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랄수 없는중에 바라는 믿음
(롬4:17-22)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세상사람들에게 건강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도해도 지나치지 않듯이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삶을 가리켜서 신앙생활이라,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안에서 이 세상을 내다보고 하나님 안에서 내 인생도 바라보면서 내 미래도 바라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좋은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좋은 믿음 하면 아마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먼저 떠오르는 인물 한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지요. 말씀 한마디에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다 떨쳐버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곳을 향하여 떠나갈 수 있었던 믿음, 또 나이 백세나 되어서 "네 자손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될 것이다" 할 때에 그대로 믿었던 그 아브라함의 믿음, 겨우 얻은 이 이삭을 하나님이 제물로 바치라고 할 때에 아낌없이 바칠 수 있었던 그 믿음. 우리가 아브라함의 생애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의 믿음을 흠모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참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것을 가리켜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던 믿음이라" 그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 그렇게 정했습니다. 오늘 이 예배를 마치고 여러분 집으로 돌아가시면서 바로 이 한마디를 가슴에 꼭 담고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내가 그 믿음을 소유해야 되겠다. 이 한마디를 여러분 가슴에 담고 돌아가시면 여러분 오늘 저녁이 결코 헛되지 않을 줄 압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런 특성이 있습니다. 도무지 바랄 수 없는 환경이지만, 바랄 수 없는 조건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고 바라보면서 또 믿으면서 확신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결코 있음직한 일만을 기대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그저 좋은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하는 막연한 기대가 믿음이 아니고 바랄 수 없는 환경이지만 바라고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 성경에 나타나는 여러 믿음의 선진들이 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것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아브라함은 어떤 바랄 수 없는 환경 중에 있었느냐? 여러분 잘 아시지요. 그는 아내와 결혼을 했지만 수 십 년이 지나도록 자식을 얻지 못했습니다. 어느덧 아브라함이 나이 100살이 되고 아내는 90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한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내년 이맘 때에 너에게 자식이 있을 것이고 또 너의 후손은 바다의 모래와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될 것이다". 도무지 그대로 믿을 수 없는 약속이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었다- 그것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다는 말입니다.
제가 교회를 섬길 때 어느 한 가정을 심방을 갔습니다. 젊은 부부가 결혼한지 7년이 지났는데도 자식이 없는 그런 가정이었습니다. 예배를 다 드리고 나서 같이 심방을 갔던 조금 연세가 높은 여집사님들이 그 안주인에게 묻습니다. 그래 며칠 전에 다시 진찰을 받았다고 하던데 의사가 뭐라고 합디까? 그 집주인이 대답합니다. 예, 나팔관이 한쪽밖에 없어서 임신이 어렵다고 합디다. 그랬더니 심방을 갔던 다른 집사님이 내가 참 그런 경우를 알고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임신이 어렵기는 어렵지만 그러나 어쩌다가 임신이 되는 수가 있습니다. 집사님, 그러니까 낙심하지 말고 우리 끝까지 기도해봅시다. 저는 그때 결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지 잘 몰랐습니다. 거기에 왜 나팔이 있는지, 그게 뭐 하는 건지 어쨌든 뭐 위로를 하는구나 생각을 했지요? 참 임신이 어렵지만 그래도 어쩌다가 되는 수가 있으니까 낙심하지 말자.
