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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여래(如來)의 방(室)」에 대해서는 「자비에 머무르며 넓힌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비란 고(苦)를 뽑아(拔) 락(樂)을 준다(與)는 의미로 온갖 괴로움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서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고 정법의 신앙으로 안락을 주고자 하는 데에 뜻을 둔 커다란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대신해서라도 자식을 구하려 하는 부모처럼 절복 대상자에게 ‘어떻게 하든 잘못된 길로부터 되돌아오게 하여 괴로움에서 구한다’라고 필사적으로 절복을 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강한 말로 상대에게 법을 설해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자비를 가지고 하면 반드시 입신(入信)으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니치렌(日蓮)만큼 천신칠대(天神七代)·지신오대(地神五代)·인왕구십여대(人王九十餘代)에 아직 이만큼 법화경(法華經)때문에 삼류(三類)의 적인(敵人)에게 적시(敵視)당한 자(者)는 없었느니라. 이와같이 상하만인일동(上下萬人一同)에게 미움을 받는 자(者)인데도 여기까지 찾아주시는 것은 예사 연(緣)이 아니며 숙세(宿世)의 부모(父母)나 옛날에 형제(兄弟)이시었기 때문에 생각하시게 되었는가, 또한 과거(過去)에 법화경(法華經)의 연(緣)이 깊어서 이번에 부처가 되실 종자(種子)가 무르익었기 때문에, 재속(在俗)의 몸으로서 세간(世間)에 한가(閑暇)롭지 못한 사람이 공사(公事)의 여가(餘暇)에 생각을 하게 되신 것일까.
게다가 도토미(遠江)의 지방에서 고슈하키리(甲州波木井)의 고을 미노부산(身延山)까지는 도정(道程)이 삼백여리(三百餘里)에 이르느니라. 숙소(宿所)마다 불안하기만 하고·봉우리에 오르면 일월(日月)을 우러러 보고, 산골짜기에 내려가면 구멍에 들어간듯 느끼며, 강물은 화살을 쏘듯이 빠르고 대석(大石)이 떠내려와서 인마(人馬)가 건너기 어려우며 배는 위태로워 종이를 물에 적신듯 하다. 남자는 나무꾼, 여인(女人)은 귀녀(鬼女)와 같고, 길은 새끼같이 좁고 나무는 풀과 같이 무성(茂盛)하니라. 이러한 곳에 찾아오심은 무슨 숙습(宿習)일까. 석가불(釋迦佛)은 손을 끌고 제석(帝釋)은 말이 되고 범왕(梵王)은 몸에 따르고 일월(日月)은 눈으로 바뀌시어서 들어가신 것일까. 존귀(尊貴)하고 존귀(尊貴)하도다.
니이케전답서(新池殿答書)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 1438쪽제천선신(諸天善神)이란 법화경 행자를 수호하는 선신을 말하는데 이는 민중, 국토를 지키고 복을 가져오는 우주의 작용을 가리킵니다.
법화경에는 이 제천선신이 법화경 행자를 수호하겠노라고 맹세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법을 실천해 가면 제천선신의 가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제천선신은 어떤 구체적인 모습을 가진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법을 실천하고 광포에 힘쓰는 사람들을 지키는 자연, 외계 등의 모든 작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벗이나 동지가 도와주는 경우도 그 중 하나입니다.
어서에 「신(神)의 수호(守護)라고 함도, 사람의 마음의 강(强)함에 의(依)한다고 쓰여져 있소.」(신편어서 p.1292)고 있듯이 제천의 작용도 우리들의 신심 여하에 달렸습니다.어서에 「사람의 몸에는 동생동명(同生同名)이라고 하는 두 사자(使者)를 하늘이 태어날 때부터 따르게 하시어, 그림자가 몸에 따르듯이 수유(須臾)도 떨어지지 아니하며, 대죄(大罪)·소죄(小罪)·대공덕(大功德)·소공덕(小功德), 조금도 빠트리지 아니하고 교대교대로 하늘에 올라가서 고하느니라 하고 부처가 설하시었다.」(신편어서 p.596)라고 있습니다.
동생, 동명이라고 하는 두 사람의 사자가 사람의 양어깨에 있으면서 그 사람의 실체의 행위를 하늘에 보고한다는 것이다. 이것도 생명을 일관하는 엄한 법리를 비유적으로 지남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생명의 엄격한 법리를 설한 것이 불법입니다.
외형에 집착해서 허영과 명문명리에 마음을 빼앗기면 결국에는 허상적인 인생이 되고 맙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묵묵히 신념의 길을 가는 사람은 엄연한 실증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본존님은 보고계시다”라고 확신하고 광포추진에 있어 아무리 어려움이 있어도 성심성의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물어 가로되 경문(經文)에 「사십여년(四十餘年)은 아직 진실(眞實)을 나타내지 않았음」이라 말하고, 또 「무량무변불가사의아승기겁(無量無邊不可思議阿僧祇劫)을 지날지라도 끝내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성취(成就)함을 득(得)하지 못함」이라고 설(說)했는데 이 문(文)은 어떠한 것을 말하느뇨. 답(答)하여 가로되, 이 문(文)의 심(心)은 석가불(釋迦佛)·일기(一期) 오십년(五十年)의 설법중(說法中)에 처음의 화엄경(華嚴經)에도 진실(眞實)을 설하지 아니했고 중(中)의 방등(方等)·반야(般若)에도 진실(眞實)을 설하지 않았느니라. 이런 고(故)로 선종(禪宗)·염불(念佛)·계(戒) 등(等)을 행(行)하는 사람은 무량무변겁(無量無邊劫)을 지나도 부처가 되지 않는다는 문(文)이니라. 부처가 사십이년(四十二年)의 세월(歲月)을 거친 후(後)·법화경(法華經)을 설(說)하신 문(文)에는 「세존(世尊)의 법(法)은 오래 가서 후(後)에 반드시 응당(應當) 진실(眞實)을 설(說)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사리불(舍利弗) 등(等)의 千二百의 나한(羅漢)·만이천(萬二千)의 성문(聲聞)·미륵(彌勒) 등(等)의 팔만인(八萬人)의 보살(菩薩)·범왕(梵王)·제석(帝釋) 등(等)의 만억(萬億)의 천인(天人)·아사세왕(阿闍世王) 등(等)의 무량무변(無量無邊)의 국왕(國王)이 부처의 말씀을 영해(領解)하는 문(文)에는 「우리들은 옛부터 이제까지 자주 세존(世尊)의 설(說)을 삼가 들었으나 아직 일찍이 이와 같은 심묘(深妙)한 상법(上法)을 듣지 않았음이라」고 하여 우리들은 부처로부터 떨어지지 않고서 사십이년(四十二年)·많은 설법(說法)을 청문(聽聞)하였지만 아직 이와 같은 존귀(尊貴)한 법화경(法華經)을 듣지 못하였다고 한 이들의 명문(明文)을 어떻게 생각했기에, 세간(世間)의 사람은 법화경(法華經)과 여경(餘經)과 동등(同等)하다 생각하고 더군다나 기(機)에 맞지 않으므로 어두운 밤의 비단·거년(去年)의 달력 따위로 말하고, 마침 수지(受持)한 사람을 보고는 멸시하고 경시(輕視)하며 미워하고 질투하며 입을 비쭉거리기도 함은 이는 오로지 방법(謗法)이 되니 어찌 왕생성불(往生成佛)이 있겠느뇨. 반드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자(者)라고 쓰여 있느니라.
