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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전대와 중동부 전선(2)
전종인 용사님이 식사를 잘 하신다. 밥 한공기 거뜬하게 비우시는 모습이 매우 건강해 보인다. 식사를 하는데 옆 테이블에서 어느 사람이 용사님을 안다며 인사를 하러 왔다.
"선배님, 저 막둥이입니다."
"아니 앞전 사무실에서 인사 드렸던 김시늉입니다."
"전혀 기억이 없어서 미안힙니다."
"아니 그때 옆에 부회장님이 앉아있고 다방에서 커피 배달해서 아가씨 앉고... ."
그래도 전 용사님은 호들갑을 떠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연세가 많아 점점 기억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수 없는 자연현상이니 마음이 아프기만 한 것이 인생사라 한다.
"월남에서 우리 맹호부대 많이 전사했지만 남아 있는 시신은 없습니다."
김시늉씨는 6.25참전용사님은 아니고 월남전은 참가해서 훈장을 받아 같이 무공수훈자회의 임원들 인데 지금 무공수훈자회는 6.25전쟁 관련 인원은 줄어들고 월남전 용사님들로 주류를 이룬다고 한다. 오늘 만나는 이유를 설명 했더니 소주 한명을 들고 오셔서 좋은 일 한다며 한잔을 권해오셔 마셨다. 그리고 올려 드리니 잘 드신다. 전 용사님은 소주를 안하신다. 월남전 용사라 남아 있는 유해관련 질문을 드렸더니 맹호부대에서 근무하며 밤마다 매복작전을 나가는데 이미 월남민들이 베트콩들과 내통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역 정보를 흘리고 나간다며 그래도 워낙 밀림이 심하여 대낮에도 앞이 잘 안보일 정도라 누가 비트를 구축하고 있다면 정말 모른다고 하신다.
실제 통계자료를 보더라도 실종자 9명중에 수도사단이 1명, 9사단이 2명 , 해병이 2명, 겅설 지원단이 1명, 주월 사령부가 3명이다. 전사자는 '65~'73까지 4,663명중 육군이 3,476명 해군(해병)이 1,182명인데 정말 대단한 유해처리다. 아마도 6.25전쟁 교훈이 준 결과가 아닌듯 싶다.
오늘은 '18.7.18일 화요일이다.
손발에 건선 피부병이 기성하여 동송 병원에 아침에 나갔다.
마침 참전용사 한분이 족발에 의지하여 오셨다. 진료를 먼저 끝내고 1시간여를 용사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귀가 조금 어두우셔서 보청기를 끼고 말씀을 하시는데 아직 전선에서 돌격 앞으로 외치시는 모습이 독똑하게 그려졌다.
"혹시 저 본적 없으세요 어르신, 저는 과거에 유해발굴을 한 20년 통제한 예비역 육군 중령출신 입니다. 그래서 전쟁터는 거의 다 올라가 보았는데 이렇게 어르신을 뵙게 되면 감사하고 또한 어딘가 있을 찾지 못한 유해의 영혼을 위로하고 싶은 열망이 아직도 있습니다."
"고마우신 분이네. 지금은 어디에 사세요?"
"네, 이곳 철원 서면 자등리에서 농사지으며 귀농활동 하고 있습니다."
"어르신은 지금 어디에 사세요?"
"고향은 전북 정읍인데 지금 이곳 관인에 전쟁이후 부터 살고 있어요."
"음~, 혹시 이쪽 군부대 근무하시면서 할머니를 만나셨나요, 아무래도 그러신것 같은데~."
할아버지는 씨익 웃으시며 "그걸 어떻게 잘 하쇼"하며 부대가 이곳 내대리에도 있었고 화지리에도 있었는데 이때 이곳이 수복 지역이 되다보니 왠만한 집은 남자들은 죄다 북으로 도망가거나 끌려가고 여자들만 남아 있어 누군가 보호해야하는 사람이 필요한데 마침 한 아주머니가 본인을 잘보아 사촌 여동생을 묶어주어 수양아들로 이곳 철원에 남아있게 되었다 한다.
