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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8. 묵상글 ( 사순 제5주간 토요일. - 모으시는 주님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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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8. 사순 제5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2024년 강론>
2024.03.23 06:47
사순 5주 토요일-모으시는 주님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예수님께서 왜 돌아가시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흩어진 하느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십니다.
이참에 우리의 모임에 대해서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모이고 그래서 모임이 많습니다.
계 모임,
등산 모임,
연구 모임,
동창 모임 등.
이런 모임은 자기들이 목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인데
그 목적이 서로 간의 친목 도모나 동호회 활동이나 같은 관심사의 실현입니다.
그리고 이런 모임은 철저하게 자기가 좋아서 모이는 것이고,
좋아하는 사람끼리 모이는 것이며 싫으면 그냥 흩어지는 그런 모임입니다.
상인들의 모임,
의사들의 모임,
노동자들의 모임도 있습니다.
이런 모임은 서로 간의 필요 충족과 자기 이익의 실현을 위해 모입니다.
당연히 필요 없어지거나 이익이 되지 않으면 그냥 흩어집니다.
제법 고상한 목적의 모임도 있습니다.
국경 없는 의사회,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회와 같이 인류애의 실현을 위한 모임입니다.
어제 저희 <여기 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 총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모임은 어떤 모임일까 생각해봤는데
저희 모임도 이주민들을 돕고자 하는 공익 모임이지만
앞의 다른 모임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하느님 사랑 때문에 모인 점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하느님 사랑 까닭에 이웃 사랑을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목적이 아주 고상하고 매우 신앙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도 저희 협동조합을 교회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교회적이고 신앙적인 활동 단체라고는 할 수 있어도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제도적인 교회도 있지만
하느님 백성의 모임이라는 것이 기본 의미입니다.
가족이 부모를 중심으로 모인 것이듯
교회는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인 것입니다.
가족이 어떤 이유나 목적 때문에 또 어떤 활동을 같이하기 위해 모이지 않고,
순전히 부모를 중심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모인 것이듯
교회도 하느님 자녀들이 하느님 중심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모인 겁니다
그래야 하는데 하느님 자녀들이 왜 흩어졌을까요?
그 이유가 많은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단순합니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떠나고,
교회 모습에 실망하고 떠나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각 사람이 하느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이고,
그것은 또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감각 안에서 사람은 가깝고 하느님은 멉니다.
인간 사랑은 가깝고 하느님 사랑은 멀기만 합니다.
이렇게 먼 하느님 사랑을 가깝게 가져오신 분이 예수님이고,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모으기 위해 오신 것이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돌아가신 이유도 같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자녀들을 하느님 중심으로 모으려고 하시니
자기 사람들을 뺏어간다고 생각한 세상 권력자들이 주님을 죽인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중심으로 모였는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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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신부님 올해 강론글 : 아직 /
성지 순례 중이시기에 12시 ~13시반에 글 올리시면 14시이후 추가로 공유할 예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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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8. 사순 제5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평화와 정의의 시편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시편 23편은 우리 마음에 위로를 주며, 동시에 정의를 실천하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시편 : 유배 시기의 노래
평화와 정의의 시편
2026년 3월 26일 목요일
시편 23편은 위로의 메시지로 사랑받지만, 다이애나 버틀러 배스(Diana Butler Bass)는 가난과 굶주림, 불의와 소외를 겪는 이들의 눈으로 이 말씀을 읽도록 도전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시편 23편은 정치적 선언문일까요?
고백하건대, 저는 그 가능성을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시편을 정치적 맥락에서, 비서구적 시선에 공감하며 읽으라는 도전을 받아들였습니다. 시편의 중심은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의로운 길로 이끄신다"는 구절에 있습니다. 앞의 구절들은 그 말씀을 향해 나아가고, 뒤의 구절들은 그 말씀에서 흘러나옵니다.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 제가 예배와 개인 기도에서 40년 동안 읽어 온 판본)에서는 중심 구절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분은 내 영혼을 되살리시고,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올바른 길로 나를 이끄신다." 반면, 킹 제임스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그분은 내 영혼을 회복시키시며,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라고 번역합니다.
