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1일』 대구시민의 날 지정과 관련하여
1981년7월1일 직할시 승격일로 부터 100일째 되는 10월 8일을 대구시민의 날로 운영해왔는데
대구의 역사와 정체성을 상징하는 의미 있는 날로 변경하자는 논의가 지속되어, 전문가와
시민 등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2월 21일을 '대구시민의 날'로 선택하였습니다.
이는 대구를 중심한 ①국채보상운동과 ②2.28학생의거와 관련한 대구의 애국시민정신을 담고 있는 뜻깊은 역사성이 있기에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국채보상운동을 살펴보면
1907년 2월 16일(음.12. 16) 대구에서 광문사의 문회를 대동광문회(大東光文會)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개최하면서 이 자리에서 광문사 부사장인 서상돈(徐相敦)은 일재(日宰)의 국채를 갚아나가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하였다. 그 내용은 국채 1,300만원을 갚지 못하면 장차 나라(토지)를 내어 주어야 할 것인데 지금 2천만 동포가 3개월간 담배를 끊고 그 돈을 매월 1인당 20전(錢)씩 모아 국채를 갚자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부터 이에 앞장서겠다면서 800원(圓)을 내어놓아 이 자리에 참석한 회원모두가 찬성하였다.
이 운동의 발기인으로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대동광문회장 박해령(朴海齡) 등의 공동명의로 〈국채1,300만원 보상취지서〉를 발표함으로써 이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여 그들은 이를 통해 온 국민의 충의(忠義)를 강조하면서
「지금 국채1,300만원은 우리 한제국(韓帝國)의 존립에 직결된 것이다. 이것을 갚으면 나라가 존재하고 이것을 갚지 못하면 나라가 곧 망할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지금 나라의 국고로서는 이것을 해결할 도리가 없는 형편이다. 이것을 나라에서 갚기를 기다린다면 삼천리강토는 장차 우리나라가 우리민족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고 또 이 취지서에는 더 이상 무능한 정부에게 나라의 존망을 맡기지 말고 국민이 분발하여 지켜야겠다고 하였다. 이 운동의 발기인은 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시장 서상돈, 대동광문회 회장 박해령, 회원 장상철외 12명 등으로서 2월 21일 그들은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를 설립하고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500원(圓)이란 큰돈이 성금으로 모아졌다. 이어서 대구민의소는 북후정(北後亭: 현 대구콘서트하우스(옛 시민회관) 부근)에서 국채보상모금을 위한 국민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일본경찰이 연설자를 체포하고 참석자 모두를 해산하였다.
그 후 3월 9일에는 대구 서문밖 수창사(壽昌社)에 국채보상지원금 수합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여기에 영세상인, 짚신장이, 부녀자, 선비 등 각계각층에서 성금을 들고 수전소(收錢所)로 몰려왔다. 이에 남일동 부녀자들이 ‘남일동패물페지부인회’를 결성하여 이 운동에 동참하는 취지서(한글)를 발표하였는데 그 주된 내용은 ‘나라사랑에 어찌 남녀가 다르겠는가.’라고 했다. 이러한 여성참여로 더욱 확산되어 ‘국채보상탈환회(國債報償脫環會)’ ‘남산국체보상부인회’ 등이 이어 조직되자 다른 지역에서도 이를 본받아 많은 여성단체가 결성되었다. 이 운동은 순식간에 전국각지로 파급되어 전개되기에 이르렀고, 당시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하여 황성신문, 만세보, 제국신문 등이 이를 즉각 보도함으로써 국민의 호응을 크게 불러 일으켰다. 고종황제도 금연을 결심했고, 전 참정대신 김성근은 100원을 성금으로 내었고, 아산군에 사는 부인도 제국신문을 통해 20원을 보내오자,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학생, 노동자, 농민, 여성단체 그리고 해외동포와 외국인까지 참여하여 후원하였다. 