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4: 16 그렇지 아니하면 - 고전 14: 18 방언을 더 말함으로
고전 14: 16 그렇지 아니하면 -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송하는 자는 통역하지 않으면 듣는 사람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아무 유익이 없다.
1]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여기 "축복"이란 말(* 은 하나님께 감사함을 의미한다.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란 말은, 교회의 지도자가 아닌 평신도(平信徒)를 가리킨다(Lenski).
2]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아멘"이란 말은, 여기서는 예배에 참석한 자로서 공석 기도자(公席祈禱者)의 감사에 동조(同調)하여 "그렇습니다" 하는 뜻이다.
* 느 8: 6 -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이 말은 히브리어의 음역(音譯)이다. 그 말은 "진실함", 또는 "그렇습니다" 등을 의미한다. 공석 기도가 끝나자 회중이 "아멘"하는 것은 구약의 예배 풍속에서 왔다.
* 민 5: 22 - 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물이 네 창자에 들어가서 네 배를 붓게 하고 네 넓적다리를 마르게 하리라. 할 것이요, 여인은 아멘. 아멘. 할지니라.
* 신 27: 15 -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말하되, 아멘. 할지니라.
고전 14: 17 감사를 잘 하였으나 -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
1] 너는 감사를 잘 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이것은, 남이 알아듣지 못할 방언으로 기도한 것이, 공동 예배자(共同禮拜者)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임을 지적한다.
예배는, 단지 신비적(神秘的)인 느낌만 위주하지 않고, 지식 성품을 통하여 받아질 진리에 해한 심령의 반응(反應)을 보다 중요시한다.
고전 14: 18 방언을 더 말함으로 -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
1]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신자들 중 받은 은사를 잘못 쓰므로 폐단이 있는 때에, 그것을 교정시킬 만한 자격자는 같은 은사를 받은 자이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방언의 은사를 더 많이 받았으므로, 이 은사를 폐단 있게 사용하는 자들을 경계할 권위(權威)를 가졌다.
오늘날 불건전한 신비주의(神秘主義)의 폐단을 교정시킬 사람은 누군가? 그는 참된 신비주의를 체험한 사람이다. 기독교는 냉랭한 지식 종교(知識宗敎)가 아니고 역시 건전(健全)한 신비주의를 하나의 요소로 가지고 있다.
성경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실감(實感)하게 되나니, 이것이 건전한 신비주의이다.
바울은 방언하는 은사를 그 자신이 받은 사실로 인하여 감사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이 은사 자체를 귀히 여긴 것이 분명하다.
고전 14: 19 깨달은 마음으로 -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
남이 아는 말로 가르쳐 남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 남들이 모르는 방언을 말함보다 교회에 유익하다고 바울은 역설(力說)한다.
기독자가 받은 은사는, 자기의 독점 사용(獨占使用)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교회의 봉사를 위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교회 앞에서는 언제나 방언을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1]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그는 말할 바엔 깨달은 마음으로 말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방언을 위주할 수 없다.
(1) 예수님께서도 친히 방언을 하였다는 말이 없을 뿐더러 그들은 물론 방언을 위주하지 않았다.
(2) 방언을 위주하면, 결국 성경을 등한히 하는 폐단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지 기이한 것을 탐한다. 누가 어떤 곳에서 성경을 가지고 기독 신자들에게 은혜를 끼친다 할지라도, 그 부근에 이적을 행하는 이가 있는 경우에는, 그들의 마음이 거의 전부 그리로 쏠리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영혼을 이적으로 먹여 살리지 않으시고 성경 말씀으로 먹여 살리신다. 바울은 말하기를,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라고 하였다.
* 고전 1: 22-23 –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3) 방언을 위주하는 곳에는 결국 "예언"(성경 이외의 어떤 예고)도 고조하게 된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필경 저마다 계시를 보려고 하여 꿈을 숭상하고, 기타 여러 가지로 숨은 것을 드러낸다고 주장할 우려가 있다. 예언을 위주하는 곳에는, 마침내 그릇된 예언들이 많이 터져 나오게 되어 마귀 역사의 온상을 이루게 된다.
마귀는 언제든지 교훈의 불건전한 틈을 타서 역사하는 법이다. 사도 바울은, 교훈의 건전성을 많이 주장하였다.
* 딤전 1: 10 -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 딤전 6: 3 -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 딤후 1: 13 -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 딤후 4: 3 -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 딛 1: 9 -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 딛 2: 1 -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
이러한 구절 중에서 그가 주장한 "바른 말", 혹은 "바른 교훈"이란 것은, 건전한 교훈을 말함이다. "건전한 교훈"이란 것은, "건강한 교훈"(* )을 말함이다.
사람의 체격이 건전하다고 하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것은 여러 지체들이 제 자리에 있는 질서 정연한 체격이 아니겠는가?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사들이 교회에서 본말(本末)과 선후(先後)가 바뀌지 않고 각기 제 위치를 지키도록 가르치는 그 교훈이 건전한 교훈이다.
2]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사도 바울은 결론적으로 교회에서 방언으로 하는 일만 마디 말이, 생각을 가지고 가르치는 다섯 마디 말보다 못하다고 말한다.
이성과 신비
신앙에는 이성적 요소와 신비적 요소(기적, 영적인 현상)가 있다. (신비주의는 아님) 그러나 ‘이성이 신비를 통제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이다.
교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신학이 바로 서야 한다. 신학은 이성적 영역이다. 오늘날 몰(沒)이성적이고 반(反)지성적인 신비적 신앙이 판치는 것은 신학의 책임이 크다.
신학이 신비(신화)를 통제하지 못하면 결국 신앙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맹목적이 되고,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독일 신학자 불트만은 복음의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를 주창하였다. 복음에서 신화는 부정될 수는 없지만, (맞습니다) 이성에 의해서 콘트롤 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옳습니다)
어떤 사회나 공동체이든지 신비(신화)가 이성 위에 군림하게 될 때 파국으로 치닫게 마련이다. 불트만은 독일교회의 비이성적인 신앙이 나치의 신화(신비)를 가능하게 했고, 나치의 신화는 독일뿐 아니라 유럽 세계 전체를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사실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깊이 반성했다.
바울 역시 공동체에 덕을 세우는 것은 방언이 아니라 이성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 14: 19)
방언의 유익을 무시함이 아니라, 이성이 신비(방언)를 통제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교회의 위기상황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신앙이 이성을 상실하고 신비로 되어가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복음이 복 비는 신비(신화)로 변질되고,
“오직 예수만”을 외치면 안 될 일도 된다는 식의 무속적인 신앙이 강조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목사들은 대체로 자기의 말과 행동을 예수와 동일시하며, 예수에게 순종하듯이 자기에게 순종하도록 강요하면서, 신도들을 신화의 세계에 머물도록 만든다. 몰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교회일수록 만약 잘 된다면, 오늘날 병든 현실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