물어 가로되, 대개 불법(佛法)을 깊이 알고 불의(佛意)에 맞는 사람을 세간(世間)에서는 이를 존중(尊重)하고 모두 이를 귀(貴)히 여기는데 당세(當世) 법화경(法華經)을 수지(受持)하는 사람들을 세상은 온통 미워하고 질투하며 경시(輕視)하고 천시(賤視)하며 혹(或)은 거처(居處)를 추방(追放)하고, 혹(或)은 유죄(流罪)하며 공양(供養)까지는 생각치도 못하고 원적(怨敵)과 같이 미움받음은 결국 마음가짐이 나쁘고 불의(佛意)에도 맞지 않으며·그릇되게 법(法)을 알고 있음이니라. 경문(經文)에는 어떻게 설(說)해 있느뇨. 답(答)하여 가로되, 경문(經文)과 같다면 말법(末法)의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는 남에게 미움받을수록 수지(受持)함을 진실(眞實)한 대승(大乘)의 승(僧)이라 하였더라. 또한 경(經)을 넓혀서 남을 이익(利益)케 하는 법사(法師)이니라. 남이 좋다고 생각해 주고 사람의 마음에 따름으로써 존귀(尊貴)하다고 여겨지는 승(僧)을 법화경(法華經)의 적(敵), 세간(世間)의 악지식(惡知識)이라고 생각할지어다. 이 사람을 경문(經文)에는 엽사(獵師)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슴을 노리며, 고양이가 발톱을 숨기고 쥐를 노리듯이 하여 재가(在家)의 속남(俗男)·속녀(俗女)인 단나(檀那)에게 아첨하고·거짓을 꾸미며 광혹(誑惑)하리라고 설(說)하셨느니라. 게다가 권지품(勸持品)에는 법화경(法華經)의 적인(敵人) 삼류(三類)를 열거(列擧)하셨는데, 一에는 재가(在家)의 속남(俗男)·속녀(俗女)이니, 이 속남(俗男)·속녀(俗女)는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미워하고 욕하며, 치고 참살(斬殺)하며 거처(居處)를 쫓아내고 혹(或)은 상(上)에게 참주(讒奏)해서 원류(遠流)시키고, 비정(非情)하게 미워하는 자(者)이니라. 二에는 출가(出家)의 사람이니 이 사람은 만심(慢心)이 높아서 내심(內心)에는 알지도 못하면서도 지자(智者)처럼 행세하여 세간(世間)의 사람이 학장(學匠)이라 여기게 하고,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보고서는 원질(怨嫉)하고 경시(輕視)하며, 천시(賤視)하고 개나 야간(野干)보다도 나쁜 듯이 남에게 말해 혐오케 하고, 법화경(法華經)을 자기만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者)이니라. 三에는 아련야(阿練若)의 승(僧)이니, 이 승(僧)은 극히 귀(貴)한 상(相)을 모습에 나타내고 삼의(三衣)·일발(一鉢)을 몸에 지니고, 산림(山林)의 한적(閑寂)한 곳에 틀어박혀서 재세(在世)의 나한(羅漢)과 같이 제인(諸人)에게 공경받고 부처와 같이 만인(萬人)에게 숭앙(崇仰)받으며, 법화경(法華經)을 설(說)과 여(如)히 읽고 수지(受持)하는 승(僧)을 보고는 미워하고 질투하여 가로되, 대우치(大愚癡)의 자(者)·대사견(大邪見)의 자(者)이며, 전혀 자비(慈悲) 없는 자(者)·외도(外道)의 법(法)을 설(說)한다 따위로 말하리라. 상일인(上一人)부터 받들어 신(信)을 취(取)하시니 그 이하만인(已下萬人)도 부처와 같이 공양(供養)을 하게 되리라. 법화경(法華經)을 설(說)과 여(如)히 읽고 수지(受持)한 사람은 반드시 이 삼류(三類)의 적인(敵人)에게 적시(敵視)당한다고 부처는 설(說)하셨느니라.
물어 가로되, 부처의 명호(名號)를 가지듯이 법화경(法華經)의 명호(名號)를 유다르게 가져야 할 증거(證據)가 있느뇨 없느뇨. 답(答)하여 왈(曰), 경(經)에 가로되 「부처가 여러 나찰녀(羅刹女)에게 고(告)하시기를 좋도다 좋도다, 그대들 다만 능(能)히 법화(法華)의 이름을 수지(受持)하는 자(者)를 옹호(擁護)하는 복(福)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고 운운(云云). 이 문(文)의 의(意)는 십나찰(十羅刹)이 법화(法華)의 이름을 가진 사람을 수호(守護)하리라고 서언(誓言)을 세움을 대각세존(大覺世尊)이 칭찬하여 가로되, 좋도다 좋도다, 그대들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수지(受持)하는 사람을 수호(守護)하는 공덕(功德)은 얼마인지 헤아리기 어렵고·뛰어난 공덕(功德)이며 신묘(神妙)하니라고 말씀하신 문(文)이로다. 이는 우리들 중생(衆生)이 행주좌와(行住坐臥)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를지어다 라는 문(文)이니라.
대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우리들 중생(衆生)의 불성(佛性)과 범왕(梵王)·제석(帝釋) 등(等)의 불성(佛性)과 사리불(舍利弗)·목련(目連) 등(等)의 불성(佛性)과 문수(文殊)·미륵(彌勒) 등(等)의 불성(佛性)과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의 깨달음의 묘법(妙法)과 일체불이(一體不二)인 이(理)를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였느니라. 그러므로 한 번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면, 일체(一切)의 불(佛)·일체(一切)의 법(法)·일체(一切)의 보살(菩薩)·일체(一切)의 성문(聲聞)·일체(一切)의 범왕(梵王)·제석(帝釋)·염마(閻魔)·법왕(法王)·일월(日月)·중성(衆星)·천신(天神)·지신(地神)·내지(乃至)·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수라(修羅)·인천(人天)·일체중생(一切衆生)의 심중(心中)의 불성(佛性)을 오직 한 마디로 불러 나타내시는 공덕(功德)은 무량무변(無量無邊)하니라. 나의 기심(己心)의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를 본존(本尊)으로 숭앙(崇仰)하고, 나의 기심(己心) 중(中)의 불성(佛性)·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불리어서 나타나심을 부처라고 하느니라. 비유컨대 새장 속의 새가 울면 하늘을 나는 새가 불리어서 모이는 것과 같고, 하늘을 나는 새가 모이면 새장 속의 새도 나가려고 함과 같으니라. 입으로 묘법(妙法)을 봉창하면 나의 몸의 불성(佛性)도 불리어서 반드시 나타나시고, 범왕(梵王)·제석(帝釋)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우리들을 지키시고, 불보살(佛菩薩)의 불성(佛性)은 불리어서 기뻐하심이라. 그러므로「만약 잠시라도 가지는 자(者)는 내가 즉 환희(歡喜)하며 제불(諸佛)도 또한 그러하니라」고 설(說)하심은 이 심(心)이니라. 그러므로 삼세(三世)의 제불(諸佛)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子)로써 부처가 되셨으니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출세(出世)의 본회(本懷)이고 일체중생(一切衆生)·개성불도(皆成佛道)의 묘법(妙法)이라 함은 이것이로다. 이러한 취지(趣旨)를 깊이 깊이 알아서 부처가 되는 도(道)로는 아만편집(我慢偏執)의 마음 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하여야 하는 것이니라.
법화초심성불초(法華初心成佛抄) 미노부에서 56세에 술작 555~557쪽.젊은 어부가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는데 "해초" 가 많아 고기를 잡는데 "방해" 가 되어서 “독한 약을 풀어서라도 해초를 다 없애 버려야겠다” 하니까
옆에서 늙은 어부가 말했습니다.
“해초가 없어지면 물고기의 "먹이" 가 없어지고, 먹이가 없어지면 물고기도 살지 못해 없어 진다네.”
우리는 "장애물" 이 없어지면 "행복"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장애물" 이 없어지면 "장애를 극복" 하려던 "의욕" 도 함께 없어지게 된답니다.
오리는 알 껍질을 깨는 "고통의 과정" 을 겪어야만 "살아 갈 힘" 을 얻으며, 누군가 알 깨는 것을 도와주면 그 오리는 몇 시간 못 가서 죽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삶도 "시련"이 있어야 "윤기" 가 나고, "생동감" 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남 태평양 "사모아 섬" 은 바다 거북 들의 "산란 장소" 로 유명한데 봄이면 바다 거북들이 해변으로 올라와 모래에 구덩이를 파고 알을 낳고 깨어난 새끼들이 바다를 향해 새까맣게 기어 가는 모습은 장관을 이룹니다.
한 번은 해양 학자 들이 "산란기" 바다 거북에게 "진통제" 를 주사해 보았는데 거북은 "고통 없이" 알을 낳았지만 거북은 제가 낳은 알을 모조리 "먹어 치워" 버렸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그걸 보고 "고통 없이 낳은 알" 이라 "모성 본능" 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만약 밝은 대낮만 계속 된다면 사람들은 며칠 못 가서 다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누구나 어둠을 싫어 하지만 어둠이 있기에 우리는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낮도 밤" 도 모두 "삶의 일부" 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기대" 하고 "소망" 하지만 그러나 "어둠" 이 있어야 빛이 더욱 "빛" 나듯 "시련" 이 있어야 삶은 더욱 "풍요로워" 지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 가는 동안 "경험" 하는 "수 많은 시련" 중에 내가 이겨내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시련" 들이 닥쳐 올것이고, 때론 그 시련들을 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시련" 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이 더욱 더 "윤기" 가 나고, 또 다른 "행복감" 을 안겨다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망 찬 내일을 위해 오늘 다가오는 어떠한 "시련" 도 "좌절" 하거나 "염려, 근심" 하지 말고 꿋꿋하게 헤쳐 나갈수 있기를 "소망" 합니다.
