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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종교개혁 그 왜곡? 역사(교회가 숨기고 싶어하는 칼뱅의 역사)
온유와사랑 추천 0 조회 436 12.11.27 15:4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살인자 칼빈 '장 칼뱅' “무조건 믿어라”와 자율성 간의 충돌

칼뱅의 신국(神國)을 꿈꾸는 사람들


 

 

장 칼뱅(Jean Cal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불어로는 '코뱅'(Cauvin), '쇼뱅'(Chauvin). 당대 라틴어로는 '요하네스 칼비누스'로 불렸다. 영어 식으로 "존 캘빈"으로 흔히 불린다. 오른쪽 초상화는 역사상 실물에 가장 가까운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다.

칼뱅과 개신교의 도래부터 파고드는 이유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비판 카톨릭의 죄악사와 우리는 동일시 보는 것이냐라는 시각의 제원을 원천 봉쇄시키고자 하는 목적이다.

카톨릭의 죄악사부터가 아닌 칼뱅부터 다루는 이유는 물론 숫자와 역사적 죄악사의 차원이지 한명 죽인놈이나 연쇄살인범이나 똑같은 살인자라 보는 시각이기 때문이다.


[1] 살인자 장 칼뱅

흔히 장로교회의 창시자라고 일컫는 존 칼빈(John Calvin)이 극악무도한 살인자라는 사실을 오늘날의 한국의 장로교 신자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가 제네바 시의 종교개혁이랍시며 특히 그 가운데서 4년 동안 종교법원을 주관하면서 얼마나 많은 생명들을 죽였는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이들을 죽인 처형의 이유를 알고 보면 더욱 참담할 지경인데, 그 이유인즉슨 예정설, 성서의 권위 문제, 삼위일체설, 유아세례, 성만찬 등의 해석을 그 자신과 달리 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성경해석에 있어서 단 한 구절만이라도 그 해석이 칼빈 자신과 일치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몰렸고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그 숙청의 대상은 추방, 투옥, 사형 등으로 구분되었는데, 예컨대....

춤췄다고 투옥하고, 설교를 들을 때 웃었다고 투옥했으며, 부모를 구타한 소녀는 목 잘라 처형하고, 귀신 쫓는 마법사(우리식으로 하면 무당 정도)도 아예 사형시켜버렸다. 심지어 한때 자신을 구출해 준 동지마저 사형시켜 죽였는데, 그 배경에는 자신의 『기독교강요』를 비판한 점이 원인으로서 작동되기도 했었다.

(* 옮긴이 注 : 정작 칼빈보다도 더 사고의 폭이 넓은 학자로 질투의 결과로 죽음을 당한것으로 보인다. )

[2]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있다.

이런 그를 두고도 기존 기독교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칼빈의 후예를 자처하는 그룹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점이다. 이들을 일컬어 칼빈주의자라고 말한다. 흔히 “본교는 칼빈주의 정통신학에 입각하여…” 혹은 “본교회는 칼빈주의 정통신학에 입각하여…” 등등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칼빈에 두기도 한다.

내가 보기엔 허접스런 『기독교강요』서적을 무슨 위대한 신학사상서인양 떠벌리는 건 오늘날의 낡은 기독교가 자행하는 여전한 구라 중의 하나다. 그것은 매우 가소로운 아규일 뿐이다. 제 아무리 위대한 사상도 생명을 죽인 살인마저 정당화될 순 없다.

[3] 자율성

사실 칼빈도 하나의 역사적 사례일 뿐이다. 즉, 기존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그것은 무수히 숱한 오류와 비극들을 저질러왔다는 사실이다. 그 배경에는 “무조건 이렇게 믿어야 한다”는 그 강요적인 전제들이 놓여 있다.

만일 안믿으면? 안믿으면 지옥에 가는 이단으로 몰리거나 그러한 식으로 처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존 기독교에는 “무조건 이렇게 믿어야 한다”는 압박과 이에 반하는 자율성의 충돌은 어쩌면 필연적이었을만큼 인류 역사 속에서 숱한 비극들을 파생시켰다.

만일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그 어떤 전제를 필요로 할 것인가? 아니면 진리는 이미 만인을 설득하고도 남음이 있기에 그 같은 전제들이 필요치 않다고 보는가? 하나님은 존재의 자율적 결정들을 이미 강요하고 있는 분인가? 아니면 존중해주고 있는 분인가?

분명히 말하지만, 참다운 기독교라면 자율성에서 출발되어야 마땅하잖은가!

하나님은 그 자율성을 통해서 상향적이고 고양된 사태로 신성화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의 온전한 구원을 원하시지만 그것은 결코 강요적으로 접근되지 않으며 오히려 설득적으로 접근될 뿐이다. 그럼으로써 ‘자율성과 신성의 藍區?theo-autonomy)로 나아가길 바라신다고 본다. 정치도 <신정정치>theocracy가 아니라 <신-인 민주정치>theo-democracy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무조건 이렇게 믿어야 한다는 식의 강요된 전제들을 통해 서로 사분오열 갈라지고, 서로 정통과 이단을 구분해버리는 못된 습성들이 이미 뿌리 깊게 깔려 왔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솔직히 그것은 이미 우리네 일상에서도 비일비재하게 목격되고 있잖은가.