아브라함의 경우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나이가 백살이고 아내의 나이가 90살인데, 육체의 상태가 어떠한지가 뻔한데 어쩌다가가 무엇입니까? 전혀 불가능한 일이고 다 끝난 이야기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떨어졌을 때에 아브라함은 그것을 붙들고 믿었다. 그것이 바랄 수 없는 중에 있었지만 바랐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 사실을 여러분 마음속에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중에 혹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찌해볼 수 없는 절대 불가능한 이런 상황에 직면했음으로 절망이 되고 낙심이 되고 하는 그런 분이 있습니까? 그저 눈앞이 캄캄하고 나는 이제 망했다 하는 그런 절망에 사로잡히신 분이 혹 있으시면 여러분 누구를 기억해야 합니까? 아브라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나보다도 훨씬 더 불가능한 상황가운데 있었지 않느냐? 나보다도 훨씬 더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었지 않느냐? 그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어코 위대한 기적을 체험했지 않느냐? 여러분 마음에 절망이 찾아들려고 하면 이 아브라함을 생각하면서 아니야, 아니야…. 그것이 병일 수도 있습니다. 사업의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도무지 남에게 얘기하지 못하는 가정의 어떤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문제이든지 간에 아무리 힘들고 앞이 캄캄한 일이라 할지라도 아브라함을 생각하면서, 그래, 그래도 나는 아브라함보다는 낫지 않느냐? 그런데 내가 하나님 붙들지 못하고 이렇게 절망해서 되겠는가? 여러분 먼저 그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 특징을 같이 한 번 살펴보십시다. 19절 말씀을 보니까,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여기 다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여기 알고도라는 말은 그 문제와 대면하고도, 그 문제와 맞서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라는 것은 현실적인 어려운 문제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 문제들을 똑바로 직면하는 것입니다. 똑바로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직면해 있는 이 어려운 현실들을 대면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기가 처해 있는 현실을 똑바로 쳐다보면 너무나도 절망적이니까 그것을 바라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리고, 그리고는 한 쪽 입으로 주여 믿습니다. 어떻게 해주시겠지요. 그러고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자기가 처해 있는 엄연한 사실들을 직면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 나이를 숙고했습니다. 자기 아내 사라의 나이도 깊이 생각했습니다. 여자의 나이가 90살이 되면 육체의 상태가 어떠하다는 것도 그는 깊이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고, 솔직히 인정하고 자기가 처해있는 문제들을 숨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 쳐다볼 것 쳐다본 후에, 그러고도 그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먼저 우리가 이 자세를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의사들이 그저 왔다갔다 하고 1차 검진, 2차 검진. 사진 필름을 가지고 심각한 얼굴로 수군대고 하는데 아, 내 병이 이것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그 환자는 의사가 자기에게 그 정확한 병명을 말해주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질지 모르니까. 만약에 한 마디 하는데 만약에 그것이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심각한 병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병명을 말해주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 아버지 나를 붙들어 주시겠지요. 고쳐 주시겠지요. 믿습니다…. 그 사람은 현실을 직면하지 않고 있습니다. 도피적인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암이면 암이라는 사실을 듣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은 의학적으로는 3개월밖에는 살지 못한다는 사형선고도 사실 그대로를 알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상태가 절망적이면 절망적인 그대로 내 상태가 참으로 불가능하면 불가능한 그대로 두 눈을 부릅뜨고 똑바로 그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나님을 우러러보면서 하나님 아버지 내 형편이 이렇습니다. 내 병이 이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의 기적으로 고쳐주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두 손들고 서야지요.
키이츠라는 사람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밤에 무릎을 굻고 기도하는 것만은 아니다. 믿음은 단순히 어두움을 뚫고 빛으로 나아가는 것만은 아니다. 믿음은 단순히 있을 수 있는 영광을 기다리는 것만은 아니다. 믿음은 단순히 죄가 가득한 쾌락을 피하여 가는 것만은 아니다. 믿음은 과감한 노력이요, 장렬한 모험이다. "믿음은 과감한 노력이요 장렬한 모험이다", 그렇습니다. 내 앞에 집채같은 파도가 밀려 올 때에 그것을 이렇게 눈으로 가려버리고 한쪽 입으로 '주여 믿습니다'가 아니라 집채같은 파도가 밀려 올 때에 두 눈으로 똑바로 뜨고 그것을 바로 바라보면서 비록 저 파도와 풍랑이 무섭지만 그러나 내 주님은 그 파도를 딛고 서서 그 위에서 걸어오시는 분이신 것을 믿고, 주님이 손을 내밀어 나를 붙들어 주실 것을 믿고, 그 집채같은 파도를 향하여 내 몸을 과감히 던져 맡길 수 있는 장렬한 모험, 그것이 믿음의 세계이지요. 눈을 가리고 주여 믿습니다. 백 날 해보십시오. 제법 잘 믿는 것 같지만 진실이 알려질 때에 이 날까지 믿노라고 고백했던 수많은 고백들은 마치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이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자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은 먼저 있는 현실을 그대로 직면하고 그것 붙들고 이제 씨름하는 그것부터 첫걸음으로 시작한다. 이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두 번째로 그 믿음의 특징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확신하는 것입니다.
