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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1.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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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나는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1코린9,16-19.22ㄴ-27)
형제 여러분, 16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7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2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25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27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복음<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루카6,39-42)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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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1.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09.10 21:19 2026년 9월 11일 금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6,39-42
형제의 눈 속 ‘티’ ― 본디 그리스 말로는 ‘작은 잔가지’입니다. 그런데 내 눈 속에는 ‘들보’ ― 커다란 기둥이 박혀 있습니다. 기둥이 박힌 눈으로 남의 잔가지를 빼내겠다니, 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늘 이렇게 삽니다. 남의 작은 허물은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면서, 내 큰 허물에는 눈을 감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형제의 티를 못 본 척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 주라’ ― 곧 돌보라 하십니다. 다만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네 들보를 빼내라, 그래야 티도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다’ 하십니다. 내가 먼저 맑아져야, 형제를 ‘사랑으로, 조심스럽게’ 돌볼 수 있습니다. 단죄가 아니라 치유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내 눈의 들보’란 무엇일까요? 한 사목자는 이렇게 풀이합니다. ‘형제를 바라보는 내 마음에 사랑이 없는 것’, 바로 그것이 들보라고 말입니다. 내 판단이 옳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 없이 바라보면, 그 옳음은 형제를 돌보기는커녕 찌르는 ‘무기’가 됩니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 없듯, 나 자신이 먼저 돌봄받아 맑아지지 않으면 남을 바르게 돌볼 수 없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들보 빼내기’를 한평생의 과업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그의 〈고백록〉은 남을 심판하는 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느님 앞에 낱낱이 비추어 돌본 책입니다. 그는 먼저 자기 눈의 들보를 정직하게 빼냈고, 그렇게 눈이 맑아진 뒤에야 비로소 남을 ‘단죄자’가 아니라 ‘자비로운 치유자’로 돌볼 수 있었습니다.
돌봄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돌봄에도 겸손이 필요하다’ 일러 줍니다. ‘저 사람 때문이야’라며 상대의 티만 세는 눈으로는 아무도 참되게 돌볼 수 없습니다. 돌봄은 ‘내 몫(들보)을 먼저 정직하게 돌보고, 맑아진 눈으로 형제를 사랑으로 어루만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갈라티아서의 바오로도, 한때 교회를 박해하던 ‘가장 큰 들보’의 사람이었으나 은총으로 그 들보가 빠지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남의 ‘티’는 크게 보면서 내 ‘들보’는 외면하지 않는가? 내가 형제를 바라보고 돌보는 눈에 ‘사랑’이 있는가? 나는 남을 돌보기 전에 ‘나 자신’부터 정직히 돌보는가? 나는 남을 ‘단죄’하려는가, ‘사랑으로 돌보려’ 하는가?
주님, 남의 티를 세기 전에 먼저 제 눈의 들보를 빼내게 하소서. 사랑 없이 바라보던 그 눈을 맑게 하시고, 단죄가 아니라 자비로 형제를 돌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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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1.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09.10. 15:58
믿음은 절대적 확실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흔들림 속에서도 은총 안에서 마음을 열고 걸어가는 길입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영성은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라기보다, 잃었던 것을 다시 회복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의심이 없는 신앙... 믿음은 절대적 확실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흔들림 속에서도 은총 안에서 마음을 열고 걸어가는 길입니다. 2026년 9월 10일 목요일 기도의 본질은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확실하기 때문에 드리는 데 있습니다. - 레니타 윔스(Renita Weems), Listening for God(햐느님께 귀 기울이기) 감리교 목사 리니타 윔스는 신앙을 떠난 한 여인에게서 기도에 대한 물음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면 기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그녀는 사색에 잠긴 듯 물었습니다. "믿기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제가 대답했습니다. "그건 거꾸로 들리네요. 