[4] 칼뱅의 사악한 독선

음악과 술이 없고, 회화 전시도 없으며, 극장과 춤이 없는 세상 게다가 에로티시즘 마저 소멸된 사회를 그대는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역사는 그러한 장소와 시기가 있었음을 안내한다. 언제나 검은 옷만을 착용했던 창백한 사나이 '장 칼뱅'이 통치했던 16세기 제네바가 바로 그곳이다. 술과 여인을 알고 즐겼던 루터와 달리 칼뱅은 최소한의 식사와 최소한의 휴식만을 허용하며 일생동안 자신의 육체를 엄격한 계율아래 가두어 두며 살았다고 한다. 자신의 육체를 배반한 사나이, 칼뱅이 신정 정치 기간 동안 행한 일들을 기억해 보자.

*춤을 추었다는 죄목으로 투옥하고,
설교를 들을 때 웃었다고 투옥하고, 부모를 구타한 소녀를 목졸라 처형하고


*자신의 교리에 맞지 않는다고 사람의 가죽을 벗기고 죽였으며(stefan zweig. op.cit.,p193)

*귀신 쫓는 마법사는 무조건 사형시키고.....

*그뿐인가 그의 신정 통치 기간 5년 동안


13명이 교수대에 목이 매달려 죽었고, 10명이 기로친에서 죽었고, 35명이 화형으로 죽었으며 76명이 국외에 추방당했다고 한다. 감옥은 만원이었으며 선고받은 사람 뿐만 아니라 단순히 혐의만 받고 있는 사람에게도 너무나 가혹한 고문이 행해졌기에 고발당한 사람들은 고문이 두려워 먼저 목숨을 끊어 자결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옮긴이 注 : 부 적절했던 칼뱅의 자라온 환경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본다 ...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었다고...)

* 유럽 각국에서 칼빈주의자들이 자행한 마녀사냥 그림중 제임스 6세(Paul Carus. op.cit. p.402-404)는 학식이 풍부한 마녀사냥의 지지자였다.

칼뱅은 성서적 폭군의 모습일 뿐이다

그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반대하였으며, 제네바의 성서적 폭군이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엄격한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즐거워서 춤을 추는 것도 범죄로 취급하여 벌을 준 사람이었다. 그의 추종자 중에는 녹스(John Knox)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주 광폭하다 할 정도로 격렬한 선교자로 자기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크리스천들이 크리스천답지 못하다 믿어, 크리스천들은 모두 칼뱅주의를 따라야 한다고 성공회로부터 일종의 종교개혁을 하려고 했고, 실제로 스코틀랜드에 장로교를 세운 사람이다.

거의 고행(苦行)생활을 해야 할 정도로 엄격했던 장로교는 철저한 가톨릭 신자였던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Mary, Queen of Scotland)이 영국 왕이 되자 녹스의 장로교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투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메리 여왕은 얼마 안 되어 처형당했기 때문에 장로교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장로교는 영국 시민전쟁 때 크롬웰(Oliver Cromwell)을 지지하고 그를 교인으로 만들었다. 전쟁에 승리한 크롬웰은 찰스 1세 왕을 교수형에 처하고, 크리스천들이 호화스럽게 즐기는 크리스마스를 불법화시켰으며, 영국 전체에 화려한 색깔과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금지하도록 하였다.

다시 말해서 칼뱅주의 장로교가 통치하는 영국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잔인하고 견디기 어려운 암흑세월이 다행히도 얼마 안 가 스튜어트 왕가에 의하여 다시 왕정이 되면서 세상이 바뀌게 되었다. 그 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던 대부분의 영국 사람들은 장로교 사람들을 몹시 증오하게 되어 일종의 보복이 시작되었고 많은 장로교인들이 처형되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장로교인들, 즉 청교도들은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대서양 건너 새 천지로 가게 되었고, 그들은 매사추세츠에 정착하여 자기네들의 자치국가를 건설했던 것이다.

당시는 영국 치하의 식민지(colony)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자기네들이 삼권을 갖고 매사추세츠를 정치했다. 현재 우리가 아는 미국 독립 이전에 존재하던 주들은 모두 이런 형식으로 조직되었던 것이 독립전쟁을 통해 각각의 주로 변모하게 되었으며, 그런 이유로 미국을 합중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청교도가 이주해 온 것이 1630년의 일이었고, 1620년에 바다를 건너와 플리무스(Plymouth)에 자리잡은 필그림(Pilgrim)의 뒤를 따라온 두 번째의 집단이민부류가 된 것이다. 필그림도 종교의 자유를 위해 신세계에 왔지만, 필그림은 성공회의 일원으로 플리무스에 정착하여 자신들의 신앙에 충실하며 조용히 산 사람들이었다.

결국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자신들만의 교회를 갖고 자기네들의 교리를 따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었던 처지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왔으나, 이들은 자기네들이 받았던 서러움을 망각하고 신대륙에서 다른 사람들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유럽에서 이미 끝난 마녀사냥을 시작하여, 이단이기 때문에 마녀이고 마녀이기 때문에 이단이란 식으로 사람들을 잡아 처벌을 했다.

예를 들어 1657년 10월 14일자로 보스턴 법정에서 공표된 한 법조문을 보면 아래와 같다.

