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례전적 존재
우리에게는 자랑스러운 필기도구가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다양한 여러 모양과 아름다운 것들이 넘쳐 나지만 아직도 향수 같은 것이 깃들여 있는 필기도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 볼펜에 보면 모나미 153이라는 숫자가 있습니다. 도대체 153이라는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나 궁금합니다. 이런저런 추측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153마리라는 의미는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누고자 하시는 이야기에 핵심의 숫자입니다, 정말 셀 수도 없는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곳에 물고기를 잡던 사람들은 몇 명인가요. 고깃배에서 예수님에 제자들이 뭍으로 올라와서 보니 예수님이 이미 숯불을 피워 놓으셨고, 거기에는 빵과 생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야 너희가 잡아 온 생선을 좀 가져와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배에서 내려온 제자들이 본, 그 빵과 생선은 예수님 한 분만을 위한 1인분의 빵과 생선을 굽고 그들을 기다리십니다. 기다리신다는 것은 정말 기적처럼 잡은 수많은 물고기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고기 153마리는 그물이 무거워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오병이어나 칠병이어 같은 엄청난 기적은 아닌듯합니다. 그러나 배에서 고기를 잡은 제자들 여러명이 모두 2마리씩 먹는다 해도 넘쳐나는 물고기의 양이 됩니다. 결국 그 얘기는 주님께서 너희가 내 말을 따르면 너희가 먹을 수 있는 그 양보다 이상으로 충분히 주신다는 것을, 사도 요한은 153마리로 표현한 것입니다. 너희가 잡은 물고기는 주님과 생명의 교제를 위한 잔치 자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곳은 식사를 하기엔 불편합니다. 더군다나 많은 사람이 잔치를 열기에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그 초라해 보이는 해변 그곳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가져오신 것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얻게 된 것을 함께 결합하여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얘기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서 20장을 이미 마무리했는데도 불구하 21장을 다시 한번 쓴 것입니다. 어째서 사도 요한은 복음서를 20장으로 기록하고 끝냈는데, 다시 결말을 하나 더 연장했습니까? 그래서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21장은 사도 요한이 쓴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첨가한 것이 아니냐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많은 진보적인 성경학자들이라고 할지라도 21장은 굉장히 오래 된, 즉, 주후 2세기 아니면 3세기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 성경의 사본의 가장 오래된 본문에서 발견되었기에 나중에 첨가되었다는 얘기는 맞지 않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썼느냐가 중요합니다. 요한복음서 21장 쓴 이유는, 바로, 사도 요한이 결론을 다시 한 번 보여 주기 위하여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생명의 교제가 주님이 가져오신 것과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셔서 우리가 얻게 된 것들을 가지고 온 그곳에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여기서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이제 아침을 먹자, 예수님이 얘기할 때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랍비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러니까 죽었다가 다시 사신 분이라는 사실을 모르면서도, 이분은 도대체 누구인가 했을 때,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서와는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주님이신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요한복음 20장에 의심 많은 도마에 대해 이야기가 나올 때, 예수님이 도마에게 의심하지 말고 내 몸에 있는 상흔을 만저 보아라 하십니다. 도마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나의 주님, 나에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고 사도 요한은 얘기합니다.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서와는 조금 다르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속 사도 마가나 마태나 의사 누가는 제자들이 알았다 즉 예수님이 주님이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들이 어떻게 된 것인가, 햇 갈리는 이야기를 하지만 사도 요한은 분명하게 알았다고 얘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이 사랑하는 사도 요한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모두 알았다는 것이, 주님이 가져오신 것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갖게 된 것을 가지고 함께 되어 우리가 주님에 거룩한 식사 자리에 참여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 거룩한 식사에 참여했을 때, 우리가 주님과 함께 생명에 교제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하는 자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자입니다. 단순히 고대 근동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 제사를 드림으로 배고픈 신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하면, 우리는 신들에게 제사 지내고 그 신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이 땅에서 허락하신 것을 누리며, 누린다는 것은 그곳을 복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복되면 그 땅이 복되게 된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 잊어버리는 것 중에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희생해서 다른 사람이 행복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조차도 구약에 나온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너가 너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만큼, 하나님이 저 사람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내가 인정받아야 하고 내가 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이 넘치면 넘칠수록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복이 더욱더 넘친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같은 일들을 너희가 복되고 너희의 창조 세계가 복되어 그 모든 것이 나와 함께 생명에 교제를 나누는 그리고 나에게 영광을 드리는 (내가 창조한 대로 너희가 멋지게 감당하고 있다. 