"총도 쏘아보지 못하고 분대 대표가 수류탄 던져보고 수색대원 되었어."
키가 작아서 총이 너무 무거워 어깨가 무너지는줄 알았다고 한다. 19살에 간는데 지역 청방을 하고 있는데 갑짜기 군트럭이 오더니 싹 쓸어담아 한 지역에서 34명이 동시에 학생복 입고 솔직히 말해 끌려서 군에 갔다. 어딘지도 모르겠고 M1총 주고 분해결합 한두번 해보고 한이틀 훈련받고 간 곳이 간성이란다.
"어르신 몇 사단에서 전쟁 하셨어요?"
"처음에는 청방에 들어가 경찰들 따라 지역 공비나 잔당을 쫒아다니다 '51년 6월에 11사단으로 입대하여 13연대에서 수색대원으로 쭈욱 전투만 하다 휴전 후에도 설악산에서잔적을 소탕하는 임무를 수행했지요."
"아이고 전쟁 말도 말아요. 어떻게 살아 왔는지 모르겠어요. 살고 보니 전쟁 재미 있더라고."
"그럼 수색대원이라 하셨는데 혹시 그당시 수색대원들은 수색정찰 들어가 전우가 전사하면 어떻게 처리하셨는지 보셨나요?" 한참을 말을 안하시고 하늘을 보고 또 저멀리로 시선을 보내신다.
한 지역에서 함께 군대에 들어가 조국을 지키겠다고 같은 부대에서 죽어라 싸웠는데 전쟁이 끝나는 순간은 다 죽고 7명만이 살아서 전역 신고를 하셨다니 얼ㄷ마 기막힌 사연인가~!
처음 간성에서 안으로 들어가니 페허가 된 절이 하나 있는데 무척 오래되고 가람이 송광사처럼 수렴한데 기둥은 무너져 내려 시커멍케 불타고 기와는 와르르 땅으로 곤두박질하여 다 깨져 마당에 뒹굴고 있는 건봉사!
처음 그 절에 임시 거처가 되고 다시 수색대원 교육을 받는데 이제는 M1소총이 아닌 따발총이 주어져 전역할때까지 메고 다녔다는 용사님. 가볍고 갈겨대면 '따따따' 소리요란하여 공포심이 든다는 적군의 총인데 이걸 수색대원이 사용한다. 옷은 교복을 입고 훈련을 받았는데 2주만에 지급된 옷이 바지는 누런 색깔의 핫밪 비슷한 옷이고 상의는 북한군 옷을 걸치고 있으니 영락없이 적군이란다.
배우는 노래도 장백산가를 부르고 말도 북한 말씨로 흉내 내도록 교육이 되고 평가도 받는다.
저 건봉사 위 건봉산과 향로봉 까치봉일대는 수시로 적이 기습하여 전투가 벌어지고 우리 또한 남강을 도하하여 북으로 들어가 적정을 살피고 때로는 졸고 있는 경계병을 포로로 데리고 오기도 한다.
서로가 속이고 속고 전쟁은 참 재미 있다 하신다.
"동네 친구가 부랄이 날라가고 쓰러졌다."
수색대원들의 이동경로는 비밀이다. 적이 알면 역 매복을 하여 기다리면 모두 죽어야 한다. 그러니 서로 감시 경계병을 운용하여 이동여부를 정탐하는데 하루는 적진으로 들어가기 위해 점심을 노무자들이 갔다주는 주먹밥으로 먹고(그래도 이때는 밥이 정시에 배급 되었다 한다.) 중간 집결지로 이동하여 장비를 점검하고 휴식을 취하는데 갑작스레 박격포탄이 머리 위로 쏟아져 모두 엎드린 상태로 서로를 감시 하는데 갑작스레 친구가 "피"하며 쓸어져 버리기에 포복으로 기어 상태를 보니 사타구니 방향으로 파편이 비산하여 하필 급소에 중용한 것이 날라가 버렸다.
