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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창세기가 전하는 요셉의 긴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창세 37,1-47.31). 야곱의 아들 요셉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그들 손에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아나 이집트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마저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요셉은 그야말로 삶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파라오의 꿈풀이를 해 주면서 당시 온 땅에 밀어 닥친 기근을 다스리는 이집트의 재상으로 곧바로 임명됩니다. 이때 자신을 죽이려다 이집트로 팔아넘긴 자기의 형제들이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로 찾아옵니다. 다음은 자신의 깊은 상처와 기구한 운명에도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는 장면으로, 이야기의 절정을 이루는 대목입니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 그러니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창세 45,4-8).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받고 용서를 하지 못한 채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소개하는 책들도 수없이 나와 있으며, 자신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라도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잘 되지 않습니다.
용서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월이 약’이라는 말처럼 시간이 가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요셉처럼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하느님 안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시간 속에서 내가 받은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그것을 당신의 은총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또한 우리가 받은 상처를 통해서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이 무엇인지를 해석해 내는 순간 요셉처럼 우리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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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인간 안에 하느님의 모습이 존재하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닮으려면 자꾸만 용서를 베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형제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될는지요?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에 대한 답으로 끝없는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용서에는 숫자가 없음을 강조하신 겁니다.
현대인들은 숫자를 참으로 좋아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숫자에 매여 살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어쩌면 정작 우리가 베풀어야 할 용서는 단 한 번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일생 닦아야 할 용서의 덕은 단 한 사람을 향한 마음일지 모릅니다.
그러한 용서일수록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한 용서일수록 순간에 생긴 미움이 아닙니다. 쌓이고 쌓인 미움입니다. 한순간에 용서될 일이 아닙니다. 그건 욕심일 뿐이지요. 그러니 미움이 생긴 만큼의 세월을 기다려야 합니다. 끝없는 용서의 길을 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즘에 신경 쓸 일들이 좀 많습니다. 7, 8월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는 있지만, 다음 주부터 있을 피정 강의 준비를 하다 보니 신경이 꽤 날카로워진 것 같습니다.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어제는 특별히 집중해서 강의를 준비하자고 다짐했는데, 아침부터 계속해서 저의 리듬을 끊어버리는 전화가 옵니다. 특히 이 전화는 저와 전혀 상관없는 불필요한 전화이기에 점점 화가 나더군요.
대출 전화, 보험 상품 안내 전화, 신용카드 가입 독려 전화, 심지어는 폰팅하자고 유혹하는 어떤 여인의 전화까지 모두 제게 필요 없는 전화였고, 저의 일을 방해하는 전화였습니다. 결국 오후에 받은 보험 상품 안내 전화에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왜 이렇게 전화를 하느냐고, 나한테는 그 보험이 전혀 필요 없다고,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화를 냈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후회가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저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전화지만, 전화를 건 사람에게 있어서 이 통화는 자기 자신의 생계와 깊은 연관이 되어 있는 중요한 전화이기 때문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전화를 하는 이 사람을 굳이 미워하고 비판하면 안 되지요.
생각해보니 하루에도 몇 차례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했고 때로는 미워도 했었음을 반성하게 됩니다. 조금만 상대방의 입장을 바라본다면 판단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을 텐데, 나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판단하기에 미움의 감정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참된 용서라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자기만족에서 오는 용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손익계산을 따져보고서 하는 용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무조건적인 용서가 참된 용서인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자신에게 잘못한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횟수인 일곱 번을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하시며,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즉, 무조건 용서하라는 명령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매일같이 죄의 탕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큰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이신데, 왜 우리들은 내게 자그마한 잘못을 한 사람을 향해 “나는 너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라고 힘주어 말할까요? 따라서 우리가 죄를 용서받고 있음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하느님처럼 무조건적인 용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용서가 어리석은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내가 약해서 용서하는 것 같고, 내가 바보 같아서 용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또한 용서하면 내가 큰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억울하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용서의 길에서 멀어지고만 싶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용서의 삶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용서함을 받기 위해 기도하거나 혹은 남을 용서하는 순간이다.(잔 홀 리히터)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양승국신부-
<용서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
‘죽음 연습을 통한 용서 연습’
용서를 주제로 강론 중이던 신부님께서 좀 더 생동감 있게 강론 좀 해보시려고 신자들에게 질문을 한 가지 던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 미워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으신 분, 한번 손 들어보세요!” 적어도 두세 명은 있겠지, 했었는데 단 한명도 손드는 신자가 없었습니다. 당황스러웠던 신부님께서 절박한 목소리로 다시 외쳤습니다. “정말 아무도 없습니까? 옆 사람 눈치 보지 마시고 소신껏 손 한번 들어보세요.” 그래도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적막감과 난감함만이 맴돌던 어느 순간, 아주 연로하신 할아버님 한분이 손을 드셨습니다. 너무나 기뻤던 신부님은 할아버님을 앞으로 모셨습니다.
“어르신, 정말 훌륭하십니다.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셨으면, 또 얼마나 열심히 용서의 삶을 실천하셨으면 단 한명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으십니까? 우리 신자들을 위해서 그 비결을 좀 말씀해주십시오.” 그 순간 할아버님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 한 마디를 던지셨습니다.
“신부님, 훌륭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세상을 너무 오래 살았습니다. 올해 제 나이가 90입니다. 원래 저도 미워하던 사람들 엄청 많았는데, 오래 살다보니 그 사람들 다 죽어버렸습니다. 용서를 하려해도 용서할 사람이 있어야지요.”
보십시오. 그렇게 어려운 용서이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하나 있는 데 그것은 바로 ‘죽는 것’입니다. 그가 죽던지, 내가 죽던지,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다 부질없어집니다. 오랜 세월 주고받았던 상처도 순식간에 아물어 버립니다. 자동으로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용서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목숨을 끊으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은혜롭게도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는 살아있으면서도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죽음의 길’이 있습니다. 마음 한번 크게 먹고, 크게 한번 뒤로 물러서면 그게 바로 죽는 길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예수님의 자기낮춤, 어처구니없이 바보 같은 사랑을 한번 실천하면 그게 바로 죽는 것입니다. 그런 ‘죽음연습’을 통해 죽기보다 힘든 용서지만 조금씩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용서만이 우리의 살 길
누군가가 가슴에 찌르고 간 비수 같은 한 마디 말을 도저히 용서하지 못해 새벽녘까지 밤잠을 설친 적이 있으십니까? 내 인생에 커다란 오점을 남긴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사연 많고 풍파 많은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누구나 몇 번씩 그런 체험을 하게 되지요.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한 순간, 통증이 아직 가시지 않은 순간, 분노로 치가 떨리는 순간,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가 안 되는 그 순간은 사실 ‘살아도 살아있지 못한 순간’입니다. 끝까지 용서가 안 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지옥입니다.
사실 지옥은 누군가가 우리를 보내서 가게 되는 그런 장소이기보다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장소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사랑이 미움 앞에서 무력하게 사라지는 순간, 속수무책으로 그 상처를 안고 숨죽여 울 수밖에 없는 순간, 우리 스스로 그 죽음과도 같은 증오의 감정을 안고 끝도 없는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곳이 지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 용서가 안 되는 그 순간 세상은 온통 회색빛입니다. 분노가 지속되는 만큼 건강도 심각한 타격을 입습니다. 명치가 답답해져옵니다. 속에 큰 돌덩어리가 하나 들어앉은 기분입니다.
‘그 인간’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확확 달아오릅니다. 어렵겠지만 어떻게 해서든 그 수렁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합니다. 정말 힘겨운 일이겠지만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있는 ‘그 인간’을 한시라도 빨리 내 속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비워야 합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우리를 향해 집요하게 용서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술 더 뜨십니다. 용서할 뿐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두 번도 아니고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이건 너무 지나친 권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건 차라리 바보가 되라는 거야 뭐야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런데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용서만이 살길이니 밥 먹듯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말고를 따질 것이 아니라 무조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용서할까 말까 고민할 것이 아니라 늘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그 순간부터 특별한 한 가지 현상이 우리의 신심을 뒤흔듭니다. 누군가가 내 안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내 삶 안에 끼어들어와 내 삶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늘 삶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삶이 부담스럽고 피곤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하느님 체험도 불가능합니다. 결국 용서만이 우리가 살길이며 용서만이 참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오 18장 21-35절).
용서 안에 활동하시는 하느님
많은 신자분들께서 제게 묻습니다. “용서를 잘 할 수 있는 비결이 혹시 없을까요?” 한 영적 스승의 가르침을 한번 귀담아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상처니, 아픔이니, 용서니 하는 말이 더 이상 우리 안에 문제되지 않게 원천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길 바랍니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잘 갈고 닦아 미움이나 분노, 실망과 좌절 같은 감정들에 더 이상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무장하길 바랍니다. 우리 내면이 튼튼하면 튼튼할수록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이나 모욕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쉽게 넘길 수 있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으며 결국 쉽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본인 자신입니다. 용서를 통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자유로워집니다. 나 자신부터 편안해집니다. 내 인생길이 활짝 열립니다. 용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가장 구체적인 현존방식입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십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십니다.
용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서로 용서를 주고받는 인간관계 안에서, 다시금 새롭게 출발하는 인간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환하게 미소 짓고 계십니다. 이웃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를 통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기쁘게 용서하십니다. 용서가 있는 곳에 하느님 사랑의 기적이 시작됩니다. 용서가 이루어지는 그 곳에서 새로운 차원의 영적 삶이 재개됩니다.
마음이 담긴 진실한 기도를 통해 용서의 길을 걷기 바랍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과거란 감옥에서 나와 이웃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과거의 아픈 기억에서 탈출한다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나와 이웃의 손에 미래란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쥐여 주는 일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두려움을 떨치고 용감하게 일어선다는 것입니다.
(생활성서사 2011년 3월호 특집 청탁 원고 '용서')

