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II. 한국 개신교 교회의 문제점들의 원인
1. ‘기독교 신앙(Christianity)’에서 인간에 대한 의존이 증대한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이다. 즉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실제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이다. 이렇듯 체험을 통해 확증된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적 사명을 분명히 깨닫게 한다. 즉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조되었으며, 그 창조의 목적을 따라 하나님에게 봉사할 소명을 깨닫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집중되며,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대하여 사후의 구원의 세계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적인 신앙은 말씀과 기도와 성례를 통해 얻어지게 되는데, 한국 개신교 교회의 문제점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의 경험적인 인격적 관계가 바르게 형성되지 못하는데 있다. 즉 교회 강단에서의 설교는 하나님 편에서가 아닌 인간 편에서의 편의주의적인 그리고 목적지향적인 설교가 되었고, 성례는 점차 간소화되거나 무시되어지고 있으며, 개인의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인간들의 나라를 위한 필요에 집중되어 기복적으로 흐르고 있다. 이와 같이 말씀의 방향성과 기도의 목적성이 호도되어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경험의 통로를 상실한 채 한국 개신교 교회는 점차 기독교의 체험적 신앙에서 벗어나고 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인격적 체험이 상실되면서 자연스럽게 인간에 대한 관심과 의존이 증대된다. 따라서 대부분의 관심이 인간에게 집중되며 인간들의 필요에 몰두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인간적 필요를 채우는 도구로 전락하고 결국 하나님에 대한 체험이 바탕이 되는 ‘기독교 신앙’은 인간에게 의존하는 ‘기독교적 신앙(semi-Christianity)’으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기독교적 신앙’은 인간적이며 인간 의존적인 모습으로 굳어지게 되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는 형식적인 용어로만 남게 된다. 이른바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실종’이 발생하는 것이다 (
2. 인간 중심의 ‘기독교적 세계관(semi-Christian worldview)’으로 변질된다.
‘기독교 세계관’은 그리스도인이 현세를 넘어서서 사후의 구원의 세계로까지 그 관심을 확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나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그로 하여금 유한한 인생과 영원한 생명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그의 최종적인 관심을 사후의 구원에 집중하게 된다. 결국 ‘기독교 세계관’은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체험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한 구원의 확증에 기초하고 있다.
한국 개신교 교회의 문제점은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의 하나님 중심적 요소를 망각하는데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경험의 통로를 상실한 채 그리스도인들은 점차 기독교의 체험적 신앙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리스도인의 관심은 하나님을 떠나 인간에게 집중되어 자신들의 현실적 필요에 몰두하게 된다.
흔히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즉 세계관 속에 기독교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을 구별 없이 모두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잘못 받아들인다. 이렇듯 교회는 ‘기독교 세계관’을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한국 개신교 교회가 ‘기독교 세계관’이 아닌 ‘기독교적 세계관’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그 세계관 속에 사용하는 용어가 기독교와 관련이 있고 그 내용이 교회에서 통용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는 다분히 인간 중심적인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을 엄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 세계관’과 인간 그리고 인간의 필요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적 세계관’은 전도의 현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전도의 목표는 미신자로 하여금 사후 세계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다. 즉 세상의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준엄하신 심판자리에서 심판의 책에 기록된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 영원한 고통으로 형벌 받게 될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미리 보게 하는 것이다. 전도자는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 신앙을 바탕으로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증을 가지고 있다. 즉 마지막 심판자리에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됨으로 심판을 면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소망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도자에게 자신의 사후 구원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이 없다면 그가 전파하는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는 메시지 속에는 이미 사후 구원의 의미는 퇴색되고 ‘우리 교회의 교인이 되세요.’ 또는 ‘우리 교회에 와서 병 나으세요.’, 우리 교회에 와서 성공하세요.’, ‘우리 교회에 와서 복 받으세요.’라고 하는 이른바 ‘교인 모으기’를 위한 인간적 의미만 남게 된다. 즉 전도자가 전하는 복음은 병이 낫고,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명예를 얻으며, 복을 누리는 것으로 구원을 대신하는 것이다. 이른바 영혼의 구원이 상실되고 인간의 만족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고 하는 복음의 메시지는 반향 없는 메아리가 되어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게 된다 (John Stott, 2001: 39). 오히려 1960년대의 ‘예수천당 불신지옥’류의 메시지가 보다 천진하고 정직한 것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전도 방법들이 대부분 사후 구원의 내용을 전하기보다는 교회에 교인을 모으고, 또 모인 교인을 유효하게 가두는 인간적인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지상천국 지향의 ‘기독교적 가치관’이 지배한다.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체험을 하지 못해 사후구원의 의미를 상실하고 인간중심적으로 변질된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인해,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부패와 무능을 반성하고 구원의 은혜를 사모하여 겸손히 십자가의 고난을 감수하며 살아가려는 하나님의 나라 지향적 ‘기독교 가치관(Christian values)’은 상실되고, 인간의 육체적 만족과 정신적 행복을 지상목표로 추구하는 지상천국 지향의 ‘기독교적 가치관(semi-Christian values)’이 그리스도인을 지배하게 된다.