이와 같이 남자는 단연(斷煙), 절주(節酒)를 통해 모금하고, 여자는 절미(節米), 패물헌납(佩物獻納) 등으로 동참하여 1년 3개월을 경과한 1908년 4월 30일현재 대한매일신보사와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에서 모금된 총액은 14만3천5백42원33전이었으며, 이어서 3개월이 지난 7월27일현재 일본헌병대가 집계한 자료에 의하면 전국 모금총액이 18만7천8백42원78전5리에 달하였다. 일재(日宰)는 금연운동을 가볍게 생각하고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였으나 국권회복을 위한 염원과 단결로 열기가 고조되자 탄압과 저지로 언론인을 구속하고 대한매일신보 사장인 베델(Bethel: 英)을 추방하기에 이르렀고, 양기탁은 신문사에서 모금한 돈을 불리기 위해 수안광산의 주식을 사두었다가 횡령혐의로 구속하였으나 증거가 없자 무혐의로 석방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이 국채보상운동을 통한 애국시민정신을 알아보았고
2. 이어 2.28학생의거를 통한 대구의 나라사랑운동을 살펴보면
제4대 대통령선거(1960. 3.15)를 앞두고 자유당수뇌부는 일당독재체제를 계속유지하기 위해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이 연로하여 후계자로 이기붕(李起鵬)을 당선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때 불행하게도 민주당 대통령후보인 조병옥(趙炳玉)박사가 신병치료차 미국에 갔다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자 여야(與野) 모두 부통령선거에 총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당시 대구는 전통적인 야당도시로서 명성이 자자하였다. 여기에 민주당 대통령후보연설이 대구 신천변에서 1960년 2월28일 일요일에 있게 되자 학생들의 유세장 참관을 막기위해 당국의 등교지시에 학생들이 항거하며 분연히 일어섰다. 여기 경북고등학교 학생 약700여명은 교문(현 대명동소재, 대구고등학교 교정)을 박차고 나와 명덕네거리를 거치면서 대구고등, 대구상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학생이 합세하여 반월당을 거쳐 경상북도청앞(현 경상감영공원)에서 항의시위를 펼쳤으며 중학생까지 가세하였고 또 사대부고는 시가지 진출에 실패하자 본관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2.28 대구학생의거를 시작으로 3월초에는 서울, 부산, 대전, 수원 등지에서도 여러 번 일어났고 선거당일(3.15) 마산에서 시위가 크게 일어났다. 선거결과로는 부정선거로 자유당 대통령후보 이승만 86.0%, 자유당 부통령후보 이기붕 79.2%를 각각득표하였다. 그후 마산앞바다에 참혹하게 살해된 김주열군의 시신이 떠올라 선거에 불만을 가진 국민과 학생들을 흥분시켰고, 이어 서울에 고려대생 시위(4.18)를 시작으로 일어난 4.19 학생의거에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결국 자유당정권이 무너지는 결과(4.26)를 초래하였다. 이날로 과도정부(수반: 許政)가 수립되어 다음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하였으나 오랜 독재정권에 쌓인 불만을 투쟁과 항거로 이어지는 집단적 의사표시가 일반화되어 또다시 혼란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노동자의 복직을 요구하는 시위와 대학, 중고등학교에서는 어용교직자 축출을 외치는 등으로 초,중등학교에서는 「교직원 노동조합」이 결정되었으나 그 후 군사혁명(쿠데타라고도 함)으로 ‘교원노조’관련자가 교직에서 축출당하는 사태는 역사적 상처로 기록된 바 있다.
위와 같이 소개된 내용을 살펴보면 대구란 도시와 시민 모두는 이 나라, 이 민족이 어렵고 힘들 때 마다 남 먼저 일어나 앞장서 나아가는 자랑스러운 시민이요 지역이라고 자부하면서
『2월 21일 대구시민의 날』 지정과 함께 2.21〜2.28을 대구시민주간이라 지정한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라 할 수 있겠다.
첫댓글 하종성 총단장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시민의날~~
잘 읽었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