용서하는 길
-이연수-
용서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
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얼핏 보면, 상대방을 향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 누군가 용서하고, 나는 누군가로부터 용서받아야 하는 이치인 듯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인은 1만 탈렌트나 빚진 종이 애원하자, 그의 딱한 처지를 가엾게 여겨 그를 용서하고 엄청난 부채를 탕감해 줍니다. 주인,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연민과 자비, 사랑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주인으로부터 은총을 입은 종은 밖으로 나가자마자 백 데나리온밖에 빚지지 않은 동료의
청을 무참히 짓밟아 버립니다. 한 데나리온이 일꾼 하루 품삯이고 한 탈렌트가 육천 데나리온이라면, 가히 어느 정도의 차이가 나는지 짐작이 갈 터입니다.
엄청난 빚을 갚을 길 없어 절망에 빠져 있던 그에게, 주인은 그야말로 마음을
헤아려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건만. 정작 종은 자신에 비하면 개미 허리만큼도 안 되는 동료의 빚을 두고 권리를 따집니다. 이런 불의한 처사가 어디
있습니까? 권리를 따지기보다는 하느님의 크디크신 자비를 세상 끝까지
알렸어야지요. 용서받은 만큼 용서를 베푸는 게 인지상정인데. 그가 하느님의 무조건적 용서에 감읍하여 자신을 뒤돌아보고 살았더라면, 자신을 용서하고
믿는 굳건함 속에서 동료의 마음도 헤아려 그를 용서할 수 있었을 겁니다.

내가 받은 용서
-고성균 수사-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 중에는 ‘복음을 실천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대어라’,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같은 말씀은 듣는 순간에는 훌륭하고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막상 그것을 실천해야 할 때면 큰 부담을 안겨줍니다. ‘나에게 큰 상처와 고통을 준 이들을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하란 말인가!’라는 내적 저항에 부딪힙니다. 심지어 용서와 사랑의 계명이 부당하게 느껴지고, 그들이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이 참된 정의의 실현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이 요구는 어떤 위대한 사랑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진정 하느님께 용서받았다면 다른 이들을 용서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만일 ‘나는 저 사람이 내게 한 만큼의 큰 잘못을 하느님께 저지르지 않았소’, ‘하느님은 내게 그렇게 큰 자비를 베푸신 적이 없는데요’, ‘내가 하느님께 용서받는 것과 내가 저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야.’ 하며 예수님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가 아닌 자신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간접적으로 장담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정말 하느님께 용서받았습니까? 우리가 진정 우리를 용서하신 하느님의 자비에 감사드린다면, 우리 마음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을 만큼 넓어져 있을 것입니다.

용서의 횟수는 잊어버려라!
-김찬선신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여러분의 용서의 능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한 번입니까?
열 번입니까?
몇 번입니까?
고작 한 번 용서한 적이 있거나 많아도 2-3번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너무 과소평가하였나요?
과소평가하였다면 용서를 청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의 능력이 아니고 의지의 문제입니다.
베드로가 몇 번을 용서해주어야 하느냐 묻는 것은
내 능력이 한 번밖에 용서할 수 없는데
더 용서해야 되느냐는 뜻으로 묻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한 번 용서해주었는데도 같은 잘못을 수없이 범할 때
그래도 그를 계속 용서해주어야 하느냐는 질문인 것입니다.
한두 번 용서해서 안 되면 용서를 포기하고 싶은,
다시 말해서 더 이상 용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인 것입니다.
이렇게 웬만큼 용서해주고 포기하려는 베드로에게
용서는 무한정해야 하는 것임을 주님께선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횟수가 아니라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한두 번 용서로 그치지 않고 매번 용서합니다.
혹, 자식을 정신 차리게 하기 위해 용서치 않을 수 있지만
이 또한 사랑에서 비롯된 불용서이지 용서의 포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그렇게 여러 번 용서했는데도 계속 그러냐?”며
화가 나서 용서를 포기하려 하곤 합니다.
그런데 화가 난다는 것은 그 용서가 그를 위한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
나의 만족을 위한 거짓 용서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그를 위한 용서라면,
진정 사랑에서 비롯된 용서라면 용서의 횟수는 잊어버릴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모처럼 쉬는 날 큰 맘 먹고 책상을 정리했습니다. 사실 몇 주 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정리 한 번 하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책상 위에 물건 하나 놓을 틈이 전혀 없을 정도로 책과 각종 물건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마치 울창한 숲 속에서 보물 찾는 식으로 책상 위를 뒤져야 했었습니다.
저는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지저분한 물건들과 종이는 버리고 이곳저곳에 펼쳐져 있는 책은 책장 안에 배치를 했습니다. 서랍도 깨끗이 정리한 뒤에 마무리로 책상 위를 먼지 하나 없이 물걸레로 깨끗이 닦았지요.
반짝반짝 빛나는 책상과 서랍을 보면서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물론 2~3일 뒤 면 다시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오겠지만(이 글을 쓰는 순간 보니 벌써 예전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 순간의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책상은 내 몸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즉, 내 몸이 아닌데 그리고 내 몸과 연결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 기분을 좋게 만들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내가 아닌 책상을 닦고 책상 위를 청소했지, 내 몸을 청소한 것이 아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분은 마치 내 몸을 직접 닦은 듯한 상쾌함이었습니다. 책상을 깨끗하게 청소했으니 책상이 내게 기분 좋다고 감사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나 스스로가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 자체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와 관계없는 것들을 통해서도 내가 행복해 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 주위에는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요? 따라서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들과 더 친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적을 만들면 만들수록 우리가 원하는 행복과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하긴 누군가를 미워하면 기분이 좋습니까? 마음이 지옥처럼 변하고 말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어떻게든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오늘 복음을 통해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말씀하셨지요. 용서하는 사랑이야말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나와 상관없다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나한테 잘 해주는 사람만, 나에게 이득이 될 만한 사람만 가까이하고 받아들이겠다는 편협한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그보다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즉, 차별 없는 사랑, 희생하는 사랑, 아낌없이 나누어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 안에서 참으로 행복하고 편안하고 자유로워 질 것입니다.
샘물은 강물과 섞이고, 강물은 바다와 섞이고, 하늘의 바람은 언제나 달콤한 감정과 어울린다. 세상에 홀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P.B.셸리).

용서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윤원진 신부-
‘용서’란,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용서해주신 그분께 답례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나를 아프게 한
그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섣불리 달려드는 용서는 그 사람과
나의 마음에 더 큰 생채기를 남기며 이전보다 더욱 거리감을 느끼게
할 뿐입니다. 나의 가슴이 미어지도록 속상할 때면 때로 하느님의 심정이
이해됩니다. 사람은 자신과 같은 모습을 보면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시집살이 독하게 한 며느리가 더 무서운 시어머니가 되듯, 우리도 내 서글펐던
마음을 나보다 못한 이 위에 군림함으로써 위로받고, 그 위에 서서
내가 받은 상처를 주고자 하는 심리가 있습니다.
이때에 하느님을 기억하십시오. 마음 상한 당신은 지금 하느님의 가슴입니다.
“용서해주면 반성하지 못하고 또 그러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던 마음은
그분께서 우리에게 느끼신 그 사랑입니다.
용서하기란 너무 어렵지만,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병상련
- 안소근 수녀-
몇 년 동안 외국에서 살면서 저는 두 가지를 배웠습니다. 하나는 저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도움을 베풀어 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난한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집회서
4장 1절의 “궁핍한 눈들을 기다리게 하지 말라.”는 말씀에도 깊이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도움을 청하고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거저 주는 도움으로 살아가는 처지가 어떤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원고 교정을 위해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감히 청할 수도 없었던 제 지도 신부님이 스스로 알아서 남은 일을 다 맡아주셨습니다.(실제로 3주 이상이 꼬박 걸리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일거리를 들고 갔을 때 신부님은, 예전에 저와 같은 처지였을 때 당신의 지도 신부님께서 그렇게 도와주셨다는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그분이 나에게 그렇게 해주셨으니 나도 너에게 똑같이 해주겠다.”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그분이 받은 도움에 깊이 감사하고 계셨고 또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제 감사하는 마음도 잘 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임금에게 빚을 탕감받은 종이, 진심으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감사했다면 어떻게 자신의 동료에게 그렇게 무자비하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의 태도는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부족했음을 보여줍니다. 내가 형제를 용서할 수 없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받은 용서가 얼마나 크고 은혜로운지를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애쓰기 전에, 하느님께 또 사람들한테서 받은 은혜를 기억해 봅시다. 주는 것은 거기에서 저절로 흘러나올 것입니다.