첫번째로 잡힌 남자 퀘이커는 귀를 하나 자르고 자비로 형무소에 보낼 것이며, 두 번째로 잡히면 나머지 귀를 마저 자른다. 그리고 첫번째로 잡힌 퀘이커 여자는 심한 채찍형을 가할 것이며, 두 번째에도 같은 벌을 준다. 그리고 세 번째 잡히는 경우에는 남녀 구별 없이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혀에 구멍을 뚫고 형무소에서 노동을 하게 되며, 모든 수감비용을 지불할 때까지 형무소 노동을 하도록 한다.

퀘이커 교도들은 다른 종파와 달리 특이한 옷을 입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귀가 잘린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머리를 길게 길렀고, 귀가 있던 자리에 난 구멍을 막기 위해 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다녔다. 또 퀘이커들은 행동에서도 차이가 났다. 그들은 십일조를 유대인들의 제도라고 지키지 않았으며, 성경의 가르침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다고 절대 싸우지 않았다.

물론 인사할 때 모자를 벗지 않았다. 청교도들이 퀘이커라는 말을 인용한 법을 제정한 이유는 필경 이때 영국에서 많은 퀘이커들이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1656년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때부터 불과 4년 동안에 수많은 퀘이커들이 완전 나체로 공중 앞에서 채찍 매를 맞았으며, 번화한 길거리에 설치한 목판에 손목과 머리가 채워지는 형벌, 발을 쇠고랑에 채워 길가에 놓아두는 형벌 또는 목과 발뒤꿈치를 불인두로 지져 병신을 만드는 형벌 등을 받았다. 그리고 역사가 매콜리(Thomas Macaulay)에 의하면, 초기에는 사형시키는 방법으로 곰에게 잡혀 먹히게 하는 수법을 썼다 한다. 즉, 소위 죄인이라는 사람을 묶어 놓고, 잡아서 얼마 동안 굶긴 곰에게 잡아먹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얼마 안가 취소되었다. 그 방법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즐긴다는 점이 그들의 마음을 바꾸게 했다고 설명했다. 또 뉴헤이븐(New Haven)에서 있었던 벌주는 현장의 한 목격자가 기술한 기록에 의하면, 요란하게 북을 쳐 많은 사람들이 모이도록 하고 목판에 채워진 죄수의 웃통을 벗기고는 벌겋게 달군 인두로 이단(Heresie)라는 뜻으로 H 자를 살 깊숙이 지져 글을 새겼다고 했다. 그리고 일요일에 술 마신 사람은 가축 가운데 하루 종일 앉아 있게 하였고, 간통하다 들킨 여자들은 등에 커다랗게 간통(Adultery)이란 뜻의 첫 글자 A 자를 약 70cm 정도의 크기로 써 붙이고 정한 기간 동안 다녀야 했으며, 처음에는 복잡한 길거리에 만들어 놓은 단 위에 올라서서 여러 시간 동안 오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고 욕할 수 있도록 서 있어야 했다. 1692년은 개까지 위치라고 사형시킨 해로 유명하다.

가장 유명했던 곳은 매사추세츠 주 살렘(Salem)이란 곳으로 지금은 위치박해 박물관을 만들어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을 정도이며, 안도버(Andover)라는 곳은 두 마리의 개와 남자 위치 한 명과 여자 위치(魔女) 세 명을 사형시켰던 곳이다. 안도버의 한 진실한 청교도는 자기 부인이 이상한 병에 걸려 의사가 아무리 노력해도 병이 낫는 기세가 없자, 어떤 위치가 해코지를 하고 있다고 믿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지랄병(경기)있는 열두살 먹은 여자 아이 두명을 지명하였다. 그리고는 지랄할 때 사람이 건드려서 조용해진다면 위치라는 것이 증명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얼마 안되어 40명이나 위치라고 잡아들였다. 한 번 누가 위치라고 지목을 하면 위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어떻든 거의 백발백중 마녀잡이는 진범을 잡게 되었다.

이때 당시 안도버의 재판관으로 있던 전 주지사의 아들 브래드스트리트(Justice Dudley Bradstreet)라는 판사는 이러한 엉터리 유죄판결에 서명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급기야는 이 판사도 위치로 몰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동생 존이란 사람은 그의 개가 동네 사람을 물은 일이 있어 그 사람도 개를 정신 나가게 만들어 사람들을 해치게 하는 위치라 하였고, 또 다른 사람의 개도 마귀에 걸렸다고 잡아들였다.

판사와 그의 동생은 변명할 길이 없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듣자마자 일찌감치 다른 주로 도망가 버려 생명을 구할 수 있었으나 두 마리의 개들은 마귀에 홀린 개로 잡혀 목매다는 교수형을 받게 되었다 한다. 그 중에는 위치로 입건되었으나 혹독한 고문에도 자백을 않고 죽은 사람들도 몇 있었다. 이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자백을 하지 않는 한 위치로 판정을 내릴 수 없었고, 만일 위치로 판결이 나면 재산은 모두 차압당하기 때문에 남은 재산이라도 후대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자백을 끝까지 않고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692년에서 1693년까지 1년 사이에 150명이 위치로 입건되었으며, 그 중 20명이 사형당하고 4명은 고문으로 옥중 사망하였다 한다. 그로부터 4년 후에 자기들의 무고죄를 뉘우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중 배심원으로 있던 앤(Anne Putman)이란 여자는 불행한 때에 우리는 사탄이 덮쳐 완전히 헛것을 보게 된 것이다 라고 간증했다 한다. 그러니까 아마도 가장 진실한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였고, 이들이 오히려 진실한 크리스천들을 마귀라고 죽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혹시 이렇게 거꾸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지금 한국에는 없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닌가 한다. 이 사람들이 가장 엄한 죄인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은 다만 자기네 것과 색다른 종교를 믿었을 뿐이었다. 이것이 초창기의 장로교라는 교회의 실상이었던 것이다.

