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71편)*
*역적(逆賊)의 아들, 왕(王)이 되다*
조선의 중흥을 꽃피운 정조의 탕평책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정치세력은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겼던 벽파(僻派)와 그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던 시파(時派)였다.
노론(老論)은 대부분 벽파였고, 남인(南人)세력은 시파였다.
그렇다면 정조는 어느 입장에 우호적 이었을까?
당연히 남인세력에게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조는 남인세력뿐만 아니라 노론세력들까지도 고루 등용했다.
할아버지 영조와 마찬가지로 당파와 관계없이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자 하는 탕평책(蕩平策)을 지향했다
즉, 붕당자체를 인정하되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려내어 반영하고, 각 붕당의 입장을 떠나 의리와 명분에 합치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중용하는 준론탕평 의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다.
준론탕평(峻論蕩平 - 강경론을 앞세운 탕평정책)은 영조가 아예 싸우지 말고 무채색으로 가자는 완론탕평(緩論蕩平) 과는 다르다.
정조는 오히려 색깔을 명확히 하고 왜 자신의 색깔이 옳은지 논쟁 속에서 끄집어내자고 한 것이었다.
(이거 이거~ 말빨이 쎈 사람만 가능한거임! 역쉬 정조 임금 짱!!!)
정조는 정적(政敵)이었던 노론세력과도 가까이 지냈다.
예전에는 노론세력이 정조를 미워해 정조를 독살했다!'
라는 이야기가 일부 전해지고 있었는데,
사실 정조는 노론세력의 수장인 심환지(沈煥之) 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정치적인 조력관계를 맺고 있었다.
2009년 2월 9일, 정조의 통치 후반기 4년 동안 심환지에게 보낸 290여 통의 어찰(御札),
비밀편지가 공개되면서 심환지가 정적(政敵)이 아니라 국정파트너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심환지(沈煥之)가 정조를 독살한 배후라는 가설도 일단락 되었다
편지내용을 살펴보면, 정조(正祖) 는 각 현안이 있을 때마다 심환지(沈煥之)에게 비밀리에 편지를 보내 미리 상의했다.
이른바 미리 써놓은 '대본'대로 정책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이거이거~완죤 짜고 치는 고스톱인뎅?)
편지내용에는 심지어 심환지(沈煥之) 와의 비밀 계약도 있었는데,
정조(正祖)는 심환지의 큰 아들이 과거시험에서 떨어진 것에 대해 이렇게 위로하기까지 했다.
300등 안에 들면 합격시키려고 했는데,네 아들이 300등 안에 들지 못해서 안타깝구나!
(정조신한(正祖宸翰)의 내용 - 낮동안 평안한가? 들으니, 내일 청좌하여 상소한다고 하는데, 내용의 개략을 보여 주는 것이 어떠한가?
각별히 들추어낸다는 비방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만 줄인다..)
♡ 개혁정치의 요람, 규장각♡
정조는 왕이 되자마자 궐 안에 규장각
(奎章閣)을 설치했다.
규장각은 정조가 세운 왕립도서관으로 창덕궁의 후원에 세워졌다
(정조의 어명에 김홍도가 그린 규장각)
(창덕궁 주합루 - 1층은 규장각, 2층은 열람실)
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탕평책을 추진하고자 했던 정조(正祖)는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야 했다.
따라서 당파와 관계없이 유능한 청년 학자들을 모아 규장각(奎章閣)에서 공부하도록 해 학문의 상징적 존재로 문풍을 진작시키려 노력했다.
정조시대의 규장각(奎章閣)은 그 이전의 규장각이 맡고 있던 역대 국왕의 글을 보관하는 기능을 넘어서 국가의 정책을 수립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정책 연구 기관의 역할을 했다.
정조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했던 목적은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했던 목적과 같은 것으로 개혁정치의 산실이었다.
정조는 즉위후 새로운 개혁기관을 설치할 경우 노론세력이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기존의 규장각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고자 한다는 것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숨겼다.
기존의 신하들 만으로는 왜곡된 당쟁(黨爭)의 정치구조와 뿌리깊은 부패를 제거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정조는 관리의 등용문으로 과거제도를 신뢰하지 않았다.
실제로 정조가 세손으로서 대리청정을 시작한 뒤 처음 실시된 영조51년의 과거에서 3명이 미리 답안지를 숨기고 들어와 부정 합격한 사실이 드러났다.