신비주의
-전삼용신부-
저의 동기신부는 자신이 자라면서 아버지에게 야단 한 번 안 맞아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있는 앞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말썽꾸러기였다고 합니다. 친구 4명이 초등학교 때부터 근방에서 하도 유명하여 경찰들까지 이름을 다 알 정도였다고 합니다. 싸움도 많이 하고 사고도 많이 쳐서 누구도 못 말리는 사고뭉치들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떨던 무섭던 십대였지만 결혼하여 가족들에게만은 큰 소리 한 번 안쳤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워낙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기 때문에 자녀에게 뭐라 할 처지가 아닌 것을 본인이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결혼을 해서도 자주 사고를 치셨는데, 한 번은 깡통에 구멍을 뚫고 그 안에 나무에 불을 붙여 넣고 철사 줄을 달아 빙빙 돌리는 대보름 밤에 하는 불놀이를 하다가 아버지가 그 것을 잘못 던져 다른 집 창고에 불을 내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이 거 네가 했다고 해라. 잘만 하면 끝나고 맛있는 거 사줄게.”하면서 아들을 훈련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주인들 앞에서 아들을 마구 혼내며, “아이고, 내가 이 놈 때문에 못 살아요. 매일 사고만 치고. 정말 죄송하고 손해 보상해 드릴게요.”라고 하며 엉덩이를 때렸습니다. 아들도 나름 연기를 잘 했습니다. 그래서 창고 주인이, “괜찮아요. 애들이 그럴 수 있죠. 앞으로는 조심해서 놀아라”하고 일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 주인이 보이지 않는 곳에 두 부자가 당도하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잘했어. 아들. 맛있는 거 사 먹으러 가자.”라고 말하고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모든 부모가 다 그렇지는 않지만 이 아버님은 당신이 자녀들을 야단 칠 처지가 못 됨을 아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용서는 몇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의무임을 일깨워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예화를 하나 말씀하십니다.
왕이 한 신하에게 일만 탈란트를 탕감하여 주었지만 그 종은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둡니다. 그래서 왕도 화가 나서 그 종에게 탕감해 주었던 빚을 다시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게 된다는 결말입니다.
일 탈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일 데나리온은 일꾼의 하루 품삯입니다. 만약 하루 품삯을 50,000원으로 친다면 친구가 빚진 100데나리온은 5백만 원이고, 왕이 탕감해 준 액수는 3조 원에 해당합니다.
3조 원이란 누가 빌려주고 탕감해 줄 액수가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지은 죗값이고 이는 인간의 힘으로는 갚을 수 없는 액수입니다. 그 죗값을 하느님 스스로 인간이 되어 피를 흘리셔서 대신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갈 운명의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5백만 원이란 인간들끼리 서로 잘못하여 짓는 죗값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작은 잘못들까지 용서하지 못한다면 하느님도 ‘정의’상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 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 하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가만히 들어보면 자신도 많은 죄를 짓고 그것을 하느님께 용서를 받으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직까지는 ‘내가 참 죄인임을 깨닫고 있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정의로워 진다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커다란 자비를 입었으니 나도 자비를 베푸는 것을 당연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해서 더 편안해지는 사람은 본인 자신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 미움 때문에 몇 배의 고통을 더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용서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많은 경우 다른 사람이 직접적으로 나에게 잘못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하는 행동이나 말이 마음에 안 들어 그냥 미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사람을 판단하고 미워하는 것은 내 안에 죄가 있어서 그 죄책감을 상쇠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죄인으로 만드는, 어쩌면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입니다. 혹은 내가 내 안에 누르고 있는 것들을 그 사람이 자유롭게 사는 것을 보고 화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결국 감추어진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됩니다.
심판은 하느님에게 맡겨드립시다. 유일한 심판관은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의 위치에 있는 교만입니다.
얼마 전에 눈이 가장 아름다운 배우로 프랑스의 이사벨 아자니가 뽑혔습니다. 그 이유는 눈빛이 매우 신비롭고 아름답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사벨의 눈이 신비로운 이유는 눈이 좋지 않아 초점이 맞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눈이 잘 안 보이지만 그냥 굳이 얼굴을 찌푸려가며 초점을 맞추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남들이 볼 때는 눈이 아름답고 신비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유명한 인상주의 화가 모네의 작품 중 ‘수련’이란 작품은 그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명작으로 치고 있습니다. 모네는 나이가 들면서 시력을 점점 잃어갔습니다. 이 수련이란 작품도 정원을 눈이 안 좋은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보고 그린 것입니다. 굳이 보이는 것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면 그것 또한 인상적이고 아름다운 예술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고 판단하고 초점을 맞추려하기 때문에 눈이 찌푸려지고 보이는 사람도 또 보는 나도 추하게 되고 그렇게 주름이 늘어가는 것입니다. 초점을 맞추고 판단하는 것은 주님께 맡겨드립시다. 그리고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하지 맙시다. 그러면 신비로운 세계가 열리고 나까지 신비롭고 아름다워집니다.

새벽을 열며
여러분, 달팽이의 속도가 어떻게 될까요? 시속 1Km? 100m? 아니면 1m? 놀라지 마십시오. 달팽이의 속도는 시속 50Cm라고 하네요. 어마어마한 속도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느리게 달리는 달팽이들도 나름대로의 지혜를 가지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 즉, 다른 달팽이가 지나간 길로만 다닌다고 하네요.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점액 분비량을 30%로 줄일 수가 있으며, 소모 에너지도 1/30 밖에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속도를 가지고 있는 달팽이들도 이러한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지혜의 시작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이시지요. 이렇게 자그맣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달팽이에게조차도 좀 더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당신께서 가장 사랑한다는 우리 인간에게는 어떠하실까요?
바로 그 지혜를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 각자에게 건네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사실 베드로는 용서에 대해서 일곱 번 정도 용서하면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결국 끝없는 용서를 해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사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결국은 자기 손해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할 때, 내 심정은 어떠했었는지? 저는 이제까지 남을 미워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불편한 마음과 불안함으로 인해서 힘들어 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쉽게 살 수 있는 지혜를 우리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앞선 말씀드린 달팽이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지혜를 철저히 따릅니다. 안 그러면 자기들이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떤가요?
운전을 하다가 도로의 끝에서 “길 없음. 돌아가시오.”라는 메시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내가 가겠다는데 어떻게 할 거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메시지를 무시한다면 어떨까요? 길이 없기에 큰 사고와 위험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바로 주님도 이 표시를 우리 곁에 수없이 해놓고 계십니다.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아니니까 되돌아가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시 되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었어요. 너무나 많이 와 버렸는걸요?”라는 말로써 되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늦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완고한 것이겠지요.
내 안의 완고함을 버리고 주님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쉽게 살아가는 지혜의 시작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용서하세요.
빠다킹신부