여기 20절에 보니까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또 21절에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될 것이다. 너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열방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는 그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은 붙든 것입니다. 자기 느낌도 아니였고, 자기 생각도 아니였고, 주위 사람들이 그래 그래 가능하겠다 하는 주위 사람들의 말도 아니였고 오직 위로부터 떨어진 하나님의 약속, 아브라함은 그것을 붙들었습니다.
흔히 확율을 믿음인지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는 옛날에 학창시절에 이런 설교를 종종 들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말씀하시면서 자 성도여러분, 좋은 믿음이라는 것은 몇몇 성자들만이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이미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갈 때에 이 기차가 잘못되지나 아니할까 혹은 서울 해놓고는 다른 데로 빠지지는 아니할까 의심이 나서 타지 못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기관사 얼굴도 못보았지만 서울까지 틀림없이 간다 믿으니까 탁 올라타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이미 좋은 믿음을 가졌다는 증거예요. 맞습니까? 그분은 또 한가지 더 예를 듭니다. 우리 남자성도들 이발소에 가서 면도를 하는데 목을 쳐 내 밀고는 그 면도하는 사람에게 완전히 맡깁니다. 그런데 그 이발사가 정신질환을 앓은 일이 없는지 있는지 그것도 모르면서 그 칼을 든 사람 앞에 목을 척 내밀고는 겁이 나서 면도 못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어떤 사람은 너무 마음이 편안해서 잠까지 잡니다. 그것은 어러분들이 이미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맞습니까?
그분은 은연중에 확율의 법칙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차를 덜렁 올라타는 것은 기차가 그래도 대중교통 수단 중에 제일 안전해, 간혹 사고가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99.9%는 안전해, 은연중에 그 생각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하면서 올라타는 것입니다. 은연 중에 우리 속에 확율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또 면도를 할 때도 내 아무리 신문을 보아도 면도하다가 이발사가 살짝이 웃으면서 "헤헤헤 한번 그어줄까?" 그래서 목이 달아났다, 그런 기사는 읽어 본 일이 없어. 정신 질환을 혹 앓은 사람이 이발사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런 일은 없어. 안전해. 은연중에 확율이 우리 속에 들어와 있고 우리는 우리 목을 내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그것하고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확율적으로 좀 안전하고 확실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확율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에 따라가는 믿음을 성경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니, 40주야 비가 내려서 이 지구가 물로 뒤덮혀서 멸망할 것이다 할 때 그 말이 그대로 성취될 확율이 몇 %나 되겠습니까?. 0%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질 때는 그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확율 100%였습니다. 그래서 노아는 주위에서 다 미쳤다고 해도 나에게는 확율 100%다. 초자연적으로 떨어지는 그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노아는 방주를 지은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죽은지 나흘이나 된 시체를 향해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대로 이루어질 확율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말씀이 말씀하실 때에 그것은 확율 100%인 것이였지요. 그래서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이상하게 기차를 타는 사람마다 99.9%가 전부 사고가 나고 안전할 확율은 0.1%밖에 안되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기차를 타라 하면 덜렁 올라타는 그런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믿음은 이상하게 면도만 하면 99.9%가 목이 다 달아나버리고 안전한 사람은 0.1%밖에 안되어도 면도를 해라 하면 목을 척 내 맡길 수 있는 믿음을 성경은 참된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아도 그랬고 우리 앞서가 선진들이 가졌던 믿음의 내용들이 다 그런 것이었습니다. 확율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이다.