인간들의 지상천국에 대한 집착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에덴의 욕망’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원래 사단이 하나님께 대해 품고 있던 반역의 근거가 되었던 허탄한 욕망이었다. 사단은 인간의 욕심을 부추겨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도록 유혹하였다. 결국 인간들은 에덴에서 쫓겨나 사단이 지배하는 죽음의 세상에 속하게 되었다 (Bavinck, 1983: 203-206). 그곳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하며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살게 되었고 하나님처럼 되고픈 자신들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지상에 바벨탑을 쌓게 되었다. 이러한 인간들의 바벨탑은 하나님 없이도 자신들의 힘만으로 행복한 지상천국을 이룰 수 있다는 세속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쫓겨난 에덴을 대신하여 자신들의 세상에 천국을 건설하기 원하였고 사단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 그들의 모든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들은 벽돌을 만들어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성읍과 탑을 쌓아 하늘에 닿게 하였다 (창11:3-4). 그들은 12가지 보석으로 견고히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를 대신하여 벽돌과 역청으로 이 지상에 인간들의 바벨탑을 쌓은 것이다.
이른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망’으로 하나님께 반역하고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던 사단은 ‘하늘의 전쟁’에서 패한 채 하늘의 천사 삼분의 일을 이끌고 지상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인간을 유혹하여 하나님께 범죄하게 하였고, 이윽고 그들을 자신의 세력 안에 지배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모든 후손들까지도 자신의 지배하에 두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원죄의 상속 (롬5:12)’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나라를 모방하여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에 해당하는 자신의 권력기관을 이 세상에 조직하였는데 그것이 이른바 ‘사단과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다 (계13:1-18). 또한 사단은 자신들이 지배하게 된 인간들을 움직여 하나님의 나라를 대신할 인간들의 지상 천국을 바벨탑으로 건설하게 한 것이다.
사단이 인간들을 지배하고 마음껏 움직이기 위하여 사용하는 세 가지 강력한 도구가 있는데, 이른바 ‘사단의 삼종신기[i]’인 돈과 명예와 권력이다. 이러한 세 가지 도구는 사단이 세상을 지배하는 악마적 가치관으로 세상의 인간들을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 인간이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로 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특히 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지상천국 지향의 세속적이고 악마적인 ‘기독교적 가치관’이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기독교 가치관’은 선한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집사에게 있어서 ‘목사님’은 극도의 존경의 표상이요, 목사에게 있어서 “집사님’은 가장 은혜로운 호칭일 것이다. 그런데 부패한 교회에서는 목사가 집사를 갈취하고 집사는 목사를 고발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 재정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과 명예를 두고 벌이는 사생결단의 투쟁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권력은 또한 돈과 명예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더욱 그 투쟁의 강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이른바 ‘기독교 정당’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4. 분파적인 ‘기독교적 문화(semi-Christian culture)’로 부패한다.