지금은 고개를 들 수도 없고 기다리는 방법밖에는 없다. 모두가 어둠이 오기를 기다려 오후 늦게야 죽은자를 파악하여 보고 하는데 소대원이 4명이나 즉사하고 3명이 부상하였다.
전사자는 이곳까지 노무자가 들어오지도 못해 주변의 돌을 이용하여 어쩔수 없이 대충 묻는데 인식표 한개는 함께 묻고 1개는 휴대하여 복귀하면 정보과에 제출하는 것으로 끝이 난단다. 그후 처리는 전투병은 알지 못한다. 부상자는 본대에 연락하여 어느 지점에서 들것 대원들이 나타나 부축해 간다.이렇게 첫번째 신고식을 아찔하게 치르고 건봉산 꼭대기에 올라 지형을 살핀다.
조소령에서 계곡을 타고 오소동으로 이동하여 남강을 도하하여 굴별우 안쪽까지도 들어간다. 서로가 복장을 바꿔입고 다니는 꼴이다.
"이번에는 악마의 화신이 나에게 왔다. 그러나 살았다."
어느날 건봉산에 올라 다시 침투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점심을 모처럼 주먹밥이 아닌 반합을 이용하여 노무자들이 들고 올라온 식사를 하는데 갑작스레 인민군 박격포가 주위에 떨어지고 그 파편이 반합을 때려 그만 반합이 얼굴에 튕기며 온갖 반찬이며 밥이 안면을 때렸다. 그리고 살아났다.
두번째의 시험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운좋게 다시 적진으로 잠입하여 송어직일대와 884고지-703고지 전방의 적 배치를 정찰하여 보고 하였다.
정찰도중 인민군 매복조와 조우하여 한번은 유창한 북한 말로 비켜 나가 우리는 북으로 인민군은 남으로 내려가는 작전을 하기도 한다. 물론 쌍방에 연락을 하여 혹시 모르니 경계하라는 정도야 연락을 한다.하지만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같다.
"드디어 적진에서 포위되어 탈출하는 3번째의 시험대에 올랐다."
하루는 남강을 도하하여 적진 깊숙히 들어 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적들이 경계를 느슨하게 하고 있었다. 나중에 보니 이미 우리를 포착하고 전원 생포하려 깊숙히 유인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갑작스레 사방에서 따발총이 요란하게 콩복고 자수하라는 방송이 터지는데 모두가 각자 흩어져 마지막 목적지만 처음 남강 대안으로 들어올때 위치로 정하고 탈출을 기도했다. 얼마를 달렸는지 엎어지고 뒤집어지고 뛰는데 어쨋든 살았다.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데 왼쪽 허벅지 부분이 아파와 보니 총알이 살짝 스치고 지나가 옷만 구멍이 나 있고 피가 묻어 나왔다. 정말 억세게 운 좋은 놈이었다.
용사님은 첫째형 들째형이 모두 국방 경비대부터 군에 들어가 3형제 참전용사 집안이다. 하지만 전투병은 본인 한명이고 큰형은 병기하사관이었고 둘째형은 인사과에 근무하는 하사관으로 직접 총을 메고 전쟁은 하지 않았다 한다.
"큰 바위 밑으로 떨어져 살았다. 하지만 그 고통으로 지금 목발을 집고 있다!"
탈출에 성공하여 남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지도도 없고 사실 있어도 보기도 힘들었다. 그런 수준이 되지는 않는다. 그저 물소리로 아 저기가 남강이구나 그러니 이쪽으로 해소 저쪽으로 가면 되겠구나 짐작을 하고 게속된 탈출을 하는데 어느새 냄새를 맡고 적군이 따라붙기 시작한다.
