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사랑하여 이루어 가는 하나님 나라!
요일3:18-20
메르스로 인해 온 나라가 어수선하고 메르스가 예상외로 무섭게 전염되어 전 국민들이 떨고 있다.
잘못하면 지역사회 감염을 통한 메르스 대유행 가능성까지 제기하고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사람 만나는 것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 서로 신뢰하며 질서를 잘 지켜 메르스 대 유행을 막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는 더 풍요로워졌다고 하지만 사람답게 살기에는 갈수록 점점 더 각박해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같이 사회가 어수선하고 어려울수록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많이 다릅니다.
개인주의가 팽배하다보니 이웃에 대한 관심이 점점 사라지고 이웃과 서로 사랑하며 함께하는 것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와서 담배 하나를 달라고 했습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라 없다고 하니까 건방지다며 시비가 붙었습니다.
조금 있자 어디선가 같은 또래의 불량배들 서넛이 몰려와서 그 젊은이를 뭇매질하였습니다.
으슥한 골목도 아니었고 자정 전이라 드문드문 사람들도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먼발치에서 구경만 할 뿐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길바닥에 쓰러진 젊은이는 한참 후에 피가 낭자한 몸으로 가까운 파출소로 달려갔습니다.
경찰은 그를 보고 자기네 관할이 아니니 관할 파출소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가르쳐준 파출소에 갔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경찰서로 가라고 했습니다.
담당 경찰관은 계속 피를 흘리고 있는 그를 의자에 앉힌 채 새벽 4시가 되도록 꾸물거렸습니다.
그는 아침이 되어서야 자기가 잘 아는 병원이 있다고 소개해 주었습니다.
기진맥진한 피해자는 그제야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가자마자 의사는 왜 좀더 빨리 오지 않았느냐고 나무랐습니다.
응급치료를 마치고 X-ray 사진도 찍었습니다. 진료비는 30만원이 넘었습니다.
그런데 의사는 진단서를 써주지 않았습니다. 진단서를 떼려면 따로 15만원을 내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진단서도 못 얻고 병원을 나와야 했습니다.
회사 동료들에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하자 "그런 세상이 어디 있느냐" 한 동료가 흥분했습니다.
그러자 한 동료가 "그보다 더 한 일도 흔한 판에 뭘 그 깐 일에 흥분하느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모든 것은 돈으로 계산하는 부정적인 우리들의 이웃들의 단면들입니다.
학자들은 이웃 간의 무관심을 이야기 할 때 키티 제노비스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미국 뉴욕 퀸즈 어느 아파트 앞에서 16세 소녀 키티 제노비스가 한 괴한에 의하여 30분 동안 도망다니다 칼에 찔려 폭행을 당했습니다.
이 때 38명이 창문을 통해 그 광경을 보았는데 아무도 이를 말리거나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고, 결국 그 소녀는 마침내 죽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경찰 조사에서 이들 모두는 한결같이 다른 사람이 도와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를 4무 병에 걸려 있다고 진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관심, 무반응, 무의식, 무책임"의 병입니다. 서로 관심을 갖는 것이 피곤하다고 생각합니다.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아무리 큰 일이 일어나도 반응이 없습니다.
그저 깊이 생각하는 것이 싫습니다.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따분하고 고리타분합니다.
서로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책임을 지기 싫으니 아이도 낳지 말고 결혼도 하지말고 살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족 간에도 무관심, 무반응, 무의식, 무책임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가리켜 '떼한민국'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조건 떼만 쓰면 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밥그릇만 생각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 정치인들을 보면 평생 원수들같이 보입니다. 사사건건 상대를 헐뜯고 비난합니다.
서로를 죽이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움질들을 합니다.
언론은 보면 매일 탐욕으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들은 이 사회의 부정한 물결에 쓸려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 이웃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빛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함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게 해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데 있어서 유일한 표증은 사랑이다.
사랑만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한다"고 했습니다.
