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리고 싶은 시절 (이와 서캐)
내 몸뚱이는 남보다 더 달작지근 하였나 보다. 여늬 사람보다 피부가 얇고 살 내음새도 더 고왔나 보다. 나는 왠일인지 유난스럽게 수시로 몸을 긁적거렸다. 겨드랑이 어깨 배 등허리 부위가 가려워서 내복 위를 손가락으로 긁거나 또는 갯말 바지가랭이 속으로 손을 넣어 불두덩이 아래를 마구 긁어야 했다. 때로는 심하게 긁다보면 살갖이 벗겨지고 핏자국이 길게 주욱 그어졌다. 손이 닿지 않는 등을 긁기 위해서는 황소처럼 등을 나무기둥의 모서리에 대고 마구 부벼서 가려움을 덜어내려 애를 썼다. 목간(목욕탕)에 자주 안 다니고 내복을 자주 안 갈아 입은 탓도 있겠으나 근본적으로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다. 사람의 몸에 기생하며 속내복 실밥 틈새에 하얗게 알을 깠다. 새끼도 금새 성충이 될 만큼 아주 번식율이 빨랐다. 보리알만큼이나 커서 소매나 옷깃의 바깥으로 스멀스멀 기여 나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체면을 일시에 깍아 내렸다. 이 해충은 살갗이 얇거나 피가 따스한 사람을 더 좋아해서 흡혈판 주둥이로 침을 박아서 흡혈했다.
1960년부터 대전으로 전학하여 시골의 어머니와는 떨어져 살았다. 나는 남보다 추위를 더 타서 겨울내내 내복을 입고 등하교를 했다. 잠 잘 무렵이면 이 때문에 심하게 온 몸을 긁적거리고 부시럭 댔다. 내 스스로 이 밉쌀스럽기 그지없는 곤충을 퇴치해야 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으면 내 방의 전등불을 끄고 잠 자는 체 했다. 미닫이 안방문 틈새에서 스며드는 흐미한 불빛 아래에서 내복을 벗어 뒤짚고 실밥의 틈새에 숨어 있는 이를 찾아내서 양 엄지손톱으로 눌러 죽였다. 툭! 소리와 함께 피가 터지면 그 소리는 참으로 더럽고 소름이 끼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이것 뿐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군식구가 많았던 작은 어머니한테 미움덩어리었던 내가 내복을 빨아 달라고 말할 염치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돌공장에서 각자(刻字)를 새겼던 외숙부는 DDT 약가루 사서 생질인 쌍둥이의 내복과 겨드랑 사타구니에 골고루 뿌려 주셨다. 당신의 몸뚱이에도 봉지 째 가루를 털어가며 허옇게 발랐다. 이 분말은 이를 잡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아주 소중한 약이었으며, 구충제를 구입해서 온 몸에 발라주는 외숙부가 그저 고맙기만 했다. 그렇게 하면 덜 가려웠다. 그러나 독한 냄새에 인상을 찡그려야 했다.
겨울방학이 되어 시골에 내려가면 어머니는 손수 이를 잡아 주셨다. 내 내복에 유난히 공을 더 들였다. 시골에서 이를 잡는 방법은 여러가지였다. 화로불 위에 내복을 펼치고 오랫동안 들고 있으면 내복이 뜨겁고 달아 올랐으며 火氣를 참지 못하고 이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화롯불 속으로 툭툭 떨어져 타 죽었다. 부엌 아궁이의 잿불 위에도 내복을 펼쳤다. 임시로 빨래한 내복을 양은솥이나 세수대야에 넣고 얼음덩어리와 비슷한 양잿물을 풀어 넣은 뒤 장작불을 땠다. 솥 안의 물이 쩔쩔 끓도록 내복을 푹푹 삶아서 때를 빨았다. 빨래를 삶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를 죽였으나 뜨거운 빨랫감 속에서도 이가 살아 있는 경우가 종종 눈에 띄었다. 참으로 그 끈질긴 생명력이였다.
어머니는 누이들의 머리를 수시로 눈여겨 보왔으며, 머리에 서캐가 실은 것 같으면 누이의 머리카락을 참빗으로 빗어 내렸다. 좁쌀보다 더 잘은 서깨가 빗질하는 참빗 틈새에 끼거나 또는 화롯불 위로 툭 떨어졌다. 서캐는 보이는 족족 엄지손톱으로 눌러 죽였다. 서캐가 많은 여자아이들은 놀림감이 되었다. 어머니는 누이들의 머리카락을 가위로 싹둑 짧게 잘랐으며, 누이의 머리채를 세수대야에 밀어넣고 자주 머리를 감겼다. 누이들이 징징 거리며 울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핀찬과 함께 등깜을 후려치는 소리이었다.
