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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69편) *
* 정조본색(正朝本色) *
정조는 팔색조 미남왕이다.
얼굴이 미남이 아니라 국왕으로서,학자로서, 문인으로서, 글을 통해 생각을 주고 받는 것을 즐긴 임금이었다.
(실제의 인물은.....장비를 생각하시라~)
그는 시간이 있으면 고전을 가까이 해 책을 보다가 밤을 새우는 일이 비일비재해서 학문의 경지는 신하들을 가르칠 정도였다
(8세 원손 시절에 쓴 정조의 편지글)
스스로를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낙관을 만들어 편지의 봉함에 찍었다고 하니 학문에 대한 그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의 만천명월주인옹 낙관) 또한 "나는 하는 일 없이 한가하게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알현을 받거나 정무를 보는 여가에는 책을 읽고, 그렇지 않으면 하다 못해 활쏘기라도 할지언정 반드시 하는 일이 있다."고 하였으니
그 부지런함에 신하들이 고달팠을 터이니 세종 만큼이나 악덕기업주 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나라를 위해 그리했겠죠
(사서 고생, 일 만들기)
정조가 좋아하는 기호품은 술과 담배였다.
술을 얼마나 즐겨 마셨나하면, 붓을 담는 필통에 술을 한가득 담아 원샷을 즐겼다고 한다.
(요거..요거 완죤 제 취향입니다
ㅎㅎ)
그것도 알코올 도수 40도가 넘는 증류식 소주를! 술을 잘 못마신 정약용이 정조 사후(死後)에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는 오늘 죽었다고 생각했다.'라 적어 놓았으니,
그날의 곤혹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붓을 담아 늫는 필통! 여기에 소주를?) 정조는 불의를 보면 '욱'하는 기질이 있었서 또한 욕쟁이 임금이기도 했다.
그 욕들의 예를 들어보자!이 사람은 (서용보) 그저 염량세태만 볼 뿐이다. 참으로 호로자식(胡種子)이라 하겠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골을 갖추지 못한 놈과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이 감히 주둥이를 놀리려 한다.
그 집 젊은 것들은 모두 개돼지보다고 못한 물건이라."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대왕만 욕을 하신게 아니었네
* 정조의 담배 사랑*
인조실록 16년(1638)의 기록에 의하면, 담배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으로 돌어와 급속히 퍼져 나갔다.
당시 조선인들의 담배 사랑은 매우 높아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팔고 사는 일이 널리 행해졌다 신윤복의 연소답청) 조선인들의 담배사랑을 여러 형태로 불리던 담배 이름을 통해 알아보자!
남초(南草) --> 남쪽에서 왔다 남령초(南靈草) --> 신비한 약효가 있다 연주(煙酒) --> 술처럼 사람을 취하게 한다 연다(煙茶) --> 차(茶) 처럼 피로를 해소 시켜 준다
상사초(相思草) --> 한번 맛보면 결코 잊을수 없다
망우초(忘憂草) ->근심을 잊게 한다
정조의 시문집은 정조 5년까지는 왕의 개인 일기 였지만, 그 후부터는 규장각의 신하들이 기록을 함으로써 나라의 공식기록이 되었다
정조 사후에도 계속 편찬작업이 이루어져 조선이 망할 때까지 쓰여졌으며, 2,329 책이 국보 153호로 지정되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정조 이후의 국왕들도 정조를 본받아 자신의 일기를 남겨야 했고, 이것이 직접 왕들이 쓴 일기로서 오늘날 과 이외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의 홍재(弘齋)는 정조의 호(號)이다.
정조의 시문, 윤음, 교지를 비롯하여 철학, 역사, 시사, 문학, 예술 등 광범위한 분야의 글을 모은 전집으로 1801년 184권으로 분류하여 1814년 간행되었다.
정조의 사상과 통치를 알아볼 수 있는 기본자료로 안의 '일득록(日得錄)'은 정조의 어록이다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70편) *
* 정조의 복수*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 아닌, 이미 죽은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아들로 입적되어 죄인의 아들이란 허물을 벗어야 했던 정조(正祖)!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의 조선 조정은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고, 이산(李祘)의 즉위를 방해한 노론들과 홍씨가문 등 외척으로 채워져 있었다.