- 옮긴 글입니다 -
그래도 좋은일만,기쁜일만 가득넘쳐나시길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 몸이 그대로 금생(今生) 중(中)에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를 나타내서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고 일컬어지느니라. 비유컨대 춘하(春夏)에 논을 갈아서 심는다면 추동(秋冬)에는 곳간에 거둬 들여서 마음대로 사용(使用)함과 같으니라. 봄부터 가을을 기다리는 동안은 오래인 것 같지만 일년내(一年內)에 기다려서 얻음과 같이 이 깨달음에 들어가서 부처를 나타내는 동안은 오래인 것 같지만 일생내(一生內)에 나타내서 나의 몸이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부처로 되느니라.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을 믿는 사람이 두려워 해야 할 것은 적인(賊人)·강도(强盜)·야습(夜襲)·호랑(虎狼)·사자(師子) 등(等)보다도 당시(當時)의 몽고(蒙古)의 공격(攻擊)보다도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괴롭히는 사람들이니라. 이 세계(世界)는 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의 소령(所領)이며,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무시(無始) 이래(已來) 그 마왕(魔王)의 권속(眷屬)이니라. 육도(六道) 중(中)에 이십오유(二十五有)라고 하는 감옥(監獄)을 짓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을 들여 보낼 뿐만 아니라, 처자(妻子)라고 하는 굴레를 씌우고 부모(父母) 주군(主君)이라고 하는 그물을 하늘에 치고 탐진치(貪瞋癡)라는 술을 마시게 하여 불성(佛性)의 본심(本心)을 어루꾀느니라. 오직 악(惡)의 안주(按酒)만을 권하여 삼악도(三惡道)의 대지(大地)에 엎드려 자게 하고, 간혹 선심(善心)이 있으면 장애(障碍)를 하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을 믿는 사람을 어떻게 해서든지 악(惡)에 떨어뜨리려고 생각하여 이루지 못하면 점차 속이기 위하여 비슷한 화엄경(華嚴經)에 떨어뜨렸는데 두순(杜順)·지엄(智儼)·법장(法藏)·징관(澄觀) 등(等)이 바로 이것이니라. 또 반야경(般若經)에 속여 떨어뜨리는 악우(惡友)는 가상(嘉祥)·승전(僧詮) 등(等)이니라. 또 심밀경(深密經)에 속여 떨어뜨리는 악우(惡友)는 현장(玄裝) 자은(慈恩)이니라. 또 대일경(大日經)에 속여 떨어뜨리는 악우(惡友)는 선무외(善無畏)·금강지(金剛智)·불공(不空)·고보(弘法)·지카쿠(慈覺)·지쇼(智證)니라. 또 선종(禪宗)에 속여 떨어뜨리는 악우(惡友)는 달마(達磨)·혜가(慧可)·등(等)이니라, 또 관경(觀經)에 속여 떨어뜨리는 악우(惡友)는 선도(善導)·호넨(法然)이니라. 이는 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이 지자(智者)의 몸에 들어가서 선인(善人)을 속이는 것인데 법화경(法華經) 제오권(第五卷)에「악귀(惡鬼)가 그 몸에 들어감」이라고 설(說)해져 있음은 이것이니라.
설사(說使) 등각(等覺)의 보살(菩薩)이라 해도 원품(元品)의 무명(無明)이라고 하는 대악귀(大惡鬼)가 몸에 들어가서 법화경(法華經)이라고 하는 묘각(妙覺)의 공덕(功德)을 장해(障害)함이니 어찌 하물며 그 이하(已下)의 사람들에 있어서랴. 또 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이 혹(或)은 처자(妻子)의 몸에 들어가서 부모(父母)나 남편(男便)을 속이고, 혹(或)은 국왕(國王)의 몸에 들어가서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위협하고, 혹(或)은 부모(父母)의 몸에 들어가서 효양(孝養)하는 자식(子息)을 책(責)하는 일이 있느니라. 실달태자(悉達太子)가 위(位)를 버리려고 하시자 나후라(羅睺羅)를 잉태(孕胎)하였으므로 정반왕(淨飯王)이 이 아이가 출생(出生)한 후(後) 출가(出家)하라고 충고(忠告)하시자 마(魔)가 아들을 억류(抑留)하기를 육년(六年)이니라. 사리불(舍利弗)은 옛날 선다라불(禪多羅佛)이라고 하는 부처의 말세(末世)에 보살행(菩薩行)을 세워서 육십겁(六十劫)을 경과(經過)하여 이미 사십겁(四十劫)이면 백겁(百劫)이 될 것이므로 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이 보살행(菩薩行)을 성취(成就)하는 것을 두렵게 생각하였는지 바라문(婆羅門)으로 되어 눈을 구걸(求乞)하자 어김없이 빼어 주었으나 그로부터 퇴(退)하는 마음이 생겨서 사리불(舍利弗)은 무량겁(無量劫) 동안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졌었느니라. 대장엄불(大莊嚴佛)의 말(末)의 육백팔십억(六百八十億)의 단나(檀那)들은 고안(苦岸) 등(等)의 사비구(四比丘)에게 속아서 보사비구(普事比丘)를 미워하였으므로 대지미진겁(大地微塵劫) 동안 무간지옥(無間地獄)을 경과(經過)하였느니라. 사자음왕불(師子音王佛)의 말(末)의 남녀(男女)들은 승의비구(勝意比丘)라고 하는 지계(持戒)의 승(僧)을 의지하여 희근비구(喜根比丘)를 비웃었으므로 무량겁(無量劫) 동안 지옥(地獄)에 떨어졌느니라.
지금 또 니치렌(日蓮)의 제자(弟子) 단나(檀那) 등(等)은 이에 해당(該當)되느니라. 법화경(法華經)에는 「여래(如來)의 현재(現在)조차도 역시 원질(怨嫉)이 많은데 하물며 멸도(滅度)의 후(後)에 있어서랴」 또 가로되 「일체세간(一切世間)에 원(怨)이 많아 믿기 어려우니라」 열반경(涅槃經)에 가로되 「횡사(橫死)의 재앙(災殃)을 당(當)하고 가책(呵責)·매욕(罵辱)·편장(鞭杖)·폐계(閉繫)·기아(飢餓)·곤고(困苦)·이와 같은 등(等)의 현세(現世)의 경보(輕報)를 받아 지옥(地獄)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등(等) 운운(云云). 반니원경(般泥洹經)에 가로되 「의복(衣服)이 부족(不足)하고 음식(飮食)이 추소(麤疏)하며 재(財)를 구(求)함에도 이(利)가 없고, 빈천(貧賤)한 집과 사견(邪見)의 집에 태어나며, 혹(或)은 왕난(王難) 및 여타(餘他)의 종종(種種)의 인간(人間)의 고보(苦報)를 만나는데 현세(現世)에 가볍게 받음은 이는 호법(護法)의 공덕력(功德力)에 의(依)하는 까닭이니라」등(等) 운운(云云). 문(文)의 본뜻은 우리들이 과거(過去)에 정법(正法)을 행(行)하는 자(者)에게 원질(怨嫉)을 한 일이 있었는데 이제 도리어 신수(信受)하므로 과거(過去)에 타인(他人)을 장해(障害)한 죄(罪)로 미래(未來)에 대지옥(大地獄)에 떨어져야 할 것을 금생(今生)에 정법(正法)을 행(行)하는 공덕(功德)이 강성(强盛)하므로 미래(未來)의 대고(大苦)를 초래(招來)하여 소고(少苦)를 만남으로써 넘기느니라. 이 경문(經文)에 과거(過去)의 비방(誹謗)에 의(依)하여 여러가지 과보(果報)를 받는 가운데 혹(或)은 빈가(貧家)에 태어나고 혹(或)은 사견(邪見)의 집에 태어나며, 혹(或)은 왕난(王難)을 만난다 등(等) 운운(云云). 이 중(中)에 사견(邪見)의 집이라 함은 비방정법(誹謗正法)의 집이며, 왕난(王難) 등(等)이라 함은 출생(出生)하여 악왕(惡王)을 만나느니라. 이 두 가지의 대난(大難)은 각자(各者)가 자신(自身)의 몸으로써 느꼈으리라. 과거(過去)의 방법(謗法)의 죄(罪)를 멸(滅)하려고 사견(邪見)의 부모(父母)에게 가책(呵責)을 당(當)하는 것이며, 또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를 미워하는 국주(國主)를 만났으니 경문(經文)에 명명(明明)하며 경문(經文)에 혁혁(赫赫)하니라. 자신(自身)이 과거(過去)에 방법자(謗法者)였다는 것을 의심(疑心)하지 말지어다. 이것을 의심(疑心)하여 현세(現世)의 경고(輕苦)를 견디기 어려워서 자부(慈父)의 책망(責望)에 따라 의외(意外)에도 법화경(法華經)을 버리는 일이 있다면 자신(自身)이 지옥(地獄)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비모(悲母)도 자부(慈父)도 대아비지옥(大阿鼻地獄)에 떨어져 함께 슬퍼하게 된다는 것은 의심(疑心)할 바 없느니라. 대도심(大道心)이라 함은 이것이니라.
