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장지(死期將至)
신천 함석헌
씨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나는 요새 심경을 말한다면 열자(列子)에 나오는 임류의 그것 같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공자가, 위나라로 가는 길에 들에서 임류를 보았습니다. 나이 백이 다 되어 오는데, 봄인데도 낡은 가죽옷을 입고, 묵은 밭고랑에서 이삭을 주으면서, 흥흥 노래를 부르면서 걸어나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공자는 제자들을 돌아보면서 “저 늙은이가 서로 말해 볼만한 사람이다. 가서 물어 보아라”했습니다. 그래 자공이 제가 한번 가보겠다고 하면서 가서 밭두렁으로 가서 그 얼굴을 바라보고는 놀라면서 이랬습니다.
“아, 선생님 후회스럽지도 않아서 그래 노래를 부르시면서 이삭을 줍고 계십니까?”
임류는 “행불류 가불경(行不留 歌不輕)”이라, 묻는 말은 들은 체도 않고, 걸음도 아니 멈추고 노래도 아니 멈추고, 그대로 흥흥 노래를 부르며 이삭을 줍고 있었습니다. 자공은 계속 물었습니다. 후회스럽지도 않아서 그래 노래를 부르느냐고 자꾸 추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임류가 대답을 했습니다.
“무엇을 내가 후회한단 말이냐?”
자공은 말하기를
“선생님, 젊어서 부지런히 일하시지 않으셨지요. 장년 돼서 때를 아껴 사업하신 것 없지요. 그래서 가난하기 때문에 이렇게 나이 많으신데 돌봐주는 처자들도 없이 돌아가시게 됐는데(死期將至) 무엇이 즐거워서 그래 이삭을 주으면서 노래를 부르시란 말씀이요?”
그러니까 임류가 허허 웃고 하는 말이
“내가 즐거움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들은 모르고 도리어 그것을 근심거리로 알아서 그러지,
소불근행 장불경시, 고능수약차(小不勤行 長不競時, 故能壽若此)-젊어서 아글타글 하지 않았고 자라서 눈이 벍애 돌아가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오래 살 수 있는 것 아니냐? 노무처자 사기장지고락약차(老無妻子 死期將至故樂若此)-늙어서 처자 하나 없는데, 그런데 이제 죽게 됐으니, 그러니 이게 즐겁지 않으냐?”
했다. 자공이 다시 묻기를
“오래 사는 것은 사람이 누구나 원하는 것이요, 죽는 것은 누구나, 싫어하는 것인데 선생님은 이제 죽는 것이 즐거우시다니 그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임류가 대답하기를
“죽는 것 사는 것이 일왕일반(ᅳ往ᅳ反)이라, 한 번 갔다가 한 번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죽는다는 것이 저기서 보면 사는 것인지 누가 알어? 그러기 때문에 산다, 죽는다는 것 알 수 없는 것이다. 살겠다고 분주히 미쳐 돌아가는 것이 그게 잘못 아니냐? 또 이제 내가 죽는 것이 전에 살았던 것보다 더 좋은 일인지 알 수 없지 않으냐?”
자공이 종시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없어서 돌아와 공자에게 그 말을 했더니 공자는 대답하기를 내가 알았지, 그가 서로 말해 볼만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더냐? 과연이로구나. 그러나 그는 도를 얻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는 하지 못한 사람이다, 했습니다.
공자가 임류를 가르쳐 도를 얻었다고는 하면서도 완전치 못하다 한 것은 자기는 초연해서 개인적인 자유의 자리에만 있지 않고, 역시 모르는 저 중생들을 위해서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이끌어 주려 힘써야 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기 때문에 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던 그 공자도 그 천하를 돌아다니기를 그만두고 결국은 물러가 제자들과 같이 세속 세계를 개척하기에 힘을 쓰게 된 것을 생각해 보면 자연 분명해 지는 것이 있습니다. 진퇴는 때가 결정합니다.