13년간이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야심한 시각까지 깨어 있으면서,
그 위기를 훌륭한 군주가 되기 위한 밑거름으로 삼았던 정조(正祖)는 왕위에 즉위한 후 제일 먼저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莊獻)'이라고 올린 다음, 사도세자의 살해에 관련된 인물들을 손보기 시작했다.
우선 사도세자의 죽음에 가장 앞장섰던 작은 외할아버지 홍인한과 함께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을 경원부에 귀양보낸후 사사 시켰다.
정후겸은 이산이 세손시절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홍인한 등과 함께 세손의 비행을 조작하는 한편 심상운을 시켜 세손을 보호하는 홍국영을 배척한 인물이었다
(아~웃!멋져부러~ㅎㅎ)
(정후겸 - 거봐!잘난척 하지 말랬지?)
정후겸을 귀양보내던 날, 정조는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를 이간질했던 정후겸의 양어머니 화완옹주를 서녀로 강등 시켰다
또한 정조는 영조의 후궁인 숙의 문씨를 사저로 내쫓아 사사 했으며, 폐서인된 그녀는 문씨도 아닌 '문녀'라 불렀다.
그녀의 오라비 문성국 은 처형 당하고 그 어미는 여종으로 삼았다.
(흐음..제대로 된 복수이군! 사도세자의 영혼이 빙그레 미소짓겠는걸?)
정조(正祖)가 즉위년 5월에 발표한 숙의 문씨 의 죄상은 다음과 같다.
사도세자를 모함했을 뿐 아니라,
직접 세자를 죽이기 위해 궁에 불을 지르고, 자신의 소생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아이를 바꿔치기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는 것이었다.
*영조 재임시절 숙의 문씨*
숙의문씨 는 임신을 하자, 사도세자를 폐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다행히 문씨가 낳은 자식은 화길옹주와 화령옹주인 딸이었다.
이때 유척기가 이종성, 이천보와 함께 영조에게 간쟁하여 사도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영조의 뜻을 바꾸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문씨가 왕자를 낳을지 옹주를 낳을지를 확인하느라 출산 때까지 도성안에 있다가 문씨가 딸을 낳자 마음을 놓고 낙향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후 모두 사도세자의 충신으로 평가되었다.
정조(正祖)가 즉위 직후 노론과 외척의 숙청작업을 시작하자, 홍인한과 홍봉한을 비난하는 상소가 물밀듯이 올라왔다
그러나 정조(正祖)는 백 번 죽여도 시원치 않을 외할아버지 홍봉한을 차마 치죄 하지는 못했다.
홍봉한은 사도세자 제거에는 적극적이었으나, 정조의 즉위에 많은 애를 썼으며, 어쨌거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부친이었기 때문이었다 .
혜경궁은 아들 정조에 의해 친정이 박살 날 듯하자, 사도세자가 죽을 때도 하지 않았던 단식을 해가며 효자였던 정조(正祖)를 압박했다.
(이룬~ 뜨그랄! 뭣이 중한겨?)
정조(正祖)는 즉위한 지 반 년 동안 숙청작업을 마무리하여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던 인물들과 외척 들을 제거해 앞길을 다졌다.
그러나 외척의 뿌리가 워낙 깊어 발본색원 은 기대할 수 없었으니 오호~통재라!
* 노론의 살군(殺君) 모의 *
정조(正祖)가 즉위한 바로 다음해,
몰락 위기에 처한 노론은 정조가 숙청의 칼을 휘두르자 그를 암살하기로 작정했으며, 이렇게 해서 일어난 사건이 3대 모역사건이었다.
이 암살모의에는 사도세자의 처가인 홍씨 집안이 깊숙이 관련되어 당시 탐관오리의 대명사였던 홍계희의 아들 홍술해와 홍상범 부자, 홍봉한의 아들 홍낙임, 생질 이택수, 홍지해 등 홍씨 가문이 줄줄이 연루되었다.