믿지 않는데 어떻게 기도할 수 있죠?" "때로는 이성이 따라오기 전에 마음이 먼저 나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믿지 못하거나 믿음이 흔들릴 때에도, ‘믿음이 중요하다’는 사실만은 여전히 믿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더듬거리며 기도를 이어갑니다." 이 대답은 사실 제가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과 같았습니다. "당신도 의심이 있단 말인가요? 그렇다면 왜 그냥 떠나지 않죠?" "제가 이미 헌신한 수많은 것들을 쉽게 버리지 않는 이유와 같습니다. 나는 단지 감정에만 의존해 살고 싶지 않습니다. 감정은 순간마다 변합니다. 오늘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혼인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결국 사랑은 돌아옵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믿음이 돌아올 때까지 기도를 계속합니다." 윔스는 그 대화에 대해 이렇게 성찰합니다: 영성이 무엇을 의미하든간에, 그것은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잃었다가 다시 회복되는 은총입니다. 우리는 평생 수천 번 그것을 놓치고, 또 되찾습니다. 하느님, 신비, 기도에 대한 믿음 역시 단순히 "가지고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열어두려는 태도이거나, 혹은 그 열림을 거부하는 태도입니다. 그날 저와 그 여인의 차이는 단 하나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마음을 열고 싶었습니다. 무엇에 열려 있었을까요? 내 허영심보다 더 큰 무엇, 내가 조작하거나 붙잡을 수 없는 무엇,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 너머의 고귀한 무엇에 열려 있으려 했습니다. 그날 저는 부족함을 느꼈지만, 여전히 삶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더 고귀한 무엇이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을 열고 싶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자연을 통해 이런 갈망에 눈을 뜨고, 때로는 예술·음악·춤·침묵을 통해 그것을 맞이합니다. 어린이와의 만남이나 낯선 이와의 우연한 만남 속에서도 우리는 그 신비를 기억하게 됩니다. 잠시 우리는 숭고함에 사로잡히지만, 곧 그것을 잃어버립니다. 그 향기를 놓치고, 그 소리를 분간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며칠, 몇 달, 혹은 몇 해 동안 그것을 다시 붙잡으려 헤매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록 비틀거리며 걸어가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76세인 저는 최근 새로운 길을 시작했습니다. 행동 중독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돕는 간호 상담가로서의 삶입니다. 우리가 실패를 직면하고, 의심 속에서도 신앙을 허락할 때,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Patricia S. References [1] “Autobiographical Note” in Albert Einstein: Philosopher-Scientist, ed. P.A. Schilpp,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49), 45. Brian D. McLaren, Faith After Doubt: Why Your Beliefs Stopped Working and What to Do About It (St. Martins, 2021), 8, 9–1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Jenna Keiper, CAC Environment, 2019-10-09, Photograph, CAC campus, Albuquerque NM. "되어 가는 여정" 위에서 짐을 내려놓고 자기를 버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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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1.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9.11 01:55
- 목표가 없는 사람처럼 달리지 않는 나인가?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자기는 불행할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복음을 선포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그에게 벌을 주시기 때문에 불행할 것이라는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보다는 불행하면 복음을 선포하지 못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실로 불행한 사람은 복음을 선포할 마음도 없고, 선포하려 해도 선포할 복음이 그에게 없기에 선포할 수 없습니다.
복음 선포는커녕 선포할 복음이 그에게 아예 없으니 이것이 불행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우리 신앙인에겐 복음이 없다는 것은 행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자어로 복음(福音)의 ‘복’자가 행복(幸福) ‘복’자가 아닙니까?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복음이고 복음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은 복음이 있으니 행복하고, 선포할 수 없는 사람은 복음이 없기에 불행한 것이 맞는데 복음이 없기에 불행한 줄조차 모르는 사람이 실은 더 불행합니다.