용서받은 기억
-상지종신부-
어제는 두 달만에 고해성사를 받았습니다. 모든 성사가 은총이 충만한 아름다운 것이지만, 고해 성사가 특히 그러하다는 체험을 가끔씩 합니다. 용서하기는 어려워도 용서받고 싶은 것이 저의 인간적인 심성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구렁텅이에서 헤매고 있을 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누군가가 구렁텅이에서 건저내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용서이지요. 선뜻 용서를 청할 용기는 없지만 누군가 용서를 해 준다면 하늘을 날듯이 기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체험입니다. 고해성사는 바로 이 체험의 자리입니다.
고해성사에서 죄 고백이 끝난 후 사제는 보속을 주고 사죄경을 외웁니다. 그리고 파견을 하지요.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언뜻 보면 별 의미없는 마침 인사 정도로 들리기도 하지만, 참으로 깊은 뜻이 담겨있다는 것을 오늘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죄의 언저리에서 헤매고 있던 적은 없는지 생각해 봅니다. 만약 이런 경우가 있었다면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죄를 용서받았는지 아닌지 의심이 가는 경우일 겁니다.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과 죄의 댓가를 치르는 것은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죄의 댓가를 치르는 것이 두려워 용서받았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용서받은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음을 아시기에 조건없이 용서를 베푸시지만 인간적인 조건에 얽매여 살아가다 보니 용서를 체험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용서할 자신도 부족합니다.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다시한번 하느님의 용서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죄의 사슬을 끊고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화해와 평화의 삶을 살도록 초대하는 파견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가슴을 펴고 세상 안으로 들어갑니다. 죄로 물든 세상 안으로 말이지요. 용서를 통해 죄를 녹이라는 사명을 받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주님처럼 그렇게 용서하십시오."
사제의 파견 인사는 바로 이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얼마나 이 말씀처럼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많이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주님의 용서에 대한 강한 체험이 부족한 까닭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주님의 용서에 대한 체험을 잊기 때문입니다. 용서받았음을 잊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렇게도 자주 용서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잊어버립니다. 그러니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요.
가끔씩 용서받은 기억을 떠올려 보고 싶습니다. 단지 그 순간의 기쁨이나 평화로 돌아가 머물고자 함이 아닙니다. 용서할 힘을 얻기 위함이지요. 용서받은 순간의 말 못할 기쁨을 항상 지니고 있는 사람만이 용서를 통해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이 기쁨을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용서받은 기억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탕감
-임문철 신부-
하느님의 사랑은 완전하시며, 무조건적이십니다. 그런데도 마치 조건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죄의 용서에 관한 부분일 것입니다.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저희 아버지는 중년의 나이에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하시고 난 뒤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그동안 목재상을 경영하시면서 다른 사업체도
많이 가질 정도로 꽤나 성공하셨는데, 부도가 난 뒤 우리 가족이 살던 건물도
은행으로 넘어가고 셋방살이를 하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재기를 하려고 무척이나 애쓰셨지만 워낙 자본이 없어서 헛고생만 하셨습니다.
죄의 용서는 히브리 말로 빚의 탕감과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하느님께 빚진 것으로, 갚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때 아버지가 그 큰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누군가가 도움을 주셨다면
아버지의 기쁨이 어떠했을까 생각해봅니다. 또 우리 식구들의 기쁨은
어떠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 고마운 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려 들지 않았을까요?

용서 안에 미소 짓고 계신 하느님
-양승국신부-
용서(容恕)란 단어처럼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요?
살다보면 백번 깨어나도, 천 번 마음을 고쳐 먹어봐도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 소중한 인생을 완전히 파멸시킨 그 ‘인간’, 내 소중한 사랑을 앗아간 그 사람, 나를 지근지근 짓밟은 그 ‘짐승’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성경은 집요하게 용서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술 더 뜨십니다. 용서할 뿐만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한번 두 번도 아니고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이건 너무 지나친 권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건 차라리 바보가 되라는 거야 뭐야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렇게까지 용서와 관련해서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용서가 영성생활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영성생활뿐 아니라 육체의 건강, 더 나아가서 정신건강에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특히 어머님들에게 많이 발생하는 독특한 병이 있습니다. ‘화병’입니다. 소화불량, 두통, 불면증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점점 죽음으로 몰고 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 원인을 추적해 올라가보면 용서란 중요한 작업을 소홀히 했거나 서툴었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즉시 우리는 심리적 정서적 균형을 잃게 됩니다. 그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에 연연하기 시작할 때, 즉시 끔찍한 내면의 고통이 시작됩니다.
결과적으로 그 ‘인간’으로 인해 내가 내 인생을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그 ‘인간’이 내 삶을 좌지우지합니다. 마음이 늘 불편합니다. 신체의 모든 장기들이 원활하게 가동될 리 없습니다. 즉시 이런저런 신체적 질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신앙생활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절실한 하느님 체험은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기도에 집중하려해도 집중이 안 됩니다.
용서란 참으로 어렵고도 험난한 작업입니다. 용서(容恕)란 단어의 용(容)자는 ‘받아들임’을 나타냅니다. 서(恕)자는 상대방을 뜻하는 如(여)자와 심(心)자로 이루어져있으니 결국 상대방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헤아린다는 뜻입니다.
용서란 말은 내 입장에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는 일입니다. 내 시각이 아니라 상대방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일입니다. 상대방이 지니고 있는 나름대로의 고충을 참작해주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이해해주는 일입니다. 큰마음 먹고 다시 그를 받아들여주는 일입니다. 다시 한 번 새롭게 그와의 관계형성을 시작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위대한 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일이 용서입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큰 용기와 결단력이 필요합니다. 큰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토록 어려운 일이기에, 용서를 실천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큽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참 평화가 찾아옵니다. 새로운 관계 형성이 시작되는 만큼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속적인 용서의 과정이 우리 내면 안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네 삶을 즉시 휘청거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함으로 인해 우리 영혼에 퇴적되는 갖은 독소들-적개심, 증오심, 복수심, 미움, 폭력성, 분노...-은 언젠가 반드시 부메랑처럼 우리에게 되돌아와 우리 영혼을 갉아먹을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 가장 큰 이익을 보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본인 자신입니다. 용서를 통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자유로워집니다. 나 자신부터 편안해집니다. 내 인생길이 편해집니다.
용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가장 구체적인 현존방식입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십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십니다. 용서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당신의 극진한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때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인간 상호 관계 안에서 찾을 필요도 있습니다.
서로 용서를 주고받는 인간관계 안에서, 다시금 새롭게 출발하는 인간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환하게 미소 짓고 계십니다.

용서할 수 있는 능력
-전의이 수녀-
셈하기 좋아하는 우리의 마음은 간장종지만하다. 그래도 베드로는 제법 큰 간장종지 마음을 지녔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자신의 넉넉함을 은근히 내비친다. “주님,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여라.”
빗물 한 방울이 태평양의 바닷물과 만나면 어떻게 될까? 주님께선 한량없는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살면서도 자기 동료의 작은 죄를 용서해 주지 못하는 간장종지 같은 마음을 지닌 우리에게 이르신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고. 필경 어떤 이는 한 번, 두 번, 세 번 하며 이번이 몇 번째인지 헤아릴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금 알아들으라고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당시 헤로데 임금의 1년 수입이 구백 탈렌트였다고 하니 만 탈렌트는 당시 화폐가치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액수다. 이 엄청난 빚을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안 임금은 전액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은 자신한테 작은 빚을 진 동료의 애원을 뿌리치고 감방에 가두었다. 하느님께 죄를 탕감받은 우리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형제의 눈에 든 티를 끄집어 내겠다고 야단법석 이다. 주님께선 형제에게 인색한 우리에게 다시금 엄중히 말씀하신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6)라고. 우리는 왜 무한히 넓은 용서의 바다에서 하나 되지 못하고 간장종지를 고집하고 있는가?
만 탈렌트를 탕감받고도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 종은 결국 감옥에 갇히고 만다. 하늘에서 아무리 많은 비를 내려주어도 받을 사람이 항아리 뚜껑을 닫아놓고 있다면 담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 전혀 없다면 아무리 많은 은총이 부어져도 소용이 없다. 마찬가지로 많은 은총이 쏟아져 내려오지만 우리 안에 그분의 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용서의 은총을 맛볼 수 없다. 용서할 수 있는 힘은 나보다 훨씬 크신 분이 내 안에 오셔야만 가능하다. 그분이 우리 안에 오셔서 일하셔야 한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한다.”고 고백하였다.

