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감자 외 4편
하지 감자를 삶는다
툭툭 갈라지며 껍질 사이로 뜨거움을 견딘 분이 일 때 버스는 툴툴거리는 바다를 끼고 들어왔다 나간다
오지리엔 하루 세 번 밥 때가 되면 다녀가는 버스가 있다
면장 스캔들 같은 심심풀이를 싣고 왔다가 나갈 땐 갯벌 속 바지락 물무늬만 싣고 가기도 하는 그날도 외할머니는 감자를 삶아 놓고 복수에 물 찬 몸으로 점심때 들어온 버스를 타고 나갔다
삶아 놓은 감자는 식고 마루의 고양이는 파리를 쫓겠다고 앞발을 자주 들어 올렸고 널어놓은 고추는 마르면서 더 붉어지기만 했다
막차에서 외할머니는 끝내 내리지 않아 나는 대문에 기대어 어두워진 마당을 움켜쥐기만 하였다
그날의 감자처럼 감자가 식어 간다 신문
새벽을 끼고 신문지국에 간다
신문 사이사이 광고지를 끼워 무거워진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나서면
새벽공기가 신문의 헤드라인을 훑으며 지나가고 가로등 밑에서 오줌 싸던 늙은 개가 실실 따라온다
오늘의 신문은 사설社說이 사설邪說 되고 만평萬坪이 만평漫評 되려다 말았다
정치면은 진흙탕이라 뵈는 게 없고 경제면은 영혼까지 끌어다 산 주식 그래프가 땅을 치고 어제 막을 내린 프로야구는 야구공 실밥처럼 터져 순위가 바뀌었다
슬쩍 본 오늘의 운세엔 운이 새고 사회면 부고란을 보면 암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게 된다 문학과 예술은 죽은 지 오래라 들여다볼 수 없고 문화면 컬러로 실린 아이돌 가수만 조금 더 들여다보게 된다
세상엔 미끄러진 뉴스들이 더 선명할 때가 있다
지상
양배추 머리를 하고 주택가 골목 끝 양옥집 지하에 있는 자동차 부품 공장을 다닐 때였다
1층은 집주인이 수의를 지어 파는 장의사였는데 장례식장이 생기면서 일감이 줄었다고 술에 취해 돌아다니는 날들이 허다했고
흰 종이에 소나무가 독야청청한 백솔*이 집주인의 손가락 사이에서 떠날 줄 모르고 언제 풍을 맞았는지 오른손을 조등처럼 흔들고 다녔다
다른 사람 염은 내가 해 줬는데 자신의 염은 누가 해 줄 거냐며 흰 종이꽃의 주름 같은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지하는 죽어야 들어갈 곳이라던 집주인이 한 번도 내려오지 않던 공장에 내려와 밀린 월세를 독촉하던 때가 초봄이었는데
장의사는 그해 여름 막바지에 문을 닫았고 공장도 어음을 막지 못해 가을 가기 전에 부도가 났다
내가 지상으로 올라온 때도 그때였다
*백솔 : 담배 이름
쌀국수 먹으러 왔다가
휴일이 저 혼자 놀아 특근으로 눈동자가 붉어진 응우엔
오랜만에 빌려 입은 옷처럼 헐렁한 바람 안고 졸다 깬 슬리퍼를 끌고 쌀국수 먹으러 왔다가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쌀국수집 출입문이 불법 체류자로 잡혀 조사받던 출입국 관리소 철문 같아 심장이 툭 하고 떨어진다
헛걸음에 돌멩이를 걷어차다 슬리퍼 벗겨져 날아가고 해외인력 공급을 알리는 식당 담벼락의 현수막은 고향에 핀 연蓮보다 붉다
쥔 적 없는 생의 과녁은 늘 빗나가 두리번거리는 미래를 누가 건드리면 쉽게 물어 버릴 것 같다
가게 담벼락 아래 졸던 개가 날아온 슬리퍼에 맞고 벌떡 일어나 두리번거리다 다시 끙, 하고 드러눕는다
잠시 개를 바라보는 응우엔 노가리
가게마다 야외 테이블을 펴는 을지로 노가리 골목
구겨 신은 낡은 운동화 위로 석양이 내려앉는 줄도 모르고 너는 나를 기다렸고
노포*라 한동안 유명했던 ‘을지 OB베어’에서 우리는 노가리 몇 마리와 생맥주를 시켰다
연탄불을 피워 놓고 노가리를 풀어놓고
너는 후배의 승진에 열을 올리다 단숨에 몇 개의 맥주잔을 비웠고
길 건너 철공소에선 두들기고 두들겨야 제 노릇 할 수 있는 기구들이 흠씬 두들겨 맞아
한참을 바라보다 가게유리창에 붙어 있는 임대처럼 거품 빠진 생맥주는 밍밍하다는 걸 알았다
취해서 내일 출근하자마자 사표 쓰겠다는 네 말이 흘러내린 쇳물처럼 굳어 가고
노가리가 숯검댕이처럼 타 버려 이런 날도 있어야 덜 태우는 날도 있을 거라 했지만 더 이상 너를 볼 수 없었다
그 후로 나도 노가리 골목엔 가지 않았다 새카맣게 타 버릴까 봐
*노포 :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점포
| 당선 소감 |
오늘도 강둑을 걸었습니다 어제와 다른 바람으로 저녁이 오고 밤이 왔습니다 쉴 곳을 찾아 낮게 나는 멧새를 보는 날카로운 고양이의 눈빛을 보며 시를 만나려 발버둥 치던 날이 생각났습니다