저는 수없이 많은 강론에서 '올바른 길'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의미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길을 잃을 때 인도하시고 인생의 여정에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완전히 길을 잃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참으로 큰 위로이지요.
물론 그것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로버트 알터의 번역을 읽어 보십시오. 학자들이 그 정확성으로 높이 평가하는 현대 번역인데, 중심 구절은 뚜렷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그분은 내 생명을 되살리시고,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정의의 길로 나를 이끄신다."
성경 안에서는 '올바름(right)'과 '의로움(righteousness)'은 '정의'와 서로 바꿔 쓸 수 있는 말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북미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중산층 교회 신자들 가운데 ‘올바름’이나 '의로움'을 '정의'로 바꾸어 읽는 이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알터의 번역은 시편의 중심 구절에서 ‘정의’를 힘 있게 울려 퍼지게 합니다. [1]
로버트 알터의 시편 23편 1–3절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버틀러 배스는 우리가 되살림 받은 삶을 정의를 위하여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부르심을 강조합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다스림, 곧 사랑의 공동체이며, 모든 억압과 착취를 거슬러 서 있는 현실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본래 의도된 모습으로 되살림을 받습니다. "그분은 내 생명을 되살리신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을 되살리신다."
그러나 새롭게 되살림 받은 삶은 푸른 초원이나 고요한 물가에만 머물러 만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거룩한 나라의 시민들은 정의의 길로 불려 나와, 하느님의 이름―곧 주님의 안식의 통치―을 온 세상에 드러내도록 부르심을 받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보스턴 칼리지에 온 한 교수님께서 나에게 직접 비탄의 시편을 써보라고 권유하신 적이 있습니다. 당시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었기에, 그 경험은 놀라울 만큼 깊은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종종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도 같은 방법을 권합니다.
그 기본 구조는 이렇습니다:
하느님께 부르짖고,
불평을 토로하며,
도움을 청하고,
신뢰를 고백한 뒤,
찬미와 감사로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큰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Eileen M.
References
[1] Philip Jenkins, “Liberating Word: The Power of the Bible in the Global South,” Christian Century 123, no. 14 (July 11, 2006), 22–27.
[2] Robert Alter, The Hebrew Bible: A Translation with Commentary (W.W. Norton & Company, 2018).
Diana Butler Bass, A Beautiful Year: 52 Meditations on Faith, Wisdom, and Perseverance (St. Martin’s Essentials, 2025), 291–29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Michael Sturgeon, untitled (detail), 2020, photo, Ukraine,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타악기는 유배가 지워버릴 수 없는 내적 리듬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 리듬은 시편 속에 메아리치며, 음악이 억압을 드러내고, 고향을 기억하며, 망각을 거부하는 힘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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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인간의 악의와 음모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의 길을 여십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가장 낮았던 때는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 직후였습니다. 요한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이 일이 일어난 뒤로, 제자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요한 6,66)라고요….
그러나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 이후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고, 그분의 명성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이에 종교 권위자들이 개입했습니다. 그들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예수님을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 인물"로 몰아갔습니다.
당시 최고 종교 권위였던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공식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예수님의 목숨을 노린 적이 있었지만(요한 5,18; 7,1.19; 8,59; 10,31), 이번에는 공식적으로 내린 결의였습니다. 대사제 카야파는 이렇게 합리화했습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고요….
요한 복음 저자는 이 사건 속에 담긴 여러 가지 역설을 드러내 줍니다.
첫째,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예수님은 오히려 당신 죽음이 확정되었다는 것입습니다. 그러나 더 큰 역설은, 바로 그 죽음을 통해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생명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카야파는 유다 민족만을 생각했거나, 혹은 그렇게 가장했을 뿐이지만,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몰면서 그는 자기도 알지 못한 채 더 넓고 높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곧 이사야 예언서 11장12절과 예레미야 예언서 31장 8절, 에제키엘 예언서 11장17절, 미카 예언서 2장12절에서 13장 2절까지 등에 예언된 모든 시대의 희망이 성취되는 길을 열었던 것입니다.