드디어 1711년에 매사추세츠에서는 신령에 의한 증거는 증거로 채택하지 못하는 법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미 위치라고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3분의 2가 판결이 번복되었으며, 지금부터 약 40여 년 전인 1957년에야 전원 판결이 뒤집혀 위치로 낙인이 찍혔던 사람들의 후예들이 명예회복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미치광이 같은 광신자들이 죄 없는 사람들을 모함하여 살인했다는 것이 번복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로 확정됨으로써 한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는 이들의 극성스러운 난동에 끌려 다니던 정부와 사법부가 독립성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며, 이로써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기 시작한 근원이 된 것이다.

오늘날 종교와 정치가 왜 분리되어야 하는지 종교가 정치의 권력을 얻게되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그에 대한 경고을 남겨주는 칼뱅은 그의 광기을 통해 오늘날 전해주고 있다.


칼뱅의 배타성과 종교개혁의 다루지않는 기독교 측에서 숨기고자 하는 역사의 이야기

"칼뱅이 종교법원을 주관한 기간이 4년간뿐이었던 것은 실로 천만다행이었다. 만일 그가 장기간 종교법원을 장악했더라면 천주교의 종교재판처럼 수많은 신도들과 학자들이 사소한 문제로 처형되었을 것이다. 또 그의 독선과 잔인성은 점증하여 천주교의 종교재판처럼 이성과 상식을 외면했을 수도 있다. 칼벵의 업적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반면에 그는 독선과 배타성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려던 수많은 형제자매들을 종교법원에서 이단이란 명목을 붙여서 사소한 일까지 트집 잡아 투옥, 추방,처형한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성직자인 그의 편협성과 잔인성이 지나쳤다는 것이 오늘의 비판이다"

칼뱅이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536-59)를 저술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신학 모형의 개요가 갖추어진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이 모형 또한 개신교의 고유한 특성인 개혁성을 상실하고 교회의 권위와 교리의 절대성을 내세우며 교조적 보수주의에 함몰하는 결과를 나타낸다.

1534년 10월 강경한 복음주의자들이 『천주교의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은 적그리스도다』란 플래카드를 파리(당시의 프랑스는 천주교국가임) 곳곳에 붙인 사건이 발생하여, 개신교(지금의 기독교) 박해가 파리 전역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칼뱅은 바젤로 피난하여 그 곳에서 『기독교 강요』 초판을 술했고(1534년), 『기독교 강요』는 개신교의 공인된 교리서가 되었다.

그 후 칼뱅은 1536년 7월 제네바의 한 여관에서, 제네바에 만연된 폐를 일소하고자 하는 파렐이라는 사람을 만나, 파렐의 강요와 득에 의하여 제네바의 개혁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리하여 칼뱅은 제네바에서 가장 큰 생피에르 교회의 부속 건물에서 개신교의 이념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한 동안 제네바를 떠났던 칼뱅은 32세가 된 1541년에 도시운영 전반에 대한 상당한 권한을 위임받고 제네바로 다시 돌아온다.

칼뱅은 제네바시를 개혁하기 위해 시의회를 설득하여 법전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자신을 책임자로 하고 5명의 목사와 6명의 장로와 집사로 구성된 원회를 설치한다. 결과 『교회 규정』이 작성되었으며, 이것이 『개혁파 교회의헌장』이 되었고, 시당국도 그것을 지지하게된다.

헌장은 이윽고 5명의 목사와 12명의 장로로서 구성된 『장로회』로 전하게된다.

장로회는 예배의 의식을 결정했고 제네바 전 시민의 풍기를 단속했으며, 적어도 일년에 한번씩 각 가정에 장로를 파견하여 조사하게 만든다.

일반 시민의 품행과 행위를 조사하여 범죄자를 엄벌에 처했던 것이다.

죄를 범한 사람은 성찬 의식에 참가할 수 없도록 했으며, 다른 사람과의 교제도 금지시켰습니다. 떤 사람은 부모를 쳤다고 해서 사형을 시켰고, 악병이 유행할 때는 점치는 남녀 점쟁이 28명을 화형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페인 출신의 세르베토라는 학자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한다”는 유로 제네바에서 체포되었고,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여 화형을 당하게된다.