어머니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우리를 얄긋게도 때때로 방 안으로 불러 들였다. 당신의 머리카락에 쌍둥이와 누이들의 손톱을 밀어넣어서 서캐를 잡도록 시켰다. 돈을 얼마씩 준다는 말에 현혹되기보다는 어머니의 청을 들어주어야 했다. 어머니가 베개 베고 누어 계시면 그 머릿맡에서 앉아서 산발로 풀어제낀 머리 속에 손가락을 넣었다. 엄지 손톱끼리 무작위로 마구 눌렀다. 이따끔 서캐나 이가 툭 하며 배 터지는 소리가 들리면 어머니는 '어, 시원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몸뚱이에서 사는 이는 흰색인데 반하여 머리카락 속에서 사는 이는 때로는 검어서 흰색보다 더 흉물스러워 보였다. 서캐는 하얀 했다. 오랫동안 쪼그리고 앉으면 다리가 저리고 무뤂팍이 아팠다.
사람의 몸뚱이에 빌붙어서 사는 해충은 이, 서캐뿐만 아니라 빈대도 있었다. 등이 납작한 빈대는 그 크기가 보릿쌀만한 했으며 낡은 건물의 틈새와 나무벽 장판지의 안쪽에서 서식했다. 그 개체수가 참으로 많았다. 빈대는 흡혈충으로써 인내(사람 냄새)를 맡으면 어느새 피부에 달라 붙었는지 장단지나 허벅지의 피를 빨아댔다. 사람이 굼실거리며 움직일 낌새를 보이면 빈대는 순식간에 벽지 틈 새로 기여 도망쳤다. 드나드는 행동이 너무 빨라서 빈대 잡기는 무척 어려웠다. 빈대가 문 자리는 피가 벌겋게 났으며 딱쟁이가 질만큼 그 상흔은 오래 갔다. 빈대는 냄새가 아주 고약했으며 피부 색깔 역시 핏빛이여서 쳐다보는 것 조차도 증상스럽다.
빈대를 잡기 위해서는 모기 파리를 잡는 후마끼(소주병 크기의 병에 살충제를 담았음)병에 약물을 뿜었다. 약물이 비산하면서 얼굴에 묻었으며 후마끼병을 든 손에는 약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상단부 병마개에 부착된 긴 빨대를 입에 물고서 입김을 훅 불어서 분말을 벽 틈으로 뿜었다. 보다 확실한 방법은 휴대용 농약분무기(살포기)에 이피엔(EPN)을 짙게 탄 뒤 온 방구석에 맹독성 농약을 쳤다. 방문을 몇 시간씩 쳐닫아두어 빈 집으로 남겨 두었다. 나중에 방문을 다 열어제끼고 환풍을 하면서 방바닥 주변을 살펴 보면 빈대가 더러 더러 나자빠졌다. 빈대의 극성은 당분간 조금 덜 했다.
빈대가 슬그머니 없어진 것은 연료가 나무류가 아닌 연탄불을 땐 이후부터였다. 십구공짜리 연탄이 타면서 피어오르는 무색무취의 죽음의 사신, 일산화탄산가스는 방고래와 구둘장의 틈새로 스며들어서 장판과 벽지 나무 틈새에서 서식했던 빈대를 박멸시키기에는 아주 적합했다. 전혀 예기치 않은 퇴충방법이었다.
고교졸업 후 수 년간 서울에서 살았다.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나를 곤혹스럽게 했던 이(서캐, 빈대)를 서울의 하숙생활에서는 더 이상 구경하지 못했다. 아마도 대도시의 유독한 오염 탓이였으리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서캐, 빈대)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사람 몸에 빌붙어서 사는 흡혈충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이었다.
이제 서울사람이 된 나는 퇴근 후 샤워를 한다. 병적일 만큼 샤워를 좋아한다. 그 옛날 암울하고 불결했던 청소년기를 보냈던, 몸이 끈적거리고 군실거렸던, 대전에서의 기억을 말끔히 씻어내고 있었다.