페스탈로치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가까이 오신다."고 말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어디서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은 우리 품안에 깃들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철학자로 라브리 운동을 하신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는 사랑을 가르쳐 그리스도의 '제자의 뱃지'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독일의 시인 괴테가 그의 친구인 슈타인 여사에게 보낸 글에서
우리들은 어디로부터 태어났을까? - 사랑으로부터,
우리들은 어떻게 되어 멸망할까? -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무엇으로 자기를 이길까? - 사랑에 의하여,
우리들도 사랑을 찾아낼 수 있을까? - 사랑에 의하여,
오랫동안 울지 않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 사랑 때문에,
우리들을 항상 연결하는 것은 무엇인가? - 사랑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마를 자신의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는 사랑의 실천자였습니다.
성자 다미엔 신부는 문둥이들과 함께 살기 위해 자신도 문둥이가 됨으로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감리교 최초 선교사인 아펜젤러는 그가 맡은 성경 번역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1902년 6월 11일 목포행 기선에 올랐다.
이날 밤 캄캄한 바다를 항해하던 중 군산 앞바다에서 충돌사고가 났다.
마침 깨어 있던 아펜젤러는 충분히 살 수 있었지만 한 여학생을 먼저 구하고 조수 겸 비서인 조한규가 미처 선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을 알고 그를 구하기 위해 선실로 다시 들어갔다가 22명과 함께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웃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지 경쟁의 대상이나 거래의 대상, 이용의 대상, 무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사회는 지옥과 같습니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랑을 실천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3: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요일3:20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우리가 말씀대로 사랑을 실천 할 때 바로 그 곳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실제 삶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경우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입술의 고백에 그칠 뿐 자기를 드리는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을 실천 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진리의 말씀이 내 삶을 다스리므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행함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나를 희생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이런 때 미국에서 실제 있었던 사랑을 실천하기 좋은 캠페인이 있습니다.
이 캠페인을 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데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으로 생각되어 다시 소개합니다.
이 캠페인은 때로 너의 인생에서 엉뚱한 친절과 정신 나간 선행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미국 전역에 퍼진 일종의 슬로건이다.
사건의 시작은 이러했다. 어느 화창한 겨울날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일이었다.
차 뒤칸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잔뜩 싣고서 빨간 색 혼다를 몰고 가던 한 여성이 베이 브릿지의 통행료 내는 곳에 이르렀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징수원에게 자동 매표기에서 산 일곱 장의 티켓을 내밀었다.
한 장은 내꺼고, 나머지 여섯 장은 내 뒤에 오는 여섯 대의 차를 위해 내가 대신 내주는 거예요.
뒤따르던 여섯 대의 차들이 한 대씩 징수원 앞으로 다가와 통행료를 내밀었다.
징수원은 그들에게 말했다.
"앞에 가는 어떤 여성이 당신들의 요금을 미리 내줬소. 좋은 하루 보내시오."
혼다를 물고 가는 그 여성은 전에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냉장고에 붙어 있는 작은 문장 하나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것은 이런 내용이었다.
(때로 너의 인생에서 엉뚱한 친절과 정신 나간 선행을 실천하라.)
그 문장에는 마음에 와 닿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수첩에 옮겨 적었다.
한편 주디 포먼은 집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도로를 차를 몰고 지나가다가 어느 창고 벽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휘갈겨 적혀 있는 똑같은 문장을 만났다.
여러 날 동안 그 내용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주디는 다시 그 먼 길을 달려가 그 문장을 베껴 왔다. 그녀는 자신이 보내는 모든 편지 말미에 그 말을 적어 넣으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난 이 말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메시지처럼 말야."
그녀의 남편 프랭크도 그 문장을 좋아해서 자신이 가르치는 중학교 교실 벽에 그것을 붙여 놓았다.
그런데 학생들 중 하나가 그 지역 신문의 논설위원의 딸이었다.