1542년에서 1546년까지 4년 동안 사형을 당한 자가 무려 58명이 되었고, 추방을 당한 자가 76명이나 되었다고 교회사는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인구가 약 16,000명 미만을 헤아리는 제네바시에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사형과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칼뱅이 지배했던 스위스에서의 마녀사냥에 대한 증언

칼뱅의 사상적 영향력이 크게 미치고 있던 스위스에서의 마녀사냥 역시 영국 못지 않는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칼뱅이 지배했던 당시 스위스에서 자행된 마녀 사냥을 보면, ‘16세기 동안, 보(스위스 서부의 주)에서만도(무고하게 잡혀온) 마녀들이 년 40명 비율로 처형되었다. 인구가 고작 7백명에 불과했던 오베르 마르흐탈이라는 마을에서는 단 2년 동안 43명의 여자가 화형을 당했는데’ --(‘The Guiness Books of Historical Blunder' Geffrey Regan : ‘세계사의 대실수’ 세종서적. pp.180)라고 증언하였다.

그 비율을 보면 가히 마을마다 초토화시키는 인간사냥의 만행이 얼마나 참혹하게 이루어졌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보(스위스 서부의 주)라는 주에서만 매년마다 40명 비율로 처형했다는 것은 매일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람 잡는 것이 일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야말로 당하는 사람이나 가족에게는 하느님과 그리스도가 악마의 화신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칼뱅의 지배시기 스위스 전역에서 일어났던 마녀사냥의 희생자에 대해

‘유럽의 마녀사냥’의 저자 브라이언 레벡(Brian P. Levack)에 의하면 칼빈사상이 지배하였던 스위스에서는 8.800명 이상의 마녀가 재판을 받고 5.000명 이상이 처형되었다.’(Brian P. Levack. op.cit. p.267)고 전한다. 실로 엄청난 숫자라는 것을 이내 알 수 있다.

‘영국도 그러하지만 칼빈주의가 지배적이었던 스위스에도 영국에 못지 않는 인간사냥이 폭넓게 자행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Brian P. Levack. op.cit. p.267)

‘특히 마녀술 혐의로 재판을 받은 이들 가운데 90%가 처형되고 희생자가 2.000명이 넘었다.’(Brian P. Levack. op.cit. p.267)

'악마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면을 들어보라고 하면, 악마의 추종자들, 이교도들, 그리고 마녀로 간주되었던 자들을 처형했던 일이다.'(Paul Carus.op.cit.p.343)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칼빈에게도 노골적으로 자행되었다.

기독교 죄악사 조찬선 목사의 글들에 의하면, '칼빈은 형제를 미워하고 판단하고, 배척하는 죄를 범했다. 그는 성경을 들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죄명은 이단이었다.'(조찬선 op.cit.p.110)라고 하였다. 그리고 칼빈이 사람들을 처형하는 것을 두고 '처형을 하면 할수록 그의 권위와 명성은 더욱 높아지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처형은 승리의 상징이었고, 그래서 그는 그 일을 통해서 승리의 쾌감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사형을 서슴치 않았던 그의 행동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 같다.'(Ibid.p.109)라고 평가하였다.'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 마녀사냥이 이루어졌다.

영국이나 스코틀랜드, 그리고 스위스에서 자행된 마녀 사냥의 큰 목적 가운데 하나는 경제적인 이득과 무관치 않다. '마녀재판으로 이득을 본 사람은, 누가 마녀인지를 알아내는데 도움을 주었던 마녀 사냥꾼들이었다.'(Brian P. Levack.op.cit.p.245)는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역사가들은 마녀술 재판이 재정적 이득과 연관시키는 것을 너무 과장하는 것 같다고 비판하지만 북유럽 전역에서 재판관과 관리가 재정적인 이득을 취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마녀술 사건에서 피의자 재산은 몰수가 원칙이었고,---돈은 재판관에게 직접 지급되거나 간접적으로 법원 관리에게 지급되었다.-- 유죄인 사람의 경우 재산은 대개 이러한 재판관의 보수로 지급되었으며, 또한 지배자의 추가적인 수입이 되었다.'(Ibid.p.245)고 한다.


그리고 '마녀 사냥꾼의 수고비가 거부되었을 때(사냥으로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없었을 때) 마녀 사냥은 끝을 맺게 되었다.'(Ibid.p.245)라고 진술해 주고 있다.

마녀사냥이 계속된 것은 지배도구의 수단으로 세습된 것이다. 중세의 사실상의 마술의 종교였다는 것을 고려할 때, 마녀사냥은 목회자들의 지배권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결과였던 것이며, 마술에 대한 믿음이 지속되는 동안은 개신교 국가에서는 암흑기의 세습재산으로 지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개신교, 특히 칼빈의 수많은 살상 가운데도 그러한 성격은 충분하게 내포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시기 칼뱅의 광기에 맞선 카스텔리오라는 칼뱅의 동료 수도사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칼뱅의 광기에 대한 도전의 댓가을 혹독하게 치르게된다. 바로 죽음으로 말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똘레랑스'(관용)의 중요성을 점차 깨달아 가는 중이다. 똘레랑스를 말할 때 그 핵심적인 요소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일 것이다.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민주주의 이념에 있어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에 속한다. 그러나 분단과 냉전의 광기가 서슬 퍼렇게 살아 지배하는 이 나라에서 그러한 가치들은 지금까지 제멋대로 무시되어 왔다.

자신의 사상을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간첩', '빨갱이', '용공좌경분자'가 되어 고문받고 투옥되어야 했던 숱한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의 이야기를 접하면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당장은 놀라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폭력에 맞서다 희생된 자들을 오래도록 기억해주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큰 병폐다. 그러니 파시즘의 망령은 거듭 되살아나 시대를 비웃으며 설쳐대곤 하는 것이다.