또 자기 신념을 의지하는 것을 두고 믿음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는 대학시절에 열심히 쫓아다녔던 목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때는 개척교회를 시작하셔서 얼마 안되었는데 한 300여명 모였지만 지금은 한 수만 명 모이는 교회의 목사님이 되어 있습니다. 그 분이 이런 간증을 하는 것을 지금까지 기억을 합니다. 충청도 시골에서 자란 분인데 이상하게 그 젊은시절 실패를 거듭했답니다. 무슨 비닐하우스가 좀 잘된다 해서 비닐하우스를 하면 또 이상하게 잘되어서 했는데 실패가 되고 또 양계가 뭐 좀 낳다해서 또 양계를 하면 병이 돌아서 닭이 갑자기 폐사를 해버리고 하는 일마다 실패를 계속했습니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마다 그분이 기도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자기 딴에는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번에는 비닐하우스입니다.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확신이 오는 것 같아서 했는데 실패하고. 하나님 아버지 이번에는 양계입니다. 꼭 될 줄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런데 또 실패해버리고.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운지요. 하도하도 안되니까 그러면 남자들은 무엇을 생각합니까? 하도하도 일이 해도해도 안되면 무엇을 생각합니까? 군에나 갔다와야 되겠다. 그런데 그 분 말씀이 그 때 논산 훈련소에 지원병을 1000명을 뽑는데 알아보니까 1003명이 지원을 했더랍니다. 그러면 되야 안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3명 안에 들어서 또 똑 떨어졌습니다. 발이 뭐 평발형이다. 이래가지고 떨어져버렸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올데 갈데가 없는 그런 신세가 되어서 그냥 어깨를 죽 내려뜨리고 맥이 빠질대로 바져서 터벅터벅 고향마을을 향해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언덕을 탁 올라섰는데 저 밑에 이제 고향 집이 보이는데 해가 뉘엇뉘엇 지금 서산에 걸려서 떨어지면서 그 햇살이 그 언덕위에선 자기를 향해서 확 비치는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이 전광석화와같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요한복음 15:7 말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 분이 망치로 탁 얻어맞은 듯이 깨달았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그러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내가 주님 안에 살고 주님 말씀이 내 속에 풍성히 거할 때 그 말씀으로 기도하고 말씀의 인도함을 따라서 그렇게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했지 자기가 이때까지 기도생활 주욱 한 것이 자기 생각이 더 앞서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번에는 양계입니다. 믿습니다. 되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이번에는 비닐하우스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믿습니다. 자기 생각이 더 앞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 잘 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그 때부터는 사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읽었는지요? 신학교 가기 전까지 신구약 성경을 103번을 읽었는데 그리고 또 신학교 가서는 아마 말씀을 더 많이 보셨겠지요? 집회를 인도하는데 뭐 어디 몇 장 몇 절 막 폭포수같이 쏟아져 나오는데 저는 그 때 대학생 때라 의심이 좀 많았습니다. 저분이 야 그렇게 빨리 하면 우리가 모를 둘 알고, 아마 엉터리로 저럴거다. 그래서 몇 장 몇 절 하면 막 찾아보았습니다. 다 있습디다.
자, 이렇게 자기 생각을 따라서 그 생각을 확신하고 붙들고 나아가는 것을 우리는 신념을 가졌다 그렇게 말합니다. 신념이라는 것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습니다. 사람이 신념도 없이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사는 것보다는 무엇인가 신념을 가지고 사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신념은 그대로 하면 성공할 때도 종종 있지만 실패할 때도 많습니다. 자기 생각이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아니고 자기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는 것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 신앙에는 실패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속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은 부도수표 내지 않기 때문에 신실하시고 일향 미쁘신 하나님께서는 거짓을 말하실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 말씀의 약속 붙들고 나아가면 언제나 성공이요,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이지요.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저는 대학 4년 동안을 한 친구와 거의 붙어 살다시피 보냈습니다. 하숙도 같이 하고 남의 집에 아르바이트 입주 들어가는 기간을 빼고는 늘 같이 지내고 자취도 같이 했습니다. 곁에서 보면서 신앙적인 도전을 참 많이 받고 유익을 참 많이 얻었습니다. 정말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라 그러더니 그 친구가 꼭 그랬어요. 참 순수하게 아들이 부모를 바라보듯이 꼭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또 말씀을 받아들이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하루는 저녁에 집회에 갔다오더니 저에게 말합니다. 어이 진환아, 나 위장병 다 나았다. 위장병이 있었습니다. 아주 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꺼억꺼억 하고 괴로워하고 그러는 친구였는데 다 나았다는 것입니다. 밤 10시가 그 하숙집 아줌마가 밀어넣어 주는 그 저녁상을 받아들고는 그냥 막 퍼먹기를 시작하고 반찬도 싹싹 긁어서 먹는데 곁에서 보는 제가 겁이 덜컥 났습니다. 분명히 아침에도 꺼억꺼억하고 그랬는데 아무리 나아도 갑자기 그렇게 나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친구는 집회에서 말씀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서에 있는 말씀 너희 몸은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바로 자기 자신에게 말씀에 주시는 그런 음성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지금 이 위장병으로 괴로워하고 고통을 당하고 이게 하나님 뜻이 아니다 뭐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여튼 무슨 자기 내적으로 받은 말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딱 확신을 가지고는 다 나았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막 먹으면서 제가 걱정스레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이거 먹어가지고 안내려 가면 더 먹어서 밀어서 내려버리면 된다. 하도 갑자기 자신 있게 그렇게 얘기하니까 저도 깜빡 속았습니다. 정말로 마지막 최후의 상황에서는 더 먹어서 밀어서 내려버리면 되겠다.
