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낭콩 껍질을 까며.
이현자
고향 집 다녀온 후, 어머니가 급히 싸준 보따리를 열어보니, 미처 껍질을 까지 못한 강낭콩이 비닐봉지에 한가득 들어 있다. 직장 일 때문에 늘 바쁜 줄 아는 딸이라 밭에서 난 작물은 무엇이든 다듬어서 주는 익숙함에 길들어져 강낭콩을 펼쳐놓고 까는 일이 참으로 성가시게 느껴진다. 적은 양 임에도 콩밥을 먹는다는 즐거움보다 질긴 콩 꼬투리를 손끝으로 눌러 깔 때마다 내 손톱 밑 아픈 것만 먼저 생각이 드니, 그동안 어머니의 노고를 당연시했다는 걸 이제야 알것같다.
어머니는 허리 수술을 하신 후 텃밭을 반으로 줄여서 가꾸신다. 하지만 심은 작물의 가짓수는 더 늘어났다. 고랑마다 이랑마다 빈틈이 별로 없다. 장마가 시작될 즈음 강낭콩을 수확하고 분이 나는 말간 감자를 캐서 아래채 고방에 펼쳐놓는다. 수년 전 큰맘 먹고 수술을 하고 시도 때도 없는 통증에서 벗어난 후 텃밭에 더욱 애착을 가졌다. 병원에 그대로 눌러앉으실까 걱정이 가득했지만, 다시 마당을 밟고 새벽 일찍 보드라운 흙을 만질 수 있다는 안도감인듯하다. 평생 수그려 밭일만 하시어 구부러진 허리를 이제야 제대로 펴건만, 자식보다 깊은 애정이 박혔는지 호미를 놓지 못한다. 그리 텃밭 농사를 말렸건만 그 후로 감자의 양과 강낭콩의 수확은 늘어만 갔다. 나머지 반이 남은 텃밭에는 어느새 심고 키웠는지. 노란 낮 달맞이꽃이 가득 번져있고 가장자리엔 키 작은 부용화꽃나무가 파수꾼처럼 서 있다. 이 곳에도 바지런한 손길이 닿았으리라 생각하니 빈틈없이 채우고 가꾸고픈 어머니의 심정이 느껴져 마음이 먹먹하다가도 이내 따듯해져 온다.
재작년 초가을 무렵, 휘어진 양쪽 무릎의 통증이, 또다시 어머니를 수술대 위로 이끌었다. 모범생처럼 재활에 임하며 집으로 돌아가고픈 의지로 힘겨운 치료를 다 이겨내고 자식 집에 두어 달 머무른 후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그 속마음을 어찌 모를 수 있으랴. 어머니는 냉기 돌던 집안에 홀로 계시며 온기를 불어넣었다. 그 후로 더는 텃밭을 가꾸지 않기로 정했건만 이웃 젊은 농사꾼이 때맞추어서 척척 밭이랑을 만들어 놓으니, 집 갈 적마다 상추와 청양고추, 가지, 부추, 강낭콩이 알차게 심어져 뿌리 내리고 있다. 새벽마다 자식 보살피듯 노구의 앙상한 손길이 닿는 작물들은 참 튼실하다. 옆집 밭보다 잡초 없이 정갈해야 하고 더 많은 열매가 맺혀야 성이 차는 듯싶었다. 아버지를 먼저 보낸 그 억척스러운 세월에 우리에게 다하지 못했던 애정이 텃밭 작물로 다 간 것만 같다.
평생을 들판에서 흙을 만지며 허리도 못 펴고 다리가 휘도록 일만 하셨으니 지식 많은 농학자보다 몸으로 체득한 어머니의 농법이 한 수 위다. 농작물이 성장해 먹을 만하면 시골집에 다녀가라고 성화를 부린다. 푸른 상추는 먹기에 맞춤한 크기를 골라 차곡차곡 정렬해놓고 밑동을 바투 자른 부추는 마른 잎과 티끌을 다듬어 씻어서 먹기만 하면 되게끔 누런 신문지에 돌돌 말아 놓는다. 평생 변하지 않는 어머니의 포장법이다. 이렇게 장마가 시작되면 팔순 넘은 어머니가 자랑스럽게 선보이는 말간 햇감자와 다 까놓은 강낭콩이 땀과 정성으로 빚어낸 반짝이는 보석 같다. 우리를 대신해 어머니의 새벽 손길이 닿을 때마다 커나가는 기쁨을 주고 열매가 되어서는 자식 앞에 당당하게 내놓는 어머니의 농익은 사랑의 결정체이다.
단지 수확된 작물이 아니라, 당신이 공들인 시간을 주는 것이며 지난 세월 못다 한 모정을 표현하는 것이고, 새벽이슬처럼 가장 순수한 사랑의 마음인 것을 당신의 허리 다리 다 굽고 휘어지도록 몰랐었다. 당신에게 나는 작물에 닿는 바람처럼 햇살처럼 빗물처럼 살갑지 못했고, 흙같이 마음이 깊고 온화하지도 않았다. 당신의 몸이 아프기 시작할 때도 알지 못했고 내 손톱 밑 아픈 것처럼 언제나 내 삶이 먼저였다. 그동안 당신이 내어 주던 것은 모두 저절로 된 것 같지만 저절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한때는 수줍은 소녀였고 여인이었던 사람이 가난한 산촌 농부의 아낙이 되어 손바닥에 풀물이 지워지지 않고 손톱에 흙이 박히도록 수그려 일만 하셨던 내 어머니는 무엇이든 저절로 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마른 흙 속에서 씨앗이 발아되고 새싹을 자라게 한 것은, 우리를 이렇게 작물처럼 성장시킨 것은, 당신이 혼신(魂神)의 힘을 다한 끝없고 질긴 기도였던 것을 이 나이 되어서 알아진다. 마치 어머니의 본질(本質)은 자식사랑인것처럼 지금도 텃밭 언저리에서 서성일 것이다.
마디마디 제 방 차지했던 뽀얀 강낭콩이 서너 알씩 튀어나올 때마다 수북이 쌓여가는 강낭콩 껍질은 당신의 생애에서 한겹한겹 벗겨낸 인고의 세월 인양 이리저리 만져 보아도 참 거칠기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