몇 번씩 용서?
-김광태 신부-
보통 사람이 세 번을 꼽는데 비해, 너그러움을 과시하면서 일곱 번까지 용서할 것처럼 말하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초라해집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문맥으로 보면 예수님께는 용서의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좀 더 근원적인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우리에게 다른 사람의 죄를 문제 삼을 자격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한 탈렌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하며, 한 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 하루 품삯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고려하여 1만 탈렌트를 오늘날의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노동자의 일당을 5만 원씩으로 계산하면 3조 원에 이릅니다. 현금 천만 원을 조달하기 힘든 서민들의 형편은 말할 것도 없고,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아도 그 정도의 빚을 상환한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합니다. 즉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영원히 빚쟁이라는 것입니다.
본래 창조 이야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무엇을 가지고 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바로 우리가 존재론적인 가난을
이야기하는 근거입니다. 동료가 빚진 백 데나리온, 즉 5백만 원이 적은 액수라서 문제 삼지 말라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어떤 것이 커보일 때마다 눈을 돌려서 하느님 쪽을 바라보아야 배은망덕한 행위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을 용서해주면서 자기의 너그러움에 스스로 도취하는 착각에서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들을 용서해야 할까요?
-임영숙 -
기가 막혔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 순간 수녀님이 전화를 하셨을까요? 35년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좋을지 하느님께 간절히 여쭙는 기도를 막 마친 순간 전화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성서묵상’ 원고 청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원고 쓰는 일이 직업이었다지만 매일성서묵상은 기도를 해야만 쓸 수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한 달 동안 끙끙거리다가 수녀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제발 이 일(일이 아니라 기도입니다만)을 면제시켜 주세요”라고 간청하고 싶었지만 결국 내 입에서 나온 소리는 “한 달만 연기해 주세요”였습니다.
그리고 미뤘던 숙제를 다시 집어든 순간 ‘맙소사’ 싶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가 제게 주어진 첫번째 과제였으니까요. 차라리 지난 달 매일성서묵상을 쓸 걸 그랬구나 하는 후회도 들었습니다. 아무리 꼼수를 부려도 하느님은 도저히 피해갈 수 없다는 생각을 새삼 다시 하게 됐습니다.
그렇지요. 용서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요? 저는 마음속에 분노를 감추고 사는 편입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분노를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잊어버리거나 무시하면서 상대방을 용서했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묵상을 시작하면서 저는 제가 용서해야 할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묵상을 할수록 여러 사람이 떠오르는군요.
어떻게 그들을 용서해야 할까요? 우선은 그들을 위한 기도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 일만 달란트나 빚진 주제에, 그래서 매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있으면서도 제게 백 데나리온밖에 빚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빚 갚기를 재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직도 제가 받을 빚이 더 크게 보이니 말입니다. 하느님, 용서해 주세요.

- 최종수 신부-
언제부턴가 개를 안고 다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애완견은 가족보다 더 소중한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애완견을 아들이나 친구처럼 품고 다니는 사람들에게서
그만큼의 외로움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내성적이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렵기에 애완견을 친구처럼 품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치유 받지 못한, 용서의
문을 열지 못한 채 자기 안에 갇혀 지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잘못했기 때문에 잘못한 그 사람을 위해
용서를 베푸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용서는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사람이 잘못을 범했기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마 용서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마음이 행복해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용서함으로서 마음의 평화라는 행복이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용서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와 손해를 입히고도 전혀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마음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용서는
하느님께 용서하는 마음을 청할 때 비로소 주시는 하느님의 선물이 아닐까요?