그런데 나았습니다. 여러분. 할렐루야 안합니까? 나았습니다. 어디 뭐 내시경 꼭 찍어보고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탈이 없으면 나은 것이지. 그렇게 먹고도 탈이 없으면 나은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목회를 잘 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도 위장병 가지고 계신 분 있으시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소화가 안되고 안 내려가거든 더 잡수십시오. 그래서 밀어서 내려버리십시오. 우리가 다 잘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에 감동하심으로 우리 마음에 주신 그 약속의 말씀이 있다면 그 말씀 붙들고 확신하고 나아가면 지금도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희한한 일들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당연하지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아버지이신데 당연하지요.
제가 참으로 존경했던 목사님, 지금은 하늘나라 계시지만 그 교회 부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합디다. 어떤 사람이 초신자가 교회 등록만 해놓고는 그 다음에 나오지를 못하는데 병원에서는 당신 안되니까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시오 돌려보냈답니다. 이 사람이 자기 집에 들어누워서는 아이고 나 이제 죽는다, 죽는다.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이 담임 목사님 귀에 들렸습니다. 아무개 초신자가 집에서 나는 죽는다 하고 있답니다. 목사님이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아주 정색을 하시면서 발끈 했습니다. "뭐 나는 죽는다, 어디 그따위 건방진 소리가 있어, 지가 뭔데, 지가 뭔데 지 마음대로 죽고 살고, 하나님이 살려주시면 사는 거지. 기도하러 가자". 부교역자들 전부 데리고 환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머리맡에 뺑 둘러앉아서는 기도를 시작했는데 8시간을 꼼짝을 않고 기도를 하셨답니다. 우리 담임목사님은 소변도 안마려운 모양이더라. 자기는 3-4번 들락날락 하는데도 목사님은 꼼짝도 않고 기도하셨답니다. 그 사람이 일어났지 않습니까? 한 두 주일 후에 벌벌벌벌 기어 나와서 교회 마이크를 들고 여러분 제가 살았습니다. 간증했지 않습니까?