각자(各者)는 힘껏 법화경(法華經)을 믿어 왔으므로 과거(過去)의 중죄(重罪)를 책(責)하여 끄집어 냈느니라. 비유컨대 철(鐵)을 공들여 달구어 치면 흠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돌은 태우면 재가 되고, 금(金)은 태우면 진금(眞金)이 된다. 이번에야 말로 진실(眞實)한 신심(信心)이 나타나서 법화경(法華經)의 십나찰(十羅刹)도 수호(守護)하시게 되리라. 설산동자(雪山童子) 앞에 나타난 나찰(羅刹)은 제석(帝釋)이며 시비왕(尸毘王)의 비둘기는 비사문천(毘沙門天)이었느니라. 십나찰(十羅刹)이 시험(試驗)해 보기 위하여 부모(父母)의 몸에 들어가서 책망(責望)하는 일도 있을 것이니라. 이것으로 보더라도 신심(信心)이 약(弱)하면 후회(後悔)가 있으리라. 또 전차(前車)가 뒤집힘은 후차(後車)에 대한 훈계(訓誡)이다, 지금의 세상(世上)에는 이렇다 할 일이 없어도 도심(道心)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세정(世情)을 싫어하더라도 결코 싫어할 수 없으리라. 일본(日本) 사람들은 반드시 대고(大苦)를 당(當)하리라고 보이며 안전(眼前)의 일이로다.
형제초(兄弟抄) 미노부에서 54세에 술작 1081~3쪽아무리 해도 이 몸은 헛되이 산야(山野)의 흙이 되리니, 아까워한들 무엇하리오, 아까워한들 끝내 아낄 수 없으며, 사람이 오래 산다 해도 백년(百年)은 넘지 못하니 그 간(間)의 일은 다만 한잠의 꿈과 같다. 받기 어려운 인신(人身)을 얻어 간혹 출가(出家)한 자(者)도 불법(佛法)을 배우고 방법(謗法)의 자(者)를 책(責)하지 않고 헛되이 유희잡담(遊戱雜談)만을 하며 지내는 자(者)는 법사(法師)의 가죽을 쓴 축생(畜生)이니라. 법사(法師)의 이름을 빌어서 세상(世上)을 살고 몸을 보양(保養)한다 해도 법사(法師)로 되는 의(義)는 하나도 없고 법사(法師)라고 하는 이름을 훔친 도인(盜人)이니라, 부끄러워 할지어다, 두려워 할지어다. 적문(迹門)에는 「나는 신명(身命)을 사랑하지 않고 단(但) 무상도(無上道)를 아낌」이라고 설하고 본문(本門)에는 「스스로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음」이라고 설(說)했으며, 열반경(涅槃經)에는 「몸은 경(輕)하고 법(法)은 중(重)하니 몸을 죽여서 법(法)을 넓힌다」라고 쓰여 있느니라. 본적양문(本迹兩門)·열반경(涅槃經) 다 같이 신명(身命)을 버려서 법(法)을 넓힐지어다 라고 쓰여 있다. 이러한 훈계(訓誡)를 배반(背反)하는 중죄(重罪)는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쌓여서 지옥(地獄)에 떨어진다 함은 비유(譬喩)컨대 한열(寒熱)은 형체(形體)도 없고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겨울이면 추위가 와서 초목(草木)이나 인축(人畜)을 괴롭히고 여름에는 더위가 와서 인축(人畜)을 열뇌(熱惱)케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재가(在家)의 몸은 다만 여념(餘念) 없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고 승(僧)도 공양(供養)하시는 것이 간심(肝心)이외다. 그것도 경문(經文)대로라면 수력연설(隨力演說)도 있어야 할 것이로다. 세상(世上)살이가 힘겨울 때도 금생(今生)의 괴로움조차 슬프니 하물며 내세(來世)의 고(苦)에 있어서랴고 생각해서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시라. 기쁠 때도 금생(今生)의 기쁨은 꿈속의 꿈이며 영산정토(靈山淨土)의 기쁨이야말로 진실(眞實)한 기쁨이라고 생각하시어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퇴전(退轉)없이 수행(修行)하여 최후(最後) 임종(臨終)의 때를 기다려 보시라, 묘각(妙覺)의 산(山)에 달려 올라가 사방(四方)을 쫙 바라보니 아아, 유쾌하도다, 법계(法界)는 적광토(寂光土)로서 유리(瑠璃)를 가지고 땅으로 하고 금의 밧줄로써 팔(八)의 길에 경계(境界)를 했으며, 천(天)으로 부터 사종(四種)의 꽃이 내리고 허공(虛空)에서 음악(音樂)이 들리며, 제불보살(諸佛菩薩)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바람에 산들거리고 오락(娛樂) 쾌락(快樂)하시느니라. 우리들도 그 수(數)에 들어가서 유희(遊戱)하고 즐기게 될 것은 벌써 다가왔도다. 신심(信心)이 약(弱)해서는 이와 같이 가장 좋은 곳에는 갈 수 없다, 갈 수 없느니라. 궁금한 일은 더 더욱 물어보시라, 황송하고 황송하오.
마쓰노전답서(松野殿答書) 미노부에서 55세에 술작 1386~7쪽이계호 교수는 “매일 아침 식탁에서 면역력을 높이는 이야기를 나누면 그 사이에 암세포가 자라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그가 한 달 전에 검은 고기 한 점을 먹었다면 이로 인해 생긴 암세포 50만 마리를 깨끗이 청소해
주는 방법도 웃음이라나..ㅋ
《좋은 식사, 좋은 물, 규칙적인 배변, 적당한 운동, 바른 호흡, 적당한 수면과 휴식, 사랑과 감사·웃음과 만족감이 면역력을 높이는 생활습관 7가지》
오늘도 즐겁고 웃음과 미소가득한 시간되시길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유전자"
어떻게 하면?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수 있을까?
"이기적 유전자" 라는
책을 써서 세계적인 스터디 셀러 작가로 유명해진,
"리처드 도킨스"는
다음과 같이 말 했습니다.
"남을 먼저 배려하고 보호하면
그 남이 결국 내가 될수 있다."
"서로를 지켜주고,
함께 협력하는 것은,
내 몸 속의 유전자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약육 강식" 에서
이긴 유전자 만이 살아 남는 것이 아니라,
"상부 상조" 를 한 "종" 이 더 우수한 형태로 살아 남는다는 것이 "도킨스" 의 주장 입니다.
결국 "이기심" 보다는 "이타심"
즉 내가 잘 살기 위해 남을 도와야 모두가
잘 살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
사람이 꽃 보다 더,
아름다울수 있습니다.
좋은일만 있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사자(使者)를 일부러 보내 주시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또 감자(柑子) 오십(五十)·엽전(葉錢) 오관문(五貫文)을 받았나이다. 각각(各各)의 어공양(御供養)이라고 운운(云云). 또 글월 중에 가로되 지난 十六日에 어느 승려(僧侶)와 만났을 때·제법실상(諸法實相)의 법문(法門)을 서로 얘기하였다고 운운(云云). 금경(今經)은 출세(出世)의 본회(本懷)·일체중생(一切衆生) 개성불도(皆成佛道)의 근원(根元)이라고 말함도 오직 이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사자(四字) 이외(以外)는 전(全)혀 없느니라. 그러므로 전교대사(傳敎大師)가 만리(萬里)의 파도(波濤)를 헤치시고 상전(相傳)하신게 이 문(文)이니라. 일구만료(一句萬了)의 일언(一言)이란 이것이로다, 당세(當世)·천태종(天台宗)이 개회(開會)의 법문(法門)을 말함도 이 경문(經文)을 그릇되게 이해(理解)하여 사의(邪義)를 말하기 시작한 것이외다, 오직 이 경(經)을 수지(受持)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고 정직사방편(正直捨方便)·단설무상도(但說無上道)라 믿는 것을 제법실상(諸法實相)의 개회(開會)의 법문(法門)이라 하느니라, 그 까닭은 석가불(釋迦佛)·다보여래(多寶如來)·시방삼세(十方三世)의 제불(諸佛)을 증인(證人)으로 받들어 모셨느니라, 명심하여 그와 같이 심득(心得)하시어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사문자(四文字)를 시시(時時)로 음미하실지어다·양약(良藥)에 독(毒)을 섞는 일이 있을손가·조수(潮水) 속에서 하천(河川)의 물을 뽑아내는 일이 있을손가, 달은 밤에 뜨고·해는 낮에 뜨는 이 사실(事實)을 언쟁(言諍)할손가. 이로부터 후(後)에는 그와 같이 이해(理解)하시고 문답(問答)하시라. 다만 자세한 논난(論難)은 하시지 말지어다. 계속해서 말하거든 우리들의 스승이신 니치렌보(日蓮房)에게 법문(法門)을 물으시라고 웃으면서 되풀이 되풀이 말씀하시라.