구원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하나님의 나라 지향적 ‘기독교 가치관’이 상실되고, 인간의 육체적 만족과 정신적 행복을 지상목표로 추구하는 지상천국 지향의 ‘기독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Christian culture)’은 점차 현세적이고 인간중심적이며 건물과 조직과 프로그램에 의존하는 ‘기독교적 문화’의 모습으로 변형되고 있다. 따라서 지상천국 지향의 ‘기독교적 가치관’이 초래한 분파적인 ‘기독교적 문화’는 자연스럽게 교회를 세속화하고, 관료화하며 종국적으로는 개 교회화하고 있다. 이러한 ‘기독교적 문화’로의 부패는 치유될 가망이 없이 심각하게 진행되어 결국에는 타락을 향해 종교적 혼합주의와 다원주의 속으로 점차 함몰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분파적인 ‘기독교적 문화’가 세속주의, 관료주의, 개 교회주의를 통해 오늘날 여러 가지 한국 개신교 교회의 문제점들을 양산하게된 것이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심판과 구원의 중대성과 시급성을 외치며, 사후 세계에 대해 설득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광대한 교회건축과 각종 프로그램과 시설의 확장 그리고 세속적인 명예와 권력을 갈망하며 현세구복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다. 교회의 직분은 점차 관료화하여 세속권력화되고 있으며 민주주의를 채용한 교회정치는 다수결이라는 강력하고 거부불능의 수단을 사용하여 폐쇄적인 개 교회를 완성하고 있다. 결국 교회 내에서 점차 하나님의 존재는 무시되고 인간들의 야합과 다수결의 폭력 속에 사회법을 능가하는 무소불위의 존재로 개 교회의 바벨탑을 쌓고 있다. 더군다나 이렇게 성장한 개 교회는 자신들이 이룩한 바벨탑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타 종교와의 화해와 연합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지상천국 지향의 ‘기독교적 가치관’의 인본주의적인 경향으로 타종교의 실체를 인정하는 종교적 혼합주의와 기독교 구원의 유일성을 포기하는 종교적 다원주의를 수용하므로 타락의 길을 향해 치닫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빛과 소금의 기능을 상실하고, 비기독교인들에게 버림받고 밟히는 부패한 ‘기독교적 문화’로 전락하고 있다.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과 기독교 저술은 점차 인간의 성공과 행복을 위한 종교적 도구화하고 (Tozer 2004: 122-123), 안티 기독교 세력과 비기독교 영상제작자들에 의해 기독교의 구원의 메시지는 희극화하고 있다.
각 개 교회는 지역의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예배와 전도의 거점으로서가 아니라 이웃교회와 경쟁하는 상업적 기구가 되고 있다. 교회 건물 위에는 높이 십자가를 세우고 밤에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도록 붉은 네온(neon sign)으로 불을 밝힌다. 이제는 교회끼리 경쟁하는 상업화시대가 되어 지역교회로서의 존재감을 상실한 채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도록 이른바 ‘좋은 교회’류의 상업화된 교회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교회의 십자가는 점차 장식화 되고 형식화되어 아무도 달릴 수 없는 합판제의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있다. 어두운 밤에 구원의 표지로 붉게 빛나는 수많은 네온의 십자가는 아무것도 태울 능력이 없는 싸늘한 불빛으로 남게 되고, 삼각형의 거대한 종탑은 더 이상 세상에 경종을 울리지 못하는 기묘한 장식품이 되고 있다 (진중권, 2007). 교회의 강단에서는 점차 십자가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거대한 스크린이 자리를 잡고 있다 (Tozer, 2004: 11-26). 이러한 스크린은 점차 교회가 대형화 되고 부유해지면서 거대한 검은색의 영상모니터로 바뀌고 있다.
