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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14일
김대중 대통령이 대북 비밀
송금 의혹대국민담화를 발표.
“현대상선의 대북송금문제를 둘러싼 논란
으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죄송하다”
며 “현대는 대북송금 대가로 북측으로부터
7개 사업권을 얻었고, 실정법상 문제가
있음에도 평화와 국익에 도움 된다는 판단
에 정부는 수용했다”고 밝혀. 대북송금은
특검으로 이어져 정몽헌 당시 현대아산
회장이 자살하는 등 파문 지속
▶2010년이승훈, 스피드스케이팅 5000m
아시아 남자 첫 은메달
메달을 깨물어 보고 있는 이승훈.
▶2009년미국, 연쇄총격으로 4명 피살
▶2007년고려 왕릉급 무덤 강화도서 발굴
▶2007년전국 첫 주민직선 부산교육감에 설동근씨
▶2007년탤런트 윤태영·임유진 결혼식
▶2003년복제양 돌리 폐질환으로 안락사
▶2003년대북비밀송금 의혹 관련, 김대중 대통령 대국민담화 발표
▶2002년한국인 과학자가 주도한 연구팀,
고양이 복제 세계 처음으로 성공
▶1999년한국계 나오미 나리남(남나리) 전미피겨스케이팅선수권대회 2위
남나리 선수의 모습.
▶1993년브라자우스카스,
리투아니아 대통령에 당선
▶1992년헬기추락 사고로 이현부 중장 등 7명 사망
1992년 2월 14일 오전9시50분쯤 경북 선산군 장천면 상림리 산동산 중턱(해발 4백50m 8부능선)에서 육군 제3183부대 204항공대 소속 UH1H 헬기 1대가 꼬리쪽 프로펠러가 떨어져 나가면서 추락했다.
이 사고로 육군 7군단 소속 탑승장병 10명 중 군단장 이현부 중장(50), 작전참모 허정봉 대령(49), 군수참모 이원일 대령(40), 감찰참모 노용건 중령(40), 비서실장 한광진 소령(32), 부관 서상권 중위(25), 헬기 보조승무원 조규성 상병(22) 등 7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순직한 이현부 중장은 1991년 육사 20기 출신 중에서 안병호 수방사령관과 함께 가장 먼저 중장으로 진급한 선두주자였다. 서울고를 거쳐 육사를 졸업할 당시 대표화랑으로 선발됐을 만큼 두각을 나타냈으면서도, 정치에 물들지 않은 전형적인 군인으로 꼽혀왔다. 12·12나 5·17에 가담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회’ 나 6공화국에 들어 육군 실세로 급부상한 9·9 인맥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순수군인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출세코스라는 수방사­기무사대신 수도기계화사단에서 대대장­사단장을 지낸 기계화부대작전의 1인자로 통해왔다.
▶1992년샐먼 루시디, 이란정부에
사형선고 3주년맞아 도피생활 청산선언
▶1989년이란 호메이니,
‘악마의 시’ 저자 살만 루시디에 사형선고
▶1982년서울등 중부지방에 지진
▶1981년중국 신강 위구르자치구의 한 유적지에서 6470년전으로 추정되는 소녀의 시신 발견
▶1979년정부, 이란회교공화국 승인을 발표
▶1979년이란 좌익과격파, 테헤란 미대사관 습격
▶1979년내무부, 인구3만 이상의
48개읍을 준시로 개편한다고 발표
▶1979년문교부, 81년부터 고교입시에
연합고사 폐지, 내신제 적용키로
▶1979년정부, 3년 만에 최저임금제 폐지
▶1972년미국 저널리스트 에드거 파크스 스노 사망
▶1967년틀라텔롤코 조약(군사적 목적의 핵무기 실험과 보유를 금지시켜 남미 핵자유지대 설치) 조인
▶1966년공무원 거액 수뢰에 최고 사형을 규정한
`특정범죄 가중처벌에 관한 법률안` 국회 통과
▶1963년인도, 로잔결정에 항의, IOC에서 탈퇴
▶1963년재건호 열차 탈선
▶1963년미국의 원자력 잠수함 조지워싱턴호 출항
▶1963년영국 노동당수에 윌슨 피선
▶1958년이라크, 요르단과 아랍연방 결성
▶1957년농업은행법 협동조합법 공포
▶1952년제6회 동계올림픽 개막(노르웨이 오슬로)
▶1950년중국-소련,
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조인
중국-소련의 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조인.
