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랑 노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 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 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돠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는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시집 『가난한 사랑 노래』, 1988)
[작품해설]
이 시는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작품으로, 한 청년 노동자의 삶을 통해 가난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최소한의 인간적인 정취마저 포기하고 살아야 하는 농촌 출신 노동자의 삶과 애환을 보여 주기 위해서 시인은 다양한 표현 방법을 구사한다. 즉 시각⸱청각⸱촉각⸱복합 감각 이미지 등 다양한 감각적 이미지 사용과 동일 구문의 반복을 통한 운율 조성, 그리고 강한 호소력을 드러내기 위한 부정과 반문 활용 등의 바로 그것이다. 특히 이 시는 좀더 쉽고 친근하게 주제 의식을 전달하기 위해 평이한 시어와 화자의 직접적 진술을 사용함으로써 김수영 ⸱ 신동엽으로 대표되는 전대의 민중 시인들과는 차별화된 신경림 시 세계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화자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뒤란에 감나무가 있는 시골 고향집을 떠나 도시 변두리로 올라와 공장 노동자로 생활하고 있지만,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움과 사랑 등을 느낄 여유도 없을 만큼 힘겨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가난은 그에게서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게 하기도,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쉽게 찾아뵙지 못하게도 하지만, 그의 인간적인 정취는 빼앗아 가지는 못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에게 날이 갈수록 비정한 삶을 요구할 뿐이다.
인간적 삶을 허용하지 않는 현실의 고통 속에서 화자는 마침내 그것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가난과 갈등하면서 모든 것을 버릴 수밖에 없는 아픔을 토로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 아픔의 이면에는 아무리 경제적 가난이 크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자신의 내면세게를 황폐학 ㅔ만들 수 없다는 화자의 의지가 담겨 있다. 곧 인간적 진실의 따뜻함과 아름다움을 믿는 화자이기에 결코 현실에 자포자기하거나 자신의 삶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화자가 처한 비극적인 현실이 바로 이 같은 가난한 사랑의 노래로 승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의 ‘가난’은 단지 한 젊은 노동자 혼자만의 가난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들의 마음의 가난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물질적 결핍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화자야말로 오히려 정신적으로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 시는 도시화로 인해 소외된 민중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비인간적인 삶을 요구하는 현대 산업 사회의 가난을 짙은 호소력의 어조로 노래한다. 그럼으로써 향토적 서정 세계에서 민중의 현실적 삶과 밀착된 서정으로 변모한 이후에도 변함없이 삶의 진실을 노래하는 신경림의 작품 세계를 잘 보여 주고 있다.
[작가소개]
신경림(申庚林)
1935년 충청북도 중원 출생
동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1956년 『문학예술』에 시 「갈대」, 「탑」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74년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
1975년 고은, 백낙청, 박태순, 이문구, 염무웅 등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현의회 창립
1981년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3년 민요연구회 창립
1987년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 소장
1988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 사무총장 역임
1990년 제2회 이산문학상 수상
1991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및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 의장
시집 : 『농무』(1973), 『새재』(1979), 『새벽을 기다리며』(1985), 『달넘세』(1985), 『남한강』(1987), 『씻김굿』(1987), 『가난한 사랑 노래』(1988), 『우리들의 북』(1988), 『저푸른 자유의 하늘』(1989), 『길』(1990), 『쓰러진 자의 꿈』(1993), 『갈대』(1996),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1998), 『목계장터』(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