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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0장 7-11절. 외모와 말보다 신앙과 능력을 봅시다
1. 지난 시간에는, 바울의 대적자들이 바울을 비난하는 말에 대한 해명으로서, 바울이 비겁하다는 비난에 대한 해명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멀리 떨어져서 편지를 써 보낼 때는 강력한 어조로 말을 하지만, 막상 대면해서는 우유부단하다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자신은 육체를 따라서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육체로는 자신이 약하지만, 영적으로는 강한 사람이라고 답변을 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2. 오늘은, 대적자들이 바울의 외모와 말이 시원치 않다고 비난한 데 대해서, 해명하는 내용입니다.
3. 설교의 제목은 <외모와 말보다 신앙과 능력을 봅시다>입니다.
7절.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You are looking at things as they are outwardly. If anyone is confident in himself that he is Christ's, let him consider this again within himself, that just as he is Christ's, so also are we.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Τὰ κατὰ πρόσωπον βλέπετε.
the things according appearance you look
직역하면 ‘너희는 외모에 관한 것들을 보는도다’란 뜻입니다.
‘보는도다’(βλέπετε)는 현재형으로서(you look) 외모를 보고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εἴ τις πέποιθεν ἑαυτῷ Χριστοῦ εἶναι,
if anyone has persuaded in himself of Christ to be
‘속한 줄을’에서 동사(εἶναι)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be), ‘믿을진대’(πέποιθεν)는 완료형으로서(has persuaded) 이미 믿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τοῦτο λογιζέσθω πάλιν ἐφ’ ἑαυτοῦ,
this let him reckon again within himself
직역하면 ‘자기 속으로 이것을 다시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생각할 것이라’(λογιζέσθω)는 현재 명령형으로서(let him reckon)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ὅτι καθὼς αὐτὸς Χριστοῦ, οὕτως καὶ ἡμεῖς.
that as he of Christ, so also we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1. 오늘부터는 대적자들이 바울의 외모와 말이 시원치 않다고 비난한 데 대해서, 해명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라고 한 말씀은 <여러분은 사실을 똑바로 보십시오>란 뜻입니다(공동 번역).
즉, 본문은 바울의 못 생긴 외모에 대한 비난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을 대적자들이 외모로만 판단한 데 대한 책망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 <외모>란 외형적인 것으로, 우선 바울의 볼품없는 외모를 비난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대적자들은 외모를 자랑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12. (육적인 사람들은 외모만 봄)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인하여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을 대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즉 바울은 눈이 병이 나서 항상 눈곱이 끼어 있고, 키는 작고 머리는 대머리이며, 코는 비뚤어진 매부리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적자들은 바울의 외모가 보잘것없고 혐오감을 주는 데 대해서 비난하는 말들을 했습니다.
2. 또한 바울은 말을 더듬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1장 6절에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고 했습니다.
정말 설교자가 말을 더듬는다면, 큰 지장이 있을 것입니다.
저와 함께 일했던 신학교 교수 한 분은 말을 더듬어서 가는 교회마다 퇴짜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을 더듬었습니다.
4. 그리고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로부터 사도라는 추천서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대적자들은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에게서 받았다는 추천서를 가지고 다녔습니다.
오늘날도 목사가 어느 교회에 부임하려면, 노회에서 추천서를 써주어야 하고, 심지어 유명한 목사님의 추천서를 받아오라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래야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대적자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율법주의자들이나 어떤 사도로부터 받은 추천서를 고린도 교회에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추천서를 고린도 교회에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과 같은 사도들과 동등이기 때문에 사도들에게서 추천서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즉 갈라디아서 2장 9절에서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추천서를 부칠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1.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5. 또한 바울의 대적자들은 자기들이 환상과 신비적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라고 자랑하면서, 바울은 이런 신비적 체험이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2장 1-7절에서 자기가 삼층천에 올라갔다 온 신비적 체험 이야기를 자랑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1-2.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6. 대적자들은 바울이 권위가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섬기는 권위였고, 감동을 주어 함께 가는 자세였고, 친밀한 교제를 통해서 서로 소통하는 자세였고, 권위적이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20. (대적자들이 바울이 권위가 없다고 비난함에 대한 답변)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7. 그러면서 바울은 오히려 자기의 약한 것들을 자랑할 것이며, 자신이 약할 그 때에 주님이 강하시다고 역설적인 진리를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0: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고린도후서 10장:7-9.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2.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외모에 쉽게 현혹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외모가 보잘것없는 바울보다는 외모가 자랑스러운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을 선호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외모만 보아서는 안 되고, 영적인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외모는 보잘것없었습니다.