▶1948년공창(公娼)폐지령 발효
▶1946년민주의원 개회
▶ 1946년 세계최초의 전자계산기 에니악(ENIAC) 탄생
미국 필라델피아 펜실베니아 대학 존 모클리와 프레스터 에커트 교수 팀이 3년 동안 연구해온 세계 최초의 전자계산기 「에니악」(eniac, 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alculator·전자 숫자적분 및 계산기)가 탄생했다. 하지만 에니악은 진공관들을 자주 갈아 끼워야 했기 때문에 항상 사람이 대기하며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 비용도 비쌌다.
세계최초의 전자계산기 `에니악` 탄생, 컴퓨터 시대의 개막을 초래
1946년 2월 15일 미국 필라델피아 펜실베니아 대학 특설 실험실엔 국방부 관계자와 보도진 등 200여 명이 모여있었다. 이 대학 존 모클리와 프레스터 에커트 교수 팀이 3년 동안 연구해온 세계 최초의 전자계산기 `에니악`(eniac) 완성식이 열리는 자리였다.
운영 요원 한 사람이 전원 스위치를 올리자, 에니악 내부에 있던 1만 8800개의 진공관이 일제히 깜빡이며 연산작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에니악은 `9만7367의 5천승`을 순식간에 계산, 참석자들 사이에선 탄성이 터졌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명인 컴퓨터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당시의 타임지는 "1백 명의 전문가가 1년 걸려 풀 문제를 2시간에 풀었다"며 현장의 흥분을 전했다.
20세기 후반의 정보화 혁명을 가능케 한 컴퓨터의 개발은 아이러니칼하게도 전쟁 수행을 위한 군부의 필요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다. 야포나 미사일을 발사할 때 대기온도,풍속 등에 따른 사거리를 포수들에 게 알려주는 탄도 하나를 계산하려면, 약200단계를 거쳐야 했고, 노련한 수학자가 가장 정교한 탁상계산기를 이용하더라도 7∼20시간이 소요됐다. 에니악은 동일한 작업을 30초에 할 수 있었던 것. 그러나 에니악의 영광은 너무 짧았다. 길이 30m 중량 30톤의 이 공룡 컴퓨터를 수용하기 위해선 42평 정도나 되는 큰 공간이 필요했다.
150kW의 전력을 사용하며 수만개의 진공관이 너무 많은 열을 발생시켰기 때문에 방을 에어컨으로 냉각시켜야 했다. 진공관들을 자주 갈아끼워야 했기 때문에 항상 사람이 대기하며 주의를 기울여햐 했다. 비용도 비쌌다. 당시 미 육군이 에니악 인수의 대가로 펜실베니아 대학에 지불한 돈은 48만 684달러. 50년의 시차를 무시하더라도 지금 5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1946년미군정 최고자문기관인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발족
1946년 2월 14일,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이 발족돼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는 김구와 김규식이 선임됐다. 김규식(왼쪽에서 두번째) 부의장이 발언하고 있다
▶1935년미국, 린드버그의 아들 유괴범 재판
▶1921년치과의사시험규칙 공포
▶1910년안중근 의사, 여순지방법원서 사형선고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를 접한 어머니(조마리아 여사)의 편지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 의사(1879∼1910)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독립운동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이름은 안응칠(安應七)이었다. 16세 때 카톨릭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이 우리 나라의 자치적인 외교권까지 빼앗자 안중근은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일본군과 싸웠다. 그 후 1906년에 삼흥학교(三興學校)를 1907년에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워 인재를 길러냈다.
그러던 중 한일신협약에 의해 우리나라 군대가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의병 운동에 참가하였다. 1908년 의병 부대의 참모장이 되어 일본국과 싸웠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는 30살이던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V.N.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결의,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코코프체프와 열차회담을 마치고 역전에서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던 이토히로부미에게 3발을 명중시켰다.
