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우리시회(URISI)
 
 
 
카페 게시글
영상시, 낭송시 스크랩 `우리詩` 7월호의 시와 능소화
홍해리洪海里 추천 0 조회 161 18.06.30 10: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통권 제361호 주요 목차

 

*권두 에세이 | 이대의

*신작시 19| 임보 김두환 정순영 최성민 김일곤 임원혁 이병금 박수빈 한옥순 김성호

                          나기창 김세형 이동훈 민구식 마선숙 최한나 김예하 이강 이순향

*신작 소시집 | 방화선        *테마 소시집 | 장수철

*연재시 | 홍해리               *시집출간 특별대담 | 이범철 & 전선용

*묶어 읽는 시 | 유진          *한시한담 | 조영임

*나의 시 한 편 & 시 에세이 | 조현석 김성중 이강하 전선용 


 

 

칼의 우화 - 임보

 

옛날 어느 마을에 한 부잣집이 있었는데

그 집의 맏아들이 골목대장 불량배였다

 

긴 칼을 허리에 차고 거들먹거리며

온 동네를 주름잡고 다녔다

 

어느 집에 가서는 담장이 높다며

안이 다 들여다보이도록 낮추라고 을렀고

 

또 어느 집에 가서는 수레가 너무 많으니

통행세를 내야 한다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아니꼽다고 수근거렸지만

힘이 없으니 맞서지도 못하고 기죽어 지냈다

 

그런데,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한 깡돌이가

어느 날 화덕을 만들어 풀무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웃사람들이 뭘 하려는가 물으니

자기도 칼을 벼려 칼과 맞서겠노라 했다

 

골목대장 칼잡이가 깡돌이를 보고 노발대발했다

그만두지 않으며 불을 질러 버리겠다고 겁박했다

 

너는 칼을 가지면서 왜 나는 못 갖게 하는가?

너도 버리면 나도 안 만들겠다! 깡돌이가 대들었다

 

깡패 칼잡이가 어찌 들을 리가 있겠는가?

칼을 휘두르며 끓어오르는 화덕을 무너뜨리자

 

깡돌이가 부젓가락으로

칼잡이의 눈을 찔렀다

 


 

 

사랑- 정순영

 

   사랑을 말하면 이미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가슴에 감추어 품고 오래토록 은근하게 사모思慕하며 하늘과 땅 지척咫尺을 가리지 아니하고 마음을 행하는 것이다.

 


 

 

웃음보살 - 김일곤


화엄사 적묵당寂默堂 처마 끝에서

천 년째 수행중인 웃음보살님

한결같이 입꼬리를 귀에 걸고

오가는 사람 마음 기울기를 높여줍니다

일상의 잡념을 밀고 당기는 동안

눅눅했던 마음속 근육들이 웃음비명을 지릅니다

얼룩졌던 마음도 풀리고

바닥을 치던 분노가 봄눈처럼 녹고

침엽수 같은 마음도 웃음보가 터졌는지

빙그레 웃으며 갑니다

서로의 마음이 스미면

입꼬리가 귀에 걸리고 눈꼬리에 닿아

심연에 꽃이 피는지

연꽃향기처럼 훈김의 향기가 납니다

첫눈에 빠졌던 저 웃음보살은

한 끼 건너뛰어도 웃고 소나기에 뺨을 맞아도 웃고

눈보라 속에서도 그냥 웃으며

내 마음 안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이 보시,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

큰 절의 마음입니다

 


 

 

선운사가 부르다 - 김성호

 

선운사가 몇 번을 불렀는지 모른다

간다 간다 약속을 하고

몇 번을 어겼는지도 모른다

동백이 필 때마다 불렀고

꽃무릇이 필 때마다 불렀어도

허기진 속세에 갇혀 살면서

선계인 도솔천에 발을 담근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계는 마음속에 있지만

속세는 몸속에 있기 때문이다

백옥 같은 피부에 파란 눈을 가지고

도솔천 숲을 밝히고 있는

외눈박이 수도승 나도수정초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면

올해도 또 약속을 어겼을지 모른다.

 


 

 

- 김세형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한 꽃과 함께 핀다는 것.

 

한 여자를 이별한다는 것은

한 꽃과 함께 진다는 것.

 

사랑도 꽃.

이별도 꽃.

 


 

 

복수초 - 방화선

 

시린 발자국 뿌리며 구름 앉았다 간 자리에

노란 물감 한 방울

 

안주할 수 없는 눈 섶엔 김이 서리고

얼음을 꺼내도 끝나지 않는 겨울은

옷소매를 걷어붙였지

 

북받치는 설움이 달려간 개울가

이불홑청 뒤집어가며 두드리던

툇마루까지 울리던 방망이소리

 

빨랫줄에 고드름 매어 두고

장작불 지핀 무쇠솥에 시린 손 녹이며

순두부를 누르던 어머니

 

시린 눈을 헤집고 노란 물감 번진 자리에

아직도 그렁그렁 웃고 있는 꽃

 


 

 

루카스와 클라우스*의 이상한 저녁 - 장수철

 

서로의 뺨을 때리며 우리는 반대말 놀이를 했다

너의 반대말과 그 반대말의 반대말이 다시 네가 되지 않는

이상한 저녁

밀폐구가 헐거워진 보온병처럼 낮은 슬며시 어둠으로 새어나가고

표적지에 그려진 동심원들처럼 하얗게 식은 별들이 뜬다

애너그램의 별들이 친족관계를 확인하며 반짝일 때

우리는 서로의 표정을 압정으로 눌러놓고

서로의 뺨을 때렸다

팔의 길이보다 가까운 기억들로 채워진

가혹한 사정거리 안에 서로를 가두고

말수가 적어진 겨울 회양목과

오드아이의 고양이와

비포장도로를 질주하는 무진동차량과

물살의 고양을 일삼는 무모한 바람의 반대말들을 외치며

서로의 뺨을 때렸다

너의 반대말과 그 반대말의 반대말이 너로 환원되지 않는

이상한 저녁에

표적지를 회수하러 되돌아오는 사수처럼 새벽이 올 때까지

더러는 고통에 익숙해질 때까지

 

---

*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 나오는 쌍둥이 형제.

 


 

 

귀를 비우다 - 홍해리

    -치매행致梅行 · 298

 

아침부터 저녁이 낮이 아니고

저녁부터 아침이 밤도 아니다

 

아내는 귀를 비웠다

하얗게 시리도록 하염없이 피고 지는

말의 홍수에 떠내려온 삶

겸손과 배려와 인내와 절제의

칼집 같은 침묵의 자궁을 위하여

아내는 말없는 세상에서

댓잎의 귀를 아득히 밝히고

나비처럼 다가온 서늘한 바람

눈빛 그늘에서 길을 묻고 있는

자신을 설핏 허공에 묻고 있다

 

절절 이글대는 천의 바다를 지나

마음 다 내려놓고

설이雪異 분분粉粉한 겨울날, 아내는

소소昭昭한 해인海印으로 귀를 씻었다.



* 월간 '우리詩' 2018년 7월호(통권 361호)에서

* 사진 : 요즘 전국의 공원과 집 울타리를 장식하고 있는 '능소화'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