저는 학생시절에 여의도의 순복음교회에 한번 구경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는 어떻게 하는지 한번 구경 가 보았습니다. 문을 착 열고 보니까 진짜 강단이 가물가물하게 멀리 보이는데 벽면 한 쪽으로 대문짝 같이 써 놓은 한 구절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야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는 일이 없느니라" 그 큰 예배당에 워낙 대문짝 같이 써 놓았으니까 저 앞에 붙여놓은 말씀이 그냥 눈에 확 들어오는데 아, 누구든지 와서 보면 이 교회의 믿음, 우리의 신앙은 이런 것이다 하고 확 들어내듯이 그런 식으로 대문짝같이 써놓았는데 마음 한구석에 너무나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왜 저 말씀이 저런 교회의 전매특허된 말씀같이 되야 되는가? 바로 우리들을 향하여 주신 말씀이고 나에게 주신 말씀이고 그런데 왜 꼭 저 교회만 저렇게 하고 우리는 저 말씀하고 상관이 없는 듯이- 그래서 굉장히 도전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지 않습니까? 말씀은 일점 일획도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말씀 붙들고 나아가면 거기에 기적의 역사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것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까지는 다 알지, 문제는 말씀을 아무리 듣고 그것을 탁 붙들려고 해도 자꾸 의심이 생기고 또 무슨 인간적인 생각이 나고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까? 예 그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여집사님이 성경을 읽다가 한 구절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만일 너에게 겨자씨 할 알 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니라" 이 집사님이 무릎을 탁 쳤습니다. 옳지, 우리 집 앞에 있는 저 산을 옮겨버리자. 자기 집 앞에 조그마한 동산이 있는데 저것 때문에 새벽기도 갈 때도 힘들고 전망도 가리고 집값도 안나가고, 저 동산을 옮겨버리자. 그래서 작정을 하고 그날 밤 철야기도를 혼자서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습니다. 믿습니다. 우리 집 앞에 있는 산을 옮겨 주시옵소서. 이건 내 생각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분명히 약속했지 않습니까? 겨자씨 할 알 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래 내가 믿습니다. 하나님 산을 옮겨주십시오. 내일 아침까지입니다. 열심히 의심없이 믿고 기도했습니다. 새벽이 되어서 달려가서 커튼을 확 열어제쳐보았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대로 있었습니다.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이 분이 하는 말이, 에이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렇습니다. 입술로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나님 말씀하셨으니까 그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수없이 그래놓고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것을 보는 순간에 "에이 내 그럴 줄 알았지". 마음으로는 그럴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될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마음의 믿음대로 되게 했습니다. 그게 참 문제입니다. 우리도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지마는 마음 깊은 중심에는 안될 줄 알고 있는 것, 그럴 줄 알고 있는 것, 그것을 그냥 확 뽑아버려야 되는데 그것이 참 문제입니다.
저도 한 번 경험을 했습니다. 목회 할 때 역시, 완전히 뭐 초신자, 교회 거의 나오지 못한 초신자인데 다 죽어간다 하는 얘기를 듣고 장로님과 다른 분과 함께 심방을 갔습니다. 그냥 눈을 감으면 완전히 시체 같습니다. 피골이 상접하고, 가래가 그렁그렁 끓고, 그분도 무슨 암이였습니다. 고통스러워하고 하는데 예배를 드려야 되는데 저분이 말씀을 해야 알아듣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말씀을 전하고 장로님 또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이신데 지금 이 성도가 이렇게 어려운 중에 있지만 하나님은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회복시켜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역사해 주시옵소서. 정말로 눈물이 나도록 장로님 간절히 기도하시고 저도 힘을 얻어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장로님이 저의 귀에 대고 목사님 아무래도 안되겠지요? 저 분은 지금 초신자라서 아무 것도 모르는데 기독교 장의사에 미리 연락을 해 놓아야 안되겠습니까? 제 아버지 같으신 장로님이셨지만 제가 고개를 들어서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이신데 하고 기도하고 나서 지금 10분도 채 지날동 말동 한데, 지금 문지방도 제대로 넘어오지도 않았는데 "아무래도 안되겠지요?" 좀 사람이 일관성이 있으셔야지. 마음속에 아무래도 안될 것 같은 마음이 들면 하나님 아버지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뭐 그래 하시든지 기도 할 때는 그래하셔 놓고 눈 뜨고 나면 아무래도 안되겠다. 그런데 그 장로님만 그러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저 자신도 그렇고 우리들도 비슷합니다. 그게 참 문제입니다.
