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국사시간에 "조국광복회"에 대해 간략하게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시간이 많이 흐러서 내용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북한 김일성은 자신이 조국광복회를 주도했다고 왜곡 선전하고 있다"라고
배웠던 기억은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KT(한국통신)이 후원하는 연변 조선족 역사사이트
"우리력사 바로알고 삽시다"에는 "조국광복회" 를 완전히 다르게
기록하고 있어서 관련내용을 아래에 소개합니다.
조국광복회 결성

“조국광복회”창립에 대하여 김일성회고록(제4권) “세기와 더불어”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4월말에 모든 준비를 끝마친 우리는 창립장소를 동강수림으로 내정하고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초청장을 받은 대표들이 그럭저럭 거의다 모여왔으나 꼭 참석하겠다고 답장까지
보내왔던 남만의 전광(오성륜)이 대회가 끝나도록 무슨 사정이 있었던지 오지 못하였다.
국내대표로는 강제하의 조직선을 타고 벽동에서 천도교대표와 농민대표가 왔고 온성지구의
당조직을 타고 교원대표와 로동자대표 각각 한사람씩 왔다.
력사적인 조국광복창립대회는 5월 초하루날부터 시작되였다. 꽃은 만발하지 못하였지만
만산에는 봄빛이 짙었다. 회합을 앞두고 대표들은 모두다 격정과 흥분으로 설레이였다.
통칭하여 동강회의라고 부르는 그 회의는 15일간이나 진행되였다...”
창립대회에서 김일성이 반일민족통일전선을 힘있게 전개하여 항일무장투쟁을 가일층
확대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를 진술한후 “조국광복회10대강령”(김일성 작성)과
“조국광복회창립선언”(김일성 작성)을 대회심의에 붙였다. 대표들은 심중한 토론을
거친후 강령과 선언에 대하여 전폭적인 지지와 찬동을 표시하였다. “조국광복회10대강령”은
다음과 같다.
- 조선민족의 총동원으로 광범한 반일통일전선을 실현함으로써 강도 일본제국주의의 통치를
전복하고 진정한 조선인민정부를 수립할 것.
- 재만 조선인들은 조중민족의 친밀한 련합으로써 일본 및 주구 “만주국”을 전복하고
중국령토내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진정한 민족자치를 실현할 것.
- 일본 군대, 헌병, 경찰 및 그 주구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진정하게
싸울수 있는 혁명군대를 조직할 것.
-일본국가 및 일본인 소유의 모든 기업소, 철도, 은행, 선박, 농장, 수리기관 및 매국적
친일분자의 전체 재산과 토지를 몰수하여 독립운동의 경비에 충당하며 일부분으로는
빈곤한 인민을 구제할 것.
-일본 및 그 주구들의 인민에 대한 채권, 각종 세금, 전매제도를 취소하고 대중생활을
개선하며 민족적 공, 농, 상업을 장해없이 발전시킬 것.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쟁취하고 왜놈의 공포정책실현과 봉건사상장려를
반대하며 일체 정치범을 석방할 것.
-량반, 상민 기타 불평등을 배제하고 남녀, 민족, 종교 등 차벌없는 인륜적평등과 부녀의
사회상 대우를 제고하고 여자의 인격을 존중히 할 것.
-노예로동과 노예교육의 철폐, 강제적군사복무 및 청소년에 대한 군사교육을 반대하며
우리 말과 글로써 교육하며 의문적인 면비교육을 실시할 것.
-8시간로공제실시, 로동조건의 개선, 임금의 인상, 로동범안의 확정, 국가기관으로부터
각종 로동자의 보험법을 실시하며 실업하고있는 근로대중을 구제할 것.
-조선민족에 대하여 평등적으로 대우하는 민족 및 국가와 친밀히 련합하여 우리
민족해방운동에 대하여 선의와 중립을 표시하는 나라 및 민족과 동지적친선을 유지할 것.
5일동안의 토의를 거친후 김동명(김일성), 리동백, 려운형을 공동발기인으로 조국광복회
창립선언이 채택되였다. 김일성이 조국광복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리하여
반일민족해방투쟁력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상설적인 반일민족통일전선이 탄생하게 되었다.
조국광복회의 창립은 혁명의 군중적지반을 강화하는 사업에서 획기적인 사변으로 되었다.
조국광복회가 창립됨으로써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은 항일무장투쟁과 밀접히 결합되여
보다 조직성있고 체계성있게 빨리 발전하게 되었으며 모든 반일력량을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조직동원할수 있게 되었다.
과거의 반일회, 농민협회, 부녀회 등 각종 반일단체의 조선민족을 조국광복회 두리에
묶어세워 반일에 총궐기시키게 했다. 강령에는 중조민족과 일본제국주의자와의 모순이
주요한 모순으로 된 정황하에 신변에 쌍중임무를 걸머진 동북조선족인민들이 반드시
해결하고 리행해햐 할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대외정책 등 제 방면의 문제가 명백히
제시되였으며 한 방면으로는 중국혁명에 참가해야 하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워야 하는 중조공동항일무장투쟁의 정책도 구현되여있었다.
“조국광복회는 민족주의세력을 비롯한 모든 반일력량은 한데 뭉치게 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였습니다. 과거의 계급투쟁을 버리고 평화, 민주주의기치하에 일체 항일력량을 포섭,
전민족이 항전에 떨쳐나서기 위해서였습니다. 한족들은 구국회두리에 뭉쳐 항일에
떨쳐나섰습니다.”
조국광복회창립에 대하여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지적했다.
족구광복회가 창립된후 김일성은 권영벽 등 30여명의 정치공작원을 백두산일대의 농촌에
파견하여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7월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를 결성,
리제순이 , 장증렬, 황금옥이 각기 청년부장, 부녀부장을 맡았다. 1937년초 장백현
조국광복회는 산하에 상강구위와 하강구위를 두었다.
상강구위산하에는 신흥촌, 행산, 19도구, 주경동, 대사동, 평강동, 왕가동, 치부동 등
9개 지회를 두었고 하강구위산하에는 도천리, 요방자, 14도구, 신방자, 탕성리, 태호산,
팔도구, 구도구 등 8개 지회를 두었다. 지회산하에는 49개 분회를 두었고 회원은
수천명에 달하였다.
출처 : http://www.ourac.com/bbs/view.php?id=ourhis&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