생김새도 그랬고, 가문도 내세울 것 없었고, 학벌도 없었고, 사회적인 지위도 없었고,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 2절에는 메시아가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도 외모로 보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볼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영적인 안목으로 보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 찐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1. 율법주의자들은 자기들만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바울은 그리스도 밖의 사람인 것처럼 도외시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면, 너무나 얼토당토 않는 말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에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의 성경을 인정하지 않고, 바울을 거짓 사도요 도둑놈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충분히 바울을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것으로 처리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 같이 바울 자신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참 지금 보면 눈물 날 일입니다.
바울 사도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보지 않다니 말입니다!
2. 본 구절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① 우선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란 뜻입니다.
② 그리고 역사적으로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예수님 생전에 예수님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 생전에 따라다니지 않았다고 해서 바울을 도외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③ ‘그리스도의 사람’이란 특히 사도적 신분을 가리킵니다.
즉 사도행전 1장 22절에서 가룟 유다 대신에 사도를 뽑을 때, 예수님 생전에 함께 다녔고 부활을 목격한 사람을 사도의 자격 요건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실제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았던 사람입니다.
④ 그리고 당시에는 영지주의적 분위기가 있었으므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이고 영지주의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을 존경했는데, 바울은 성경 말씀만 잘 알고, 이런 신비적 체험이 없는 것으로 비난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삼층천 체험을 말한 것입니다.
3. 이처럼 바울의 적대자들은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자부했는데, 바울은 자기도 그에 뒤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람'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의 적대자들이 자신은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참된 사도라고 확신 있게 선전하면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거짓 사도라고 선전한 것입니다.
지금도 종종 신비주의를 따라가는 이단들은 자기들만 특별 체험을 했다고 하면서, 일반 교회 성도들은 마치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처럼 악선전을 합니다.
그리고 교회 내에서도 기도원파 신비주의자들은 자기들만 진짜 성령의 사람이고, 다른 교인들은 육신적인 사람들이라고 은연중에 비난을 합니다.
그래서 그룹 활동을 합니다.
그러나, 올바로 성령님의 은혜를 체험하신 분들은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적이며, 봉사를 잘하고, 목사를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 시대에 거짓 사도들이 바울 같은 위대한 주의 종을 비난했으니, 오늘날도 거짓된 신비주의자들이 주의 종들을 얼마나 비난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세우신 주의 종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주의 종으로 존경하고, 설교 때도 하나님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은혜 받고, 생활 중에 복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8절.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even if I boast somewhat further about our authority, which the Lord gave for building you up and not for destroying you, I will not be put to shame,
(우리의 권세에 대해서)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ἐάν τε γὰρ περισσότερόν τι καυχήσωμαι περὶ τῆς ἐξουσίας ἡμῶν,
if even for more somewhat I should boast concerning the authority of us
직역하면 ‘왜냐하면 우리의 권세에 대해서 내가 지나치게 자랑한다고 할지라도 (주께서 그것을 세우려고 주셨고,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란 뜻입니다.
‘자랑하여도’(καυχήσωμαι)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I should boast) 단호하게 자랑하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ἧς ἔδωκεν ὁ Κύριος εἰς οἰκοδομὴν καὶ οὐκ εἰς καθαίρεσιν ὑμῶν,
which gave the Lord for building up and not for tearing down you
직역하면 ‘주께서 그것을(권세를) 세우려고 주셨고,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란 뜻입니다.
‘주신’(ἔδωκεν)은 부정과거로서(gave) 과거에 확실히 주신 것을 가리킵니다.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οὐκ αἰσχυνθήσομαι,
not I will be ashamed
직역하면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란 뜻입니다.
부끄러워 하지(αἰσχυνθήσομαι)는 미래 수동태입니다(I will be ashamed).
1. 진정한 권세는 성도들을 굴복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잘 양육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권세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고,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 전도와 목회를 통해서 고린도 교회를 설립하고 성장시켰으나, 율법주의자들은 고린도 교회에 침투해서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고, 목회자인 바울을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은 마귀와 같고, 바울의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10장 10절 말씀대로, 마귀는 죽이고 도적질하고 멸망시키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끔 교회에서 권세를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바울처럼 섬기고 봉사하는 가운데서 자발적인 존경을 얻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교인들을 억압하고, 두렵게 해서 권세를 부리려는 자는 악한 마귀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라디아서 5장 1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했습니다.