독일의 유명한 전기작가인 츠바이크는 히틀러의 독재가 확고해지고 세계 전쟁으로 치닫던 당시에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미친 운전사인 줄도 모르고 독재자 히틀러에 열광해 마지않던 동포들에게 찬물 한 사발을 끼얹으려 함이었을까. 어쨌든 이 책은 일반에 완전히 잊혀져 있던 16세기 최고의 인문주의자이자 양심적 지식인인 카스텔리오를 부활시켜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카스텔리오는 루터와 더불어 대표적인 종교개혁가로 손꼽히는 칼뱅의 최후의 적수였다. 그런데도 칼뱅이 위대한 종교개혁가로, 장로교의 아버지로, 사람들에게 한껏 추앙받는 동안, 카스텔리오는 참으로 긴 세월 동안 거의 잊혀진 존재나 다름이 없었다. 한데 칼뱅의 폭력과 종교적 광기에 온몸으로 저항한 이 외로운 전사가 뒤늦게나마 재조명되고 있다는 사실은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감히 카스텔리오를 에밀 졸라, 볼테르, 로크, 흄 같은 사람들과 함부로 비교하려 들지 말라고. 예컨대 카스텔리오가 벌인 싸움은 칼라 사건에 대한 볼테르의 항변이나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졸라의 항변과는 한마디로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 두 사람이 카스텔리오가 살던 당시보다 훨씬 개명된 인문주의적 시대에 살았다는 사실은 놔두고라도, 그들이 타인의 운명을 위해 자신의 명성과 안락만을 걸고 싸웠을 때 카스텔리오는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것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단자에 관하여>와 같은 그의 저서를 통해서 드러난 바, "관용"에 대한 카스텔리오의 외침은 유럽에서 거의 선구적인 것에 속했다. 그럼에도 그는 마치 없었던 존재인양 부당히 취급되어 왔던 것이다.

칼뱅이 세르베토라는 박식하고 창의적인 신학자를 교리상의 이유를 들어 이단자로 몰아 화형시킨 사실은 이 책을 접하기 이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제네바시를 장악하고 성서정치(Bibliokratie)를 펴면서 많은 무리를 낳았다는 것도 대충은 알고 있던 바다.

그러나 칼뱅이 얼마나 잔인하고도 비열한 인물인지에 대한 진면목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제 보니, 그는 가톨릭과의 싸움을 빌미로 제네바시 전체를 오로지 자신의 의지만이 관철되는 파시즘적 광기로 채웠던 사람이었다.

그의 신정 통치 처음 5년 동안에 13명이 교수대에 매달리고, 10명이 목이 잘리고, 35명이 화형당하고, 76명이 추방당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감방마다 죄수로 가득차서 간수장이 시 당국에 단 한 명의 죄수도 더 받을 수 없다고 통보할 정도였을까. 이것만 봐도 종교개혁을 내세운 그의 공포정치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칼뱅은 광신적 주지주의자로 오로지 가르치려고만 했지 도저히 남에게 배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신과 조금이라도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기필코 제거해야 속이 시원했던 지독한 독선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칼뱅의 본모습을 알지 못했던 카스텔리오도 처음엔 멋모르고 그의 문하에 들어가 일했다. 그러나 칼뱅의 독재와 그의 측근들의 위선이 시 전체를 망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까놓고 문제제기 하다가 결국 제네바에서 쫓겨나고 만다. 쫓겨난 카스텔리오의 삶은 비참했다. 칼뱅보다 훨씬 위대한 학자가 칼뱅의 입김으로 일정한 직업도 얻지 못한 채 구걸을 해야할 정도가 되었고, 기껏해야 바젤의 오포린 출판사에서 교정을 보는 일로 입에 풀칠을 해야했다.

카스텔리오가 추방된 이유는 너무나 사소한 문제에 기인한다. 그가 성서를 라틴어와 프랑스어로 번역하면서 일부 용어 사용에 있어 칼뱅의 생각과 차이가 있다는 것, 아가서를 방탕한 연애의 기록으로 보았다는 것 등이다. 칼뱅은 이러한 사소한 트집을 잡아, 카스텔리오를 제네바시의 목사로 임명하기를 거부했고 끝내는 시에서 몰아내기까지 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칼뱅이 자신과 견주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는 학자 카스텔리오를 질투했다는 의심을 할 만하다.

추방된 카스텔리오와 칼뱅과의 싸움이 절정에 달한 것은 세르베토가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했다고 칼뱅에 의해 이단자로 화형에 처해진 다음부터다. 정치적 반대자들에 의해 한참 수세에 몰려 있던 칼뱅은 세르베토를 본보기로 처형하면서 그 모든 반대자들을 잠재웠다. 중세 가톨릭이 행했던 무시무시한 종교재판과 하등의 다를 바 없는 개신교 최초의 종교적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세르베토는 처참히 죽어가면서도 "예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그는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죽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삼위일체 교리에 어긋난 주장(<삼위 일체론의 오류>)과 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비판한 책(<기독교의 재건>)을 썼다고 하여 공개적인 신학적 토론 한 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비극적인 생을 마감해야 했다.