3대 모역 사건의 첫 번째는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이 대궐에 자객을 침투시켜 정조(正祖)를 살해하려 한 사건이다.
홍상범이 천민 출신 전흥문을 돈으로 매수하고 장가를 들여주겠다고 꼬시자, 평생 거지로 살았던 전흥문은 얼른 이를 승락했다
홍상범은 대궐 호위군관 강용휘와 그의 조카인 별감 강계창, 강용휘의 딸인 나인 월혜를 포섭하여 대궐 안내와 내응을 준비하도록 했다.
전흥문과 강용휘가 무기를 들고 궁궐에 난입을 하면 홍상범이 무사20여 명을 데리고 함께 합세하기로 하였다.
이 계획은 궁궐안의 요직에 있는 인물들과 안내인까지 포섭한 살해공작 이어서 성공할 가능성이 꽤나높았다.
자객들은 안내인을 따라 경희궁까지 어려움 없이 당도하여 지붕 위로 올라간 다음 기와를 뜯어내 암살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 잠을 자지 않고 책을 보고 있던 정조(正祖)가 이상한 소리에 놀라 고함을 질렀고, 이 소리에 달려 온 정조의 호위무사들에게 발각되어 이들은 대궐 담을 넘어 달아나고 말았다.
이들은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간 크게도 다음날 다시 담을 넘다 발각되어 모조리 체포되었다
첫번째 계획이 실패하고 정조(正祖) 의 신변경호가 대폭 강화되자,
이들은 두번 째 계획에 착수했다.
무당의 주술을 빌려 정조와 홍국영을 저주로 살해하려 했는데 이 계획은 귀양간 홍술해의 처 효임이 주도했다.
당시는 주술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믿을 때였으나, 저주를 한다고 사람이 죽을 리는 없는 것!
이 사건은 암살기도 사건에 대한 조사가 대대적으로 벌어졌을 때에 일어나 금방 수사망에 포착되었고, 관련자들이 모두 검거됨으로써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에 노론은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홍계능과 홍상길이 난을 주도해 정조를 살해한 후,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전군 이찬(恩全君 李櫕)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민 것이었다.
혜경궁의 친동생인 홍낙임도 가담한 사건으로 이 역시 거사 전에 발각되어 애꿎은 은전군은 자진했고, 관려자 25명이 처형되었다.
이렇게 노론은 코너에 몰리자 왕을 죽일 정도로 막가파로 변신했다.
*정조의 개혁정치, 친위부대 장용영*
정조(正祖)의 암살 계획이 계속 드러나자 홍국영은 숙위소를 설치하여 정조의 신변보호에 나섰다.
앞뒤 모두 노론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 정조는 국정개혁을 위하여 새로운 세력을 양성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대안이 바로 규장각과 장용영이었다.
장용영 은 왕의 신변 보호를 위해 설치한 국왕 친위대로, 붕당세력의 기반이었던 기존의 체제인 5군영에 대항한 정조 자신만의 군사적 기반이었다.
조선의 군영은 5위체제로 운용되었으나, 조일전쟁 때 군체제의 무력함이 드런 5군영 체제로 바뀌었다.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으로 이루어진 5군영 체제는 각 군영의 책임자가 병조판서의 지휘를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체제이다
당시 군영에는 장수가 있지만 대신이 관할하고, 문신이 보좌했으므로 작은 진영까지도 문관이 배치되는 상황이라 무관이 설 자리가 거의 없었다.
조선 건국 초기부터 내려온 전통인 숭문천무 (崇文賤武)가 정조때 까지도 굳건히 지켜졌던 것이었다.
*요대목에서 숭문천무(崇文賤武) 에대하여 잠시 알아보고 넘어갑니다*
숭문천무는 글(학문)을 숭상하고 무예(군사)를 천시한다는 뜻으로, 한국 역사 특히 조선 시대의 통치 철학과 사회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이 사상은 조선의 건국 이념인 성리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국가 운영의 중심을 무력보다는 도덕과 예교에 두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조선은 고려 말 무신정권의 폐단과 군벌의 횡포를 경계하며 세워진 국가였습니다.