정조(正祖)는 부정합격자들이 답안지를 가지고 입장할 수 있었던 전모를 철저히 밝히라고 예조에 지시했으나 부정합격자 3명의 합격이 취소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고 말았다.
부정을 비호(庇護)하는 세력의 뿌리가 워낙 깊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조(正祖)는 개혁정치의 주체세력을 형성하는데 과거제도에만 의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때묻지 않은 재야의 선비들을 주목했다.
그는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재야 선비들을 모아 이들을 개혁의 논리로 무장시키고, 나아가 이들이 개혁정책을 실현시키기를 희망했다.
제학(提學), 직제학(直提學), 직각(直閣), 대교(待敎) 등 총 6명으로 구성된 이들 각신(閣臣)은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국왕 정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많은 특권이 부여되었다.
우선 국왕을 아침 저녁으로 대면할 수 있고, 각종 조정 내 토론에 참가할 수 있었다.
특히 직각(直閣)을 거치면 왕명 없이도 전랑(銓郞)에 추천될 수 있었다.
또한 각신이 다른 신하들의 죄를 청할 수는 있어도 사헌부에서 국왕의 허락없이 각신(閣臣)의 죄를 청할 수 없었다.
형사상 특권도 주어져 공무중에는 체포, 구금되지 않아 국왕의 가신(家臣)과 같은 우대를 받았다.
정조시대를 통틀어 각신(閣臣)에 임명된 사람은 총 38명이었다.
이 중에서 제학에 임명된 사람이 20명이고, 그 중에서 채제공(남인), 이복원(소론),이성원(소론),서명응 (소론)을 제외하면 모두 노론이었다.
따라서 당파로 구분한다면 노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만 각신(閣臣)들에게는 당파를 초월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당론을 지키면서도 탕평정치를 비롯한 정조의 개혁정치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규장각(奎章閣) 을 통해 개혁정치의 추진세력을 형성하고자 했던 정조의 구상이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규장각(奎章閣)에서는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등 새로운 활자들이 대거 개발되었으며, 정조가 직접 주관한 책만도 2,400권에 달할 정도로 많은 책들이편찬되어 조선의 문예부흥시대가 열렸다.
정조대에 간행된 대표적인
서책들이었다(대전통편)
* 요대목에서 잠깐 대전통편 에대하여 *
대전통편(大典通編) 은 조선 정조 9년(1785년)에 발간된 조선 시대의 통일 법전입니다.
조선 후기의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하고 복잡해진 법 체계를 하나로 통합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큽니다.
조선 초기 성종 대에 완성된 경국대전 이후, 사회가 변하면서 새로운 법령(수교)들이 계속 쌓여갔습니다.
영조 대에 이를 보완한 속대전 이 나왔으나, 여전히 여러 법전과 시행 규칙이 흩어져 있어 관원들이 법을 집행할 때 혼란이 컸습니다.
정조는 이를 해결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법령을 체계적으로 통합한 법전을 만들게 했습니다.
경국대전』(원문)과 『속대전』(속편), 그리고 그 이후 정조 대까지의 새로운 법령(증보)을 한데 모았습니다.
독자가 법의 연원을 쉽게 알 수 있도록 글자 앞에 원(原), 속(續), 증(增) 자를 표시했습니다.
원(原): 『경국대전』의 내용
속(續): 『속대전』의 내용
증(增): 그 이후 새롭게 추가된 내용
체제: 기존의 6전(이·호·예·병·형·공전)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여 일관성을 높였습니다.
공장(고용 장인) 제도나 신분제의 변화 등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달라진 조선의 경제·사회적 모습이 법적으로 정리되었습니다.
정조의 핵심 기구였던 규장각을 중심으로 편찬되어 학문적 수준이 높고, 이후 고종 대의 대전회통 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습니다.
조선 시대 법전의 변천사를 보면 경국대전(성종) → 속대전(영조) → 대전통편(정조) → 대전회통(고종) 순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대전통편』은 그중에서도 조선 후기 법령 체계의 완성판이라 평가받습니다.
♡ 인재의 요람, 초계문신제도 ♡ 초계문신(抄啓文臣)이란 규장각에 소속되어 재교육을 밟은 나이 어린 문신 들을 말한다.