2.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진정으로 주님께 받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적대자들이 자랑하는 것처럼 자랑하자면 아무리 지나쳐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분명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5-9.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11:21-30.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2)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만을 전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2: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3) 또한 바울은 항상 공평하게 행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1:5-15.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내가 비록 말에는 졸(拙)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내가 너희를 섬기기 위하여, 다른 여러 교회에서 요(料)를 받은 것이 탈취한 것이라.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어떠한 연고뇨?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 함이로라. --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役軍)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4)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운명을 같이 하고자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7:2-3.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내가 정죄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로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5. 그러므로 만약 누가 사도라고 자처하면서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면서 자신의 권세를 내세운다면, 그 사람은 결코 사도가 아닙니다.
도리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그러므로 교회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조심해야 할 것은 자기를 하나님처럼 높이려고 해서는 안 되고, 교회에서 주님의 권세와 말씀의 권세를 높여야지, 교권의 권세를 높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못된 장로들(목사들)이 교회의 권세를 장악하여 목사(장로들)를 마음대로 쫓아내고, 성도들 위에 군림하여 교회의 재정을 자기 마음대로 쓰는 악한 권세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악인을 따르지 말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만 따라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사탄 마귀의 권세가 강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를 대항할 수 없습니다.
6. 그런데 교회에서 이런 악한 권세자를 만나서 싸우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육신적인 폭력이 앞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4장 30-32절에는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6장 52절에는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악한 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시편 37:1-1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성실로 식물을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36절에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교권을 장악하여,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말고, 또 그런 자를 따르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 말씀만 순종하여, 참된 교회를 이루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9절.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I do not wish to seem as if I would terrify you by my letters.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ἵνα μὴ δόξω ὡς ἂν ἐκφοβεῖν ὑμᾶς διὰ τῶν ἐπιστολῶν.
so that not I might seem as if anyhow to frighten you by the letters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에서 동사(ἐκφοβεῖ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이고(to frighten), ‘생각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에서 동사(δόξω)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I might seem) 결코 생각하지 않게 하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1. 본 절은 앞 절과의 연결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의 뜻은 바울이 편지로 고린도 교인들을 위협하는 사람으로 오해받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앞에 8절에서 자신에게 권위가 있다고 말한 것과 본 절은 어떻게 연결되는가요?
이것은 바울이 보낸 편지에 대해, <그가 편지를 쓸 때는 강하고 담대한 것 같으나 만나서 말할 때는 유약하기 짝이 없다는 비난이 있었다>는 10절의 내용과 연관지어 생각해야 합니다.
2. 이 편지는 '가슴 아픈 방문' 후에 쓴 '준엄한 편지'였고, 그것에 대해 적대자들은 바울이 면전에서는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편지로 위협하려 한다고 악선전을 했던 것입니다.
이런 비난에 대하여 바울은 해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즉 바울은 자신에게는 사도로서의 권위가 있으나 편지를 통해 위협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 권위가 행사된다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며, 그는 결코 그런 식으로 권위를 행사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권위는 성도를 세우는 것 외에, 직분자 자신의 권위를 위해서 행사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4. 참으로 초대교회도 바울 사도와 같은 위대한 사도에 대해서 이처럼 악마적으로 악선전을 하고,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비난하는 무리가 있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똑같은 악마적인 일들이 있음을 봅니다.
즉 선한 일을 악의적으로 비난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발목을 잡고 방해하는 악한 무리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악한 일을 할 수 있을까 놀라기도 하지만, 벌써 성경 시대에 위대한 하나님의 종 바울에게까지 그런 악한 비방과 모독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런 악한 자들을 볼 때, 이상한 일 당한 것같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12-14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이런 가라지들을 반드시 불태우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13:40.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악인이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악인이 우는 사자 같이 덤벼들어서,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런데 마귀는 마치 미친개와 같이 고귀한 성도의 영혼을 해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나운 개에게서 성도들의 영혼을 보호해주십니다.
시편 22:20.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그래서 아무리 사나운 개가 성도의 영혼을 해치려고 포악스럽게 달려들어도, 하나님께서 이미 유리창으로 막아놓으셔서 미친개가 해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미친개가 얼마나 사나운지, 성도들은 무서워합니다.