법문(法門)을 쓰느라고 공양(供養)의 후의(厚意)는 말씀드리지 못했소이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상세(詳細)하게는 후일(後日)에 정중히 말씀드리리다.
시조깅고전답서(四條金吾殿答書) 미노부에서 54세에 술작 1139쪽이렇게 깨닫는다면 무시(無始)로부터 이래(已來) 지금까지 항상 생각해 온 그릇된 망상(妄想)은 어제의 꿈을 생각하듯이 형적(形迹)도 없이 되어버리는 것이니라. 이를 믿고 한번이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면 법화경(法華經)을 깨닫고 여법(如法)으로 일부(一部)를 봉독(奉讀)함이니라. 열번은 十부(部)·백(百)번은 百부(部)·천(千)번은 천부(千部)를 여법(如法)으로 봉독(奉讀)한 것이로다. 이렇게 믿음을 여설수행(如說修行)의 사람이라고 말하느니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십여시사(十如是事) 가마쿠라에서 37세에 술작 411쪽이 몸이 그대로 금생(今生) 중(中)에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를 나타내서 즉신성불(卽身成佛)이라고 일컬어지느니라. 비유컨대 춘하(春夏)에 논을 갈아서 심는다면 추동(秋冬)에는 곳간에 거둬 들여서 마음대로 사용(使用)함과 같으니라. 봄부터 가을을 기다리는 동안은 오래인 것 같지만 일년내(一年內)에 기다려서 얻음과 같이 이 깨달음에 들어가서 부처를 나타내는 동안은 오래인 것 같지만 일생내(一生內)에 나타내서 나의 몸이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부처로 되느니라.
이 길에 들어가는 사람에게도 상중하(上中下)의 삼근(三根)은 있지만 똑같이 일생내(一生內)에 나타내느니라. 상근(上根)의 사람은 듣는 곳에서 남김없이 깨달아서 나타냄이라. 중근(中根)의 사람은 혹은 一일(日)·혹은 一월(月)·혹은 一년(年)에 나타내느니라. 하근(下根)의 사람은 뻗어 갈 곳이 없어 막혀버리므로 일생내(一生內)에 한정(限定)된 일이기에 임종(臨終)의 때에 이르러서 모든 꾸던 꿈도 깨어 현실로 됨과 같이 지금까지 본 바의 생사(生死)·망상(妄想)의 사(邪)된 생각과 그릇된 사리(事理)는 형적(形迹)도 없어지고 본각(本覺)의 현실의 깨달음으로 돌아와서 법계(法界)를 보면 모두 적광(寂光)의 극락(極樂)으로서 평소(平素)에 천(賤)하다고 생각한 나의 이 몸이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로 되어 있느니라·가을의 벼에는 조(早)와 중(中)과 만(晩)의 세가지의 벼가 있지만 일년내(一年內)에 거둬들임과 같이, 이것도 상중하(上中下)의 차별(差別)이 있는 사람이지만 똑같이 일생내(一生內)에 제불여래(諸佛如來)와 일체불이(一體佛二)라고 아울러 생각해야 할 일이니라.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체(體)의 존귀(尊貴)하심은 어떠한 체(體)이신가 하고 추구(追求)해 보았더니 나의 심성(心性)의 팔엽(八葉)의 백연화(白蓮華)라 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몸의 체성(體性)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말한 것이므로 경(經)의 이름이 아니고·이미 나 자신(自身)의 체(體)라고 알았기에 자신(自身)이 그대로 법화경(法華經)이며 법화경(法華經)은 나 자신(自身)의 체(體)를 불러 나타내시는 부처의 말씀이시므로 다름아닌 나의 몸이 삼신즉일(三身卽一)의 본각(本覺)의 여래(如來)인 것이니라. 이렇게 깨닫는다면 무시(無始)로부터 이래(已來) 지금까지 항상 생각해 온 그릇된 망상(妄想)은 어제의 꿈을 생각하듯이 형적(形迹)도 없이 되어버리는 것이니라. 이를 믿고 한번이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르면 법화경(法華經)을 깨닫고 여법(如法)으로 일부(一部)를 봉독(奉讀)함이니라. 열번은 十부(部)·백(百)번은 百부(部)·천(千)번은 천부(千部)를 여법(如法)으로 봉독(奉讀)한 것이로다. 이렇게 믿음을 여설수행(如說修行)의 사람이라고 말하느니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십여시사(十如是事) 가마쿠라에서 37세에 술작 411쪽대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불성(佛性)이며 불성(佛性)이란 법성(法性)이고 법성(法性)이란 보리(菩提)이니라. 소위(所謂)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상행(上行)·무변행(無邊行) 등(等)·보현(普賢)·문수(文殊)·사리불(舍利弗)·목련(目連) 등(等), 대범천왕(大梵天王)·석제환인(釋提桓因)·일월(日月)·명성(明星)·북두(北斗)·칠성(七星)·이십팔수(二十八宿)·무량(無量)의 제성(諸星)·천중(天衆)·지류(地類)·용신(龍神)·팔부(八部)·인천(人天)·대회(大會)·염마법왕(閻魔法王)·상(上)은 비상(非想)의 구름 위로부터 하(下)는 나락(那落)의 불길 바닥까지 모든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갖추고 있는 바의 불성(佛性)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느니라. 물어 가로되 천진독랑(天眞獨朗)의 법(法)은 멸후(滅後)에 있어서 어느 때에 유포(流布)시켜야 하느뇨, 답(答)하여 가로되 상법(像法)에 있어서 홍통(弘通)해야 하느니라. 물어 가로되 말법(末法)에 있어서 유포(流布)될 법(法)의 명목(名目)은 어떠한가, 답(答)하여 가로되, 니치렌(日蓮)의 기심(己心)에 상승(相承)한 비법(秘法)은 이 답(答)에 나타낼 것이니라, 소위(所謂)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이것이로다. 물어 가로되 증문(證文)은 어떠한가. 답(答)하여 가로되, 신력품(神力品)에 가로되 「이시(爾時)에 불(佛)이 상행등(上行等)의 보살(菩薩)께 고(告)하시되 요(要)를 가지고 이를 말하면 내지(乃至) 선시현설(宣示顯說)함이라」 운운(云云). 천태대사(天台大師) 가로되 「이시불고(爾時佛告) 상행(上行) 이하(以下)는 제삼(第三) 결요부촉(結要付屬)이니라」 또 가로되 「경중(經中)의 요설(要說)의 요(要)는 사사(四事)에 있다. 통틀어 일경(一經)을 결(結)함에 오직 사(四)일 뿐이며 그 추병(樞柄)을 취(取)하여 이것을 수여(授與)하노라」 물어 가로되, 지금의 문(文)은 상행보살등(上行菩薩等)에 수여(授與)한다는 문(文)이니라. 그대는 무슨 까닭으로 기심(己心)에 상승(相承)한 비법(秘法)이라 하느뇨. 답(答)하여 가로되 상행보살(上行菩薩)이 홍통(弘通)해야 할 비법(秘法)을 니치렌(日蓮)이 앞서서 이것을 홍통(弘通)하는 당자(當者)라고 하는 뜻이 아닐손가, 상행보살(上行菩薩)의 대관(大官)의 일분(一分)이니라. 결국(結局)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천진독랑(天眞獨朗)의 법문(法門)은 무익(無益)하니라. 조행(助行)으로는 사용(使用)할 것이로되, 정행(正行)에는 오직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이니라. 전교대사(傳敎大師) 가로되 「천태대사(天台大師)는 석가(釋迦)에 신순(信順)하여 법화종(法華宗)을 도와서 진단(震旦)에 부양하고 에이산(叡山)의 일가(一家)는 천태(天台)에게 상승(相承)하여 법화종(法華宗)을 도와서 일본(日本)에 홍통(弘通)함이라」 지금 니치렌(日蓮)은 탑중상승(塔中相承)의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칠자(七字)를 말법(末法)의 시(時)에 일본국(日本國)에 홍통(弘通)하니 이 어찌 시국상응(時國相應)의 불법(佛法)이 아니겠느뇨. 말법(末法)에 들어와서 천진독랑(天眞獨朗)의 법(法)을 홍통(弘通)하여 정행(正行)으로 하려는 자(者)는 반드시 무간대성(無間大城)에 떨어질 것은 의심(疑心)이 없도다. 귀하(貴下)는 연래(年來)의 권종(權宗)을 버리고 니치렌(日蓮)의 제자(弟子)가 되셨으니 진실(眞實)로 시국상응(時國相應)의 지인(智人)이니라, 통틀어 나의 제자(弟子)들은 나와 같이 정리(正理)를 수행(修行)하시라, 지자(智者)·학장(學匠)의 몸이 되었어도 지옥(地獄)에 떨어지면 무슨 보람이 있을손가, 결국(結局) 시시염념(時時念念)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奉唱)할지어다.