안중근 의사는 총을 내던지고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펼치고는 "대한제국 만세"를 불렀다. 피살사건에는 그 외에 우덕순, 주도선, 유동하가 함께 참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장에서 러시아경관에게 체포된 안 의사는 뤼순(여순) 관동군 사령부 지방법원법정에서 6회에 걸친 재판을 받았다. 안중근 의사는 러시아 검찰관 예비심문에서 거사 동기를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개인자격이 아닌 대한 의용군사령관으로서 총살하였다>고 밝혔다.
1910년 2월14일 선고공판에서 안중근 사형, 우덕순 징역 3년, 조도선.유동하 징역 1년3월이 각각 선고됐다.
1910년 2월 안중근은 변론을 맡던 안병찬 변호사에게 유언 '동포에게 고함'을 전달했는데, 이 글은 1910년 3월25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었다.
▶1896년미국, 하와이 합병조약 조인
▶1892년프랑코 스페인 총통 출생
▶1882년폴란드 피아니스트 프리드만 출생
▶1869년스코틀랜드 물리학자 토마스 윌슨 출생
▶1867년일본 발명가 도요다 사키치 출생
▶1864년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파크 출생
▶1859년오리건, 미국 33번째 주로 편입
▶1819년미국 발명가 숄스 출생
▶1793년영국 발명가 거니 출생
▶1779년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 하와이 원주민에 피살
ㆍ‘세계 탐험’ 가장 위대한 항해가
18세기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항해가였다. 전설의 땅으로 남아 있던 남극을 확인했고, 북극해에 접근했으며 하와이·이스터섬·뉴칼레도니아 등 남태평양의 섬들을 발견하고 뉴질랜드를 지도에 그려넣었다.
가난한 노동계급의 아들로 태어난 쿡은 생계를 위해 영국 해군에 입대했다. 캐나다 북부 뉴펀들랜드 탐사에서 지도 그리는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승진을 거듭해 세계 대탐사의 선장까지 된다. 쿡이 이끈 세 차례의 대항해는 백지로 남아 있던 세계 지도의 절반을 채웠다. 1767년 ‘엔데버 호’를 타고 떠난 첫 항해에서는 대서양과 남아메리카를 지나 남태평양의 섬들을 발견했다. 뉴질랜드와 타히티, 뉴기니,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가 이 때 처음으로 서구 지도에 기록됐다. 두번째 ‘레졸루션 호’ 항해에서는 남극 대륙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스터섬과 뉴칼레도니아, 바누아투, 통가 같은 남태평양의 섬들을 ‘발견’했다.
세번째이자 마지막 항해였던 ‘디스커버리 호’ 탐험에서는 호주 남단 태즈메이니아 섬에서 지구 반대편인 알래스카까지 항해했다. 북상하는 길에 하와이에 들러 ‘샌드위치 제도’라는 이름도 붙였다. 쿡 탐험대는 알래스카 최북단 아이시 케이프까지 올라갔으나 얼어붙은 북극해에 가로막혀 돌아 내려온다.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와이에 들렀던 쿡은 1779년 2월14일 원주민들에게 살해된다. 원주민들이 가져간 배의 쇠붙이를 되찾으러 다시 섬을 찾았다가 습격으로 오해한 주민들과 교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하와이 마우이섬의 케알라케쿠아베이에는 쿡의 죽음을 기리는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그가 처음으로 상륙한 카우아이섬의 와이메아 비치에는 동상도 남아 있다. 쿡은 약탈도 정당화했던 같은 시기의 다른 탐험가들과는 달리 원주민 사회와 문화에 깊은 애정을 보였다. 그가 남긴 항해 일지에는 침략자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쿡은 선원들에게 ‘원주민 문화를 존중할 것’과 ‘전염병을 옮기지 않기 위해 원주민들의 배 출입을 금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쿡의 탐험대가 다녀간 뒤 하와이 원주민의 98%가 사망했다. 서구의 질병에 면역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 미국은 우주 탐사선 OV105호와 OV103호에 쿡의 항해를 기려 ‘엔데버’와 ‘디스커버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1992년 화성을 탐사한 디스커버리호는 화성의 거대한 크레이터(운석구덩이)를 ‘쿡 크레이터’라고 명명했다.
▶1763년프랑스 장군 모로 출생
https://youtu.be/K70lu2MVzkI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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