따발총이야 있지만 이건 최후에나 사용해야하고 두발의 방망이 수류탄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사실 아무것도 없는 비무장이다 생각하면 된단다. 얼마쯤 가다 어둠이 왔는데 그날따라 비가 억수로 내리고 안개가 한치앞을 못보게 막고 있어 서로가 은폐엄페에 많으 도움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탈출하는 쪽이 더 유리하게 된다. 그런데 갑작스레 미끄러지면서 그만 돌바위에서 굴러 떨어져 버렸다. 겨우 일어나 보니 걸을 수가 없다, 무릎이 돌 바닥에 찧어버려 발이 펴지지 않는다.
하지만 살려면 운명은 그렇게 다가 온다. 포위 3일만에 탈출하여 살아서 돌아온다.
눈을 뜨고 주변을 보니 수색정찰시 넘나들던 남강변에 와 ㅜ있었다. 어둠을 기다려 강을 넘어야 한다. 하지만 갑작스레 소나기가 퍼부어 강물이 불고 어디로 건너야 할지 큰 장애를 만나고 말았다. 이대로 굶으며 얼마를 기다려야 할지 모른다. 벌써 2일이 지나고 있다.
동료들은 어디에 있는지 살았는지 모두 전사했는지 궁금도 해진다. 무릎에 상처는 칡순으로 동여메고 질질 끌으며 오직 꽐꽐 거리며 흐르는 물줄기만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은 물이 동쪽으로 흐르는데 아무리 큰비도 하루면 쏟아져 내려가 수위는 크게 문제가 없다는 것을 교육을 통해서 알고있는 터라 기다려야 한다. 배고픔은 한두번이 아니지만 물이라도 마실수 있는 상황이 그래도 다행이다. 드디어 밤이 오고 강을 발로 걸어서 넘었다.
이제 아군 지역이다. 3일째 되는 날에 아군지역으로 들어와 수색로상에 들어서 구조되어 바로 강릉으로 후송 되어 1개월간 치료를 받고 다시 원복 되어 영원한 수색대원이 된다. 돌아오지 못한 전우가 10여명은 되었다고 기억된다.
드디어 전투를 한다. 884고지란다.
그렇게 뜨거운 7월은 가고 이제 정찰에서 전투로 전선은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사천리지역에 위치한 꼭지점 모양의 884고지는 양구~간성을 잇는 보급로와 나강을 통제하는 중요감제고지이다.
수도사단이 지난 '51년도 5월말부터 8월말까지 전투를 하며 서측방으로 진출하여 924고지를 확보하고 지리산일대 공비토벌 작전에서 전방으로 투입된 11사단이 향로봉-건봉산지역 방어중 북에서1 884고지를 확보 토록 명령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이지역 일대는 10월 중순에 11사가 인수하고 수도사는 동해안으로 옮기어 월비산 -351고지 쟁탈전을 하게 된다. 그러다 다시 11사가 11월 중순에 동해안의 수도사단지역을 인수하여 '53년 6월까지 건봉령~고성(지금의 통일 전망대)을 방어하다('53.1~3까지 일시적 부대정비및 교육훈련, 국군 5사단이 임무) '53년 6월에 중공군 최후 공세를 맞이하여 화천 북방 삼현지역으로 투입하여 휴전을 맞이 한다.