십팔원만초(十八圓滿抄)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1367쪽대저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불성(佛性)이며 불성(佛性)이란 법성(法性)이고 법성(法性)이란 보리(菩提)이니라. 소위(所謂)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상행(上行)·무변행(無邊行) 등(等)·보현(普賢)·문수(文殊)·사리불(舍利弗)·목련(目連) 등(等), 대범천왕(大梵天王)·석제환인(釋提桓因)·일월(日月)·명성(明星)·북두(北斗)·칠성(七星)·이십팔수(二十八宿)·무량(無量)의 제성(諸星)·천중(天衆)·지류(地類)·용신(龍神)·팔부(八部)·인천(人天)·대회(大會)·염마법왕(閻魔法王)·상(上)은 비상(非想)의 구름 위로부터 하(下)는 나락(那落)의 불길 바닥까지 모든 일체중생(一切衆生)이 갖추고 있는 바의 불성(佛性)을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라고 이름하느니라. 그러므로 한 번 이 수제(首題)를 봉창(奉唱)하면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불성(佛性)이 모두 불리어서 여기에 모일 때 자신(自身)의 법성(法性)의 법보응(法報應)의 삼신(三身)이 함께 이끌려서 현출(顯出)하는 것을 성불(成佛)이라고 하느니라. 사람은 누구나 그 사람만이 지닌 "마음씨"가 있다.
없으면서도 "남을 도우려고" 하는 사람.
자기도 바쁘면서 순서를 "양보" 하는 사람.
어떠한 어려움도 꿋꿋하게 "이겨내는" 사람.
어려울 때 보기만 해도 "위로" 가 되고 어려움을 함께 "해결" 해 주는 사람.
허물을 감싸주고, 미흡한 점을 고운 "눈길"로 봐주는 사람.
자기의 몸을 태워 빛을 밝히는 "촛불" 과도 같이
상대를 "배려" 하고 "도움" 을 주는 사람.
"인연" 을 깨뜨리지 않는 사람.
삶을 진실하게 함께 하는 사람은 "잘 익은 진한 과일 향" 나는 사람이다.
세상 바라보는 눈이 곱고 밝은 사람.
항상 웃고 있는 사람은 마음을 상쾌하게 하는 진한 "꽃향기" 같다!
향수를 아니 뿌려도 촛불을 켜지 않아도
넉넉한 마음과 진한 꽃향기 풍기는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오늘 하루도
사랑의 향기를 뿌려드립니다~
- 옮긴 글입니다 -
오늘도 즐겁고 행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여인성불초(女人成佛抄) 가마쿠라에서 44세에 술작 471쪽 어서말씀》
경문(經文)에는
"일인일일중(一人一日中)에 팔억사천념(八億四千念)이 있으며 염념(念念) 중(中)의 소작(所作)은 모두 이는 삼도(三途)의 업(業)"라고 하여
비록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한사람이 하루에 840000000번의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8억4천번의 생각들은 지옥, 아귀, 축생 등의 삼도(三途)의 업(業) 즉 카르마 Karma가 된다고 합니다.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에서는 카르마 Karma에 대해
"윤회와 더불어 인도에 존재하는 모든 사상과 종교의 공통적인 근간을 이루는 사상이다. 목적과 관계없는 행위나 수행을 뜻하며, 업(業)으로 번역한다. 행위 자체는 근본적으로 중립적이며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라 하더라도, 선과 악, 고통과 즐거움의 열매를 맺는다고 한다. 이 법칙은 개인들의 삶의 차이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비슷한 상황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결과가 판이하게 다르거나 착한 사람이 고통을 받고 악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것은, 현재의 행위뿐만 아니라 과거의 행위도 현재 혹은 미래의 생애에서 결과를 낳은 것이라는 주장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카르마는 개인과 세계의 질서를 지배하는 도덕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
윤회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 카르마는 ‘행위의 잠재력’이라는 의미가 된다. 어떤 행위를 했을 때, 그것은 반드시 그 행동에 상응하는 결과를 나타내는 잠재력 혹은 여력을 남기게 되는데, 이 힘을 업 혹은 업력(業力)이라 한다. 이 개념은 엄격한 생물학적 과정의 한 부분으로 스스로 설명할 수 있을 뿐이며,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수정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 중략 >
유신론적 철학파에서는 카르마의 법칙이 신의 지배 아래 있다고 믿는다. 신은 카르마의 법칙을 가지고 세계를 창조하는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와 자이나교와 무신론적 철학파에서는 카르마의 법칙으로 세계의 근원과 전개와 질서를 설명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카르마의 법칙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카르마의 법칙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것보다는, 카르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카르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언급처럼 생명의 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세상을 이끌어갈 수 있는 새로운 철학, 새로운 종교, 새로운 영성인들의 출현을 기대해봅니다.
바로 그 중심에 우리들이 있습니다.
오늘도 즐겁고 활기차게 출발하시어 행운이 가득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시방세계(十方世界)의 제불(諸佛)은 자아게(自我偈)를 스승으로 해서 성불(成佛)하시어 세계(世界)사람의 부모(父母)와 같으니라. 지금 법화경(法華經)·수량품(壽量品)을 가지는 사람은 제불(諸佛)의 명(命)을 잇는 사람이다. 자신(自身)이 득도(得道)한 경(經)을 가지는 사람을 버리실 부처가 계실손가, 만일 이를 버리신다면 부처가 도리어 자신(自身)을 버리시는 것이 되리라. 이로써 생각하니 다무라(田村)도시히토(利仁) 등(等)과 같은 무사(武士) 삼천명(三千名)을 낳은 여인(女人)이 있다고 하자. 이 여인(女人)을 적(敵)으로 하는 사람은 이 삼천명(三千名)의 장군(將軍)을 적(敵)으로 하는 것이 아니겠느뇨. 법화경(法華經)의 자아게(自我偈)를 가진 사람을 적(敵)으로 함은 삼세(三世)의 제불(諸佛)을 적(敵)으로 하는 것이 되느니라. 지금의 법화경(法華經)의 문자(文字)는 모두 생신(生身)의 부처인데 우리들은 육안(肉眼)이기 때문에 문자(文字)라고 보느니라. 예(例)컨대 아귀(餓鬼)는 항하(恒河)를 불이라 보고, 사람은 물이라 보며, 천인(天人)은 감로(甘露)라고 보니 물은 하나이지만 과보(果報)에 따라서 보는 바가 각각(各各) 다름이라. 이 법화경(法華經)의 문자(文字)는 맹목자(盲目者)는 보지 못하고 육안(肉眼)은 흑색(黑色)이라 보며 이승(二乘)은 허공(虛空)이라 보고·보살(菩薩)은 가지 가지의 색(色)이라 보고, 불종(佛種)·순숙(純熟)한 사람은 부처라고 뵈옵느니라. 그러기에 경문(經文)에 가로되 「만약 능히 가지는 자(者)는 곧 불신(佛身)을 갖는 것이니라」 등(等) 운운(云云). 천태(天台) 가로되 「계수(稽首)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 일질(一帙)·팔축(八軸)·사칠품(四七品)·육만구천삼팔사(六萬九千三八四)·일일문문(一一文文)·시진불(是眞佛)·진불설법이중생(眞佛說法利衆生)」 등(等)이라고 쓰셨느니라.
호렌초(法蓮抄) 미노부에서 54세에 술작 1050쪽시간의 아침은 오늘을 밝히지만, 마음의 아침은 내일을 밝힙니다.
열광하는 삶보다, 한결같은 삶이 더 아름답습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서나 배웁니다.
부족한 사람에게서는 부족함을, 넘치는 사람에게서는 넘침을 배웁니다.
스스로를 신뢰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성실할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소금 3%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3%의 좋은 생각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있는지도 모릅니다.
