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라크로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상(La Liberté guidant le peuple 영어: Liberty Leading the People)은 외젠 들라크루아가 7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1830년에 그린 그림이다. 그림 가운데 여성은 자유를 상징하며, 한 손에는 프랑스 국기(프랑스어: La Tricolore)를 다른 손에는 총검을 휘두르고 있다. 이 작품은 들라크루아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들라크루아가 사명감을 가지고 제작한 작품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정치적 목적을 담은 최초의 근대회화 이기도 하다. 들라크루아는 샤를 10세의 절대주의 체제에 반발해 파리 시민들이 일으킨 소요 사태 중, 가장 격렬했던 1830년 7월 28일의 장면을 사실주의 관점에서 표현했다.
시신을 밟고 전진하는 혁명세력의 모습에서 들라크로아는 민중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혁명적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도자나, 추종자나, 영웅이나, 피해자나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하늘을 덮고 있는 포화 연기 사이로 한 여인이 중앙에서 깃발을 들고 민중을 이끌고 있다. 옆에 총을 든 어린 소년과 총칼을 높이 치켜든 사람들이 돌과 보도블록, 건축물로 세운 임시 바리게이트를 넘어 전진하고 있다. 어두운 하늘은 혼란스러운 대척 상황을 암시한다. 화면 오른쪽 포화 연기 사이로 노트르담 성당이 보인다. 혁명 당시 노트르담 성당의 탑에는 아침부터 삼색기가 꽂혔다.
프랑스 공화국을 상징하고 있는 여인은 프랑스 대혁명 당원이 쓰던 붉은 모자 프리지아를 쓰고 오른손에 삼색기를 들고 있다. 삼색기는 자유·평등·박애를, 총을 든 어린 소년은 프랑스의 미래를 상징한다. 국민군으로 참여했던 들라크루아는 자유의 여신을 총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 넣었다.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인이 민중들과 다르게 옷을 벗고 있는 것은, 여인이 실제의 인물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자유의 여신은 고대 ‘승리의 여신’에서 영감을 받아 표현한 것이다. 자유의 여신은 바로 앞 길거리에 방치된 시신에서 느껴지는 잔인함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있다.
들라크루아는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실제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실제 상황을 포착해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의 요점을 확대시켜 사건의 중요성을 알리는 것이었다.
들라크루아는 나폴레옹 시대에 유명한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 유년기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일찍이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그는 누나의 보호 아래 성장하지만, 경제적 능력이 없는 누나는 재산 관리에 실패해 파산하게 된다. 들라크루아는 어린 시절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음악과 문학에 두각을 나타내는 모범생이었고, 결국 17세때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는 화가의 길을 가면서도 잡지에 기고하거나 논문 또는 일기에 자신의 생각을 펼칠 정도로 뛰어난 문필가로 활동한다.
들라크루아의 문학적 취향은 수많은 책을 읽은 데에서 출발한다. 그는 책을 읽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당대의 유명했던 문학 동아리에서 활동을 한다. 들라크루아는 문학 동아리에서 당대에 유명했던 스탕달이나 빅토르 위고 등 문인들과 친분을 맺었으며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단테, 셰익스피어, 몽테뉴, 볼테르, 괴테 등을 숭배했다. 들라크루아의 문학적 감수성이 나타나는 작품이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다. 이 작품은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단테를 추종했다.
들라크루아는 이 작품을 빚에 쫓겨 궁지에 몰려 있었던 시기에 제작했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화가로서의 성공이라고 생각해 작품을 3개월 만에 완성했다. 24세때 제작한 이 작품으로 들라크루아는 처음 살롱전에 입선한다. 이 입선으로 그는 대중과 비평가들 사이에 두각을 나타내게 됐다.
들라크루아는 이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하면서 아주 긴 원제를 단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는 플에기아스의 인도를 받아 지옥 도시 디스의 성벽을 둘러싼 호수를 건넌다. 죄인들은 배에 달라붙고, 또 그 위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쓴다. 단테는 그들 가운데 피렌체 사람 몇 명이 있음을 발견한다”가 그것이다. 붉은 색의 두건을 쓰고 있는 남자가 단테이며 그 옆에 짙은 색의 옷을 입은 남자가 베르길리우스다. 뱃사공 플에기아스는 폭풍이 이는 바다에서 노를 젓고 있고 지옥의 사람들은 배에 매달려 있다. 작은 배에 매달려 있는 죽은 자들의 격한 움직임이 화면에 긴장감을 주고 있으며, 단테의 붉은 두건은 배경의 색채와 강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들라크루아의 이 작품은 그의 야심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지옥에 떨어져 표류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을 참조했으며, 또한 지옥의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색채로 관능적인 인간의 육체를 찬미한 루벤스의 기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는 루벤스나 제리코의 기법을 연구하고 존중했지만, 그것을 따르지는 않았다. 당시 아카데미 미술 규범과 다르게 들라크루아는 관능적이고 풍부한 색채로 인간의 고통을 표현했다.
‘메두사의 뗏목’처럼 이 그림도 살롱전에 출품했을 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정부가 이 그림을 구입하여 전시를 하지 않으므로 이 그림은 민중으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이 그림이 민중에게 혁명의 열정을 불어넣지 못했다. 루이 필립 정부가 무너진 1848년에서야 들라크로아의 그림이 전시될 수 있었다.
이 그림은 들라크로아의 후기작에 나타나는 그림 제작의 더욱 부드러운 접근법으로 이행하는 것을 보여준다. 들라크로아의 색채 사용이 이웃끼리 서로서로 스며들어 영향을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식의 채색법은 르노아르와 쇠라부터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준다. 더구나 앞으로 나타날 인상주의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