죽음이 좋은 것은 사람의 마음에 여유가 있게 만들어 주는 점입니다. 같은 열자에 있는 말로서, 공자가 태산에 놀러 갔다가 영계기(榮啓期)를 성(郕)이라는 들에서 만나서 하는 문답 중에 그 끝에 가서 영계기가 말하기를
貧者士之常也(가난이란 선비의 떳떳한 일이지)
死者人之終也 (죽음이란 사람의 마침이지)
處常得終, 當何憂哉(떳떳에 처해 있어서. 마침을 얻게 됐으니 무엇을 근심할 것이 있겠느냐)
하는 대답을 듣고 공자는 말하기를
善乎 能自寬者也 (좋다. 스스로 너그럽게 할 줄 아는 사람이로구나)
했다. 사람은 마음에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죽으면서 죽는 줄을 아는 것이 여유 있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자유요, 부물어물(不物於物), 물건에 종노릇 아니함입니다. 지혜가 아무리 있고 비록 옳은 일을 손에 잡았다 하더라도 자기와 그 하는 일을 분리해 생각할 줄 모르면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 없이 했으면 참이 아닙니다. 하나의 기계지 산 혼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을 죽일 수는 있을지언정 살릴 수는 없습니다. 군자포손(君子抱孫)이요 불포자(不抱子)라, 참교육은 늙어서만 가능하다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역자이교지(易子而敎之)라, 아들을 바꾸어 가르친다는 것은 젊어서는 감정이 강하여서 일을 화(和)로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 혈육에도 그렇거든 모든 남을 상대로 하는 정치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열심 있는 아버지가 아들을 병신을 만들고 욕심에서 해방 못된 정치가가 민족을 망가칩니다.
늙으면 죽음이 친해집니다. 젊어서는 허깨비같이 무시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무서워만 할 수 있던 죽음이 차차 가까이 오면 그것이 결코 검은 얼굴도 아니요, 흉악한 이빨도 아니요, 초겨울 먼 산꼭대기에서 차차 오래 앞으로, 문간으로, 그리고 창호지를 가볍게 와서 두드리는 첫눈 마냥, 찬 속에 따뜻함이 있고 침묵 속에 무한 가락을 먹음고 있는 시를 가진 나그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연 어느 새인지 모르게 욕심의 무거운 공기가 사라져 버리고 가벼운 마음에 모든 것이 여유가 있어 집니다. 그것이 좋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나간 것을 다시 차분히 생각하여 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을 찾아내어 이미 알던 것이 새삼 알뜰도 해지고, 전에 너무 가혹하게 했던 것을 이제 고쳐 따뜻이 보상해 줄 수가 있습니다. 노자가 말한 좌기예 해기분(挫其銳 解其紛)은 이런 것일까?
그 대신 앞에 것이 더욱 더 분명하고 확신이 있어집니다. 뒷산은 무너지는 대신 앞의 바다 안개는 손짓을 해 부릅니다.
그러면 초 서릿발 밑에 함박꽃의 새움이 자라듯이 모든 선(善)이 전 날의 죄에 거칠어졌던 방촌지(方寸地) 속에 쑥쑥 돋아나게 됩니다. 이른바 인지장사 기언야선(人之將死 其言也善)입니다.
이 시대의 가장 나쁜 것은 죽을 줄 모르는데 있습니다. 젊은 것은 죽음이 뭔지 생각도 아니 하고, 늙은 것은 안 죽어 보려 어리석은 애를 부득부득 씁니다. 그러는 동안에 인심은 가시밭 같아집니다.
죽음과 손을 잡고 길거리를 걸으니 부러운 것도 자랑할 것도 없거니와 미운 사람도 몹쓸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고 “아이들아…” 했다는 심정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음이 오는 순간 내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이 있다면 아침저녁으로 나가며 들 어 올 때 옷깃에 매달리던 동리 어린 친구들과 이제 꺾어 꽂아놓은 제라늄의 뿌리 내리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럼 나도 봄철에 낡은 가죽옷을 입었을망정 행불류 가불철(行不留 歌不輟)로 영원의 묵은 밭고랑에 이삭을 주우며 나갈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를 고소하고 재판하는 사람 앞에서도 내가 피고냐, 네가 피고냐 속으로 묻고 섰을 여유가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씨알의 소리 1976. 5 53호
저작집; 9- 73
전집; 8- 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