- 차성현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용서라는 말이 가장 마음에 와 닿습니다.
용서의 마음을 가슴깊이 느낄 수 있도록 예수님은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방금 들은 복음 내용이었지만, 정말 그 종은 그야말로 무자비, 자비라고는 하나도 없는 종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일까 ? 그 생긴 모습이 궁금하기까지 합니다. 비슷한 체험을 한 사람이라면, 맞아 ! 그 무자비한 종은 아마 내가 알고있는 그런 비슷한 사람일거야... 할지도 모릅니다.
수억을 탕감받은 사람이 단돈 몇푼 빚진 친구에게 그렇게 모질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내 돈 탕감 해주지도 않았는데, 제 자신이 화가 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답답합니다. 그러니 그 많은 돈을 탕감해준 왕의 분노야 오죽했겠습니까?
결국 그 왕도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무자비한 종을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비유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나지만, 그 무자비한 종의 결말이 궁금합니다.
죽을때까지 감옥에서 살았는지, 아니면 그 빚을 다 갚고 감옥에서 풀려 나왔는지..
일곱번씩 일흔번 용서하라고 했으니 아마도 분명히 그 종은 용서를 받았을겁니다. 물론 진심으로 용서를 청해야 했겠지요...
언젠가 저는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느낀적이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그 존경심과는 또 다른 눈부심이었습니다. 도대체 잘못을 하지 않고는 빛을 발할 수 없는 그런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한번은 하늘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실때, 선한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사람 하나가 하늘나라의 더 큰 기쁨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착하고 훌륭한 사람사이에서 느끼는 마음과 용서를 청하는 회개의 눈물 앞에서 느꺼지는 마음이 달랐습니다.
착하고 선하게 살기위해 항상 도움을 청하는 삶이 되어야하겠지만,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청할 수 있는 더 눈부신 삶으로 살고 싶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가 용서를 청할 것은 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용서를 해주어야 할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더 늦기전에 용서를 꼭 청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가기전에 용서 받을 일 꼭 용서 받고 가야겠습니다.
성전 건립기금에 몹시도 애를 먹고 있던 어떤 신부님이 한번은 나이드신 할머니에게 그냥 위로라도 얻고 싶어 얘기했습니다. 할머니, 나중에 하느님 만나면 신부의 이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알아주시라고 얘기 좀 해주시겠습니까...
그랬더니 할머니가 삐죽하시면서 말했답니다.
"누가 먼저 갈지 어떻게 알아" 하면서 할머니는 섭섭함을 드러냈습니다.
저는 신부이다 보니 용서를 청하는 많은 사람들을 고해성사를 통해 만나게 됩니다. 짧은 시간들이지만, 순간 순간 저의 삶을 되돌아보게하고 은혜롭게 합니다. 저와 같은 죄를 짓고 고민하며 진심으로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모습에서 저 또한 하느님의 자비와 무한한 사랑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 신자에게 저는 고해사제가 되지만, 저에게 그 신자는 회개의 은인이 되는
순간입니다.
일곱 자녀가 있는데 유독 한자녀가 부모의 마음을 애타게 합니다.
부모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그 자녀에게 더 많이 가 있습니다.
어느날 그 힘든 자녀가 눈물로 용서를 청합니다. 나머지 여섯 자녀들이 늘 자랑스러웠지만, 오늘 이 눈물의 자녀만큼 그 부모에게 기쁨을 크게 주지는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도 언젠가는 한번 하느님께 큰 기쁨을 드릴 수 있도록 합시다.
세상에 태어나서 큰 효도 한번 하지 못하고 마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실 수 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일곱번씩 일흔번까지 용서해주고자 하시는 아버지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그러나 어떡합니까? 내가 용서를 해주지 못해 내 안에 분노가 가득한 데,
하느님의 용서가 어떻게 내 안에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용서는 억지로라도 해야할 것 같습니다.
결국 용서는 남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위한 치유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남긴 것
-김호균 신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 한 분이 약을 먹고 죽었다는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연은 이랬습니다. 남편은 냉담신자였습니다만 여자관계가
복잡했고, 경제력도 없었습니다. 자연히 경제적인 부분을 아내 스스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철 없는 자녀들까지 카드빚을 지면서 여러 차례 어머니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하는 가족들이었지만 자신의 운명으로
생각하고 밝게 웃으며 생활해왔습니다. 사제인 저에게도 속사정을 숨기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출한 남편이 돌아올 날을 10년 넘게 기다리다가
너무 힘들고 지쳐 다른 사람을 만났는데 그것이 가족들에게 발각되어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예순이 가까운 나이지만 어렵게 직장을 잡고 생활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고 맏며느리 역할까지
감당했습니다. 그때 남편은 다시 재결합을 바랐지만 자녀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시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울증이
왔고, 잠이 오지 않은 관계로 과다한 수면제 복용이 죽음을 불러들였습니다.
남겨진 것은 자신을 쫓아낸 자식들에게 대한 증오심이 아니라 가족들에게
남겨줄 전세금 이 천만 원과 현금 천만 원이 유서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마음〔心〕은 의지·생각·근본·본성·중심·도(道)의 본원·알맹이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마음은 인간에게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용서(容恕)는 ‘얼굴·모양·모습·몸가짐·담다·그릇 안에 넣다.’라는 뜻을 가진 ‘용(容)’과 ‘헤아려 동정하다, 깨닫다, 밝게 알다.’라는 뜻의 ‘서(恕)’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마음으로 용서하는 일이란 우리 근본`-`중심에서 깨닫는 일이며 밝게 아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용서란 본질에 해당하는 깨달음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마음에서 용서하라고. 그러나 우리는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그 사람과 마주치면 마음이 완고해지고 화가 치미는 자신을 대면하게 되고, 그때마다 자기 부정의 유혹과 절망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 갈등과 죄책감은 귀를 막고 눈을 멀게 해서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거나 듣지 못하게 합니다.
용서는 어둠으로 왜곡되고 단절된 세계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것은 용서하는 사람에게 해방과 자유를 가져다주며 동시에 용서받는 사람도 해방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용서하기 위해 갈등하는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수없이 갈등하고 죄책감으로 괴로워하기를 반복하는 그 모든 과정이 이미 용서의 과정임을 믿을 수 있을 때 용서하는 일이 조금씩 더 쉬워질 것입니다. 삶이란 그런 것입니다. 이 순간과 저 순간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용서한다는 것도 용서한 순간과 용서하기까지 갈등의 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갈등의 순간이 용서를 잉태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니 우리 힘을 냅시다!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의 용서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양승국신부-
<작은 것이 아름답습니다>
교회 안의 큰 경사이자 대축제인 성모승천대축일을 하루 앞둔 오늘 우리는 성모님에 대한 열렬한 신심의 소유자였던 폴란드 출신의 콘벤투알 성 프란치스코회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의 축일을 지냅니다,
각별한 성모신심을 지녔었던 콜베 사제는 성모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봉헌했으며, 성모님을 세상만방에 널리 알리기 위해 ‘성모의 기사’란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콜베 사제가 우리에게 모범으로 남겨둔 이웃사랑의 실천은 참으로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담근 시원한 동동주가 목으로 술술 넘어가듯 만사가 술술 잘 풀리는 가운데 이웃사랑을 실천하기란 사실 ‘누워서 떡먹기’입니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평화로운 가운데, 넉넉한 자금과 수많은 협력자들이 확보된 가운데 이웃사랑을 실천하기란 ‘식은 죽 먹기’입니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도 죽을 지경인 상황 속에서, 옆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괴로운 상황 속에서는 제대로 된 이웃사랑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내 코가 석자’인 상황 속에서도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그 사람이야말로 참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콜베 신부님께서 그랬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보다 ‘살짝’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보다 한 2% 더 사랑이 추가되었던 것입니다.
그분도 난 데 없이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와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느라 하루하루가 죽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하루에도 몇 명씩 동료 수감자들이 주검이 되어 실려 나가는 것을 보며 그분도 죽음의 공포를 느끼셨을 것입니다. 머리털 나고 처음 맞이해보는 극단적이고 처절한 상황 앞에서 ‘하느님, 도대체 이게 뭡니까?’ 하는 하소연이 저절로 튀어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목자로서 콜베 신부님은 너무나 당당하고 의연하셨습니다.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도 그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힘겨운 강제노역에 시달리면서도 힘겨워하는 동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쥐꼬리만한 빵 조각을 젊은 재소자들에게 나눠주고, 눈을 부릅뜨고 죽어버린 형제의 눈을 감겨주고, 임종을 지켜주고...
이것이 바로 참 목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은 단 한명의 동료 재소자를 대신해서 죽음의 아사 감방으로 내려가셨지만, 사실 인류 전체를 대신해서 지하로 내려가신 예수님을 꼭 빼닮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역설의 진리를 온 몸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금 내 눈 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단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최선을 다하는 것, 지금 내 곁에서 고통 받고 있는 단 한 생명을 소홀히 하지 않은 것... 그것이 사실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용서, 상처의 고통에서 상처의 사랑으로
-김찬선신부-
어제는 죄지은 형제를
어떻게 교정해주어야 하는지 보았습니다.
오늘은 나에게 죄지은 형제를
어떻게 용서해주어야 하는지 보게 됩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이 질문에서 두 가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몇 번이면 되는지”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
용서한다면 누구를 위해 왜?
나에게 죄를 지은 그 형제를 위해?
나에게 죄를 지은 그 사람 죽어 마땅한데
오히려 그 형제를 위해 용서를 해?
우리는 그를 용서해 주는 것이니까
그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를 위해 그를 용서하라면 죽어도 용서 못합니다.
죽이고 싶은데 어찌 용서를 합니까?
용서하려 해도 억지로 되지 않을뿐더러
용서하려 할수록 더 생각나서 더 죽이고 싶습니다.
그러니 그를 위해 용서하려는 생각은 아예 거두는 것이 좋습니다.
용서는 나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내 안에 있는 그의 가시를 빼내는 것입니다.
빼내지 않고 그냥 놔두면
그가 던진 말이
그가 한 행위가
그가 끼친 손해가
계속 나를 후벼 파 상처를 덧내고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에
나를 위해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의 심장에 가시를 박아놓았다면
원한을 품고 그를 미워한다고 그 가시가 뽑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이렇게 상처 주고 괴롭게 하였으니
너도 상처 받고 괴로우라고 미워해도
무디고 뻔뻔한 사람은 아무리 미워해도
상처받거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미움과 원한을 품고 사는 자기만 손해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함은 하느님 사랑 때문에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용서하는 것이고
그러니 몇 번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계속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 사랑 때문에 용서한다 함은 어떤 뜻입니까?
하느님 사랑 때문에 용서한다 함은
나를 용서하시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함으로
우리 마음이 하느님 마음처럼
넓어지고 너그러워졌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용서한다 함은 또한
먼저 나를 용서하신 하느님 사랑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못 했어도 어머니는 자식들이 서로 용서 하기를 원하시니
어머니 사랑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용서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지요.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사실은
내가 미움과 원한에서 해방되고
상처의 고통에서 상처의 사랑으로 성장케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그 사람을 만든다.
-천향길 수녀-
사람 사이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크고 작은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를 기억하려고 하지 용서하려고 생각하지 못한다. 내가 받은 상처를 철저하게 돌려주고 싶은게 인간의 마음이고 보면 용서란 무척 힘든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본인의 사인을 용서를 뜻하는 ‘恕’자로 사용하는 선배 수녀가 있다. 이름과 상관없는 사인이라 궁금해서 직접 물어본 적 있다. 그때 선배는 가장 좋아하는 단어라고만 했다.
‘생각이 그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생각은 행동으로 드러나야만 완성되고 그 행동은 다시 생각을 규정한다. 선배는 자신의 삶에서 ‘용서’가 필요해서 그렇게 의식하려고 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어쩌지 못하는 ‘상처’ 때문에 고통받고 살아간다. 송봉모 신부는 자신의 저서 『상처와 용서』를 통해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용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길이라고 제시한다.
저자의 말처럼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용서하려 해도 ‘나’를 버리기 전에는 힘든데, 하물며 내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사람,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 나에게 원수가 된 사람을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때는 감당할 수없을 정도로 사람에게 시달린다는 느낌이 든다. 또 어느 때는 목이 타도록 사람이 그립다.
그래서일까? ‘상처는 친밀감을 먹고산다’고 한다. 모르는 사람이 나에게 한마디 했다고 해서 그렇게 상처받을까? 아니다. 지나가는 개가 짖었나보다 생각할 것이다.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는지 되씹는 것이다.
사소한 ‘말’ 때문에 상처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윈스턴 처칠은 “한번 내 뱉은 말은 도로 삼켜도 잘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송봉모 신부는 사소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이렇게 제안한다.
첫째 기대하지 말라. 둘째 추측하지 말라. 셋째 상처에서 자유롭고 싶다면 앞으로 인정과 애정이 없이는 못 산다는 얘기를 하지 말고, 넷째 상처 때문에 더 이상 고통 받지 않으려면 지금 당장 자신 안에 있는 ‘상처의 텃밭’을 제거하라. 다섯 번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살아가라고 권고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서적인 예화를 들어가며 기도로 도움을 청하라는 것이다.
상처를 딛고 일어나 건강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마태 18,22)해야 한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최우선이라 생각했던 나에게 오늘은 이렇게 일침을 놓으신다. 언제나 내 생각이나 방법과 다른 그분께 주님의 빛을 구하자. 당신의 빛으로 빛을 볼 수 있도록....................◆