둘째 역설은 "로마인들이 와서 자기들의 성전과 민족을 멸망시킬까 두려워" 예수님을 희생시키려 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로마인들은 와서 성전과 민족을 파괴했습니다.
그 해의 대사제로서 그는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하였다는 사실은 단순한 역설을 넘어, 어쩌면 어두운 유머처럼 들리기까지 합니다. 카야파가 "예언자"가 된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 대목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인들의 가장 두려운 회의 속에서도 하느님의 계획은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는 결코 악의 현실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악을 궁극적으로는 긍정적인 하느님의 섭리의 틀 안에 위치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히 한 시대의 비극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인류 구원의 문을 여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달리 말해, 인간의 악의와 계산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신다는 것이지요!
카야파의 말은 정치적 계산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말조차 당신의 뜻을 드러내는 "예언"으로 삼으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상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흩어진 모든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는 승리인 것입니다!
2004년에 개봉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많은 이에게 상당한 울림을 준 영화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수난을 사실적으로 묘사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촬영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연기한 배우 짐 카비젤은 십자가 장면을 찍으며 실제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하지요!…
그는 연기 중에 두 번이나 벼락을 맞았고,
70kg에 달하는 나무 십자가를 지고 가다 어깨가 탈구되었으며,
혹독한 추위 속에서 저체온증과 폐렴에 시달렸고, 실제로 연기 중에 실수로 채찍질에 의해 살이 찢어지는 상처까지 입었습니다.
며칠 동안 그는 추위와 고통에 크게 시달렸다고 합니다. 촬영이 끝날 무렵 그의 몸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고,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연기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힌 듯한 체험을 했다."라고요.
주변에서는 촬영을 중단하라고 했고, 의사들도 위험하다고 경고했지만 그는 계속했습니다. 자신의 고통을 어떤 목적을 위해 봉헌한 것입니다.
카비젤은 이후 여러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부활을 원하지만, 그 부활에 이르는 고통은 대부분 원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단순한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사명"이었습니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통해 신앙을 회복하고, 회개와 치유를 체험했다고 증언합니다.
이 고통스러운 과정은 우리에게 중요한 진리를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삶이 산산조각 나는 듯할 때, 악이 승리하는 듯 보일 때, 선이 미움으로 맞이될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선으로 작용합니다."(로마 8,28 참조).
성주간을 앞둔 우리는 십자가의 신비를 다시금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인간의 악의와 음모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여신다는 것을요.
우리가 신앙의 여정을 해 가면서 가져야 할 확신이 바로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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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8.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지금 우리는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사순시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결정적인 사건인 십자가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 결정적인 사건이 어떻게 해서 벌어지게 되는지 그 단초를 제공해줍니다. 곧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사건’을 전해줍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시던 중, 도달하기도 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곧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엠마오에서 라자로의 장례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일곱 번째의 표징’, 곧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표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표징이었습니다. 이를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어떤 이들이 이를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유다 지도자들이 민심이 동요된 것을 두려워하여 최고 의회(산헤드린)를 열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은 메시아가 와서 다윗 왕조를 회복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건하리라고 여겼는데, 이러한 사실은 로마제국에게는 위협이 되었고 당시의 기득권을 갖고 있던 종교도자들에게도 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정과정이 참으로 묘합니다. 바로 그 결정과정을 통해서 ‘예수님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해의 대사제였던 가야파의 입을 통해 밝혀줍니다.
“온 백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요한 11,50)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온 백성을 위한 대속’임을 밝혀줍니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요한 11,51-52)임을 드러내줍니다. 그것은 “가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것”(요한 11,51)이었습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오묘하게도 기회주의자인 가야파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밝혀주십니다. 참으로, 성령께서는 오묘하게 일하십니다.
(어쩌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서도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신비롭게 일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백성들을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기다리며 파스카를 준비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준비해야 할까요?
주님!
