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호세 데 안치에타 (1534~1597)
브라질에서 가장 유명한 선교사이자 상 파울로와 리오 데 자네이루의 두 도시를 건설한 호세 데 안치에타는 1534년 3월 19일 카나리아 제도의 테네리페 Tenerife 섬의 산 크리스토발 San Cristobal de la Laguna에서 태어났다. 그는 코임브라의 예수회 학교에 등록, 일년간 면학에 힘쓴 후 1551년 5월 1일 예수회에 입회했다. 2년 뒤, 그러니까 그가 19살 되던 해 그는 브라질로 파견되었다. 수련기동안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특히 척추 탈구로 심한 고통을 겪었다. 이 척추 탈구는 평생 그에게 고통을 줄 터였다. 브라질의 기후가 온화한 편으로 알려졌기에 장상들은 안치에타의 건강의 회복을 위해 브라질 파견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은 결코 회복되지 못했으나 그래도 브라질의 사도가 되었던 것이다.
6명의 다른 예수회원들과 함께 안치에타는 1553년 7월 바이아 Bahia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정착지 외곽에 살고 있는 투피 Tupi 족 인디오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언어에 숙련된 인물인지라 짧은 시간 안에 인디오들 사이에 가장 많이 사용되던 투피-과라니 어를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언어에 대한 안치에타의 관심은 학문적인 것에 머무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만약 이 원주민들을 그리스도화하기를 바란다면 우선 그들의 언어로 말할 수 있었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554년 1월 그는 그의 장상인 노브레가 Nobrega 신부를 수행하여 피라티닝가 Piratininga 지역의 인디오 마을로 갔다. 그들은 그곳에 선교구와 학교를 개설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들은 마을에 1월 24일 도착했다. 도착 다음날 미사를 봉헌하였고 특히 그 날이 사도 바오로의 축일이었기에 그 선교구의 이름을 사웅 파올로라고 명명했다. 이 자그마한 선교구가 오늘날의 거대도시 사웅 파울로로 발전했던 것이다. 안치에타의 임무는 사제로 양성 중인 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또한 투피족과 포르투갈 식민자의 아이들에게 문법과 교리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20년 동안 안치에타는 사웅 파울로 지역에서 전교일에 힘쓰고 인디오들과 정착민들 사이에서 시간을 쪼개 그들과 함께 하였다. 그는 투피족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투피어에 대한 문법책을 1555년 완성하여 포르투갈 정착민들과 선교사들이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나중에 그는 투피어 사전까지 편찬하였다.
그가 선교구를 벗어날 때는 오직 장상과 함께 길을 떠날 때뿐이었는데, 그는 종종 통역으로 봉사했던 것이다. 1563년 그는 노브레가 신부와 함께 포르투갈과 타모요 Tamoyos 족 사이에 평화를 중재하기 위한 임무에 파견되었다. 타모요 족은 호전적인 부족으로 자주 사웅 비첸테 Sao Vicente 선교구를 괴롭히고 사웅 파울로까지 위협했던 것이다. 당시 타모요 족은 포르투갈을 축출하고 대신 프랑스 정착지를 건설하려고 획책하던 위그노파가 공급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협상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 계속되었다. 협약이 마침내 체결되자 안치에타는 위협적인 타모요 족 사이에 인질로서 이페로익 Iperoig에 억류되었다. 고독과 절망 속의 다섯달 동안 안치에타는 성모님을 찬송하는 송가를 작사하는데 몰두하였다. 종이도, 펜도, 잉크도 없는 상태에서 그는 해변의 젖은 모래 위에 라틴어로 싯구를 적어두고는 이를 머리 속에 기억해 두었던 것이다. 그가 나중에 다시 사웅 비첸테로 돌아와서 종이 위에 싯구를 옮겼더니 4,172행이나 되었다.
1566년 32세가 되던 해 안치에타는 바이아의 대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다음 해 그는 다시 노브레가 신부와 함께 정착촌을 건설하기 위해 갔다. 그 정착촌의 이름은 리우 데 자네이루였다. 그는 사웅 파울로와 사웅 비첸테 선교구의 장상으로 임명되었다. 가르치고 강론하는 일에 행정적인 소임이 더해졌지만 그는 인디오들에 대한 관심을 전혀 거두지 않았다. 그는 성공적으로 마라모미 Maramomis 족을 개종시켰고 또 이 시기에 그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공연하도록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이 희곡들은 모두 라틴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투피어 등 다른 언어들로 각각 쓰여졌다. 희곡의 테마는 가톨릭 신앙에서 뽑은 것들로 영적인 지도와 덕성의 함양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의 희곡들이 브라질에서 최초로 쓰여진 희곡이기에 안치에타 신부는 브라질 국민 문학의 아버지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고 있는 형편이다. 1577년 그는 관구장으로 임명되어 1500마일의 해안선을 따라 각지를 방문해야 하는 의무를 안게 되었다. 이 방문들은 대개 조그만 보트로 이루어졌는데 내륙으로의 여행은 도보로 이루어졌다. 그의 허리는 항상 그에게 골치를 안겨주었는데 그가 점점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거의 곱사등이가 되고 말았다. 이런 경우 말을 탈 때에는 매우 고통스러웠다.
관구장을 두 번 역임하면서 거의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게 되었다. 건강이 점차 악화되기 시작하여 그는 의무를 덜어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1587년 그는 에스피리토 산토 Espirito Santo의 선교구 책임자로 자리를 옮겨 10년 이상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시작(詩作)과 희곡에 시간을 할애하였다. 그는 개종시킬 인디오들을 찾아 밀림에 가서 그들을 인디오 주거지에 살도록 초대하곤 하였다.
브라질에서 44년간 살면서 안치에타 신부의 행동원칙은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힘들지 않다.”는 것이었다. 주님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소진한 후 그는 레리티바 Reritiba (오늘날의 안치에타)로 옮겨져 그곳에서 1597년 6월 9일 63세의 나이로 이 불요불굴의 선교사는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께 다시 바쳤다. 그의 육신은 에스피리토 산토로 옮겨져 예수회 성당에 묻혔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1980년 6월 22일 호세 데 안치에타 신부를 시복하셨다.
첫댓글 예수회원 모든 분들이 안치에타신부님을 닮으시기를 빌며 축하드립니다!
아~멘
성인품에 오르신 호세 데 안치에타 신부님~!
한국의 모든 성인성녀들과 함께 우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