절망 중에도 바라고 나가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느냐? 그런 믿음을 어떻게 하면 소유할 수 있겠느냐? 참 이것이 중요하지요? 역시 잘못된 것부터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큰 믿음을 가질 수 있느냐? 먼저 자기 의심을 짓누르려고 하지 마십시오. 의심을 짓누른다고 해서 믿음이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합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서. 아 이거 의심하면 안돼, 이거 의심하면 안돼. 어, 의심이 싹 일어나네. 이거 사탄이 역사한다. 의심하면 안되는데. 자꾸 의심을 다지고 짓누르려고 합니다. 그런 노력도 없이 태평치고 있는 사람보다야 훨신 낫지요. 그러나 그런 의심을 짓누른다고 해서 상대적으로 믿음이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의심은 꼭 고무풍선과 같습니다. 여기를 콕 누르면 저기가 불쑥 삐져저 나옵니다. 깜짝 놀래서 거기를 콱 누르면 생각도 않은 다른 데서 또 하지만은 하면서 또 삐져저 나옵니다. 그것 쫓아다니면서 아무리 의심을 꾹꾹 눌러보아야 안하는 것보다야 낫지만 그러나 그런다고 믿음이 커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를 자꾸 설득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 너 이거 믿어라, 믿어야 돼, 믿어라. 목사님 설교말씀 들어보니까 그럴 듯하지 않더냐? 믿어라. 집사님 간증하는 것 들어보니까 정말 그렇겠더라. 믿자. 믿어라. 자기를 그런식으로 설득하고 재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안하는 것보다야 낫지요. 그러나 그런식으로 자기를 설득하고 자기를 재촉한다고 해서 믿음이 커지느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자기를 자꾸, 너 이거 믿어. 믿어야 돼. 제발 좀 믿자. 이렇게 자기를 자꾸 설득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믿습니다라는 말을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러다가 속이 시원 안하니까 밋-십니다하고 발음을 이상하게도 해보고. 어떤 사람은 믿습니다믿습니다믿습니다….
심하게 말하면 의심이 나니까 발악을 하는 거지요.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믿습니다라는 말이 나쁘다 그 말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저도 믿습니다. 자주 합니다. 기도할 때도 하고 혹은 말할 때도 하고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요지는 잘 안믿어지기 때문에 자기를 설득하고 재촉하고 압박하는 수단으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해 보아야 믿음을 크게 하는데 별 효과는 없다 그런 뜻입니다. 아니 남편이 피곤하게 직장생활 마치고 이제 집에 들어와서 저녁먹고 자리에 겨우 누웠는데 아내가 새초롬하게 다가와서 여보 당신은 늘 밖에 돌아다니면서도 절대로 딴 생각 안하는 것 내가 믿습니다. 절대로 다른 여자 곁눈질 하지 않고 나만을 사랑하는 줄 내가 믿습니다. 돌들이 소리 지릅니까? 그 부인은 의심이 나서 발광을 하는 거지요? 정말로 믿는다면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악을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영광과 감사를 올리지 믿습니다하고 악을 쓰지 않습니다. 그것은 잘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설득하고 재촉하고 압박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자기를 그런식으로 재촉하고 너 이거 믿어라 믿자 이런식으로 하게 되면 믿는 것이 굉장히 힘이 듭니다. 신앙생활이 굉장히 힘이듭니다. 늘 쫓기는 감이 있습니다. 늘 초조함이 있습니다. 늘 압박감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믿음의 선진들이 누가 그런식으로 신앙생활을 한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언제나 자유함과 해방감이 있습니다. 믿는 것이 참 쉽습니다. 참된 믿음은 어떤 의미에서는 저절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자기를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서 저절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이 신앙의 선진들의 믿음이 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느냐? 자, 이제 오늘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왔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하여 그 분을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하여 그 분을 알아 가셔야 합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저에게 40년을 사귄 친구가 있다고 합시다. 너무너무 잘 압니다. 뭐 형제간보다도 더 가까운 친구입니다. 그래서 그 친구 눈짓만 보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 표정만 보아도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 다 압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사업의 어려움을 당해서 돈을 조금 빌리기 위해서 조금 이상한 약속도 아닌 것이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주위사람들이 전부 수군대면서 그 친구를 향하여 손가락질 합니다. 저 사람 저거 순 사기꾼 아니야, 자기가 그렇게 해서 그런 돈을 어떻게 갚을 수 있다고 그런 말을 해, 속이 뻔이 들여다보이는 그런 말을 하고, 순 사기꾼 아니야, 사람 그렇게 안 보았는데, 나쁜 사람이다. 주위에서 전부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친구가 의심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앞 뒤 딱 가려놓고 그 말만 딱 따서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입니다. 도무지 약속을 그대로 지킬 수 없는 것 같은 말입니다. 그래도 저는 그 친구가 의심이 되지 않습니다. 그 친구를 내가 40년 이상을 알고 있는데 그 친구를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아, 그 친구가 그런 말을 했어. 아 그러면 그 사람은 약속 지킨다. 물론 그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그 뭔가 말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럴 거야. 하여튼 그 사람이 말했다면 그 사람은 지킨다 약속. 