따라서 왕권과 국가 기틀을 안정시키기 위해 칼보다는 붓을 쥔 문신들이 정국을 주도하는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과거 제도에서도 문과(文科)는 최고의 영예로 여겨졌으나, 무과(武科)는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었습니다.
심지어 군 지휘관인 병마절도사 등의 요직에도 문관이 임명되어 군대를 통솔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농공상의 서열에서 '사(士)'는 곧 선비(문인)를 의미했으며, 무인은 기술직이나 하급 계층으로 치부되기도 했습니다.
중앙집권의 안정: 군사 세력의 정치 개입(쿠데타 등)을 방지하여 장기적인 왕조의 안정을 꾀할 수 있었습니다.
문화와 학문의 발달: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들이 행정을 담당하면서 기록 문화, 교육 시스템, 법전 정비 등 수준 높은 유교 문명국가를 건설했습니다.
부정적 측면 (한계)
국방력 약화: 군사 기술의 개발이나 무관의 사기 진작이 소홀해지면서 외세의 침략에 취약해졌습니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초기에 고전하게 된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됩니다.
무관에 대한 차별: 현장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무신들이 정책 결정 과정에서 소외되면서 효율적인 군사 전략 수립이 어려웠습니다.
오늘날에는 문무(文武)의 조화와 균형이 강조됩니다. 단순히 공부만 잘하거나 힘만 센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지식과 더불어 국가를 지킬 수 있는 실질적인 힘
(국방, 기술, 경제 등)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가치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사를 살필 때 이 용어는 당시의 사회적 역동성과 한계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열쇠가 됩니다.
정조(正祖)는 학문만 했던 선비 임금이 아니었다.
실상 아버지 사도세자를 닮아 무인풍이었고, 신궁이었다.
정조의 활쏘기 성적을 기록한 에 따르면 1792년 한 해동안 정조는 믿을 수 없는 기록들을 쏟아냈다.
50발을 쏘아서 49발을 명중시킨 날이 열 번이나 되고, 100발을 쏘아서 98발을 맞춘 날도 있었다
정조(正祖)가 50발을 쏘아서 49발이 명중되었다는 것은 사실 일부러 마지막 한 발을 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임금은 신하에게 겸양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라는 예가 있기 때문에 한 발은 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정조(正祖)의 활쏘기 실력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
국내의 최고수 궁도 선수들에게 정조가 활을 쏜 것과 비슷한 조건 즉, 145m 거리에 과녁을 세워놓고 선수들에게 50발씩 쏘아 보도록 했다.
국내 최고수 궁도 선수들이 쏘아도 그 거리에서는 50발 중 40발도 맞추기 힘들었으니,
정조(正祖)가 올림픽 양궁 종목에 나갔으면 금메달을 바구니에 쓸어 담았을 것이다.
정조(正祖)는 실력있는 무사를 양성하고 조선 무예의 혁신을 이루고자 했다.
그리해서 정조에게 등용된 대표적인 무사가 백동수(白東修)였다.
그는 만부부당(萬夫不當)의 용력을 지녔으며, 당대에는 그의 무예를 따를 자가 아무도 없었다.
백동수는 장용영(壯勇營)에서 군사들의 훈련을 맡았다
정조(正祖)는 사도세자의 뜻을 이어받아 무예교본인 를 펴냈는데,
이는 병사들에게 십팔기라는 무예를 보급하기 위한 병서였다.
(십팔기 무예)이 는 십팔기 무예에다 마상 무예 6기를 더해 편찬한 무예서로, 42종에 이르는 각종 무예에 관한 도해와 설명을 적은 책이다
조선에서 무관이 대우받은 것은 개국 초기를 빼면 북벌을 꿈꾸던 효종,
그리고 무를 숭상하던 정조와 흥선대원군 등 모두 서너번쯤이었다.
그외의 기간에 무관은 언제나 문관들에게 천대를 받고 지냈다.
조선은 조일전쟁, 병자호란 등을 통해 그렇게 박살이 났으면서도 망할 때까지 정신을 못 차리고 무관을 천대한, 말로해서는 도저히 안 되는 나라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