시는 늘 거기에서 한 발 내 디디면 한 발 물러나고 내가 한발 물러나면 한 발 다가오고 썸 타는 연인들처럼 곁을 쉽게 내주지 않아 몸살도 여러 번 앓았습니다 여름감기를 아주 심하게 앓고 나아갈 무렵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작은 사물에 마음을 주고받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겠습니다 스치고 떨어지는 것에 묻고 답하기를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섬세한 눈으로 늘 깨어 있겠습니다
언제나 열정 가득한 이돈형 선생님과 시깡패 문우들께 감사드립니다 함께라서 시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고 행복했습니다 오래 감사할 것입니다 멀리서 응원해 주는 어벤져스 친구들 봉숙, 종철, 현주, 광명, 은정, 미경, 미숙, 영매, 영숙, 명숙, 은숙, 장씨 딸들 내 소중한 사람입니다 언제나 내 편이 돼 주는 가족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준비할 시간 없이 떠나신 엄마에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제 시를 뽑아 주신 ‘문예바다’에 감사드리며 부끄럽지 않은 시를 쓰겠습니다 | 시 부문 심사평 | 『문예바다』의 문학 저변 확대 일조
계절의 섭리란 정직하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옴이다. 『문예바다』 2023년 후반기 신인상에 경향 각지 및 해외에서까지 시 부문에 많은 분이 응모해 주셨다. 새삼 『문예바다』가 문학의 저변 확대에 일조하는 듯해 뿌듯하다. 시는 이미지에 대한 형상화가 기본이며, 언어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시선이 부분집합을 만들 때 하나의 행간이 만들어지고, 그 행간의 모임이 문장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내용과 같은 구성과 같은 서정시를 쓴다면 그것은 유니크한 개인의 사고가 멈춘 것과 같다. 개인의 인지와 사고를 성찰에 바탕을 두고 관조하는 자세로 시를 쓰는 것은 어쩌면 삶을 조망하는 진지한 접근방식일 것이다. 많은 응모작 중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을 본심 심사위원들이 다시 난상토론을 거쳐 특별한 두 분을 선정하였다. 첫 번째로 주목한 작품은 김미옥의 「하지 감자」외 아홉 편의 작품이다. 마치 서정시의 전형과 같은 질감이 일반적이며 특별한 감각을 공유한 것으로 읽힌다. 특히「하지 감자」에는 기억이 있고, 뒤안길이 있으며, 이미 지나간 삶의 반추가 있다. 그 공간을 잘 파고든 묘한 서정의 감각이 작품을 다시 보게 만든다. “나는 대문에 기대어/ 어두워지는 마당을 움켜쥐기만 하였다” 등의 감각은 미학적이며 자기 순환적 성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가벼우면서 동시에 무거운 작품이다. 같이 응모한 「신문」이라는 작품 속 화자는 “오늘의 신문은/사설社說이 사설邪說이 되고/만평萬坪이 만평漫評이 되려다 말았다” 등의 희언법을 사용하여 깊이를 더하기는 하였으나 자칫 시적 감각은 떨어져 보일 수 있음을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지상」이라는 작품은 삶의 근간을 관조하는 자세가 좋다. 그 눈시울의 깊이로 인하여 행간이 미학이 된 부분이 다수 존재한다. “다른 사람 염은 내가 해 줬는데/자신의 염은 누가 해 줄 거냐며/흰 종이꽃의 주름 같은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는 일상화된 말이기도 하며 동시에 주관을 객관화하는 화자의 깊은 메시지이기도 하다. 『쌀국수 먹으러 왔다가』에서는 이주노동자의 애환과 연민에 대한 통찰의 눈을 짐작하게 하고 『노가리』는 철공소에서 두들겨 맞는 쇳덩어리들과 노가리의 연관성을 빌려 삶의 애환을 긴장감 있게 표현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전체 작품에서 사용한 시인의 그 메시지 전달법이 요연하게 파고 들어와 깊은 성찰의 눈을 빌리게 한다. 시는 빼는 예술이라고 한다. 함축을 좀 더 염두에 두고 그림이 아닌, 구도를 볼 줄 아는 지혜로운 시인의 첫걸음을 걷길 바라며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선외의 모든 분들도 더욱 분발하시길 바라며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심사위원 : 안영희・김지명・김부회(글) 계간 『문예바다』 (2023년 가을호) 김미옥 시인 1966년 충남 서산 출생 현재 대전 맹학교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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