저도 두려워했습니다.
사나운 개가 얼마나 무섭게 달려들던지, 마치 유리 창문이 깨지거나 열리면, 미친개가 나를 물어 죽일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높은 산성과 반석과 요새로 인도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시편 18편 2절에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고 했습니다.
이 산성에 올라가기는 힘이 듭니다.
어쩌면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힘주셔서, 이 산성에 올라가기만 하면, 정말 안전합니다.
정말 평안합니다.
누구도 공격해올 수 없습니다.
이 산성은 넓은 반석이요 요세입니다.
아무런 마귀가 다시는 두렵게 하지 않는 참으로 평안한 산성입니다.
바로 주님이 이 산성이요 반석이요, 요새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은 악인이 함께 산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늘 깨어 기도하고 반석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산성과 반석과 요새 되시는 주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10절.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they say, "His letters are weighty and strong, but his personal presence is unimpressive and his speech contemptible.“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ὅτι Αἱ ἐπιστολαὶ, μέν φησίν, βαρεῖαι καὶ ἰσχυραί,
that the letters, indeed they say, weighty and strong
직역하면 ‘그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강하다고 그들이 말하고 있다’란 뜻입니다.
‘그들이 말하고 있다’(φησίν)는 현재형으로서(they say) ‘현재 그들이 말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ἡ δὲ παρουσία τοῦ σώματος ἀσθενὴς
the but presence of the body weak
동사는 없으나 ‘그러나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다’는 뜻입니다.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καὶ ὁ λόγος ἐξουθενημένος.
and the speech having been ignored
직역하면 ‘그 말은 무시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동사(ἐξουθενημένος)는 완료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ignored) 이미 무시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원형(ἐξουθενέω)은 ‘무시하다, 경멸히 취급하다’(despise, treat with contempt)는 뜻입니다.
1.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의 외모에 대해서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의 말에 대해서도 비난을 했습니다.
즉 바울의 말이 시원치 않다고 비난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편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는 무게 있게 잘하는데,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나, 공중 앞에서 말을 할 때는 시원치 않다고 비판을 했습니다.
그랬습니다.
바울은 글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는 한 단어 한 단어가 신중하고 무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는 말이 어눌해서 전달을 잘 못했습니다.
더구나 대인기피증이 있었는지, 사람을 안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는 신중하고 무게 있게 잘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는 그처럼 똑똑하게 전달을 잘 못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고, 단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는 엄중하고 무게 있게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엄중한 말씀을 한다는 것은 마치 사람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다같이 감정의 동물인데, 뻔히 얼굴을 보면서 엄중한 말씀을 액면 그대로 전한다는 것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 볼 때는 직접 얼굴도 보지 않으니까, 좀 더 엄중한 말씀을 전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이해할 수 있는 문제를 가지고,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을 비난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사람을 흠잡고 비난하려고 하면, 지극히 정상적인 일도 탈을 잡고, 삐뚤어서 말을 만들어냅니다.
2. 그런데 대적자들은 바울이 편지만 힘이 있지 실상 만나면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고린도 교인들을 바울과 대적하라고 선동했습니다.
즉 바울이 편지로만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처벌은커녕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라고 모독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10장 11절에서 “우리가 떠나 있으나 함께 있으나 같은 사람임을 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3장 2절에서는 “이번에 다시 가면 용서치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3. 특별히 여기서 무게가 있고 힘이 있는 편지란 고린도후서 2장 4절과 7장 8절에 나오는 '중간 편지, 혹은 준엄한 편지(눈물의 편지)'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2:4.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7: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그 편지를 쓸 때의 상황이 그랬던 만큼, 그 내용이 매우 강한 어조로 쓰여졌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적대자들은 바울이 편지를 쓸 때나 그렇게 강하게 말할 뿐, 직접 만나보면 그의 외모가 약해 보일 뿐더러, 말도 시원치 않다는 악선전을 하였습니다.
4. 본문의 표현대로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는 외부적으로 드러난 바울의 풍채가 나약해 보였음을 말하는데, 실제로 바울은 고질적이고 만성적 질병을 갖고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7-9.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4:13-15.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5. 초대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바울은 병을 갖고 있는 것 외에도 외모가 그리 보기에 좋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그 한 예로, 180년경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바울과 데클라 행전>(Acts of Paul and Thecla)에 의하면, 바울은 키가 145센티 미터로 작았고, 대머리였고, 두 다리가 가운데로 둥그렇게 구부러져 있었으며, 눈썹은 양쪽이 다 끝이 밑으로 축 쳐져 있었고, 눈은 병들어 눈곱이 끼어 있었으며, 코는 킨 코를 하고 있었는데, 얼굴은 은혜로 가득차 있었고, 천사와 같았다고 했습니다.