1960년대와 70년대 초에 월남에 참전했던 파월장병들은 제대 후 피부암, 가려움증, 근육마비 증세를 호소했으며 병원에서는 그 발병 원인을 몰랐다. 發病源이 월남전에서 정글의 수목을 송두리째 말려 죽이려고 살포했던 제초제였음을 뒤늦게 밝혀냈다. 미군은 저공비행기로 제초제를 뿌렸으며 한국군에게도 무상보급했다. 한국 장병들은 휴대용분무기로 사용하기 귀찮아서 철모 안에 제초제를 받아서 한 웅큼씩 손으로 퍼서 수목에 직접 뿌렸다. 이 제초제가 디디티(DDT)이며 고엽제의 일종이었다. DDT는 맹독성이며 그 피해가 심하면 자손까지도 기형아로 낳는다는 극약이였다. 한국 파월장병동우회는 미국 호주에 뒤이어 뒤늦게서야 미국 민간회사로부터 승소 판결을 얻어냈으며, 1970년대 초 DMZ(비무장지대)에서 근무했던 한국의 예비역들도 군당국를 상대로 집단소송을 제기했다. 얼마 전에도 DMZ 내에서 DDT사용 여부에 대하여 민원을 제기했다. 이삼 해 전 고엽제 피해 문제를 잠시 다루었기에 저간의 사정은 지금도 짐작한다.
외숙부가 생질인 나에게 이를 잡기 위하여 뿌려주었던 흰 가루가 DDT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러나 수십 년이 경과된 지금까지 나는 말짱했다. 그러고 보니 내 피부와 살갗은 이(서캐, 빈대)에는 유약했지만 DDT에는 강했나 보다.
일전 서점에서 옛 그림 책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너덜바위에 걸터앉은 노승이 속옷에서 스몰거리는 微物을 차마 殺生하지 못하고 손톱으로 튕겨내는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 너무 해학적이였다. 노스님답게 껍질뿐인 육신을 이에게 뜯겨서 몸 보시하면 어떻까 하는 짓긋음으로 나는 느물거렸다. 그와는 달리 나는 눈에 띄는대로 족족 殺生했으므로 극락세상에 가기는 이미 글렀다. 가고 싶지도 않은 극락세계는 이미 포기했으므로, 대신 잊어버리고 싶은 시절의 前過를 밝히고자 이 글을 썼다.
2002. 1. 22.
오늘은 2017. 3. 2.
이 글 쓴 지는 벌써 15년 전이다.
그 당시에는 내가 한자어를 무척이나 많이 썼다. 그게 자랑인 줄로 알았기에.
2017년인 지금은 한자어 쓰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지금 보니, 그 당시에는 띄어쓰기, 맞춤법도 무척이나 미흡했다.
오늘, 어떤 여회원이 쓴 책, 시/에세이를 서점에서 찾아냈다.
그런데 나는 뭐 했나? 하는 반성으로 예전에 써 둔 글을 꺼내서 다듬어야겠다는 후회도 든다.
퇴직한 뒤 PC 없는 시골에서 8년 이상을 글 쓰지 않았으니 아쉽다.
많은 글감을 잃어버렸다는 아쉬움이...
산문집 내고 싶다는 생각이 꿈틀거린다.
/////////////////////////////////////////////////////////////////////
어떤 카페에 내가 이런 글 올렸나?
<이와 서캐>라는 문구로 검색하니 위와 같이 떴기에...
국보문학에는 게재되었다. 2008년도 통권 10호...
오늘은 2019. 9. 10.
무척이나 후덥지근하다.
장마... 비 내리고...
한가위 추석을 사흘 앞 둔 날인데...
오고 가는 차들이 부쩍 늘었을 터.
나는 아무 데도 가지 않는다.
위 글 속의 어머니는 4년 전인 2015. 2월 말에 돌아가셔서 지금은 흙속에 묻혔다.
육신은 흙속에, 영혼은 멀리 여행 떠나서 더욱 멀어지고 있을 게다. 억겁의 저너머로...
올 추석 차례상에 과일 몇 개 올려놓고는 내가 절을 해도... 대추 한 알, 밤 한 톨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냥 나 혼자서나 기억할 뿐...
첫댓글 추석을 맞아서 최선생님
이야기를 듣고 그 시절을
생각합니다.
제가 어린 시절 내 옷에 이를 잡던 할머니가 호롱
불에 이를 죽이던 기억이
납니다.
호롱불에 내복의 이를 갖다
대니 톡톡 터지는 소리가 들리더라구요.
옛날 생각이 납니다.
최선생님 행복한 추석
명절이 되세요.
저 어린시절에는 이와 서캐, 빈대 등이 정말로 많았지요.
살충제 DDT를 사타구니에 뿌려야 할 정도로.. 그거 맹독성으로 월남전 참가자들이 지금껏 고생하고...
이제는 이런 글은 나이 많은 사람이나 기억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