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된 것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것이다. 결국에는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물고기를 주셨고 우리가 이 모든 것이, 주님이 주신 것을 알게 하셨고 함께 식사를 나누며, 주님과 함께 생명에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형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선언합니다. 주후 1세기에 유대인 출신에 성도들이 집중했었고 예수님이 집중하라고 말씀하신 복음에 핵심은 무엇입니까? 유일하신 하나님 단일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에 충만한 임재을 통해서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통해서 아들 예수님과 생명에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이는 삼위 하나님과 생명에 교제를 나누게 되는 일을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그것을 선언하고, 또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이신 예수님이 성육신하심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당신에 몸과 보혈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에 형상이 회복되었습니다. 회복된 우리는 주님에 만찬을 계속해서 누리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만찬에 초대되는 존재이며 그 만찬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 식탁에서 주님과 함께 생명에 교제를 나누는 성례전적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례전적 존재라고 하면 매 예배 때마다 성례전을 가져야 합니다만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그런 존재로 회복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존재로 살아가야 하고 그 존재로 주님에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안에 있어야만 하는 생명에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새하늘 새땅에서 성례전적 존재로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생명에 교제를 나누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요한 복음에서 사도 요한은 그 갈릴리 바닷가에 나온 제자들 모두가 선생님은 누구십니까하고 묻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의심많은 도마도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이 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도 요한이 도마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는 것은 진정한 도마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요한이 도마 이야기를 쓴 이유는 영지주의라는 것들이 매우 힘들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흐릿하게 하고 망가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초대교회에 도전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중에 비유대인 출신 성도들을 핍박하는 가운데 나온 또 다른 반대적인 운동입니다. 성도를 영과 육을 분리하여 영적인 존재만이 하나님에 생명을 추구하는 존재이고, 육적인 성도는 땅에 매여 있는 어리석은 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자신만 영적인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이같이 사도 요한은 교회가 분열되어, 유일하신 하나님에 단일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완전히 깨어지고 있는 가운데서 가슴을 치며 이 본문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 존재적으로 하나님에 거룩한 영을 회복함으로 영혼과 육체가 하나로 통합된 존재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아침을 먹어라, 물고기를 낚아라, 얘기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핵심 제자들을 갈릴리 바닷가로 부르셨습니다. 그곳은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신 첫 번째 장소에서 그들을 다시 만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내가 사람을 낚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단일 백성으로 회복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 이야기가 초대 교회가 집중했던 복음입니다. 교회가 어지럽고 깨어지고 망가지고 있는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지키길 원했던 바로 그 복음입니다. 오늘 이곳에 교회가 계속해서 지켜가야 하고 증언해야 하는 그 복음입니다.
이곳에 소금빛 교회가 있기에, 이렇게 주님에 말씀이 선포되고, 또한 듣고 있는 성도가 있기에, 하나님은 이 공동체를 지켜가실 것입니다. 이곳에 일어나는 모든 사역은 주님이 지켜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에 은총가운데서 그 자리에 초청받고 함께 더불어 생명에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생명에 교제를 나눌 수 있게 인도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참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 주님은 참으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에 중요한 핵심은, 내 잔치에 참여하라. 내가 너희에게 은혜로 준 것들을 가지고 와서 이 잔치에 참여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준 것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 너희는 처음엔 마음이 불편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가 받았던 것이 무엇이지 찾아보면 나에게 너무나 충분한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기에도 너무나 넘치는 것들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던 것들이구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네가 감사함으로 나에게 왔을 때, 나는 내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너는 나에게 주게 되는 것이라고,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 이 시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같이 기억하며 주님이 우리에게 행하셨던 그 귀한 것을 잊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가 누리게 될 그 생명에 일들을 기대하며 주님에 은총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님에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