초계문신(抄啓文臣)제도는 정조가 개혁에 필요한 인재를 키우려고 1781년 부터 시작되었고,
정조는 과거에 급제한 문신과 현직 문신 중에서 37세 이하의 사람들을 모아 이른바 재교육을 시켰다.
(아주 빡시게...)
37세 이하라 할지라도 3품 이상의 고위관료는 제외시켰다.
정조(正祖) 는 왜 관직과 나이에 제한을 둔 것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어린 문신들을 키워서 훗날 정조(正祖)의 정치를 함께 수행할 인재로 쓰기 위해서였다.
나이 제한을 둔건 나이 많은 사람들은 다시 교육을 시키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을터이고,
37세 이하의 고위관료를 제외시킨건 그들 중에서 노론 계열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19년 동안 선발된 초계문신(抄啓文臣)은 모두 138명으로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청요직(淸要職)에 올랐으며,
규장각에서 배출된 정약용, 이가환, 서유구 등 당대 최고의 학자와 관료들을 배출하여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했다
♡ 서얼허통(庶孼許通) ♡
서얼(庶孼)은 양반의 자손 가운데 첩의 소생을 이르는 말로,
서(庶)는 양인 첩의 자손,
얼(孼)은 천인 첩의 자손을 말한다
고려시대에는 서얼(庶孼)에 대한 차별이 두드러지지 않았으나,고려 말에서 조선초기에 들어와 성리학의 귀천의식과 계급사상이 지배계급의 생각으로 자리잡게 되자 서얼(庶孼)의 등용에 제한을 두기 시작했다.
서얼(庶孼)은 가정에서도 천하게 여겨 재산 상속권이 없었고, 관직에 등용되기도 어려웠다.
1776년 정조(正祖)가 즉위한 직후, 전국에서 올라온 수천 명의 서얼들이 무려 7개월 이나 궁궐 밖에 버티면서 집단으로 왕에게 상소를 올려 서얼(庶孼) 차별을 시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신분차별의 폐해를 잘 알고 있던 정조가 이들의 요구를 상당 부분 받아들여 발표한 것이 '서류허통절목이다
*요대목에서 잠깐 서류허통절목 이란*
서류허통절목(庶類許通節目)은 조선 후기인 1777년(정조 1년)에 발령된 법령으로, 서얼(서자 출신의 후손)들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획기적인 조치입니다.
조선 시대의 신분제적 제약이었던 '서얼금고법(서얼의 문과 응시 및 고위직 임용 제한)'을 완화하려는 국가적 차원의 공식 선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중기 이후 서얼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실용적인 학풍(실학)이 대두되었습니다.
특히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서얼들의 소통(허통)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절목(節目)'이란 시행 규칙을 의미합니다.
이 법령에는 서얼이 관직에 나갈 때 적용되는 구체적인 기준이 담겨 있습니다.
서얼들도 실력에 따라 정해진 범위 내에서 관직에 오를 수 있게 했습니다.
완전히 평등한 것은 아니었으나,
과거 시험 응시와 하급 관직 임용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이 절목의 정신에 따라 정조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등 유능한 서얼 출신 인재들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파격 등용했습니다.
양반 중심의 폐쇄적인 신분 사회가 능력 중심의 사회로 이행하기 시작한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서얼들이 가졌던 지적 능력을 국가 경영에 활용함으로써 조선 후기 문화와 학문의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정조 대의 서류허통절목은 훗날 1823년(순조 23년) 대대적인 서얼 허통으로 이어졌으며, 궁극적으로는 조선 말기 신분제 폐지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 절목은 단순히 서얼을 도와주는 차원을 넘어, **"능력 있는 자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는 정조의 탕평책과 민본주의 철학이 잘 드러난 기록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조시대 부터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된 서얼허통 문제는 관직의 수가 양반 수에 크게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과, 사대부 집안의 적서(嫡庶)간의 다툼과 혼란을 이유로 수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정조시대의 서얼허통(庶孼許通) 정책은 '백성은 나의 동포요, 한 집 식구"로 보는 정조의 백성관에서 비롯되었으며,
유능한 인재를 고루 등용한다는 임용 방침에 따라 취해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3년부터는 홍국영의 천거로 서얼(庶孼)에게도 관로(官路)를 열어주기 시작해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 실력이 쟁쟁한 서얼 출신 학자들이 등용되었다.