884고지는 올라서면 남북으로 길게 능선이 뻗어 내리고 동쪽으로는 내려서서 남강 지류를 넘어 703고지로 연결되며 북쪽은 남강이고 서쪽은 삼재령으로 가는 요지로써 바로 854고지가 있다. 이 고지는 휴전이 되는 순간까지 812-854고지 전투는 계속 되어 812고지는 피탈되고 바로 목전의 무명고지는 전후에 "쌍룡고지"라하여 아군이 수중에 넣고 854고지 또한 확보 된다. 그런만큼 884고지는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여 지금 그 곳으로 남방 휴전선이 지나간다. 원래 이 고지는 9연대가 8월18일 남강지류를 건너 측방으로 공격을 하여 3번이나 탈취하였으나 다시 피탈되는 악순환을 거듭하면서 결국 27일에는 20연대로 주공을 바꾸어 공격을 하게 되는데 바로 13연대 수색대가 그곳으로 투입하게 되었단다. 수색대는 항상 먼저 들어가 적진을 살피고 통로를 개척하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적도 이곳에 많은 지뢰를 매설하여 진출에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결국 피로써 8월27일 4차례의 피아교대로 주인을 바꾸며 결국 우리가 주인이 된다.
884고지와 703고지는 우리 아군이 북한군을 물리치고 지금의 휴전선 형성에 절대적으로 기여 한다.
지금 지도에는 878m로 나오기도 하는데 그만큼 전투가 치열하여 포격이 동해안의 함포, 비행기까지 동원되어 초토화가 되어버려 우리가 최종적으로 점령했을 때는 포연이 무릎까지 올라와 정말 숨 쉬기조차 버거운 먼지로 자욱했다.
"죽어가는 용사들, 누구도 거들떠 볼 겨를도 없고 오직 적을 찾아 내가 먼저 쏴야 산다."
8~9월의 더위도 그때는 왜그리 더운지, 썩어가는 시신의 냄새는 천지를 진동하고 날으는 쉬파리떼는 꼭 비행기 편대처럼 하늘을 지배한다. 절대로 사람을 두려워 하지않는 무서운 놈들이다.
여기저기 팔다리가 떨어져 뒹글고 사람의 머리는 깨져 누군지도 모르고 복장을 바꿔 입고 있으니 누가 누군지 일일이 휴대품을 혹인해야 하는데 몸둥아리가 해체되어 버렸으니 무슨 수로 피아를 판단하겠는가. 그저 흩어져 있는 인식표를 수집하고 때론 목에 걸려 있는 인식표를 아무런 느낌없이 떼어서 호주머니에 넣은 일상이 되어 버렸다.
얼마나 죽었는지 모른다. 포연 속에 적혀있는 피의 색깔이 진하게 두 눈에 충혈 될 뿐~!
곧 있을 적의 역습에 대비하여 그 시신위에 흙을 올리고 아니면 시신을 굴려버리고 그곳에 호를 파야하는 전쟁터는 죽은자들의 무덤이며 산자들의 엄체호로 변한다.
884고지 전투에서 살아난 용사님은 건봉산으로 복귀하여 호흡을 가다듬는다. 함께 군에 들어온 동료들은 이미 많은 인원이 전사하고 새로운 식구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동해안으로 이동하라 한다. 그리고 351고지에 올라서 지켰다."
'51년 9월 초에 전선 조정으로 좌측에서 전투하던 수도사단이 동해안으로 가고 동해안의 3사단이 예비가 되면서 그 유명한 월비산 탈환전이 10월 10일부터 전개 되어 몇번에 걸친 탈환과 피탈을 반복 하면서 15일 완전히 탈환하고 인민군의 기습을 막아내어 17일을 전후하여 월비산과 351고지는 우리 것이 되면서 고성을 손안에 넣게 된다.
그러다 11월 중순에 11사단이 이지역을 인수받고 수도사단은 후방지역 공비토벌을 목적으로 내려가 백야전사령부(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공비 토벌 부대로 수도사,8사, 서남사등 이 지리산 일대의 호남지역과 영남지역 서측의 공비 토벌실시, '52년 3월까지 계속됨)에 배속 되었다.