나에게는 조금도 의심이 되지 않습니다. 제가 그 친구를 그렇게 믿기 위해서 악을 썼습니까? 아무 노력도 안했는데 저절로 믿어집니다. 그 친구를 수 십 년을 사귀었기 때문에.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깊이 사귀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하나님을 자꾸 알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갈대야 우르를 떠나라 하실 때에 어디로 갈른지는 정확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순간순간 하나님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동서남북이 다 광활한 사막인데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어디로 출발할까요?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또 광야길을 터벅터벅 가다가 하나님 아버지시여 어디에서 우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어디에서 이 외적을 피할 수 있습니까? 해가 뉘엇뉘엇 떨어지면 오늘은 우리 식구들 어디에서 텐트를 치고 유숙해야 합니까? 뭐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늘 그는 하나님께 인도하심을 묻고 하나님과 속삭이면서 살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친구보다도 더 가깝게 하나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신 바입니다. 이사야 41:8에 보니까 "나의 벗 아브라함이라" 하나님께서도 야 저 아브라함은 나의 벗이다, 나의 친구다. 인정하실 정도로 하나님을 친구같이 가까이 모시고 묻고 답하고 인도함을 받고 손을 잡고 동행하면서 그는 광야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자꾸자꾸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구나 이렇게 세밀하신 분이시구나, 이렇게 자상하신 분이시구나, 이렇게 빈틈없이 여호와 이레로 정말로 준비해 놓으신 분이시구나. 내가 정말 염려할 것이 없겠다. 그는 계속해서 신지식을 쌓아갔습니다.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 계속계속 그의 눈이 열려져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오늘 내 말을 잘 들어라. 내년 이맘 때에 너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에 아브라함은 눈은 잠깐 동그랗게 떴겠지요. 하나님 그렇습니까?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그는 악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믿자고 발광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가 바라보고 자기가 손붙들고 살아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자꾸자꾸 알아왔기 때문에 어느날 하나님이 갑자기 그 말씀을 하시는데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거려졌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렇게 되겠지요 뭐. 고맙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절로 믿어졌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쥐어 짜내는 것이 아니고, 믿음은 하나님이 안주시려고 하는 것을 억지로 쟁취해 내야 되는 그런 것이 아니고 그저 고개를 들어 하나님만 바라보고 내 눈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그분을 친구로 모시고, 조용히 이렇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왔더니 어느날 하나님께서 선물로 내 가슴속에 심어주신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말씀을 요약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큰 믿음을 원합니다. 위대한 믿음을 원합니다. 그것은 내 의심을 꾹꾹 눌러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자신을 제발 좀 믿으라고 설득하고 재촉하고 압박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가 내 자신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내 의심이든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든 나 자신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고개를 들어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 분을 친구 삼아 살아왔더니 나도 모르는 가운데 세월이 지난 후에 문득 내 자신을 들여다보니 내 자신도 깜짝 놀랄 큰 믿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쳐주는 패턴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해야될 것은 아무리 피곤하셔도 새벽마다 30분 조금 빨리 일어나셔서 먼저 말씀을 펴십시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가르쳐주는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속 알아가십시오. 야,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면 자기 백성을 400년 지나도 이렇게 구출해 내시는 분이시구나. 하나님은 야, 이거 광야에서도 만나와 메추라기, 4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채워주시는 그런 분이 하나님이시구나. 이 성경을 통해 계속해서 여러분 배워가십시오. 그리고 생활 중에서도 늘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우리가 그렇게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하지, 여러분 정말로 하나님께 묻고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고 해보십시오. 하루에도 하나님의 손길을 아마 수십 번은 체험할 그런 영광스러운 날들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렇게 친구 삼아서 계속 하나님을 알아가시면 어느날 내 자신을 돌아볼 때에 내 속에 큰 믿음이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다 이런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랄 수 있는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들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