하여튼 바울의 외모는 불품이 없고,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만은 사실이었습니다.
6. 이런 외부적인 것들이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는 없었겠으나, 그것이 바울의 세련되지 못한 행동과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는 부족한 말솜씨(11:6) 등과 연결되어, 그의 사도적 권위를 훼손시키기 위한 악선전의 재료로 사용되기에는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 종들과 교회 직분자들을 외모나 언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바울 사도같이 위대한 사도도 외모와 언변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처음 바울의 복음 전도로 예수 믿고 구원의 은혜에 충만한 갈라디아 교인들은 목회자 바울을 천사처럼 섬겼고,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줄 것처럼 사랑했습니다.
갈라디아서 4: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갈라디아서 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목사를 천사처럼 존경하고 눈이라도 빼줄 것 같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종들을 존경하고 도와주면, 똑같이 하나님의 상을 받습니다.
마태복음 10:41-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종들을 외무로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 전하는 하나님의 사자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을 받으시고 가정과 자녀들이 잘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1절.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Let such a person consider this, that what we are in word by letters when absent, such persons we are also in deed when present.
이런 사람은--알지라
τοῦτο λογιζέσθω ὁ τοιοῦτος,
this let him reckon the (one) such
‘알지라’(λογιζέσθω)는 현재 명령형으로서(let him reckon) ‘그는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ὅτι οἷοί ἐσμεν τῷ λόγῳ δι’ ἐπιστολῶν ἀπόντες,
that such as we are in the word by letters being absent
직역하면 ‘떠나 있어서 편지들로 말할 때, 우리가 (함께 있으면서 행동할 때와 같은) 우리인 것을 (알아라)’는 뜻입니다.
한글 번역은 좋은 번역입니다.
‘떠나 있을 때’(ἀπόντες)는 현재분사로서(being absent) 떠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맨 앞의 동사(ἐσμεν)는 현재형입니다(we are).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τοιοῦτοι καὶ παρόντες τῷ ἔργῳ.
such also being present in the action
‘함께 있을 때’(παρόντες)는 현재분사로서(being present) 현재 함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1.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깎아내리려고 악선전하는 자들은, 바울이 결코 이중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대적자들은 바울이 편지로 말할 때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직접 몸으로 대할 때는 말이 시원치 않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대적자의 말을 반박하면서, 자신이 떠나 있어서 편지를 쓸 때나 직접 몸으로 대하여 말할 때가 동일한 사람임을 알아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원래 바울은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즉 스데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때는 단호하게 스데반을 죽이기까지 했던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때, 잔혹하게 핍박했던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는 기독교인들을 위해서 얼마나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입니까?
고린도후서 11장 23-28절에서 바울이 복음 전도와 교회를 위해서 당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목록들이 열거되어 있듯이 바울은 참으로 복음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엄청나게 많이 희생한 사람입니다.
이런 바울의 희생적 모습을 보고, 율법주의 반대자들은 바울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주의 이단자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갈라디아서 편지에 쓴 것처럼 무섭고 단호한 사람이었습니다.
즉 갈라디아서 1장 8-9절에서 말씀한 대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라고 무섭게 선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진리의 말씀을 선포할 때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을 대할 때는 부드럽고 사랑과 배려가 많은 분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의 복음을 대항하고,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매도한 것까지 용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이 바울을 이중인격자라고 비난한 것은 정말 바울을 모르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즉 바울은 본문에서 말한 것처럼, 편지를 쓰는 바울이나 직접 말로 대하는 바울이나 같은 사람임을 알라고 한 것입니다.