제 안에 당신의 생명이 자라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소서.
오늘 타인을 위하여 죽고 타인을 대신해서 죽을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
주님! 겉치레 속에 교묘히 가리고 있는, 제 불신의 껍질을 벗겨 내소서.
신앙의 겉꾸밈 뒤에 감추고 있는, 제 허영과 자애심을 끊어내소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기고 있는, 제 위선을 몰아내소서.
빛을 비추시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당신의 생명이 자라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소서.
오늘 타인을 위하여 죽고 타인을 대신해서 죽을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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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8.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 구역장 회의에 한 가지 건의가 있었습니다. ‘재의 수요일’ 미사를 두 번 하면 좋겠다는 건의였습니다. 그동안은 재의 수요일 미사는 저녁에 한 번만 있었습니다. 저는 부주임 신부님,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올해부터 재의 수요일 미사는 오전과 저녁에 두 번 하는 걸로 정했습니다. 결과는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오전에 많은 분이 오셔서 이마에 재를 받았고, 저녁에도 많은 분이 오셔서 이마에 재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두 번 하니 인근에 있는 성당의 교우도 재를 받았습니다. 오전에 혼자 하니 시간이 오래 걸려서, 저녁에는 부주임 신부님을 도와서 함께했습니다. 매년 사순시기에는 성경 필사를 하였습니다. 올해는 ‘잠언’을 필사하도록 하였습니다. 교우분들은 기쁜 마음으로 성경 필사를 하였습니다. 올해도 성경 필사하신 분을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2026년 사순시기는 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40일 동안 성경 통독을 제안하였고, 26분이 신청하여서 매일 성당에서 3시간씩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혼자 하면 힘들 것 같은데 함께 하니 힘이 나는 것 같습니다. 성경 통독 교우분을 위해서도 작은 선물을 마련하려고 합니다.
조선의 위대한 학자 중에 한 분인 정약용 선생님은 ‘목민심서’를 남겨 주었습니다.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를 위한 지침서입니다. 정약용 선생님은 관리의 자리를 권력이나 명예의 자리가 아니라 “백성의 눈물을 닦아 주는 자리”라고 보았습니다. 수령은 청렴해야 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멀리해야 하며, 세금을 거둘 때는 백성의 형편을 먼저 살피고, 형벌을 내릴 때는 법 이전에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애민(愛民)’, 곧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관리가 백성을 부모의 마음으로 대할 때 나라가 바로 서고, 백성의 삶이 편안해진다는 것이 그의 가르침입니다. 결국 목민심서는 다스림의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향한 책임과 양심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민심서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관리가 있는 마을은 정이 넘쳐나고, 부정과 부패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관리가 있는 마음은 굶주림이 넘쳐나고 부정과 부패가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지침은 세상의 통치 원리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라고 하셨고, “너희 가운데 가장 큰 이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셨으며, “첫째가 되려는 이는 꼴찌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의 길은 높아지는 길이 아니라 낮아지는 길이고, 지배하는 길이 아니라 섬기는 길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시며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를 고쳐 주며, 마귀를 쫓아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권력을 행사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자비와 해방을 드러내라는 사명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주시는 제자의 사명은 자신을 비우고 타인의 생명을 살리는 길이며, 십자가를 통해 사랑을 증명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우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재의 수요일 미사를 두 번 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앞장서서 40일 성경 통독을 시작한 것도 잘한 결정이었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들춰내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남이 나에게 해 주기 원하는 일을 먼저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파수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등대지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은 때로 힘들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참고 하느님께 의지하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거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재를 받는 것도, 성경을 필사하는 것도, 성경을 통독하는 것도 결국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계약에 충실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을 때, 우리 가운데 하느님의 성전이 세워질 것입니다. 그리고 슬픔은 기쁨으로, 근심은 즐거움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과의 약속을 충실히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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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8.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예수님의 시선에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킵시다!
이제 사순시기도 막바지에 도달했습니다. 토요일 저녁 해가 떨어지면 이제 우리는 주님 성지 주일을 맞이하며, 가톨릭교회 전례력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성 주간에 들어갑니다.