새벽을 열며
제가 살고 있는 강화도는 자전거 도로가 그래도 잘 되어 있는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휴일이면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저는 매일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기 때문에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특히 많이 만나게 되지요.
얼마 전 휴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날 저는 아침에 운동을 하지 못했기에 오후에 복장을 갖추고 성지를 나섰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저와 같은 방향으로 자전거를 타고 있는 한 무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같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잠시, 그들이 너무나 신경 쓰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무나 천천히 자전거를 타고 있었거든요. 더군다나 그 도로에는 차들이 너무나 많이 지나가고 있어서 추월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답답했지요. 화도 났습니다. 이분들에 대한 미움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미움의 감정이 생기고 화가 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이 상황이 바뀌지는 않더군요. 그러면서 이런 마음을 갖게 되는 제 자신이 더 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괜히 손해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마음을 가다듬고 이 날은 그냥 자연 경관을 즐기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 앞에서 자전거 타시는 분들의 속도에 보조를 맞추면서 주변의 경관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자전거를 탔습니다.
저는 이날 가장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전에 빨리 달리면서 보지 못했던 경관도 볼 수 있었으며, 천천히 달리는 그 맛도 너무나 좋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떤 책에서인가 읽었던 인상 깊은 구절이 생각납니다.
“사람은 이해의 대상이지,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너무나 자주 사람을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판단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 결과는 내 자신을 더욱 더 힘들게 만들어 버리는 부정적인 모습만을 가져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람이 판단의 대상이 아니고 이해의 대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닐까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판단의 대상으로만 사람을 본다면 이렇게 용서할 수 없겠지요. 어쩌면 단 한 번도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해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도, 아니 그 이상도 용서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그 판단의 대상으로 보려는 못된 마음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고 쉽게 단정 짓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상대방보다 먼저 반가운 인사를 합시다.
빠다킹신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김흥주 신부-
◆올 초 한 방송국에서 ‘마음’을 주제로 6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다. 특히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제목의 마지막 편은 ‘용서’의 문제를 비록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다루긴 했지만 우리 신앙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고 본다. 그 내용은 우선 사랑하는 가족들을 무참히 살해한 살인범을 용서한 고정원씨를 비롯해 돈을 빌려주었다가 떼이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결국 그 빚진 사람을 용서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어떤 분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용서는 과연 이렇게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용서에 대한 문제를 풀어 나갔다. 결론은 누구나 노력하면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우리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만큼, 용서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남을 용서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용서를 생각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상대방과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는 것이 용서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일 뿐 아니라 용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정한 용서는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가 상대방에게 동정과 사랑을 주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가 웃을 수 있는 것이 용서의 힘이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분노와 미움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릴 뿐이다. 반면에 마음을 편하게 하고 용서하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용서의 대가는 마음의 평화이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용서하는 법’을 가르쳐 온 러스킨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용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삶이 허락해 주지 않았을 때에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 복음 말씀처럼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할 때만이 우리도 하느님의 더 크신 자비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법이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이수철신부-
진정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인간의 원죄와도 같은 고질병,
자기를 모르는 ‘무지(無知)’이며,
받은 은혜를 자주 잊어버리는 ‘망각(忘却)’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 후렴도 “주님의 업적을 잊지 말라.”고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킵니다.
하느님과 멀어진 결과가 무지요 망각입니다.
하느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오늘 아침기도 시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누가 야훼의 정신을 지도할 수 있겠으며,
그의 고문이 되어 일러 드릴 수 있으리오.”
“누가 그분께 지식을 가르치겠으며,
외람되이 현명한 길을 그분께 보여드릴 수 있으리오.”
이런 하느님을 깨달아 가면서 비로소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알게 되어
비로소 겸손에 지혜요, 마음의 순수입니다.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내리신 주님의 말씀,
그대로 오늘의 하느님을 멀리 떠난 사람들을 향한 말씀 같습니다.
“사람의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 가운데에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은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멀어지면 반항적이 되고, 마음 어두워져
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의 ‘매정한 종의 비유’가 바로 하느님을 잊은 인간이
얼마나 무지하고 무자비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지와 무자비는 함께 갑니다.
하느님과 자기를 모르면 모를수록 우리는 무자비해지고,
하느님과 자기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자비로워집니다.
만 탈렌트 부채를 탕감 받고도
자기에게 백 탈렌트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하는 매정한 종,
바로 탕감 받아 무한한 은혜로 사는 자기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를 아는 것이며,
가장 쉬운 것이 남을 판단하는 것이라 합니다.
만 탈렌트 받은 은혜는 잊어버리고
백 탈렌트 입은 손해에는 마음 아파해 하며,
만탈렌트 잘해 준 것은 곧 잊어버리고
백탈렌트 서운하게 한 것은 잊지 못하는 게 사람 마음 같습니다.
받은 은혜 만 탈렌트를 생각하면 자비롭고 넉넉하겠지만,
백 탈렌트 손해 본 쪽만 생각하면
불평불만에 마음도 옹색하고 편협해 질 것입니다.
이 매정한 종에 대한 주인의 말, 바로 주님의 심정을 대변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이어 주님의 결론 말씀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진정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와 자비를 체험해 갈수록,
우리 또한 자신을 잘 알게 되어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이웃에게 마냥 너그럽고 자비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명하신 무한한 용서도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도 성체성사의 주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다시 새로운 하루를 살게 하십니다.
아멘.

容恕와 하늘나라
-강영구신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그대에게
진정한 용서(容恕)란 무엇입니까?
당신은 누구를 용서(容恕)했다고 말을 하지만, 가슴 한 구석에 섭섭하고 억울한 감정, 울분과 울화를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용서하긴 했지만 내 방식대로 용서했기 때문에 가슴 속에 앙금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용서(容恕)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임금은 일만 달란트나 빚을 졌지만, 갚을 능력이 없는 종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줍니다.
“너는 갚을 능력이 없구나. 갚을 능력이 없는 너를 인정하고 받아주마. 갚을 능력이 없는 너를 윽박지른다고 일만 달란트가 어디서 나오겠느냐? 앞으로 열심히 살아라.”
임금으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받은 그는 더 이상 빚에 짓눌리지 않고 새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어 새 삶을 시작하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옹졸함은 친구를 감금하고 끝내 자신도 감금당합니다.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은 소나무를 느티나무가 되라 하지 않습니다. 잔디를 클로버가 되라하지 않습니다. 수국에서 장미 향기가 나지 않는다고 책망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시기에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느티나무는 느티나무대로 아름답고 늠름합니다.
하느님은 때 묻고 상처투성이인 나를 깨끗하게 되라 하시거나 깨끗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자비의 손길로 감싸 어루만져줍니다. 그 순간 나의 더러움은 씻겨나가고 상처는 깨끗이 치유됩니다. 여기에 하늘나라(天國)가 있습니다.
오늘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을 용서(容恕)하십시오.
용서(容恕)하는 당신은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는 사람이 됩니다.(一明)