- 옮겨온 글입니다 -
오늘 하루도 봄날처럼 화사한 미소가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성색(聲色)의 근명(近名)이란 부채와 나무와 같은 몽중(夢中)의 일체경론(一切經論)의 언설(言說)이니라. 무상(無相)의 극리(極理)란 달과 바람과 같은 생시(生時)인 이 몸의 심성(心性)의 적광(寂光)의 극락(極樂)이니라. 이 극락(極樂)이란 시방법계(十方法界)의 정보(正報)인 유정(有情)과 시방법계(十方法界)의 의보(依報)인 국토(國土)가 화합(和合)하여 일체삼신즉일(一體三身卽一)이니라. 사토불이(四土不二)로서 법신(法身)의 일불(一佛)이며, 십계(十界)를 신(身)으로 함은 법신(法身)이니라. 십계(十界)를 심(心)으로 함은 보신(報身)이니라. 십계(十界)를 형(形)으로 함은 응신(應身)이니라. 십계외(十界外)에 부처는 없고 부처 외(外)에 십계(十界)가 없어서 의정불이(依正不二)이고 신토불이(身土不二)니라. 일불(一佛)의 신체(身體)임을 가지고 적광토(寂光土)라 하며, 이런 고(故)로 무상(無相)의 극리(極理)라 하느니라. 생멸무상(生滅無常)의 상(相)을 떠난 고(故)로 무상(無相)이라 하며, 법성(法性)의 연저(淵底)·현종(玄宗)의 극지(極地)인 고(故)로 극리(極理)라고 하느니라, 이 무상(無相)의 극리(極理)인 적광(寂光)의 극락(極樂)은 일체유정(一切有情)의 심성(心性)속에 있어서 청정무루(淸淨無漏)이니라. 이를 이름하여 묘법(妙法)의 심연대(心蓮臺)라 하며, 이런 고(故)로 심외무별법(心外無別法)이라고 하느니라. 이것을 일체법(一切法)은 개시불법(皆是佛法)이라고 통달해료(通達解了)함이라 하느니라. 생(生)과 사(死)의 둘의 이(理)는 생사(生死)의 꿈의 이(理)이고, 망상(妄想)이며 전도(顚倒)이니라. 본각(本覺)의 생시(生時)를 가지고 나의 심성(心性)을 밝히면 생(生)할 시초(始初)도 없는 고(故)로 죽게 될 끝도 없으니, 이미 생사(生死)를 떠난 심법(心法)이 아니겠느뇨. 겁화(劫火)에도 타지 않고, 수재(水災)에도 썩지 않으며, 검도(劍刀)에도 잘리지 않고, 궁전(弓箭)에도 맞지 않고, 개자(芥子)속에 들어가도 개자(芥子)도 넓어지지 않고, 심법(心法)도 줄어들지 않고, 허공(虛空)속에 꽉 차도 허공(虛空)도 넓지 않고, 심법(心法)도 좁지 않으며, 선(善)에 배반(背反)함을 악(惡)이라 하고, 악(惡)에 배반(背反)함을 선(善)이라고 한다. 고(故)로 심외(心外)에 선(善)이 없고 악(惡)이 없으며, 이 선(善)과 악(惡)에서 떨어짐을 무기(無記)라고 하느니라. 선악무기(善惡無記)·이 외(外)에는 마음이 없고 마음 외(外)에는 법(法)이 없는 고(故)로 선악(善惡)도 정예(淨穢)도 범부(凡夫)·성인(聖人)도 천지(天地)도 대소(大小)도 동서(東西)도 남북(南北)도 사유(四維)도 상하(上下)도 언어도단(言語道斷)하고 심행소멸(心行所滅)함이라. 마음에 분별(分別)하여 생각해서 말하여 나타내는 언어(言語)이므로 마음의 외(外)에는 분별(分別)도 무분별(無分別)도 없느니라. 말이라 함은 마음의 생각을 울려서 소리로 나타냄을 말함인데, 범부(凡夫)는 나의 마음에 미혹(迷惑)하여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니라. 부처는 이를 깨달아 나타내서 신통(神通)이라 이름하니 신통(神通)이란 혼신(魂神)이 일체법(一切法)에 통(通)하여 장애(障碍)가 없음이라. 이 자재(自在)의 신통(神通)은 일체유정(一切有情)의 마음인 고(故)로 호리(狐狸)도 응분(應分)으로 신통(神通)을 나타냄은 모두 마음의 혼신(魂神)의 응분(應分)의 깨달음이며, 이 마음의 일법(一法)에서 국토세간(國土世間)도 출래(出來)하는 것이니라. 일대성교(一代聖敎)란 이 일을 설(說)한 것이며, 이것을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장(法藏)이라고 하느니라. 이는 모두 일인(一人)의 신중(身中)의 법문(法門)이니라, 그러므로 팔만사천(八萬四千)의 법장(法藏)은 자신일인(自身一人)의 일기문서(日記文書)로다. 이 팔만법장(八萬法藏)을 나의 심중(心中)에 내포(內包)하여 갖고, 품어 가졌노라, 나의 신중(身中)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와 법(法)과 정토(淨土)를 내 몸 밖에서 생각하고 원(願)하며 구(求)함을 미혹(迷惑)이라 하고 이 마음이 선악(善惡)의 연(緣)을 만나 선악(善惡)의 법(法)을 만들어 내느니라. 화엄경(華嚴經)에 가로되「마음은 솜씨 좋은 화사(畵師)가 종종(種種)의 오음(五陰)을 만들 듯이 일체세간중(一切世間中)에 법(法)으로서 만들지 않음이 없도다.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며, 부처와 같이 중생(衆生)도 그러하니 삼계(三界)는 오직 일심(一心)이니라. 마음 외(外)에 다른 법(法)이 없고, 심불(心佛) 및 중생(衆生)·이 삼차별(三差別)이 없느니라」이상(已上). 무량의경(無量義經)에 가로되「무상(無相)·불상(不相)의 일법(一法)에서 무량의(無量義)를 출생(出生)함」이상(已上)
삼세제불총감문교상폐립(三世諸佛總勘文敎相廢立) 미노부에서 58세에 술작 563~4쪽지금 법화경(法華經)·수량품(壽量品)을 가지는 사람은 제불(諸佛)의 명(命)을 잇는 사람이다.깊이 명심(銘心)하고·어떻게 하든 이번에 이 경(經)을 깊이 믿어 명종(命終)의 때·천불(千佛)의 마중을 받아 영산정토(靈山淨土)에 달려가시어 자수법락(自受法樂) 하시라. 신심(信心)이 약(弱)해서 성불(成佛)이 연장(延長)될 때·나를 원망하지 마시라. 비유(譬喩)컨대 병자(病者)에게 양약(良藥)을 주었는데 독(毒)을 좋아하여 복용(服用)하셔서 그 병(病)이 낫기 어려울 때, 나의 잘못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도리어 의사(醫師)를 원망함과 같이 되리라. 이 경(經)의 신심(信心)이라 함은 조금도 사견(私見) 없이 경문(經文)과 여(如)히,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법화일부(法華一部)에 배반(背反)하는 일이 없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니라. 부처가 된다고 함은 별(別)다른 일은 아니로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타사(他事)없이 불러 나아간다면 천연(天然)히 삼십이상팔십종호(三十二相八十種好)를 갖추게 되느니라. 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라 해서 석존(釋尊)과 같은 부처로 손쉽게 되느니라. 비유(譬喩)컨대 새의 알은 처음엔 물인데 그 물속에서 누가 하는 것도 아닌데, 주둥이나 눈이 생겨나서 허공(虛空)을 날아다니는 것과 같다. 우리들도 무명(無明)의 알이고 천박한 몸이지만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창제(唱題)라는 어머니가 품어주어서 삼십이상(三十二相)의 주둥이가 나오고 팔십종호(八十種好)의 개모(鎧毛)가 생겨 갖추어져서 실상진여(實相眞如)의 허공(虛空)을 날게 되느니라. 이로써 경(經)에 가로되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무명(無明)의 알속에 있어 지혜(智慧)라는 주둥이가 없다. 불모(佛母)라는 새는 분단동거(分段同居)의 옛집에 돌아와 무명(無明)의 알을 두들겨 부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이란 새를 보금자리를 떠나게 하여 법성진여(法性眞如)의 허공(虛空)을 날게 한다」라고 설(說)했느니라 취의(取意).
유해무신(有解無信)이라 해서 법문(法門)을 알아도 신심(信心)이 없는 자(者)는 결코 성불(成佛)할 수 없으며 유신무해(有信無解)라 해서 해(解)는 없어도 신심(信心)이 있는 자(者)는 성불(成佛)하느니라. 모두 이 경(經)의 의(意)이지 나의 말은 아니로다. 그러므로 이(二)의 권(卷)에는 「신(信)으로써 들어감을 득(得)하였지 자기(自己)의 지분(智分)은 아니다」라고 해서 지혜제일(智慧第一)의 사리불(舍利弗)도 오직 이 경(經)을 수지(受持)하고 신심(信心) 강성(强盛)함으로써 부처가 되었으며 자기(自己)의 지혜(智慧)로써 부처가 되지 않았다고 설(說)하시었다. 사리불(舍利弗)조차도 지혜(智慧)로써는 부처가 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우리들 중생(衆生)이 약간의 법문(法門)을 터득했다 해도 신심(信心)이 없으면 부처가 되기란 의심스럽도다.
