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때였으니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의 일이다. 담임선생님께서 여름방학 전날 종례시간에 “이명호! 네 이름이 ‘명호’가 아니라 ‘강문’이던데, 방학 끝나고 나올 때 이름표를 ‘이강문’으로 바꿔”라고 단호하게 명령하여 모두 어리둥절했다. 그러니까 1학기까지 ‘이명호’였던 교복의 이름표가 2학기부터 ‘이강문’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아마 호적에 ‘이강문’으로 올랐으나 이후 ‘이명호’로 개명하고도 그대로 두었으며 담임선생님께서 방학 전에 학생들의 호적을 들춰보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이유야 어떻건 급우들도 이후부터는 ‘강문’으로 부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며 씁쓸한 까닭은 어린 학생의 인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던 담임선생님의 경직된 일처리 때문이다. 호적상의 이름이 뭐 그리 중요하랴. 당신께서 명호만 따로 불러 사정을 알리고 조용히 넘어가도 되었으리라. 명호 부모님들께서는 분명 ‘강문’이라는 당초의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명호’로 바꿨을 것이다. 그런데 호적대로 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예전의 이름을 다시 쓰라니 명호와 그 가족들의 심정이 어떠했으랴. 중학교 졸업 이후 그 친구를 만나지 못했는데 지금은 과연 두 이름 중 어느 것을 쓰고 있는지 궁금하다.
필자도 이름이 바뀌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일로써 선친께서 밤마실 가셨다가 들어오시더니 느닷없이 온 식구들을 안방으로 부르시고는 “오늘부터 ‘근홍’이 이름이 ‘철한’으로 바뀌었으니 앞으로는 절대 ‘근홍’이라는 이름을 쓰지 말고 ‘철한’이라고 해라”라는 요지로 매우 엄격하게 말씀하셨다. 그래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지만 바뀌고 나서 얼마동안 새로 바뀐 이름 듣기가 어찌나 쑥스럽던지 식구들이 불러도 대답하기 싫을 정도였다. 식구들 또한 처음에는 바뀐 이름을 부르기가 서먹서먹했던지 쉽게 부르지 못하고 망설였었던 기억이, 수평선 끝자락의 해무에 휩싸인 조그마한 섬만큼이나 가물가물하다.
당시에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주를 봐주거나 작명을 해주고 삯을 받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는데 훗날에 들을 수 있었던 개명改名 사연이 황당할 정도다. 시골이 고향인 필자가 대여섯 살 때의 어느 날, 용하다는 한 작명가가 마을에 와서 뉘 집 사랑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선친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거기에 모였으나 처음에는 눈치만 보며 선뜻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중에 누가, 예전에 그 마을에서 살면서 객지로 장사를 나갔다가 죽은 사람의 이름과 생일생시를 대고는 그 이름이 어떤지를 물었다. 그런데 한참 후 고개를 갸웃하며 내뱉은 작명가의 한 마디가 모든 사람들의 넋을 빼놓았다. 작명가의 입에서 “중년에 객사할 이름입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마을사람들이 앞 다투어 이름을 대며 나쁘다는 말이 나오면 당장 개명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선친께서도 당신의 장남인 필자의 이름(근홍)과 생일생시를 대며 부탁한 후 작명가로부터 “그 이름으로는 열 살을 넘기지 못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등골이 오싹할 지경에 이르러 그 자리에서 즉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한편 지금이야 이름을 바꿔도 어렵지 않게 호적을 바꿀 수 있으나 당시에 호적상의 이름을 바꾸려면 법원의 민사재판을 거쳐야 했을 정도로 까다로웠기에 개명하고도 호적에는 예전의 이름이 그대로 남은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유교의 이념이 매우 강하셨던 선친께서는 장남의 재수 없는 이름을 호적에까지도 남기지 않으려는 심정으로 정리를 했으리라. 만약 그때 호적정리가 되지 않았다면 필자도 중학교 때 예전의 ‘근홍’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민속신앙을 포함한 동양철학 관점에서는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인들이 여러 가지다. 사주팔자, 관상, 손금은 물론이고 조상의 묏자리를 명당에 쓰면 후손이 잘된다는 풍수지리설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름까지도 거기에 포함된다면 과연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 한편 좋은 이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당사자의 생년월일에다 한자漢字의 획수, 뜻, 음까지를 결부시켜 따진다고 한다. 그런데 만약 이름에 좋지 않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면 평생 동안 남들이 그 이름을 부르며 저주하는 꼴이 되어 결국 현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지금까지도 사람의 이름이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주장을 터무니없다고 여기고 있다. 또한 자식들에게는 둘 다 한자漢字로 쓸 수 없는 순 우리말 이름을 지어 줬는데 거기에는 그 이름을 두고 왈가왈부하지 않기를 바라는 뜻도 없지 않았다.
정년 후, 예전에 근무했던 지역의 어느 농협에서 하루에 수십 명 정도를 상대하며 농약상담을 해 주던 때였다. 어느 날 한 노파가 찾아왔는데 상담일지에 기록하려고 이름을 물었더니 ‘박죽자’란다. 나는 일부러 태연자약泰然自若하며 그 이름을 적어 넣으면서도 속으로는 “왜 하필 이름이 ‘죽자’일까?”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누구든지 그 이름을 듣거나 부를 때면 한자漢字의 획수나 뜻과도 관계없이 ‘살자’의 반대 뜻이 떠오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웬걸, 상담을 마치고 나서 “연세가 많으신 것 같은데 여태껏 농사일을 하시나요?”라고 묻자, “여든이 넘었지만 아직 할 만 합니다.”라고 옹골차게 답하며 문을 나서는 노파의 뒷모습에는 건강미가 철철 넘쳤다. 잠시 후 필자 마음속에 전해진 그 노파의 메시지는 이렇다. “이름은 결코 사람의 운명을 간섭하지 못해요. 나를 보면 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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