논설위원은 딸의 말을 듣고 그 문장을 신문에 실으면서 자신도 그 말을 좋아하긴 하지만 그것이 누가 한말인지, 또는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이틀 뒤 논설위원은 앤 허버트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늘씬한 40대의 금발 여성 앤은 십대 부자 촌에 꼽히는 마린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틈틈이 남의 집을 봐주거나 잡일을 하면서 그럭저럭 생활을 해 나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가 무심코 테이블에 놓여 있는 식탁용 종이 받침대에다 며칠 동안 마음속에 맴도는 그 문장을 썼다.
그러자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가 "그거 정말 멋진 말이군요?" 하면서 자신의 종이 받침대에다 그것을 옮겨 적었다.
앤 허버트는 우리에게 권한다. 이런 방법들을 생각해 볼 수 있죠.
물론 더 많은 것들이 있을 수 있지만 말예요. 한번 시도해 보세요.
앤 허버트가 제안하는 것들은 이런 내용이다.
(1)낡은 학교에 갑자기 찾아가 교실 벽에 새 페인트를 칠해 준다.
(2)도시 빈민가에 따뜻한 음식을 배달해 준다.
(3)자존심 강한 할머니의 지갑에 살짝 돈을 넣어 준다.
앤 허버트는 말한다. "친절은 폭력이 파괴하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세울 수 있어요."
이제 그 문장은 사방으로 전파되고 있다.
자동차 범퍼의 스티커로, 벽에, 그리고 편지 말미와 영업용 카드에도 등장하고 있다.
머지 않아 우리는 이 나라 전역에서 게릴라와 같은 선행이 베풀어지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오레곤 주의 포틀랜드에서는 한 남자가 남의 차가 주차해 있는 장소의 주차 미터기에 때맞춰 동전을 주입한다.
뉴저지의 패터슨에선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양동이와 막대 걸레와 튜울립 뿌리들을 들고 와서 어떤 낡은 집의 안팎을 말끔히 단장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어리둥절한 늙은 주인이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시카고에서는 한 십대 학생이 갑자기 충동에 사로잡혀 차고에서 집앞 도로까지의 차도를 삽으로 정리하고 있다.
무슨 일인지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데 학생은 이웃집의 차도까지 열심히 다듬고 있다.
이것은 매우 긍정적인 무정부 상태이며 무질서이고, 기분 좋은 혼란이다.
보스톤의 한 여성은 은행 직원에게 수표를 내밀면서 수표 뒤에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쓴다.
세인트 루이스의 한 남자는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젊은 여성이 모는 차에 자기 차의 뒷범퍼가 찌그러졌는데도 "아, 걱정하지 말아요 조금 긁혔을 뿐인데, 뭘."하고 말하고는 손을 흔들며 사라진다.
정신 나간 선행은 전염성을 갖고 퍼져 간다. 한 남자가 차도를 따라 나팔 수선화를 심고 있다.
시애틀에서는 한 남자가 공중 위생 자원 봉사단에 가입해 혼자서 콘크리트 숲속을 돌아다니며 슈퍼마켓에서 쓰는 수레에 쓰레기들을 주워 모으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애틀랜타에선 한 남자가 초록색 공원 벤치의 낙서들을 지우고 있다.
이런 말이 있다. 미소를 지으면 기운이 난다고. 마찬가지로 때로 무차별적인 친절을 베풀면
당신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한결 가벼워진다.
세상이 그만큼 약간이라도 살기 좋은 곳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신이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당신은 하나의 기분 좋은 충격에 사로잡힐 것이다.
당신이 러시아워 시간에 차를 몰고 가는데 누군가 앞에서 당신의 도로 통행료를 대신 내 줬다면 당신 역시 언젠가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그런 일을 하게 되지 않을까?
예를 들어 교차로에서 상대방 운전자에게 손을 흔들고, 지친 공무원에게 미소를 짓지 않을까?
모든 위대한 혁명처럼 이 남모르는 선행 역시 하나의 작은 행동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도 교회에서 목장에서, 직장이나 APT에서 엉뚱한 친절과 정신나간 사랑을 한번 시도해 보자.
그것이 말씀을 이루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작은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런 작은 파도가 모여 큰 파도를 이루게 될 때 이 세상은 아름다운 천국으로 변화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