2. 바울은 떨어져 있을 때나 함께 있을 때나 언제나 온유하고 관대한 면에서(1절)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편지로 무게가 있고 힘있게 편지를 썼다면, 직접 만나서 얼마든지 무섭게 처벌할 수 있는 동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편지에서 아직도 복종치 않는 사람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0:6.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그리고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대항하는 자들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3: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그러면서도 바울은 편지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자신이 가서 처벌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3:10. 이를 인하여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파하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세를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3. 다윗도 성자처럼 사울같은 원수를 용서하고 므비보셋을 사랑하고, 시므이같은 자를 용서하는 사람이지만, 다윗은 골리앗을 쳐죽이고, 사울을 죽인 아말렉 사람과 사울의 아들을 죽인 두 신하와 요압을 처벌하여 죽인 하나님과 공의 앞에서는 단호하고 무서운 사람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처럼 바울도 외모와 말은 시원치 않았으나, 성령 충만하고 영적 능력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영적 권위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게 하고(행 5:5,10), 바울이 영적 권위로 박수 엘루마를 눈봉사가 되게 한 것처럼(행 13:11), 바울은 육신으로는 약하나 영적으로는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도 자신을 대머리라고 놀리는 청년들을 저주할 때, 암곰이 나와 청년 40명을 죽게 했습니다(열왕기하 2:24)
이처럼 베드로나 바울처럼, 주의 종들은 영적인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4. 어떤 큰 교회에 습관적으로 목사를 쫓아내는 나** 장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는 새벽기도회는 안 나오고, 목사가 설교할 때면, 항상 고개를 숙이고, 설교를 듣지 않습니다.
수석 장로가 고개를 숙이고 설교를 듣지 않으니, 교인들 보기에 얼마나 민망합니까?
그런데도 제직회 때나 당회 때는 자기 말만 하고, 교회를 자기가 주관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장로가 새로 부임한 목사도 괴롭히다가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장로가 대형운전면허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운전사 대신에 교인들을 싣고 대형버스를 운전하다가 큰 사고를 냈습니다.
그러자 담임목사가 자기를 괴롭히는 장로이지만, 온 교인들을 설득해서 탄원서를 작성하고, 잘 아는 경찰들을 통해서 구속되지 않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장로는 일시적으로 조심한 듯하다가, 다시 목사를 괴롭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장로가 스스로 운전을 하다가 바닷속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습니다.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는데, 그 장로가 목사님에게 와서 이실직고하면서 회개했습니다.
이처럼 주의 종은 육신적으로 싸우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영적 권위를 주셔야 목회를 잘 할 수 있습니다.
5. 이것은 일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불신자에 비해서 외모나 말이나 지식이나 재산이나 세상 직업이 보잘것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님들은 기도 많이 하시고, 말씀으로 굳센 믿음을 가지셔서, 세상 불신자가 무시할 수 없는 영적인 권위와 존경스러운 인격을 갖추시기 바랍니다!
6. 오늘 성경의 핵심적 교훈은 하나님의 종의 말을 곡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고린도 교회에서 율법주의자들은 바울 사도의 태도를 곡해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자들은 바울 사도가 편지로 하나님 말씀을 엄중하게 전하고 몸으로 성도들을 대할 때 온유한 모습으로 대하는 것을 이중인격자라고 곡해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편지로 전할 때는 정확하게 전해야 하지만, 몸으로 심방할 때는 부드럽게 대해야 하는 올바른 자세를 악하게 곡해한 것입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엄중하게 전해야 하고, 심방하여 성도를 위로해주어야 할 때는 온유하게 심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올바른 바울 사도의 태도를 율법주의자들은 악의적으로 곡해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종의 올바른 태도를 곡해하는 것은 악한 태도입니다.
성경에서 다윗도 이처럼 원수들이 악의적으로 곡해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원수들이 나의 말을 종일 곡해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시편 56:5-6.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내게 대한 저희 모든 사상은 사악이라. 저희가 내 생명을 엿보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종적을 살피나이다.
7. 그러므로 우리들은 다른 사람을 바보처럼 무시하고 억울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다 똑같이 자존심이 있고, 인격모독을 참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자들처럼 성자같은 바울을 바보 같다고 억울하게 비난하고 흉봐서는 안 되겠습니다.
반면에 주의 종들은 바울 사도처럼, 외모와 말은 시원치 않더라도,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하고, 영적 권능이 강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 충만하고, 하나님 말씀을 연구해서 확신하고 견고한 믿음과 신앙 인격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종들이 겸손하게 섬기더라도, 인격 모독하거나 말을 곡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종으로 존경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으시고 자녀들이 잘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주의 종들은 외모와 말이 시원치 않더라도, 늘 기도하여 성령 충만하시고, 말씀의 권능을 가지시고, 영적 권능이 충만하셔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