이렇게 복음과 행불행의 관계를 아예 모르는 사람은 틀림없이 복음 없이도 행복한 줄 알고 살아가거나 적어도 자기가 불행한 줄 모르고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걸 모르거나 행복이 인생의 목적인 것을 알더라도 그 행복이 천상의 영원한 행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기에 참 행복이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놀랍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것이 하느님도 모르고 복음도 모르고 어떤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천하태평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런 사람은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그것을 묻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불안하지 않은 것이 참으로 놀랍고도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바오로 사도가 인생을 달리기에 비유하면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참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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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1.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09.11. 05:29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문다(쉰다)는 것~~~ 맹인이 맹인을 인도한다고요?...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일은 우리 삶 안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서로 많은 것을 공유하고, 서로를 이해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어리석은 이를 따르기가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그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문제를 만드는 것인데도,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편리함만을 보며 그것이 가져다주는 문제를 별로 의식하지 못한 채 그런 삶의 방식을 쫓아가는 모습 말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할 때, 실제로는 우리가 만들어낸 예수님의 이미지를 따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닐 수 있으며, 오히려 정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생각과 관념을 넘어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분을 설명하려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설명은 예수님에 대해 말하기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많이 드러내는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복음 묵상이나 강론을 나누는 것도 그런 일일 수 있을 겁니다만.... 어쩌면 지나치게 단순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일은 그저 그분 곁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성인들이나 신비주의자들의 믿음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학식 있는 이든 단순한 이든, 그들은 모두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고자 했던 것이지요. 대개 그들은 이 머묾에 대해 다른 설명을 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면서 그 현존이 가져다주는 지혜의 샘에서 영감을 얻어 살아갔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저 그분 곁에 있으려 노력하는 수양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물 며 그분이 우리 존재 안에서 일하시도록 맡겨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힌두교에서는 이를 삿상(satsang)이라 부릅니다. 그분의 존재에 귀 기울여 봅시다. 생각은 나중에 해도 됩니다. 지금은 생각하지 말고, 그저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묵상은 곧 삿상입니다. 나무 아래 고요히 앉아 있는 것도 삿상의 한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나무의 아름다움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이 실제로 나무 곁에 머물러 본 적이 없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무는 위대한 침묵의 존재이며, 그 곁에 있으면 우리도 침묵하게 됩니다. 토머스 머튼은 이렇게 썼습니다. "고독한 묵상의 세계를 글로 다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소나무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그 모든 것을 더 깊고 아름답게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요....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정말로 아는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이론과 생각을 말할 뿐일 수 있습니다. 머리로는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말로는 그럴듯한 설명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안에 열정과 영감, 생명력이 결여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말하는 내용을 듣되,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에도 귀를 기울이십시오. 말하는 사람 자체를 들으십시오. 종종 사람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말합니다. 말 사이에 침묵이 없다면, 또 신비의 중심에 머무는 기운이 없다면, 그 말은 큰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깊은 침묵의 순간에 우리는 '알게 됩니다'. 단순히 무엇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네 형제 눈 속의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노르웨이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속담을 말합니다. "허물을 찾으려거든 망원경이 아니라 거울을 들어라." 형제 눈 속의 티는 사실 내 눈 속의 들보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일 뿐입니다. 그 조각이 내 눈을 덮고 있으니 다른 이들의 티가 들보가 보일 수밖에요.... 예수님은 심리학이 "투사(projection)"라는 개념을 정립하기 훨씬 전에 이미 그것을 보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내면성, 곧 묵상의 친밀함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방향을 잃은 포탄처럼 되어버립니다. 결국 남을 판단하는 일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남을 판단하는 "타인" 중 하나가 되어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도 멀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남을 분석하고 판단하는 것은 에고가 만들어내는 허상입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맞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대개는 에고가 꾸며내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침묵 안에서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에 현혹되어 불안하고 힘들어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물론... 이런 에고의 이야기를 통해 그 반대의 삶을 살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여전히 현실이 아니라 허구입니다. 그래서 "분석 마비!"("Analysis paralysis!")라는 말이 있는가 봅니다. 그러니 오늘은 그저 무언가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생각의 열차를 타고 허상의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나'를 힘들게 하기보다는 그런 모든 생각과 논리를 내려놓은 채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며(쉬며) 그분의 그 무한한 사랑을 느껴 보는 시간을 잠깐이라도 가져 보면 어떨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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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911.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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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기도 1 하느님께서 들어오시는 거룩한 여백 ( 2026.08.26. 10:4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27
가난과 기도 2 팔을 벌리시는 하느님과 포옹의 사랑 ( 2026.08.27. 01:21 ) http://www.ofmkorea.org/ofmkfb/584146
가난과 기도 3 십자가를 바라보는 눈과 존재의 가난 ( 2026.08.28. 03:06 ) http://www.ofmkorea.org/ofmkfb/584207
가난과 기도 4 형제 안에서 배우는 가난과 무소유 ( 2026.08.29. 03:36 ) http://www.ofmkorea.org/ofmkfb/584312
가난과 기도 5 사랑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교환 ( 2026.08.30. 05:42 ) http://www.ofmkorea.org/ofmkfb/584342
가난과 기도 6 보게 되는 사람에서 기도가 된 사람으로( 2026.09.02. 06:35 ) http://www.ofmkorea.org/ofmkfb/584513
가난과 기도 7 가난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 2026.09.04. 19:57 ) http://www.ofmkorea.org/ofmkfb/584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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