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능역과 압구정은 강남 땅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강남 땅이 왜
비싼지 나름대로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 ‘태정태서 문 단세‘
조선의 7대 임금 세조시대를 사느라고 일주일째 세면도 거르며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 저를 본다면 제 몰골은 영낙없는 노숙자나 노비의 모습입니다.
-
저는 역사를 역사 선생님인 제수씨를 통해 배우고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의경세자의 부인이자 성종의 모후가 되는 인수대비를 공부하면서 3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첫 째는 태조와 태종의 피가 거름이 되어 세종시대의
-
꽃을 피운 것처럼 성종이 있기까지 계유정란의 피 값과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장인 한명회의 치맛바람이 25년의 태평성대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조선의 왕들 중에 성군이라고 일컫는 왕은 세종, 성종, 영조, 정조정도입니다.
우리가알 듯이 그중에서 외형적으로는 세종대왕이 단연 으뜸이지만 통치
-
기간으로 친다면 용호상박일 것입니다. 저는 성종에게 한 표를 찍겠습니다.
둘째로 고부간의 갈등은 생존을 위한 인간의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 권력은 철저히 권력지향적일 때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권력이란
생존처럼 다분히 적자생존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생존이나 권력을 선과
-
악으로 보는 이분법을 지양해야할 것입니다.
성종은 그 묘호가 상징하듯이 여러 업적을 이룸으로써 왕조를 안정적 기반
위에 올려놓은 임금입니다. 그는 왕위 계승의 정상적인 서열에 있지 않은
상태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갑작스럽게 즉위했지만, 세종을 빼면 그때까지
-
가장 오랜 기간인 25년 동안 재위하면서 성실하고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
했습니다. 그의 통치에는 한계나 흠결이라고 지적할 수 있는 부분도 물론
있었지만, 조선 개국 이후 추진되어 온 여러 제도의 정비를 일단 완결함으로써
왕조가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
성종은 세조의 손자로 덕종이 요절하자 적자이면서 작은 아버지인 예종에게
밀려 자산 군으로 목숨이 위태위태했습니다. 다행히 예종이 일찍 승하하면서
형인 월산대군을 제치고 12살에 보위에 올랐는데 당시 대왕대비와 인수대비가
세기의 고부갈등을 겪자, 송이라는 라인에게 빠지게 됩니다.
-
송이는 훗날 폐비 윤 씨로 유모이자 첫 정인 중전을 폐비시키고 사약을
받는 가슴 아픈 운명을 걷게 됩니다. 대부분의 왕조가 그렇듯이, 조선 또한
개국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치열한 정치적 갈등을 겪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태종과 세조의 집권 과정입니다. 냉혹한 정치적 승부를
-
거쳐 등극한 세조는 13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치세를 마치고 승하했습니다.
맏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는 이미 10여 년 전에 요절한 상태
이었기 때문에 둘째 아들인 예종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 역시도 14개월 만에
붕어한 돌발적 상황은 왕위 계승에 관련된 분쟁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짙게
-
드리웁니다. 예종의 맏아들인 제안대군은 너무 어려(당시 3세) 왕위를 이어
가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반면 성종은 인수대비, 한명회, 신숙주 등을
중심으로 한 역대의 훈구대신들이 풍부한 경륜과 긴밀한 인맥을 바탕으로
광범하게 포진해 있었습니다. 문종이 붕어하고 단종이 즉위했을 때,
-
비슷한 상황이 빚어낸 정치적 균열을 민첩하고 과감하게 포착해 집권했던
인물들은 그때의 경험을 효과적으로 사용해 위기를 잠재웠습니다. 왕실의 가장
어른으로 상당한 식견과 정치적 능력을 갖고 있던 세조비 정희왕후는 지체
없이 성종을 후계자로 선정했습니다.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무식한 대비로
-
김미숙이 열연합니다. 59년생인 그녀는 당시 54세이었는데 비주얼이 반짝반짝
빛이 나더이다. 미인이 악역을 하면 더 소름이 기치는 것 같습니다.