이번 사순절 저는 주님의 수난 복음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곱씹고 묵상을 거듭하던 어느 순간,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우리 나약하고 부족한 죄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시선을 언제나 한결같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기적과 치유 활동이 셀수없이 거듭되는 예수님 일생의 절정기, 가장 잘 나가던 공생활기간 동안 그분께서는 항상 우리를 측은하게 바라보셨습니다. 그 결과가 수많은 치유요, 소생이요,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그 측은지심은 잘 나가던 시기가 끝나고 극심한 고통이 시작되던 수난의 때에도 한결같았습니다. 우리를 향한 측은지심의 시선은 수난의 시기에도 여전히 똑같았다는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이 끝나갈 무렵 베드로는 예수님께 장엄하게 약속을 드립니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감옥에 갈 준비도 되어 있고 죽을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루카 22,33)
그러나 예수님께서 체포되신 후 대사제 관저로 압송되자 베드로의 기고만장은 즉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쪼그라들었습니다. 그나마 베드로는 수제자인지라 책임감을 느꼈던지,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뒤따라 갔습니다.
날씨가 쌀쌀했던지라 베드로 사도는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의 모습을 본 사람들이 “이자도 저 예수라는 자와 함께 있었습니다.”라고 외치자 베드로는 아니라고, 또 아니라고. 또 아니라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마침내 세 번째 부인하던 순간, 예수님께서 예언하신바 대로 닭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닭이 울던 순간, 예수님께서는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그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닭이 울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루카 22,61)
예수님의 시선과 베드로의 시선이 마주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선을 어떤 시선이었을까요? 째려보는 시선? 비웃는 시선? 분노로 가득찬 시선? 아니었습니다.
그 시선은 여전히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 찬 시선이었습니다. 대화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때로 눈빛으로도 대화를 할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건네셨을 것입니다.
“베드로야, 많이 힘들지? 속도 많이 상하고. 그래도 너무 괴로워하지 말거라. 세 번 배반했다고 엉뚱한 생각하지 말고. 그래도 나는 괜찮다.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세 번 배신했다고 너를 저버리지 않는다. 배신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네 편이란다.”
그런 예수님의 눈빛에 베드로는 완전히 무너져 내립니다. 처절히 참회합니다. 밖에 나가서 슬피 울었습니다. 예수님을 은전 서른냥에 팔아넘긴 유다는 그 예수님의 눈빛을 마주치지 못했기에, 그 사랑을 확인하지 못했기에, 안타깝게도 비참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그 눈빛, 죽어가시면서도 베드로 자신을 측은히 여기시는 그 눈빛으로 인해 회심을 하고 다시금 수제자의 자리로 복귀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 사도는 세 번 배반 사건 이후 수시로 울었답니다. 그래서 그의 눈가는 늘 짓물러 있었답니다.
우리가 여기서 또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유다는 배신 이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버렸습니다. 그 결과 참혹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세 번이나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이 늘 예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비록 두려움에, 인간적인 나약함과 비겁함으로 인해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지만, 베드로의 시선을 늘 예수님에게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배신에도 불구하고 용서받았고, 수제자의 위치도 회복되었으며, 불멸의 수제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 살아가다보면 죄를 짓고 나락으로 떨어지고 예수님을 배반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유다와 베드로의 상반된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길을 가버린다면 우리 역시 유다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러나 깊은 죄의 구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할지라도, 베드로 사도처럼 우리의 시선을 지속적으로 예수님께로 향한다면, 우리는 살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될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중죄를 저질러도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큰 죄를 지어도 주일 미사에 나오셔야 합니다. 대죄를 지어도 아침 저녁 기도를 계속 바쳐야 합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 된다 할지라도 주님과의 마지막 끈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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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8. 사순 제5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1,45–56
라자로가 살아난 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도자들은 두려워합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많은 표징을 행하면
사람들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그러면 로마가 와서
우리의 자리와 민족을 없앨 것이다.”