전선을 인수한 11사는 9연대로 1개 사단이 맡고 있던 주저항선을 방어토록 하여 전투력이 약화 되고 전초로 대전차 공격대대에 사단 수색중대를 배속시켜 맡도록 하였으나 이 또한 1개연대가 전초 임무를 수행하던 것을 1개 대대로 전담토록 함으로써 전투력에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결국 11월18일 부대 인수인계에 따른 공백기간을 이용하여 인민군 제6군단 19사단과 교대된 제9사단이 전 전선에 공격을 가해와 결국 월비산을 피탈 당하고 351고지는 일시적 피탈에서 되찾았지만 이로 인해 남강을 적에게 넘겨주고 결국 고성까지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온다.
"동무들 어디 소속이오,, 아 우리 나래 86연대요." 그리고 남쪽으로 적을 몰고 내려간다.
제11사 13연대는 이 351고지를 지키기 위해 전초를 수색중대로 운용하여 적의 기습적인 공격행동을 사전에 제압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그래서 적 장비와 복장으로 위장하고 바로 월비산 밑까지 침투하여 적의 이동 상황을 파악하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어느날은 바로 옆으로 적들의 정찰대가 지나고 있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지나치는 그 스릴은 지금 생각하셔도 서늘 하다고 하신다.
그러니 길을 비켜 지나 얼마간 가다 우리는 북에서 남으로 총을 쏘아 그들을 추격하는 꼴이 되니 이걸 주변에서 바라보는 적군들은 도무지 피아판단이 되질 않아 관망하는 자세로 되어 엉뚱하게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어 화랑무공 훈장을 받아 지금 월 36만원을 받는다.
그러다 우리 5사단에 '52년 1월 중순에 넘겨주고 양양훈련소에 들어가 사단이 전체 정비와 교육훈련을 하고 '52년 3월에 다시 건봉령 지역으로 들어와 방어 임무를 하게 되었다.
"억세게 운이 좋아 나는 죽지 않고 살아난 불사신 이었다."
남강이 앞을 가로막아 주어 쉽게 적에게 돌파되지 않는다. 어쩌다 한번 건봉령 넘어까지 적이 들어오기도 했지만 곧바로 격퇴되고 줄곤 아군의 수중에 있다.
그러다 중공군의 '53년 최후공세에 따라 6월에 21사에 지역을 넘겨주고 지금의15사단 전방 삼현 지역으로 들어와 국군 6사단의 뒤를 이어 받치게 되는데 먼저 9연대가 6사단에 배속 되어 교암산 우측 원남리 일대 봉화산 지역으로 들어갔으나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나고 결국 6사단을 대신하여 신 주항선인 삼현 일대에 우측은 그대로 9연대, 좌측은 602고지를 앞에 두고 13연대가 전방으로 추진되어 '53년 7월15일에 반격 작전으로 나선다.
"얼마 죽었는지 모른다, 오르는 것은 피로 물든 포연과 비명 소리 뿐~!"
수색중대는 다시 전방으로 먼저 투입해 들어가 적진을 교란하여 17일 오전 04:00시에 탈환하였으나 중공군의 강력한 반격에 밀려 결국 18일 02:00시에 다시 피탈 당하고 만다. 우리 연대는 아무리 공격을 해도 중공군을 제압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 20연대가 들어 간다. 이때 용사님은 안내조에서 빠져 결국 20연대 1대대와 3대대가 5차례의 역습으로 탈환에 성공은 했지만 1중대는 중대장을 포함하여 8명만 살았다. 3대대는 42명 전사에 249명 부상이다. 미 5공군의 항공지원과 사단 포병 미 제461중박격포대대의 화력지원 속에 그 포연이 앞을 가려 7월 중순의 적근산 바로 밑의 넓은 평강 평원은 온통 시신의 냄새와 아우성 치는 부상자의 비명소리에 삼복더위의 무더위도 잊어 버렸다 한다.
그러나 이 고지도 결국 중공군의 역습으로 다시 빼앗기고 지금까지 그 상태로 휴전이다.
"하지만 집에는 못 갔다, 공비들이 집안을 박살내어 버렸다."