†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박상대 신부 -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공동체설교를 통하여 제자들과 교회공동체에 내리시는 마지막 일곱 번째 규범으로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21-22절)는 것이다. 물론 이 규범의 의미는 "용서의 무한정"이다.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5절)를 통하여 믿는 이들 사이에 "무한정 용서의 규범"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밝혀주신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마르코나 루가복음이 교회의 규범이 될만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이곳 저곳에 흩어 기록한데 비하여 마태오는 공동체설교 안에 잘 엮어 놓았다. 루가복음은 "잘못한 형제를 바로잡아 주어라"는 규범과 "용서하라"는 규범을 한데 묶어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 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가 17,3-4)고 말한다. 그러니까 죄를 지은 형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우선 꾸짖었을 때, 그가 뉘우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해 주라는 것이다.
마태오복음은 이 둘을 분리시켜 전자는 전체교회와 관련된 죄를 견책(譴責)하라는 것이고, 후자는 신자들간에 개별적으로 빚어지는 잘못에 대하여 무조건 용서(容恕)하라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루가는 죄인이 뉘우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를, 마태오는 뉘우침과 관계없이 무조건 용서를 지시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를 보자. 베드로는 스스로를 아주 마음이 넓은 사람인양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겠지요?" 하고 예수께 묻는다. "용서해 주면 되겠지요?" 하고 묻는 베드로의 말속에는 이미 용서가 자기의 권리로 드러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의 대답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490번 용서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말씀은 분명히 용서의 무한정을 의미한다. "용서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용서"가 "해 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강력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의 의도를 따르자면,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언제 어느 때나 그 잘못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즉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우리들 일상 체험은 무조건적인 용서가 거의 불가능함을 말해 준다. 용서를 놓고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태도를 취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사전에 용서는 없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이번에는 용서하지만 다음엔 국물도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태오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4절)를 들어 무조건적인 용서의 합리성을 밝혀주면서, 용서가 의무임을 강조한다.
각양각색의 죄상이 판을 치는 오늘날, 왜 이 세상이 망하지 않느냐고 한탄하지 말라.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죄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선(善)으로 악을 이겨내는 일이다.(로마 12,21) 용서는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며,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요 선행이며, 용기 있는 결단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용서만이 완전한 평화
오늘복음은 생각이나 말로는 가장 쉬우면서도 행동이나 실천으로는 너무도 어려운 용서편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참 답답한 말입니다. 지난날 분심, 원한 등으로 응어리 진 것들이 아직도 용서가 되지 않아, 나이 50이 들어선 지금도 그 사람의 이름만 들으면, 괜히 짜증이 나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판인데, 일곱번도 아니고 일흔번도 아니고, 일흔에 일곱번을 용서하라니요.......에이, 예수님이나 그렇게 할 수 있지, 요 모양 요 꼬라지로 만들어 놓고는 너무 심한 요구 아닙니까...하고 십자가 앞에서 무척 대들기도 했던 젊은 날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용서에 대해서는 에누리(일본어)도 없이 한결같이 똑같은 말씀만을 하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고....그러면 더 이상 불순하게 버틸 수도 없고, 순명은 해야하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도대체 이 말씀에서 주님은 무엇을 바라시며, 요구하는 것은 무언인가를...제대로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복음의 묵상은 용서편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참된 용서의 의미와 실천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1. 인간 모두는 용서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용서받을 자는 하느님 앞으로 돌아오라.
우리는 살아오면서 계산 할 수 없는 하느님의 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더 많은 은총을 거져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에게 필요한 소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들은 스스로 죄값을 치를 수 없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담 이후의 인생들은 하느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아 화목하게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8장 26절의 전후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사자(천사)들을 뵙는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죄악으로 만신창이가 된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을 유황불의 심판으로 멸망시키기 위해서 그 도시를 향하여 걸어가는 도중에서 대화입니다.
심판의 사실을 알게 된 아브라함은 간청합니다. "저 도시 안에 죄없는 사람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 곳을 쓸어버리시렵니까? 죄없는 사람 오십 명을 보시고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죄없는 사람을 어찌 죄인과 똑같이 보시고 함께 죽이시려고 하십니까?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이라면 공정하셔야 할 줄 압니다.".
그 때 야훼(하느님의 천사)가 말하기를 "소돔 성에 죄없는 사람이 오십 명만 있으면, 그 죄없는 사람을 보아서라도 다 용서해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어떤 심각한 경우라도 죄인을 용서하시고 싶은 것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한사람도 멸망치 않는 것을 원하십니다. 결국 소돔의 멸망의 원인은 죄없는 사람(의인) 열명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소돔 고모라는 유황불의 심판을 당한 것입니다. 소돔 고모라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용서를 받지 못하고 멸망당한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죄악의 도시로 유명한 니느웨와 그 백성들은 40일 후면 멸망 할 수밖에 없는 위급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백성들은 예언자 요나의 복음을 듣고 왕과 모든 백성이 회개함으로서 용서의 은퐁을 받았습니다. 이와같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을 은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서 속에 다른 예를 하나더 들겠습니다. 창세기 50,17의 말씀에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게 용서를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고 동생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고 음모하고 노예로 팔아 버린 형들을 용서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것입니다. 그 때 요셉은 하느님의 마음으로 형들의 모든 죄를 용서한 것입니다.
"형들이 악의로 한 일이건 어떻게 마음을 잘못 먹고 한 일이건 못할 짓 한 것을 용서해 주어라. 네 아비를 돌보시던 하느님의 종들이 비록 악의에 찬 일을 했지만 용서해 주어라"라는 아버지 야곱의 유언에 요셉과 그 형들은 서로 부등켜 않고 울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지은 그 형제들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사 55,7입니다. "불의한 자는 그 가던 길을 돌이켜라. 허영에 들뜬 자는 생각을 고쳐라. 야훼께 돌아오너라, 자비롭게 맞아주시리라. 우리의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는 주의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시고 사랑을 베푸신다는 약속입니다. 참으로 모든 사람들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주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용서의 은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용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에게 실천하므로 축복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이다.
엄청난 부채를 탕감받은, 즉 은총받은 자가 오늘복음에 등장합니다. 그 은총받은 자가 마땅히 행할 것은 자신도 그런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앞에서 맺힌 것이 있다면 회개하고 풀리는 은총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과의 맺힌 것이 있다면 서로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은 엄청난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에서는 아주 어리석고 불행을 자초하는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마 나의 모습을 보고 하신 말씀같습니다.) 본문에서 10,000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빚을 거져 탕감 받은 자가 100 데나리온 정도의 직은 빚을 탕감해 주지 못하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하느님으로부터 무한한 용서와 자비를 받아놓고는, 정작 이웃에게는 전혀 용서와 자비를 베풀지 않는 엄청난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는 영원한 은혜와 축복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아주 미미하고 조그마한 사랑이라도 베풀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지혜롭고 아름다운 일인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사랑과 용서를 베푸는 삶은 결국 엄청난 하느님의 축복을 나누어 가지는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삶>
요한일서 1장 9절에 보면 하느님께 죄를 범했을 때 그것을 고백하면 용서를 받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자와 일반인들의 비교를 정신과 의사들이 종종 많이 하고 있습니다. 폴 토레니에라는 스위스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의 치료 사례집속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앙과 질병과의 관계에 대해서, 병과 사람의 생각과의 관계에 대해서 치료한 사례 중의 하나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불치의 빈혈증에 걸린 한 소녀가 날마다 치료를 받으러 왔다. 어떤 정신요법이나 약물 요법으로도 낫지 않는 병이었다. 마침내 산중의 요양소로 보냈다. 얼마후 요양소에서 진단을 했는데 혈액 검사의 결과 아무 이상이 없고 빈혈증도 아니고 불치의 병도 아닌 정상이었다. 그래서 그 소녀에게 지난번 자신에게 진단을 받을 때와 요양소에서 진단을 받을 때까지의 생활상에 무슨 변동이 없었느냐고 물었더니 평생 지독하게 미워했던 사람을 갑자기 용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마음이 환해지고 삶에 대해서 굉장히 긍정적이 되고 적극적인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점점 몸의 병이 나았다고 했다.... 이런 치유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 ㅇ아이구 툴툴 털으니, 십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네..."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마태 6,14-15입니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에페 4,32에서는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영광은 용서에서 옵니다.- 윌리암 브레이크 -
가장 고귀한 보복은 용서하는 것이다. 영국 속담 -
상해에 대한 용서만큼 우리로 하느님을 가장 가까이 닮게 하는 요인은 없다. - 크리소스톰 -
용서하는 마음이 없이는 어떤 기도도 응답될 수 없다. - J.C.라일 -
3. 예수 그리스도는 용서받은 자가 용서하지 못한 것은 스스로 저주스런 삶을 선택하는 것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복음의 주인공은 엄청난 빚을 탕감을 받았으니 너도 다른 사람에게 빚을 탕감을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탐심의 종이 되어서 조그만 용서도 잘하지 못합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용서 할 수 있는 마음은 믿음은 능력입니다. 지혜입니다. 성숙한 모습입니다. 자랑스러운 주의 일군의 몫입니다. 주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에게 엄청난 은총과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피, 보혈로 용서하심>
하늘에는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신상명세서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식으로 그것을 기록하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서에 기록되던 당시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계산하셔야 할 갖가지 것들을 모두 책에 기록하고 계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의 과거 신상명세서 첫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미가엘 크리스텀...머리카락은 6,276개..."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저에 대하여는 더 이상 물을 것이 없습니다.
두번째 페이지에는 하느님의 모든 법들, 특히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페이지부터는 제가 각 계명을 범할 때마다 표시를 해 놓을 수 있는 칸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저의 신상명세서는 상당히 두껍습니다.
맨 마지막 페이지는 차용증서입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미가엘 크리스텀은 제1계명을 8,322회 범했으며, 제2계명을 5,456회 범했고, 제3계명은...제4계명은...그러므로 미가엘 크리스텀은 곧장 지옥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제가 주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주님은 저의 신상명세서를 꺼내드셨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스탬프 도장에 자신의 피를 듬뿍 묻히시더니 매 페이지마다 "폐기됨"이라고 찍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쓰레기는 하늘나라에 두실 수가 없기 때문에 영원히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저의 신상명세서를 십자가에 못박아 버리셨습니다. 누근든지 미가엘 크리스텀의 신상명세서를 보고 싶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넘어가야 하는데 그것은 이미 영원히 지워진 사건입니다.
주님을 찬미합시다. 이제 우리는 갚지 못할 빚을 지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하느님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과도 완전한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탕감 받은 축복을 누릴려고 한다면 어떤 신앙으로 살아야 할까요? 그 첫째는 감사 신앙이 불타야 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항상 잊어버리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우리의 마음에 품고있는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적은 것을 탐심을 포기하지 못한 것 때문에 큰 은혜와 축복을 놓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넷째는 교만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바오로 사도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2)
지혜로운 자는 용서를 서두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용서할 기회의 진정한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 사무엘 죤슨 - 의 말입니다. 참으로 의미 깊은 격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손길에 축복을 주셨다. 한 손에는 용서를, 또 다른 손에는 거룩함을 주셨다. - W.E.생스터 -의 말입니다.
오늘복음의 묵상마무리입니다.
우리는 용서의 은총으로 자랑스럽고 행복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에 의지하여 사는 삶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용서 베푸는 삶으로 은혜를 유지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의 믿음과 실천을 병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