니이케어서(新池御書)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1443쪽기쁘도다, 석존출세(釋尊出世)의 상투 속의 명주(明珠)를 이번에 나의 몸에 득(得)하였음이여, 시방제불(十方諸佛)의 증성(證誠)이라 소홀하게 할 수 없느니라. 정말로 「일체세간(一切世間)·다원난신(多怨難信)」이라고 알면서 어찌 일분(一分)의 의심(疑心)을 남기어 결정무유의(決定無有疑)의 부처가 되지 않으려 하느뇨. 과거(過去) 원원(遠遠)의 고(苦)는 헛되이 받아 왔을 뿐이로다. 왜 잠시(暫時)라도 불변상주(不變常住)의 묘인(妙因)을 심지 않을 손가·미래(未來)·영원(永遠)의 즐거움은 서서히 마음을 배양(培養)해 나가되 억지로 무리하게 전광조로(電光朝露)의 명리(名利)를 탐(貪)하지 말지어다. 「삼계무안(三界無安)·유여화택(猶如火宅)」은 여래(如來)의 가르침이며 「소이제법(所以諸法)·여환여화(如幻如化)」는 보살(菩薩)의 말씀이니라, 적광(寂光)의 도읍(都邑)이 아니고서는 어느 곳이나 모두 고(苦)이니라, 본각(本覺)의 거처(居處)를 떠나서 무슨 일인들 즐거움이 되리요. 원(願)컨대 「현세안온(現世安穩)·후생선처(後生善處)」의 묘법(妙法)을 수지(受持)하는 것만이 오로지 금생(今生)의 명문(名聞)·후세(後世)의 농인(弄引)이 되리라. 모름지기 마음을 하나로 하여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나도 부르고 타인(他人)에게도 권(勸)하는 일만이 금생(今生) 인계(人界)의 추억이 되느니라.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지묘법화문답초(持妙法華問答抄) 가마쿠라에서 42세에 술작 467~8쪽비유(譬喩)컨대 새의 알은 처음엔 물인데 그 물속에서 누가 하는 것도 아닌데, 주둥이나 눈이 생겨나서 허공(虛空)을 날아다니는 것과 같다. 우리들도 무명(無明)의 알이고 천박한 몸이지만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의 창제(唱題)라는 어머니가 품어주어서 삼십이상(三十二相)의 주둥이가 나오고 팔십종호(八十種好)의 개모(鎧毛)가 생겨 갖추어져서 실상진여(實相眞如)의 허공(虛空)을 날게 되느니라. 이로써 경(經)에 가로되 「일체중생(一切衆生)은 무명(無明)의 알속에 있어 지혜(智慧)라는 주둥이가 없다. 불모(佛母)라는 새는 분단동거(分段同居)의 옛집에 돌아와 무명(無明)의 알을 두들겨 부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이란 새를 보금자리를 떠나게 하여 법성진여(法性眞如)의 허공(虛空)을 날게 한다」라고 설(說)했느니라 취의(取意).
유해무신(有解無信)이라 해서 법문(法門)을 알아도 신심(信心)이 없는 자(者)는 결코 성불(成佛)할 수 없으며 유신무해(有信無解)라 해서 해(解)는 없어도 신심(信心)이 있는 자(者)는 성불(成佛)하느니라. 모두 이 경(經)의 의(意)이지 나의 말은 아니로다. 그러므로 이(二)의 권(卷)에는 「신(信)으로써 들어감을 득(得)하였지 자기(自己)의 지분(智分)은 아니다」라고 해서 지혜제일(智慧第一)의 사리불(舍利弗)도 오직 이 경(經)을 수지(受持)하고 신심(信心) 강성(强盛)함으로써 부처가 되었으며 자기(自己)의 지혜(智慧)로써 부처가 되지 않았다고 설(說)하시었다. 사리불(舍利弗)조차도 지혜(智慧)로써는 부처가 되지 못하였으니 하물며 우리들 중생(衆生)이 약간의 법문(法門)을 터득했다 해도 신심(信心)이 없으면 부처가 되기란 의심스럽도다.
니이케어서(新池御書) 미노부에서 59세에 술작 1443쪽‘반드시 밀물 때는 온다.
바로 그날, 나는 바다로 나갈 것이다.
(The high tide will come.
On that day, I will go out to the sea.)’
그림과 글에 압도당한 그는 그 그림으로 인하여
집에 돌아와서도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28세가 되던 어느 날 다시 노인을 찾아가서
세상을 떠나실 때에는 그 그림을 자신에게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의 간곡한 부탁에 노인은 그림을 줬습니다.
그리고 평생 그 그림을 가까이 두고서는
‘반드시 밀물 때는 온다.’라는 글을
자신의 생활신조로 삼았다고 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자가 이기는 자다.’,
‘버티기만 해도 잘하는 것이다.’라고
흔히 말합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시기입니다.
하지만, 썰물이 있으면 반드시 밀물의 때가 옵니다.
내리막길이 있으면 오르막길이 있고,
밤이 있으면 낮이 있는 법입니다.
지금의 나의 상황이 썰물같이 황량하다 해도
낙심하지 말고 밀물 때가 올 것을 기다리면서
노를 젓기 위한 준비를 하는 사람만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러시아의 유명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에게 고통이 없다면 무엇으로 만족을
얻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하나의 고통이 열 가지 감사를 알게하고
하나의 감사가 열가지 고통을 이기게
합니다.
우리들의 삶속에서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고통이 없기를 물론 바랍니다.
그러나 혹시 지금 고통속에 있거나 무슨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불평과 투덜거림
대신에 그것을 통해 얻게 될 새로운 성숙과
감사를 떠올릴수 있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으로 그럴수 있다면 참으로 멋진 삶을
살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의 삶은 아픔이 가져다 주는
고통보다 아름답고 위대합니다.평생 물고기를 잡아온 베테랑 어부가
고기가 잘 안잡히면 바다를 보면서
"바람이 한번 불어야 할텐데" 하고
말합니다.
태풍이 불어와 바닷속까지 뒤집으면
산소가 풍부해지고 먹이가 많아진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은 못해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어쨋든 큰 바람이 불면 고기들은 활동을
많이 하게 되고 어부들은 고기를 많이
잡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도 태풍이 불어 올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는 무섭기도 하고 불안 하기도 하고
아프기도 합니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가면 하늘이 높고
맑듯이 우리의 삶을 온통 흔들리게 하는
큰 바람이 지나가면 우리의 마음도 깊어지고
생각이 맑아져서 한층 성숙해 집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에게 고통이 없다면 무엇으로 만족을
얻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하나의 고통이 열 가지 감사를 알게하고
하나의 감사가 열가지 고통을 이기게
합니다.
우리들의 삶속에서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고통이 없기를 물론 바랍니다.
그러나 혹시 지금 고통속에 있거나 무슨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불평과 투덜거림
대신에 그것을 통해 얻게 될 새로운 성숙과
감사를 떠올릴수 있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으로 그럴수 있다면 참으로 멋진 삶을
살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우리의 삶은 아픔이 가져다 주는
고통보다 아름답고 위대합니다.이 경(經)의 신심(信心)이라 함은 조금도 사견(私見) 없이 경문(經文)과 여(如)히,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법화일부(法華一部)에 배반(背反)하는 일이 없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니라. 부처가 된다고 함은 별(別)다른 일은 아니로다.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타사(他事)없이 불러 나아간다면 천연(天然)히 삼십이상팔십종호(三十二相八十種好)를 갖추게 되느니라. 여아등무이(如我等無異)라 해서 석존(釋尊)과 같은 부처로 손쉽게 되느니라.마지막으로 「여래(如來)의 방(室)」에 대해서는 「자비에 머무르며 넓힌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비란 고(苦)를 뽑아(拔) 락(樂)을 준다(與)는 의미로 온갖 괴로움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서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고 정법의 신앙으로 안락을 주고자 하는 데에 뜻을 둔 커다란 마음을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대신해서라도 자식을 구하려 하는 부모처럼 절복 대상자에게 ‘어떻게 하든 잘못된 길로부터 되돌아오게 하여 괴로움에서 구한다’라고 필사적으로 절복을 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강한 말로 상대에게 법을 설해야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자비를 가지고 하면 반드시 입신(入信)으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