사실 이러한 부분이 6.25전쟁사에 많이 보완 되어야 할 부분이다. 용사님은 휴전의 기쁨이나 제대보다 쑥밭이 되어버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문제 였단다.
정읍 내장산을 끼고 지리산 공비들의 준동이 끝나지 않아 이 지역은 전쟁중에도 공비 토벌 작전이 계속 되어 웬만한 집은 다 불타 버리고 마을은 서로 감시와 고자질로 피폐할대로 피폐하여 살곳이 못 되었다. 3형제가 군에 갔으니 공비들이 점령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기에는 완전히 ㅂㄴ동 집안이 되어 옷 한가지 없이 모두 빼앗겨 버리고 아버지는 연일 불려나가 자아비판을 받아야 하고 죽지못헤 살아 있었다 한다. 이제 아군 세상이다. 그래서 집으로 갔으나 부모형제가 없다. 누구도 군에서 전사하지 않아 정말 하늘이 보호해 주신 집안이란 찬사는 조금 뒤로 미뤄야 했다.
아직 내장산을 끼고 장군산 회문산 지역 공비들이 담양과 순창 임실을 깃점으로 점조직으로 파고들어 분명 우리 지역인데도 낮에만 우리 지역이고 밤에는 공비들의 소굴이 되었단다.
한 ㅊㅁ 공비토벌이 실시된 '51.12.2~'52.3.14까지의 백야전 사령부의 집중적인 토벌 기간에도 국군 8사단이 신선봉 내장산 백양산을 집중으로 토벌하고 이어서 전선 복귀 이후에는 새로 창설된 경찰의 손 부대(손계천 총경)가 칠보 계림 양개 경찰 대대로 전주 임실 남원 담양 정읍을 연하는 회문산 지역의 공비를 소탕하게 된다. 그러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돌아온 영웅3 인방이 있는 집안이 방 한칸 없으니 그리고 병들어 누워버린 아버지, 꼴이 꼴이 아닌 두 어린 여동생의 이야기는 말로 할 수 없다고 하신다.
"설악산에 들어갔다. '53년 겨울은 더없이 춥고 그 수많은 계곡과 골짜기에 숨어든 잔당들을 소탕한다는 것은 너무도 힘들었다. 차라리 수색대원으로 남강을 넘나들던 때가 훨씬 쉬웠다."
인민군 잔당들은 설악산 내부 사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11사는 최초 '51년 5월 말에 전선으로 투입 된 곳이 바로 성악산으로 동해안 강릉 위 둔전리에서 부터 공릉능선을 타고 마등령 저항령 황철봉 미시령 상봉 신선봉으로 진격하던 그 당시의 용사는 별로 없다. 모두 전선에서 전사하거나 부상으로 귀환하고 지금의 인원들은 그 후 보충된 인원이니 설악산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투입한 상부의 지시가 좀 의아스럽단다.
전쟁의 총성이 멎어 이제 목숨을 붙였구나 생각했더니 아닌 밤에 홍두깨라고 졸지에 눈속에서 잔당들을 추적해 가면서 또 많은 인원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아사하는 비극을 맞이 하기도 했다.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데 얼마나 포격을 했는지 그 아름답던 산은 전수 불에 타 버리고 까맣게 그을린 나무들의 잔해들이 진출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사실 전쟁의 추억보다 설악산에서 고생하던 추억이 더 머리속에 남아 있다고 하신다!
당시 봉정암은 조그만 초가집처럼 겨우 나무껍질로 이어만든 토굴같은 절에 스님이 한분 남아 기도하고 있었고 바람이 불면 넘어질듯이 겨우 지탱하고 있는 조그만 절이었다. 그 스님이 바로 얼마전까지 백담사 위에 있는 영시암의 큰 스님이셨던 분이다.