이렇게 발탁된 규장각 4검서는 이후 조선의 지식계를 주도했다.
비록 서얼(庶孼) 출신이고 직급은 낮았으나 이들의 학문은 당대 최고였다
조선초 태종때인 15세기 초, 서얼(庶孼)의 관로 진출을 막는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
이라는 🐕 같은 악법이 제정된 이래 거의 400여년 만에 서얼의 한(恨)이 정조에 의하여 조금씩이나마 풀리기 시작했다.
태종이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을 만든 것은 서자 출신인 정도전 때문이라고도 하고, 이방원 태종이 죽인 동생 방석(芳碩)이 후비소생 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어? 이방석을 낳은 신덕왕후는 계비인지라 적자가 맞는뎅~어찌 된걸까?)
하여간 서얼(庶孼)의 자식도 서얼로 인정되는 바람에 서얼의 수가 엄청 늘어났고,
그 수많은 서얼들과 서얼출신 인재들이 이 🐕 같은 법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한 채, 사회의 그늘속에서 빈곤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원망하며 죽어갔다.
관로(官路)가 막혀 있을뿐만 아니라, 적자가 없고 딸만 있는 집에서 조차 서자(庶孼) 에게 상속치 아니하고 양자를 들여 상속시키는 바람에 돈 한 푼 못 받았고, 제사도 못 지내게 했으니
서자(庶孼)의 한(恨)은 깊고도 깊은 것이었다.
하다못해 한식 때 산소에 가서도 술 한잔 따를 수 없어, 멍청하게 적자(嫡子)들 뒤에 서서 구경이나 해야 했다.
서자(庶子)는 자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왕실에서는 사실 왕들이 선조대부터 거의 서자(庶子)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이라는 것들은 서자문제에서 저희들은 쑥 빠지고 백성들의 적서(嫡庶)의 구분만 엄격히 했다
서얼(庶孼)차별을 타파하려는 시도는 영조 때부터 나타났다.
1772년 영조는 서얼을 청요직(淸要職) 에도 등용한다는 '통정윤음'을 내리고, 서얼도 호부호형(呼父呼兄)하게 하였다.
그러나 기존 양반들의 반발이 심해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기존 양반들은 소과에 합격한 서얼(庶孼) 들을 생원이라고 부르지도 않았고, 양반 명부인 향안에도 올려 주지 않았다.
기득권을 가진 수구 꼴통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었다.
조선후기가 되어 천인의 첩이 다수가 되자 '얼(孼)이 압도적으로 많아졌으며, 서얼(庶孼)이 전체 조선 인구의 거의 절반에 육박하게 되었다.
정조가 즉위한 다음해인 1777년, 정조는 서얼(庶孼)에 대한 문관, 무관의 관직을 구체적으로 정하여 관로를 열어 주라는 명을 내렸고,
그 결과 서류소통절목(庶流許通節目)'이 반포되었던 것이다.
정조(正祖)는 이 절목이 사문화(死文化)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규장각에 검서관제도를 만들어
그 유명한 4검서인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을 출현시켰고, 이향림을 경상우수사, 이덕형을 선전관으로 임명하는 등 30여 명을 관직에 등용했다.
그러나 청요직(淸要職)인 사헌부나 사간원, 예문관에는 서얼 (庶孼)을 입성시키는 데 실패했다.
기존 관료들이 집단으로 반발하는 바람에 때를 더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1791년이 되자 정조(正祖)는 성균관에서의 자리 배정에 적서(嫡庶) 순서대로 하지 말고 나이 순서대로 하도록 명했으며, 서얼차별 철폐는 노비제도 철폐와 함께 갑오개혁이 일어난 1894년까지 100여 년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여기서 잠깐 유형원의 에 나와 있는 서얼차별의 예를 보자.
1. 서얼은 적자를 지극히 섬겨야 한다.(이룬 옘~병할)
2. 적자와 서얼이 자리할 때, 약간 뒷 줄에 서자, 더 뒤에 서얼이 앉는다.
3. 적자의 나이가 어려도, 서얼은 '너'라 할 수 없다.
4. 적자를 만나면, 서얼은 말에서 내려야 한다.
5. 서얼이 적자에게 무례하면, 관에서 벌한다
서얼제도는 조선 최고의 악법 중 하나였고, 조선시대의 가장 큰 병폐였다.
