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시보 효과 / 조미숙
유달산 둘레길을 걸었다. 청명한 가을 날씨에 걸맞게 사람들이 많다. 조각공원의 느티나무가 햇빛을 받아 노란 빛으로 반짝여 눈부시고, 이제 막바지에 이른 은목서의 향이 코끝에 맴돈다. 일요일 오전의 평화로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걷는다. 점점 숨이 가빠지고 이마에 땀도 흐른다. 느려진 발걸음 덕분에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예전에는 유달산 둘레길을 걷는 데 한 시간이면 족했다. 물론 빠른 걸음으로 쉬지 않고서 말이다. 남자들도 그러지 못한다고 놀라는 눈치다. 하지만 이제는 그 시간은 그림의 떡이다. 발걸음이 빨라지면 숨이 차고 가슴이 아프다. 쉬엄쉬엄 걸으면 두 시간까지 걸린다. 높지 않는 산이건만 둘레길도 제법 경사가 있어 무릎이 안 좋아 요즘은 산에 가기를 주저한다. 날다람쥐라는 별명이 무색해졌다.
재작년 겨울 시험 준비로 날마다 책상에 앉아 있었더니 가슴이 답답했다. 뭔가 바윗덩이 같은 것이 가슴을 꽉 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너무 앉아 있어 소화가 안 되나 싶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이상해 시간 있을 때 검사나 한번 받아볼 요량으로 병원을 찾았다. 시티검사를 마친 의사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검사 해 보길 잘했네요.”하며 의기양양해했다. 심장 혈관이 조금 좁아져 있다고 협심증이라고 했다. 내 눈에도 까맣게 변한 곳이 보였다.
혈관 확장제는 두통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게 아플 줄은 몰랐다. 도저히 못 먹겠다고 했더니 약을 반으로 쪼개 줬다. 그래도 여전했다. 이런 약을 함부로 먹어도 되나 의구심도 들고 ,동네 의원에서 진단 받은 거라 좀 더 큰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되었다. 아무튼 큰병일수록 여러 군데서 진단 받아야 확실하다고 했으니 섣불리 한 곳만 바라볼 수 없었다.
큰마음 먹고 종합병원에 갔더니 검사를 하려면 입원해야 한다고 했다. 일 때문에 어렵다고 하고 그냥 왔다. 그래도 찜찜한 마음을 떨칠 수 없어 마침 시간이 나자 바로 입원하고 검사했다. 혹시 심각하면 바로 스탠트(금속 그물망을 넣어 혈관을 넓히는) 시술을 할 수도 있으니 꼭 보호자를 동반하라고 했다. 혈관 조영술 결과 큰 문제는 없지만 혈관이 예민한 변이 협심증이니 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병명은 생전 처음 들어 봤다.
의사는 꾸준히 약을 먹어야 한다지만 두통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다. 몇 달 약을 먹으면서 이게 정말 맞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왜 고지혈증도 고혈압도 없는데 치료제에 그런 약들이 들어가는지 이해가 안됐다. 한 번은 몇 달 약을 끊어 봤다. 별 이상을 못 느꼈다. 그러다가 속이 다시 답답한 것 같아 갔더니 의사는 약을 끊은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사실은 몇 달 약 안 먹었는데도 아무렇지 않다고 했더니 그럼 뭐 하러 왔냐고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그래도 불안해서 왔다니까 큰일 난다고 꼬박꼬박 챙겨 먹으라 했다. 그러다 또 먹으나 안 먹으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 뒤로 동네 병원에 다른 일로 갔다가 이래저래 했다고 얘기했더니 그럼 혈관 확장제 빼고 아스피린이라도 먹으라고 했다. 안 먹으면 큰일 난다고 그 병원 의사와 똑같은 말을 했다.
꾸준히 약을 먹지만 요즘은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다시 예전처럼 체한 것 같고 걸음만 빨라져도 가슴이 아프고 시도 때도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가 건강 염려증이 있어 예민한 건지도 모르겠다. 주변 사람들은 협심증은 위험하니 꼭 전대병원이나 서울로 가 보라지만 시간이 여의치 않아 차일피일 미루면서도 나는 멀쩡한데 괜한 약을 먹고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은 쌓여만 갔다. 워낙 오진이 많다는 얘기를 자주 들은 터라 도통 믿음이 가지 않는다.
난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다. 나이가 먹었으니 당연한 결과이지만 유난히 나이에 비해 이른 질환을 많이 달고 산다. 조기 완경부터 퇴행성 관절염 등 항상 의사들은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닌데 빠르다는 말을 꼭 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픈 곳 수만큼 건강 걱정도 늘어났다. 그래서 요즘 <명의>라든가 <생로병사의 비밀>이라는 프로그램을 자주 본다. 그런데 문제는 아는 게 병이라고 거기에 나온 각종 질환들을 다 내가 앓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홈쇼핑 보면 다 우리 집에 필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얼마 전 방영한 심장 질환 관련 내용을 보고 변이 협심증이 더 무섭다는 사실을 알았다. 혈관에 혈전이 생기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수축해서 위험하다고 했다. 그래서 비상시 혀 밑에 넣는 알약을 주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처음에는 그렇게 심장을 쥐어짜고 숨도 못 쉴 정도의 증상도 없는데 왜 이런 약을 처방했나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무서운 병이면 정말 내가 제대로 진단 받아 약을 먹고 있는지 더더욱 걱정이 되었다.
며칠 전에는 어깨 통증이 심해서 정형외과에서 준 약을 먹었는데 너무 속이 쓰려 먹을 수가 없었다. 위장약까지 따로 줬는데도 감당이 안 돼 2주분 것을 며칠 만에 끊어 버렸다. 염증이 심해 몇 년 째 고생하고 있지만 통증이 심하지 않으면 평소에는 그러려니 하고 지낸다. 긁어 부스럼이라고 오히려 어깨에 주사를 맞고 더 심해졌다. 또 하루도 멀쩡한 날이 없는 두통 때문에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뭐가 문젠지 마음 같아선 머리부터 활짝 열어보고 싶다.
‘노시보 효과’라는 말이 있다. 약을 올바로 처방했는데도 환자가 의심을 품으면 약효가 나타나지 않는 현상이다. 내가 요즘 그런 것 같다. 나는 아픈데 검사하면 이상이 없다고 하니 미칠 노릇이다. 몇 년 전부터 제자리에서 뜀뛰기를 하거나 달리면 골반이 아팠다. 정형외과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 어깨 염증 약을 먹었더니 운동했는데 골반이 많이 아프지 않았다. 그렇다면 염증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의사는 문제 없다고 했을까? 자꾸 의심이 생긴다. 이것도 큰 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