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風이 건듣 부니 물결이 고이 닌다. 돋다라라 돋다라라.
東胡를 도라보며 西湖로 가쟈스라. 압뫼히 디나가고 뒷뫼히 나아온다.
우는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 이어라 이어라.
漁村 두어 집이 냇속의 나락들락. 말가한 기픈 소희 온갇 고기 뒤노나다.
-어부사시사 중 일부 발췌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가 어부들의 진솔한 일상을 노래한 것인지, 아니면 한가로운 사대부의 뱃놀이를 읊은 것인지를 논할 만한 안목이 필자에겐 없습니다. 또한 이 가사가 시조의 변형인지, 독창적인 문학 장르인지를 가릴만한 능력은 더욱 없습니다. 다만 고딩시절 열심히 외웠던 古文 중 다른 것에 비해 좀 더 흥겨웠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납니다. 그 건 아마도 어부사시사가 노랫가락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부사시사는 1645년(효종 2년) 그의 나이 45세 때 보길도에서 정신적으로 비교적 안정을 되찾은 후 지었다고 하지요. 당쟁에서 밀려난 후 예전부터 눈독(?) 들여왔던 보길도로 내려와 구경하고 노닌 걸 바탕으로 쓴 시랍니다. 한자어도 漁夫가 아닌 漁父로 국어사전에는 같은 뜻으로 나와 있으나, 漁父는 실제로는 취미 삼아 고기 잡는 사람이라는 뉘앙스로 쓰인다고 하네요.
시문(詩文)이 뛰어난 이는 정치판에 발붙이기 힘든건가
가사문학의 巨峯 송강 정철의 경우 비교적 사교성이 있는 인물이었다지만 정치판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당쟁속에 피바람을 뿌리며 축출과 유배를 거듭하지요. 중국의 경우 시선(詩仙)이라는 칭호를 들었던 당나라 불세출의 시인 이백(李白)은 조정에 들어가서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송대 최고의 문장가로 명필이며 대시인인 소동파는 정계에 진출한 후 거듭된 내침과 귀양살이 끝에 마지막 유배지인 중국 최남단 하이난(海南)에서 해배되어 돌아오다 객사(58세)하지요.
유배 생활 20여년에 거의 비슷한 기간 동안 향리에 은거한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1671)의 경우도 결코 이들에 뒤지지 않습니다. 30세 때 성균관 유생 신분으로 올린 상소로 유배되어 인조반정으로 풀려난 게 34세 때입니다. 그 후 관직에 있다가 병자호란으로 보길도에 은거 중 난이 끝나 상경하였으나, 임금을 먼저 알현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귀양 간(42세) 후 풀려나 다시 보길도로 돌아와 10년을 지냅니다. 그 뒤 우여곡절을 겪다 71세에 다시 정계로 돌아왔으나 송시열과 맞서다 축출됩니다. 73세(1659) 때 효종이 승하하자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노론(본인은 남인)과 다투다가 다시 함경도 삼수(三水)로 유배됩니다. 8년 뒤에 풀려나 보길도 부용동에 돌아와 지내다 낙서재(樂書齋)에서 85세로 생을 마감합니다.
윤선도의 작은 왕국 보길도(甫吉島)
윤선도는 병자호란 중 인조가 강화도로 몽진한다는 전갈을 받고 가던 중,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에 낙담하여 제주도로 향합니다. 도중에 조상이 살던 해남을 지나 보길도에 이르러 그곳 풍광에 반해 정착하게 되지요. 그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고 명명합니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많은 재산으로 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동천석실(洞天石室) 등을 지어 놓고 풍류를 즐깁니다. 인공 연못(洗然池) 가운데에 세운 세연정은 남도에서 으뜸가는 정자로 평가됩니다.
조선팔도에서 가장 크다는 정자, 세연정(洗然亭)
정자(亭)란 대개 물가에 세워진 아담한 건축물로 주변 풍광이 수려하고 전망이 좋은 곳에 있으면 그만이지 크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요. 수년전 고등학교 동창들과 찾은 세연정은 우선 그 크기에 압도당했습니다. 창덕궁 후원(後苑, 祕苑)이나 창경궁에도 많은 정자가 있으나 대체로 그다지 크지 않은 편입니다. 한잔 걸쳐 거나해진 해설옹의 말을 빌리자면, 혹 임금이 이곳으로 몽진하게 되면 대소신료들이 함께 자리할 수 있도록 정자를 크게 지었다는 거지요. 실제로 2,3십 명은 족히 들어갈 수 있는 넓이로 보였습니다. 임금을 모시지는 못 했지만 남도의 시인묵객들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시(詩)를 읊조리고 글씨(書)와 그림(畫)을 즐겼다고 합니다. 이런 분위기에 어울릴 법한 孤山의 절창 '五友歌'를 아래에 붙입니다.
내버디 몃치이나 하니 水石과 松竹이라.
東山의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삿 밧긔에 또 더하야 머엇하리.
구름빗치 좃타하나 검기랄 자로 한다.
바람소래 맑다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조코고도 그칠늬 없기는 믈뿐인가 하노라. -물
고즌 무스니로 피면서 쉬이 디고
푸른 어이하야 푸르난닷 누르나니
아마도 변티 아닐손 바회뿐인가 하노라. -바위
더우면 곳퓌고 치우면 닙 디거날
솔아 너난 얻디 눈서리랄 모르난다.
九泉의 불희 고단 줄을 글로 하야 아노라. -소나무
나모도 아닌 거시 풀도 아닌 거시
곳기난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난다.
뎌러코 四時예 프르니 그를 됴아하노라. -대나무
쟈근거시 노피떠셔 萬物을 다 비추니
밤듕에 光明이 너만하니 또 잇나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벋인가 하노라. -달
孤山은 적지 않은 한시도 남겼기에 여기 북쪽 변방(아마도 三水)으로 유배되었을 때 지은 시(被謫北塞) 한 수 붙이면서 끝맺습니다.
歎息狂歌哭失聲 (탄식광가곡실성)
男兒志氣意難平 (남아지기의난평)
西山日暮群鴉亂 (서산일모군아난)
北塞霜寒獨雁鳴 (북새상한독안명) -일부
탄식하며 미친 듯 울부짖고 소리 질러도,
사나이 품은 뜻 펼치기 어려워라.
서산에 해지려 하니 까마귀 떼 어지러이 날고,
북쪽 변새에 서리는 차고 기러기 울음소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