하여튼 제안대군(세조의 아들)은 아직 강보에 싸여 있고 월산대군(세조의 아들)
은 질병이 많지만, 자산군은 그동안 세조가 늘 그의 기상과 도량을 칭찬해
-
태조에 견주기까지 했다는 이유였으니 신숙주, 한명회등 주요 대신들은 그
의견에 즉각 찬성했습니다. 이런 일치된 합의에 따라 그동안 왕위 계승과는
거의 무관한 위치에 있던 성종은 예종이 붕어한 그날 전격적으로 조선의 최고
권력자에 오르는 행운을 거머쥔 풍운아가 되었습니다.
-
“알리기도 전에 자산군은 이미 부름을 받고 입궐해 있었다.”는 기록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 결정은 사전에 상당 부분 합의된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핵심적인 요인은 아마도 한명회가 성종의 장인이었기 때문이
아닐가? 성종이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자신을 탄핵한 대간에게 반발하는
-
정인지, 한명회를 하옥시켰고, 대신에 대한 탄핵을 활발히 전개하도록
경국대전을 완성합니다. 경국대전은 목사들이 만든 장로 법같은 것이지요.
성종은 왕권의 확립과 대간의 육성을 통해 대신에게 기울어져 있던 권력의
무게 중심을 효과적으로 이동시킴으로써 성종 중반 조선의 중앙 정치는
-
국왕이 상위에 군림하면서 대신과 대간이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안정
적인 체제를 갖게 되었는데, 이것은 ‘정치적 정립구도’라고 부를 만한 체제
이었습니다. 이런 수준 높은 유교정치의 한 형태가 나타난 것은 성종대의
중요한 변화이자 발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그러나 그 체제에는 균열도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유교정치의 기틀을 마련한 국왕답게 성종은 유학의 진흥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재위 6년에는 성균관에 존경각을 지어 여러 경전을 소장케
했고, 양현고의 재정을 확충해 학문 연구를 후원했습니다. 재위 15년과
-
20년에는 성균관과 전국의 향교에 학전과 서적을 분배해 관학을 진흥시키기도
했습니다. 독서당을 설립한 것도 특기할 만합니다. 세종 8년에 시행된 사가
독서 제를 확대한 그 조처는 매년 뛰어난 신진학자 5~6명을 선발해 독서에
전념하도록 배려한 것으로, 이후 계속 확대되었습니다.
-
제 회사가 포스코 앞에 있었는데 저는 선 능이 성종의 묘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행정구역과 관련해 지금의 ‘압구정’은 한명회가 은퇴 후에
살던 곳입니다. 성종의 개인사에서 흥미를 끄는 부분은 폐비 윤 씨와 연산군에
관련된 사실입니다. 성종은 공혜왕후 한 씨(한명회의 딸), 폐비 윤 씨(윤기견의
-
딸), 정현왕후 윤 씨(윤 호의 딸) 등 세 왕비와 숙의 하 씨 등 10명의 후궁을
두었고, 대군 2명(연산군과 중종), 공주 2명, 왕자군 14명, 옹주11명 등 모두
29명의 많은 자녀를 얻었다고 전해집니다. 성종은 재위 내내 신하들을 폭력적
으로 제압하지 않았는데 전근대의 왕정에서 그런 행위는 정당하고 일반적인
-
통치의 일부였음을 감안하면, 이것은 그의 내면과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측면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부인에게 가장 엄중
한 처벌을 집행했고, 적장자는 유례없는 학정을 자행한 폭군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사실의 기저에는 복잡한 요인이 개재해 있지만, 그 표면적 결과는
-
인간의 근본적 한계와 인생의 복잡한 역설을 절감케 하질 않은가?
인생반백년쯤 살다가보면 내 자신에게 더 이상 실망할 것도 없게 되지만
저는 성령이 바진 인간은 누구나 악하고 이기적이고 자기 합리화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종이나 저나 개진도진이라고.
2017.5.21.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