수구꼴통 양반들이 100여년 간이나 서얼차별 철폐에 반발하여 저항하지만 않았어도......
그다음 ......부분은 여러분이 채워주시기를!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72편)*
*역적(逆賊)의 아들, 왕(王)이 되다*
♡ 백성들의 자유로운 상업활동을 보장한 신해통공(辛亥通共)♡
18세기 조선은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해 잉여농산물이 늘어나고 제조업이 발달했다.
또한 대동법 시행으로 인하여 화폐의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상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던 시기여서 전국에 1,000개가 넘는 장터가 생겨났다
한양의 인구는 17세기 15만명에서 18세기가 되자 30만 명으로 두 배로 늘어났다.
이렇게 되자 국가 지정 시장인 시전이라는 제한된 시장만 가지고는 늘어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조선에는 전통적으로 육의전
(六矣廛)이라 불리는 시전상인과 난전상인이 있었다.
시전상인은 국가에 세금을 내는 상인으로, 비단을 취급하는 입전, 무명을 취급하는 면포전, 베를 취급하는 포전, 모시를 취급하는 저전, 종이를 취급하는 지전, 그리고 내외어물전 등의 육의전(六矣廛)을 포함한다
조정에서는 재정난을 덜기 위해 시전 상인들에게 일부 품목에 대한 독점권을 인정해 이익을 보장해 주고,
그래서 그들이 갖게 된 특권이 금난전권
(禁亂廛權- 난전을 금지하는 권리)' 이었다.
시전상인은 오늘날의 종로거리인 운종가에 모여 장사를 했다
난전상인(亂廛商人)은 무허가 좌판을 통해 상업활동을 하는 이들로, 세금을 내야하는 시전상인의 물건보다 물건값이 쌌기 때문에
조선후기에 상업활동이 활발 해지면서 사람들이 난전 상인에게서 물건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에 따라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유지하기 위해 서인 노론 벽파의 정치자금을 대고 있던 시전상인들은 허가 없는 장사꾼들의 상행위를 난전(亂廛)으로 규정하여 세금을 거두거나 파는 물건을 압수했으며, 반항할 경우 관가에 넘겨 처벌을 받게 했다
금난전권(禁亂廛權)'은 도성 안과 도성 밖 10리까지 사사로운 상행위를 금지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으로, 처음에는 시전에서 판매하는 6가지 물품에만 한정되어 있었으나, 나중에는 모든 상품이 금난전권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시전상인들이 물가를 마음대로 조작하여 물가는 하늘을 치솟게 되었고, 상인들은 거부(巨富)가 되어갔다.
이 과정에서 상인들은 고위 벼슬아치들 에게 뇌물을 받쳐 금난전권의 권리를 계속 유지하려 했다.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정경유착 이라는 부패의 고리가 여기서부터 생겼으며, 결국 금난전권 은 상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고 말았다.
1791년 2월, 정조는 백성들의 상업활동을 자유롭게 보장함과 동시에 정적(政敵)인 노론 벽파 세력의 자금줄을 끊기 위해 '금난전권 을 폐지하고 독점을 금지하는 신해통공 을 반포했다.
채제공의 건의로 정조가 결단한 정책인 '신해통공(辛亥通共)'이 발표되자 전국의 난전이 활성화되면서 물가는 내려갔으며, 이로써 조선의 상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 문체반정(文體反正) ♡
1791년 나라가 온통 천주교인의 '진산사건'으로 시끄러울 때, 정조는
이 여파를 잠재우기 위해 문체반정
(文體反正 문체를 바르게 돌려놓음) 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서학을 금지하려면 먼저 부터 금지하고, 패관잡기를 금지하려면 먼저 명말청초의 문집들부터 금지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 것이었다
(패관잡기 - 어숙권)
패관(稗官)이란 민간에 나도는 풍설과 소문 등을 수집하던 일을 맡은 관리를 지칭하는 말로서,
(이들이 모은 잡다한 이야기)
조선 중기에 어숙권(魚叔權)이 지은 수필집의 이름이다.
오늘날로 따지면 단편소설이나 수필, 에세이 같은 것들인데 이런 것들이 당시의 사고로는 너저분한 스토리들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 당시 성리학자들의 문집들은 모두 도(道)를 논하거나 교훈을 주는 경건한 글들로 도배되어 있어서 수신제가(修身齊家)에는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한 책들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패관잡기와 같은 잡문들은 지나치게 우울하거나 슬픈 스토리를 다루고, 깊이가 없이 화려하며, 쓸데없는 농담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등 경건한 경서와는 거리가 먼 문체라고 여겨서 비난을 받았다.