후쿠오카(福岡)의 다자이후 텐만구(大宰府天滿宮)라는 일본 굴지의 신사에는 해마다 입시철이 되면 일본 전국에서 수많은 입시준비생들이 합격을 기원하러 모여든다. 이 신사의 본당에는 두 개의 거울이 안치되어 있는데 우선 크고 둥근 거울이 본당 전면 위쪽에 비스듬히 달려있다. 이 거울은 제단을 향해 돌아앉은 신관이 등 뒤의 돈 궤를 감시하기 위한 백미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둥근 거울이 정면 중앙에 안치되어 있는데 참배자들이 돈 궤에 돈을 넣고 이 거울을 바라보며 기원한다.
우상 숭배의 특징은 우상의 재질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 은, 동, 철, 흙, 목재, 유리, 플라스틱을 넘어 종이, 천, 심지어 티탄과 실리콘까지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다. 또한 우상 숭배는 우상의 형상에도 상관하지 않는다. 사람, 동물, 곤충, 돌과 바위와 나무, 그리고 심지어는 상상의 기묘한 형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우상숭배가 우상의 재질이나 형상에 관계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의 관심이 우상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우상을 통해 자신들의 욕망을 투영할 뿐이기 때문이다.
다자이후 텐만구의 거울우상은 이러한 우상숭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우상의 진수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어 섬기고 있는 것이다. 구차하게 형상이나 재질을 고르기 위해 고심할 것 없이 가장 단순하고 명료하고 솔직하게 우상의 본질을 드러내 놓고 있다. 그들은 이 거울 앞에서 ‘합격하고 싶다.’는 욕망을 투영하고, 그 거울로부터 ‘합격하세요.’라는 반향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여 돌아간다. ‘부자가 되고 싶다.’라고 기원하고, ‘부자가 되세요.’라는 응답을 받은 것으로 기뻐하며 만족한다.
오늘날 교회강단의 십자가를 대치하고 그 자리를 차지한 대형 검은 거울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투영하고 있는가. 내세지향적 ‘기독교 가치관’을 상실한 교회는 3백 인치 또는 5백 인치의 대형 검은 거울을 통해 현세적 욕망과 인간적 필요를 투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수천만원이 넘는 대형거울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돕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인원이 참석하고 그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예배의 필요를 돕기 위해 대형 모니터를 사용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그 거울이 고난의 십자가를 대신하여 인간의 현세적 욕망을 투영하는 우상으로 사용될 것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또한 교통이 불편한 교인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수십 대의 대형버스를 지역마다 운행하여 저인망식으로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아내가 집 주변의 개척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가던 중 길가에 대기 중인 대형교회의 버스에 자기도 모르게 타게 되었다고 한다. 교통이 여의치 않고 몸이 불편한 교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의미로 교회차량을 운행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낚싯대에 의지해 하루의 양식을 위해 고기를 낚고 있는 어부 앞에 커다란 어선으로 나타나 대형 그물을 풀어 그 지역의 모든 고기의 씨를 말리는 폭력적인 행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가 우리 버스로 우리 교인을 실어 나르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힘없는 작은 교회 목사에게 할 수 있는 그 말이 과연 하나님 앞에서도 가능한지 묻고 싶다. 힘이 있다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도 된다는 것인가. 다른 교회는 어떻게 되든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관심할 필요도 없다는 것인가.
