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0일 연중 제20주일>
믿음, 본질적인 삶에서
성경이 전해주는 이야기 안에는 여러 층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것 같다. 얼핏 보면 평범한 이야기처럼 보이나 이면에 신선한 신학적 의미나 영적 지혜를 몇몇 장치 속에 숨겨두기도 한다. 오늘 마태복음 15장 21절 이하의 말씀 또한 그런 이야기 중 하나로 보인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지역은 이방인들의 지역이요 등장인물도 이방인이다. 여기에서 성경은 바야흐로 예수님의 전교 활동이 이스라엘이라는 영역을 넘어선 보편적 과업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제1독서 이사야서 56장 1절 이하의 말씀과 연결된다. 한편 정작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었는데 이방의 여인이라니! 예수님의 하늘나라 운동이 보여주는 역설이 숨어있다.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이스라엘이 주역일까? 그리고 이방인들은 그저 주변부 존재일까? 그러나 성경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우리의 생각처럼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어떤 가나안 부인, 그녀는 유대인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22절) ‘다윗의 자손’이란 표현은 예수님의 족보이며, ‘주님’이란 표현은 그분이 메시아라는 점을 고백한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고백을 이방인의 입에서 그것도 여인의 입에서 나오게 하고 있다. 대단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제 깜냥에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나는 영적으로도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어쩌면 이 이방의 여인에게 배워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런 평가는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방의 여인은 ‘제 딸이 호되게 마귀가 들렸습니다.’하고 호소한다. 예수님의 반응은 냉정하리만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 그럴수록 여인이 소리를 지르며 부르짖자 그제야 하신 말씀이 ‘너 따위를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라는 투의 무지막지한 말이다. 그래도 여인이 물러가지 않고 계속 청하자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하신다. 이쯤 되면 실망스럽고 속상해서라도 돌아설 법했으련만 그녀는 그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얻어먹습니다.’하고 대답한다.
믿음이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하신다. 그녀는 바라는 바를 얻어 그녀의 딸은 나았다. 믿음이란, 우리의 자존심, 부끄러움, 수치심까지도 포기하라는 것인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방의 여인이야말로 참으로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지 않을까? 그녀는 참된 생명 앞에서 수치심이나 자존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진실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본질적인 것을 위해서 비본질적인 것을 미련 없이 버릴 줄 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예수님의 냉정한 거부와 험한 표현에도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표면 속에 숨겨 계신 예수님의 본성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녀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성큼성큼 들어선다.
참으로 많은 것들에 흔들리며 괴로워하는 세대에 이방의 여인은 믿음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다.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고, 자존심의 작은 상처에 몸부림치며, 주변의 따돌림에 괴로워하고, 진짜 내 모습을 몰라주는 것 같아서 속상한 우리의 마음들. 이 마음들이 오늘 이방의 여인처럼 예수님의 냉대를 당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지금, 이 순간도 어쩌면 수많은 사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냉대를 하시는지도 모른다.
내 생각대로 뭔가 되지 않는다면, 정말 그렇다면 어찌 되는데? 뭔가 반드시 그렇게 되지 않으면 뭔가 큰일이라도 나나? 자존심 좀 상하면 어때? 숨 막혀 죽는 것도 아닌데 마치 사생결단을 낼 듯이 감정에 휩싸여야 하는가? 좋아하는 사람, 의지하는 사람이면 무조건 내 편이 되어줘야 하고 나를 이해해줘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배신감에, 실망감에 몸부림치며 ‘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라고!’ 외치면 속이 시원한가? 지금 그토록 ‘이것이 아니면 안 돼!’라며 부여잡고 있는 것이 진정 그렇게 중요한 본질적인지 한번 다시 보자.
물론 비본질적인 것이라 하여 쓸데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믿음은 궁극적이며 본질적이다.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나의 외모가 나의 존재를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더 근본적이고 더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보면 우리는 쉽게 본질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다. 이방의 여인은 주변부적인 것에 주의를 돌리지 않고 본질적인 것에 집중했다. 사람들이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인정해주기를 바라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스스로 인정할 줄 알려고 노력하는 것, 남과 비교해서 나도 괜찮은 사람임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대신 타인과 다른 나만의 특성을 찾아 그 가치와 의미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기대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길을 가는 것, 이것이 본질적인 것이 아닐까?
남들이 나를 칭찬해주고 높게 평가해주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걸까? 사람들이 나를 높게 평가해주면 나는 뛰어난 사람이 되는 걸까?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주면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되는 걸까?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28절)
첫댓글 예수님의 거절에도 딸을 구하겠다는 오롯한 마음이
믿음으로 확인되네요
어머니들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삶의 희망이자 용기이며
곧 굳건한 신앙의 길이기도 하네요 감사합니다..
딸을 구하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로 구세주를 만나게 되었으니 참으로 큰 축복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