대사제 카야파는 말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모두가 멸망하는 것보다 낫다.”
그날부터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합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 장면을 통해
두려움이 어떻게 ‘정의의 언어’를 가장한 폭력이 되는지 봅니다.
카야파의 말은
공동체를 지키려는 책임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자기 체제와 권력을 지키려는 계산이 섞여 있습니다.
사람은 때때로
“공동선”을 말하면서도
사실은 두려움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역설을 드러냅니다.
카야파의 말은 악의 계산이었지만,
하느님은 그 말마저도
구원의 신비 안에서 새 의미로 바꾸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폭력의 승리가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완성이 될 것입니다.
영성 주간의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할 때
그 선택의 뿌리는 무엇인가?
사랑인가, 두려움인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
때로 불편함과 저항을 부르더라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끝까지 사랑을 선택하셨다는 것을.
그리고 성 암브로시오의 눈으로 우리는 배웁니다.
참된 공동선은
한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약한 이를 살려내며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님,
제가 두려움으로 선을 말하지 않게 하시고
사랑으로 공동선을 선택하게 하소서.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평화가 아니라
모두를 살리는 자비의 길을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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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8. 사순 제5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미사에 집중하시는 수녀님, 한 편의 예술 조각을 보는 듯
오늘은 다른 수녀님 이야기를 한번 하겠습니다. 어젠 아기 같은 모습을 하신 수녀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오늘은 다른 수녀님입니다. 제가 미사를 뒷자리에서 봉헌했습니다. 성무일도를 가르쳐주시겠다고 하시는 수녀님이 왼쪽 뒷 편에 계셨어요. 오늘 그 수녀님의 미사 봉헌을 보며 생각한 게 있습니다. 봉헌 모습이 엄청 경건해 보였습니다. 연세도 있으신데 옆에서 보니 감탄이 나왔습니다. 왜 감탄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보통은 바로 직립해서 땅과 직각으로 서는 게 보통입니다. 수녀님도 그렇게 하시는데 신부님께서 미사경본을 보시고 기도하시는 곳이나 또 우리가 마음을 모아야 하는 그런 부분에서는 자세가 조금 달랐습니다. 머리를 약간 15도 정도 앞으로 숙이시면서 어깨 부위도 그에 맞게 숙이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반절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왜 이게 인상적인가 하면요 그 모습이 바로 제대를 향해서 마음을 모으려고 하는 몸짓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미사는 하느님께 올리는 제사입니다.
유교식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제주가 됩니다. 제주는 몸 자체 하나 하나 동작 하나 하나 속에 조상을 섬기는 마음이 얼마나 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걸 보면 이 사람이 조상을 잘 섬기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문중에 가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문중 어른들이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절도 다 같은 절이 아닙니다. 이게 보면 어떤 사람은 절하는 모습 자체도 정말 멋진 사람이 있습니다. 경건함이 묻어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절하는 게 품위가 없습니다. 바로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아우라 같은 게 있어요. 마치 그런 게 수녀님으로부터 나오는 걸 봤습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얼굴에서도 이게 정말 집중하고 계신다는 게 느껴집니다. 이건 어떻게 그 모습을 표현하기가 힘드네요. 정말 그 모습을 보시게 되면 제 말씀이 전혀 과장이 아니라는 걸 공감하실 겁니다.