최근에 논란이 일고 있는 목회세습에 관하여 살펴보면 목회는 성경적으로 세습이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모세에게는 여호수아가 있었고 엘리야에게는 엘리사가 있었다. 엘리에게는 사무엘이 있었고 베드로에게는 마가 요한이 있었으며 바울에게는 디모데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모두 혈연에 의한 부자관계는 아니었다. 심지어 다윗의 후계자인 솔로몬조차 온전한 의미의 아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부자의 관계를 형성하였다. 후계자들은 그들의 스승을 아버지같이 따르고 장년에 걸쳐 배웠으며 그 후계 사명을 훌륭히 감당하였다. 즉 목회세습은 혈연의 유무를 떠나 이미 부자의 관계 속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혹시 그것이 혈연관계를 통해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무조건적으로 반대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작 교회에서 목회세습이 비난받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 그것은 후계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전임자가 자신의 목회를 이어받아 계속할 후계자를 선정할 때에 충분히 준비가 되어있지않은 것을 예견하면서도 단지 혈연이기 때문에 자식을 후계자로 선정하는 경우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막대한 재정과 권력의 이양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생활보장이 안 되는 가난한 교회의 목사가 자신의 아들을 목회 후계자로 삼는다면 비난은커녕 존경과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껏 쌓아온 막대한 재산과 권력을 자신의 영향권 안에서 보존하기 위해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혈연에게 후임을 맡기려고 하는데 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리한 목회세습을 위해 교회는 민주주의 원칙을 강조하며 교회 공동체의 자주적인 결정이라고 주장한다. 목회세습의 진정한 문제점은 혈연으로 목회를 세습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후임자 결정에 민주주의 원칙을 강조하며 불법적 다수결의 횡포를 자행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목회세습에서의 문제점은 후임목회자 청빙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전임목회자가 자신의 후임으로 청빙되는 목회자에게 거액의 사례금을 요구하거나 또는 특별한 조건의 대우를 강제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불법적이고 편법적인 후임목회자 청빙은 민주적 다수결이라는 횡포로 교회 내에 세력 싸움을 일으키고 결국 교회를 분열시켜 자신이 평생 일구어온 목회의 터전을 스스로 황폐케 하는 결과를 만들게 된다.
마지막으로 교인의 이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요사이 교회들 사이에 교인의 권징과 이명이 사라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학이나 취업 등으로 이사할 경우가 아니더라도 자유롭게 교회를 바꾸는 시대가 되었다. 이른바 ‘지역교회의 붕괴현상’이다. 동일한 지역에 이미 교단의 구분 없이 많은 교회들이 들어서고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교회가 자신에게 유익한지 교회들을 순회하며 고르고 있는 형편이다. 이른바 ‘교회의 쇼핑시대’가 된 것이다 (
이러한 지역교회의 붕괴는 교회 스스로가 초래한 결과이다. 교인의 이동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권징을 포기하고, 다른 교회의 교인이 이동해 올 경우에는 이명을 상관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교회가 스스로 권위를 포기하고 교인에게 굴복한 것이다. 그것은 교회의 양적 성장을 지상과제로 삼은 결과이다. 교인의 숫자는 그대로 교회의 헌금과 연관이 있고 그것은 목사의 사회적 신분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소위 ‘목사의 계급화’가 이룩된 것이다.
이러한 교인의 수평이동과 관련하여 ‘양 도둑’이란 용어가 생겨났다. 자신의 교회에 재적하는 교인이 자신의 허락을 받지 않고 다른 교회로 옮겨 갈 때 옮겨간 교회의 목사는 졸지에 ‘양 도둑’으로 몰리는 것이다. 교인이 떠난 교회의 목사는 ‘양을 도둑맞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양은 누구의 소유이던가.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양일뿐이다. 단지 그리스도께서 그 양을 목사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성실한 목자가 되어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를 잘 양육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불성실한 목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를 자신의 소유로 생각하고 다른 목자에게 ‘양을 도둑맞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도대체 누가 양을 도둑질한 것인가. 그리스도의 입장에서는 어느 목장에서 양육되든지 그리스도의 양은 전혀 잃어버리지 않았다. 단지 그리스도의 양을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불성실한 목자만이 ‘자신의 양을 도둑맞았다’고 주장할 뿐이다.
[i] 삼종신기(三種神器)는 곡옥과 구리거울 및 청동검을 말하는 것으로 일본 텐노의 상징으로 여겨져 신성하게 숭배되어지고 있다. ‘사단의 삼종신기’는 이에 빗대어 돈과 명예와 권력을 통하여 인간세상을 지배하는 사단의 권세를 비유한 것이다.
첫댓글 목사님의 글 큰 공감을 이루며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