"능선따라 오르는 길은 여기저기 사람뼈가 흉칙하게 뒹굴고 더러는 안타까운 마음에 주어서 인근에 돌을 이용하여 덮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 백골병단이 이곳에 들어가 거의 300여명이 동사내지는 아사하여 죽어 남겨지고 적군 또한 많은 인원이 사살되거나 부상하여 겨우겨우 은신하다 죽은 인원이 또 얼마이며 그 적군을 추격하다 전사한 아군 또한 그 얼마인가.
육지에서 가장 높은 설악산은 너무도 많은 피를 흘렸고 이곳에 숨어들은 그 많은 인원들이 추위와 기근으로 숨져간 곳으로 지리산이나 오대산 못지않게 죽은자의 시신이 많다고 한다.
"이때 구세주처럼 수양 어머니를 만나 백년가약의 처녀를 만나다."
그러다 부대는 문혜리 지역으로 이동하여 잠시 구철원일대를 통제하게 되고 살아 남은 용사님은 이등상사가 되어 있었다. 이제 밖으로 나와 돌아 다니고 페허가 된 철원의 지역을 둘러 보기도 했다. 이때 철원에서 쫒겨난 피닌민들이 지금의 장흥일대에 국군이 마련한 피나살이 촌에서 있었는데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 집을 수리하고 먹고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치는 시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지역은 수복 지역이니 대부분의 남자들은 인민군ㄴ을 따라 북으로 가버려 여인들만이 가정사를 지켜야하는 아픈 사연이 계속 되었다. 그러니 듬직한 남자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바로 한 아주머니를 만나고 지금은 운명을 달리했지만 할머니를 만나게 되어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어 버렸다 한다.
"휴전 후에 정부가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고 묻는다."
휴전은 되었는데 전방이나 후방이나 오고갈데 없는 것은 마찬가지 신세였다고 한다.
어쩌다 가진 것이 그대로 보존 되었거나 고관대작들 빼고는 그당시 살림살이느 청계천 수표교 밑에 진치고 있던 양아치들의 모습 그대로 였다고 한다.
3형제가 전쟁에 참가한 집안도 그리 많치 않을 법한데 내장산 공비소굴의 소용돌이에 지역주민들은 주민들대로 뿔뿔이 갈라지고 심지어는 형제지간에도 살려니 밀고하고 정말 어쩌구니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 전쟁이 힘든게 아니라 이러한 갈등을 잊는데 더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솔직히 제대보다 군에 있는 것이 밥 먹는 유일한 방법이 된 전우들도 많았다. 그러나 용사님은 이제 어느 집안의 가장 아닌 가장으로 지켜야하는 위치가 되어 고향에 낙향을 미루고 철원에 살림을 차려 지금까지 살고 있다.
하지만 세월은 어쩔수 없는 것, 할머니 돌아 가시고 이제 남간 북쪽에서 포위되어 탈출 과정에 바위에서 떨어지며 부상당한 무릎이 쓸 수가 없게 되어 두개의 목발에 의지해야 한다.
자식은 2남2녀를 두어 큰아들은 해외에서 살고 큰손자는 미국에 있다. 둘째는 서울에서 아직 뻐스 운전기사를 해 자주 오지 못한다. 두 딸은 고양에서 살고 직장에 다니니... .
세상살이 돌고 도니 남는 것은 영광의 상처 뿐!"
기나긴 유해발굴의 역사를 종이에 옮기는 작업이 무척 한여름에는 힘들다. 덥고 농사일을 하면서 갖추어진 기록물을 옆에 놓고 1:5만 영진 지도와 1:10만 군사지도를 놓고 앞뒤를 맞춰가는 기억의 되돌림이 삼복 더위에 쉽지않다. 하지만 이런 용사님을 만나게 될때마다 고개 숙여 정중하게 고마움ㅇ믈 표하고 정말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사시기를 바라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지난 20년이... .
전종인 용사님과 김시늉님이 잠시 기억력을 돌리는 대화가 이어지고 드디어 합일점을 찾아 서로 손을 꼭 잡고 흔들며 반가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