여기에 카스텔리오는 침묵을 깨고 <이단자에 관하여> <칼뱅의 글에 반대함>과 같은 글을 써서 이에 목숨을 걸고 맞서고자 하였다. 만일 이들 내용이 당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면 칼뱅은 자신의 국가권력으로 월권을 행사하여 살인죄를 저지른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 치명타를 입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만큼 빈틈없이 치밀한 내용으로 칼뱅의 잘못을 낱낱이 공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르베트 사건을 말하는 카스텔리오의 명쾌한 문장 한 대목을 읽어보자.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절대로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을 뜻할 뿐이다. 제네바 사람들이 세르베토를 죽였을 때, 그들은 교리를 지킨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을 희생시킨 것이다. 인간이 다른 사람을 불태워서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는 없다. 단지 신앙을 위해 불에 타 죽음으로써 자기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214쪽>

카스텔리오의 이와 같은 빛나는 명구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 그의 글은 칼뱅에게 별로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칼뱅의 명령에 따라 미리 행해진 검열에 의해 카스텔리오의 글들이 인쇄조차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나중엔 카스텔리오가 이단자들과 어울렸다고 하여 화형에 처해질 뻔했던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다행히 카스텔리오는 쇠약해진 몸 때문에 격렬한 위경련을 일으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그런 불행한 사태만은 모면할 수 있었다.

종교적 폭력과 광기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어떤 단일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되고 조작, 지배되는 사회가 얼마나 끔직한 파시즘을 낳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 본유의 양심과 자유는 철저히 유린당하고 만다. 그래서 저자는 결말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말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인류는 언제나 진보를 위해서 싸워야 하며, 극히 당연한 것도 새로이 의심받는다. 우리가 자유를 습관으로 여기고 더 이상 신성한 소유물로 여기지 않는 순간에 충동세계의 어둠 속에서 신비한 의지가 자라 나와 그것을 유린하려고 드는 것이다. 인류는 너무 오래 너무 근심 없이 자유를 누리고 나면, 언제나 힘의 도취에 대한 위험한 호기심, 전쟁에 대한 범죄적인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271쪽>


칼뱅주의를 따르는 신교도들은 영국과 미국에서는 조직적 측면을 강조하여 장로교회 또는 회중교회라고 부르게된다

장로교회는 평신도 중 선임된 장로가 교회 운영을 담당하며, 회중교회는 평신도 전체가 교회 운영에 참여하게된다.

한국의 장로교는 1885년 미국 북장로회에 의해 세워졌으며, 1907년 독립된 조직을 구성하면서 세계개혁교회연맹에 참여하게되었다. 한국의 개신교 교인들의 70% 가까이는 칼뱅주의를 따르는 칼뱅의 정신적인 후손들이다.

(성경)를 모르면 무조건 목사들의 말을 좇아서 신앙을 할 수밖에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칼뱅의 배타주의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믿고 따라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진리(성경 말씀)를 알아서 자유한 자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을 스스로 위배한 것이 아닐까?

고전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기독교 교파의 부패한 지도자들(목사들)의 선동에 이끌려, 서울광장 등의 반정부 집회에 동원된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나, 진리를 알지 못하여 사람들의 종이 된 자들이라 말하는 성경의 귀절들의 인간이나 칼뱅과 당시 종교인들의 모습이 무엇이 다른가?

이런 기독교인들이 예수님 당시에 살았다면, 유대교인들의 선동에 이끌려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할 자들이다.

요나서에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니느웨성의 십 이만 여명과 같이, 지금 우리나라에는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이 너무나 많듯이 악을 분별하지 못하여 사람들의 종이 되어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래서 역사적 규명과 과거 그들의 죄악사에 대한 질문들은 당연한 불가항력의 질문이며 이들에게 지난 과거에 대한 뒤돌아 봄이 필요하리라.


[5] 칼뱅의 말로

우리의 육체는 금욕만으로는 살 수 없다. 피는 뜨겁고 근육은 움직임을 부추기며 정액은 방출되기를 원한다. 타인에게 가혹했던 것 만큼 자신의 육체에게도 엄격했던 칼뱅은 결국 그 육체에게 굴복을 허용하게되는데, 편두통, 위통, 치질, 감기, 신경발작, 각혈, 담석증, 부스럼, 류마티즘, 방광염 등을 선물함으로서, 칼뱅의 육체는 칼뱅의 무리함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육체의 반란을 무시했던 칼뱅은 제네바 시민에게도 자기와 같은 길을 동행하도록 강요했다. 자신을 추방했던 제네바에게 보복의 귀향 선물을 선사한 셈이 되는데, 바로 '제네바 교회 계율'(The Ecclesiastical Ordinances of Church of Geneva)이 되겠다.

이 끔직한 저주의 선물에 의해, 제네바는 극단적인 모범도시가 되어 버렸고, 교회계율은 살륙의 정당함을 제공하는 이데올로기 역할도 하게 되었다.종교라는 이름을 내걸고 감행한 테러가 프랑스 혁명의 피의 축제보다 더 심했다고 말한 발자크의 칼뱅에 대한 평가나, 세르베토의 화형을 항의했던 카스텔리오의 위험했던 행위 그리고 칼뱅의 죽음을 축하했던 제네바 시민의 축제는 무엇을 말하는가?