사실 그런 카리스마도 그냥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집중하신다고 해서 그렇게 보여지는 게 아닙니다. 예전에 그 본당에 어떤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요즘은 잘 안 보이시더군요. 며칠 전에 마트에서 뵈었습니다. 그분이 저한테 말을 걸어셨습니다. 전에 대화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잘 기억을 하시지 못하셨는지 그냥 전혀 딴 사람인 줄 아시고 마트 출입구를 문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헷갈리셨나 봅니다. 그분은 미사 때 고개를 숙이긴 한데 어떤 경우는 너무 지나치게 숙이시고 상체도 엄청 숙이십니다. 아마도 그분은 그렇게 하면 더 하느님을 경배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그렇게 하는 모습은 오히려 좋은 모습으로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마치 과유불급입니다. 사실 그분이 그렇게 하면 옆 주위 사람들도 그렇게 좋은 모습으로 보지 않는 걸 보면 그게 맞습니다. 수녀님은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미사에 그렇게 집중하는 건 잘 보지 못했습니다. 다들 보면 집중은 하긴 해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거든요. 가끔 가다 보면 영혼 없는 미사를 봉헌하는 그런 기분이 드는 분도 계십니다. 표정에서 뭔가 멍 때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분이 있어요. 저 역시도 그럴 때도 있습니다. 어쩌다가 분심이 들 땐 그렇습니다. 가능하면 정말 집중하려고 노력을 하긴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와서 한 번 언급하겠습니다. 오늘 미사 때 어느 지점인가 순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좋습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니 거기까진 이해를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사 후에 마침 또 금요일이라 바로 신부님이 제의만 벗고 나오신 후에 십자가의 길 기도를 했습니다. 거의 9처인가 10처인가 그 지점에서 전화가 또 울리는 것입니다.
그땐 좀 달랐습니다. 사람들이 대개 다 짜증난 얼굴을 했습니다. 처음엔 이해를 해 줄 수 있지만 두 번씩이나 그렇게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빨리 진동을 해 놓던가 아니면 무음을 해 놓던가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근데 문제는 그 자매님은 전혀 뭐 미안한 기색이 없더군요. 사람들은 그런 경우에 표정이라도 죄송하다는 그런 표정을 짓는데 그러니 주위분들이 인상을 찌뿌리며 흉보는 모습을 하는 것입니다. 처음 울렸을 때도 그렇고 두 번째 울렸을 때도 수녀님은 그 소리에 반응을 하시지 않고 정말 집중하시는 그 모습 그대로 계시는 걸 보고 또 감탄을 했습니다. 보통 그런 경우라면 어디시 나는지 보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게 보통의 경우인데도 말입니다. 오늘 수녀님의 그 모습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저도 저런 모습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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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8.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08:35 추가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요한 11,45-54)”
1) 48절의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라는 말에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로마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라는 말은, 로마제국이 반란을 진압하려고 군대를 보내면 유대교는 망할 것이고, 이스라엘 민족도 멸망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비록 로마제국의 식민지이긴 했지만,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어느 정도는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고의회 의원들은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인지, 가짜 메시아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또 속마음으로는 민족의 안위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진짜로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최고의회를 비롯해서 지도층 사람들은
로마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고, 독립을 위해서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기득권을 누리면서 사는 것에 만족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카야파가 한 말은, 민족을 위해서 한 말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한 말입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는, 뜻으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잃는 것보다”입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그자를 죽이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다.”입니다.
그의 말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고민하지 말고, 그냥 그자를 죽입시다.”입니다.
그래서 그의 말은, 예수님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자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은 기득권 유지를 방해하는 걸림돌일 뿐이니 그냥 제거하자는 말입니다.
2) 51절과 52절은, 복음서 저자의 해석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살인자들 쪽에서 보면,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살해당한 일이지만, 예수님 쪽에서 보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 사람들, 즉 이방인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주신 일입니다.
‘모든 사람’에는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들도 포함됩니다.>
3)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일은,
그 자체로 불법인 일입니다.
재판도 없이 사형을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생명을 주려고 오신 메시아를 배척한 일이기 때문에, 사실상 그들 자신들의 영혼을 죽이기로 결의한 일과 같습니다.
최고의회가 로마제국을 두려워한 것은, 그들이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것을 몰랐더라도, 그렇게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것은 하느님과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자체도 ‘큰 죄’입니다.>
4)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려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서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라고 생색내면 안 됩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해서 통곡하는 여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루카 23,28ㄴ.31)”
성주간을 지내는 신앙인들의 기본자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구원의 완성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해야 하는 일입니다.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 가운데에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끝까지 자신의 기득권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예수님을 거부한 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자들은 결국 서기 70년에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할 때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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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328. 사순 제5주간 토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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