[6] 칼뱅의 '제네바 교회' = 교황청?

그러나 역사는 우울하기만 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도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과 함께 기독 신학 3대 저서로 꼽히고 있는 [기독교 강요]는 칼뱅의 행위를 눈감아 주기로 하는 댓가로 충분하였나 보다. 더욱이 칼뱅이 제정한 '제네바 교회 법령(규례)'는 목사들의 밥줄을 지탱하는 금과옥조가 되기도 하였으니....(칼뱅은 교회법령에서 교회법(church oder)을 제정했는데, 교회정치는 국가의 간섭이나 그 밖에 누구의 간섭을 받을 수 없으며, 오직 목사, 장로, 집사, 교사에 의해서만 운영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는 제네바시의 종교법원을 주관했고, 그의 최종 목표는 제네바시의 신정일치와 정교일치 제도를 확립하여 교회와 시정을 신앙의 엄격한 규율로 통치하려는 것이었다.)

[7] 헌법(憲法, constitution)


오늘 현재, 대한민국의 장로교는 칼뱅의 신국을 재차 건설하길 꿈꾸고 있는 듯하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귀뜸하기로 하겠다. 한나라의 통치조직과 통치작용의 기본원리 및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근본 규범은 무엇일까? 그러하다. 국가에는 헌법이 당연히 있으며, 그 헌법은 그나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유일한 것이라야만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에는 헌법이 몇개나 있다고 한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의 헌법이 있고, 예장 합동의 헌법이 있으며 기장의 헌법도 있다고 한다. 한국 장로교의 헌법은 미북장로회와 남장로회의 것을 모방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면 이들 교파도 헌법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미안하지만 아니올시다가 되겠다.

미국 장로회는 [Book of Church Order]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미국 장로회 규범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칼뱅의 [제네바 교회 계율(The Ecclesiastical Ordinances of Church of Geneva)] 마저 헌법(憲法, constitution)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만 헌법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그리고 정부는 이렇게 무뢰한 행위를 왜 지금까지 용납하고 있을까?

헌법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장로교 계통의 교단 그리고 기하성 등의 직업 종교인들의 잠재의식에는 칼뱅의 신정정치를 꿈꾸고 지향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헌법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자체가 그러한 반증이라고 보여 진다.

이러한 의심이 기우임을 증명하려면, 지금 즉시 그 [헌법]이란 용어 대신 [정관]이라던가 [규례], [규약] 등으로 변경할 것을 강요하는 바이다. 그건 그렇고, 장로교 계통의 대표적 신학대학교인 총신대의 교육목표를 아래에 소개하겠다.

1. (지성) 성경적 신앙에 기초한 고도의 기독교 학문 수립을 추구한다.
2. (영성) 성경적 가치관에 따른 경건을 훈련한다.
3. (인성) 칼빈주의 세계관을 실천하여 사회와 교회에 봉사할 인재를 양성한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목회자들은 칼뱅의 신국을 꿈꾸면서도, 칼뱅의 금욕 생활만은 무시하기로 작정하였다는 증거가 여기저기 너무나 흔하게 드러나는 우울한 오늘이다.

 

프랑스 생피에르에 있는 칼뱅의 묘와 묘비

글을 마치며.....

칼뱅의 오점/오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거짓이 없는 양, 은연 중 100% 다 옳은 양 주장함은 잘못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칼뱅절대순수론', '칼뱅절대주의'란 있을 수 없다. 그건 한낱 우상숭배에 불과하다.

[성경은 엄연히 "살인하지 말라"고 했는데 칼뱅은 동기나 과정이야 어떻든 미구엘 세르베토를 화형으로 귀결시켰다. 카톨릭은 개혁가 얀 후스를 화형시킨 후였다. 사료와 문서에 따르면, 칼뱅은 명백히 세르베토를 계획 살인했다. 그러고도 끝끝내 회개는커녕 변명으로 일관했다.그와 함께 마녀사냥을 선두지휘하여 죄없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이런 사실을 은폐하려 들어선 안된다. 말씀의 진리와 직결된,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진리에 어긋난 것을 갖고 무조건 덮으려는 것은 사랑도 긍휼도 아닌 불의요 맹종이다. 은폐자, 공범이 되고 싶은가?


칼뱅은 훌륭한 성경 주석가요 신학자였으되 우리와 성정이 같고 대동소이한 평범한 인간이요, 신이 아니었다. 그러니 칼뱅을 우상 숭배하듯, 100% 완벽한 인간처럼 신처럼 오매불망 섬기고 추종할 성격인가? -이것이 이 글 왜곡? 종교개혁이라는 3부작의 주된 요점이다.

마찬가지로 루터역시 칼뱅과 다를바 없다.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의 이름으로 그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작업 보다는 그들을 섬기고 추종하면서 그들이 저지른 범죄와 죄악에 대해 공범이 되려는가라는 나의 질문을 기독교인들에게 던지며 왜곡? 종교개혁이라는 3부작을 이로서 끝을 볼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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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12.28 20:05

    첫댓글 감사합니다. 제가 아는 전도사님한테 물어봤을때는... 그 전도사님은 칼빈의 사상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자들이 많다고 해서 혼란이 왔었는데... 이제 정리가 좀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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