말하자면 당시에는 유머나 재치, 역설, 낭만 등을 아주 점잖지 못한 행위로 알았고, 모든 글을 엄숙하고 장중한 틀에 박힌 문체로 써야 했던 것이다.
(말도 안돼~~~)
1792년, 정조(正祖)는 당대의 거장 연암 박지원(朴趾源)의 로 부터 비롯된 패관문체와 새로운 타입의 글쓰기가 문풍을 비속하게 만들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패관문체의 소설과 서책들을 모아 모조리 불태우라 명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내용의 일부분)
또한 사신들에게 패관문체의 중국책을 일체 반입하지 말도록 명했고, 과거 답안지에 패관문체를 쓰면 아무리 답안을 잘 썼어도 탈락시켰으며, 앞으로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정학을 확립하면 서학 등의 잡학이 저절로 수그러들 것이라는 논리였다.
정조도 박지원의 를 읽었다.
정조는 를 읽고 나서, "근자의 문풍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박지원의 죄이다.
내 익히 보았거늘 어찌 속이거나 감출 수 있겠느냐?"라며 문풍의 원흉으로 지적했으나, 박지원의 재주를 아껴 벌을 주기는 커녕 반성문 한 장으로 때우게 했고, 대신에 다른 인물들이 걸리면 혼줄을 냈다.(ㅋㅋ~ 사람을 차별하시면 아니되옵니다!) (박지원과 열하일기)
중국 서적을 수입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패관문체 때문이었으나, 정조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사대부 들이 경서(經書)를읽을 때에는 책을 책상에 반듯이 올려놓고 바른 자세로 앉아서 읽어야 하는데, 중국 책은 종이가 얇고 글씨가 작아 누워서 보기 편했다.
즉 경건하게 대해야 할 경서.를 사대부들이 누워서 편히 본다는 것은 성현의 경전을 우습게 보는 처사이며,
또 이렇게 게을러서야 어떻게 수신하며 장래에 국사(國事)를 감당하겠느냐는 정조의 질책이었다.
정조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일으켜 노론들이 주장하는 천주교 박해의 예봉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었으며, 문체반정(文體反正)을 통해 본 개혁군주 정조는 의외로 보수주의자였다.
♡ 문체반정의 희생자 이옥(李鈺) ♡
정조의 중국 경서에 대한 지극한 숭배와 문체반정(文體反正)으로 인생이 꼬인 사대부가 있다.
이옥은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집안이 무과로 흐르고 서자가 대를 이은 경력 때문에 권력의 가장 자리로만 맴돌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더구나 집안이 소북 계열이어서, 먹고살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어도
출세에는 많은 걸림돌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과거에 뜻을 둔 이옥(李鈺)은 과거 준비를 열심히 했으나 일곱 번이나 내리 낙방을 했다.
그러다가 겨우 31세, 1790년에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곧이어 대과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도중인 1792년, 정조의 추상같은 문체반정령이 반포되었는데, 하필이면 박지원이 아닌 이옥(李鈺)이 타락한 문체를 쓰는 문제의 인물로 찍히게 되었다.
박지원 이야 당대의 문장가에다
또 집안이 쟁쟁한 노론 집안이었기 때문에 정조도 한 수 접어주던 인물이었다.
(이룬 뜨그랄 그랴서.더러우면 출세를 해야하는게야!)
이옥(李鈺)의 과거 시험지 답안을 검토하던 정조는 문체가 패관소품의 경향이 있다면서 이옥에게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취했다가 벌로 충군(充軍)을 명했다.
답안지 문체가 마음에 안 든다고 군대를 가라는 것이었다.
3년 뒤인 1795년 이옥(李鈺)은 경상도 삼가현의 군적에 이름을 올리고 한양으로 돌아와 초시에 응시해 1등을 했으나, 문체가 격식에 어긋난다는 문책을 듣고 꼴등으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합격은 합격이었고, 과거에 합격하면 병역은 자연히 면제였다.
그러나 이옥(李鈺)이 그 절차를 몰라 소견서를 올리지 않고 그냥 고향에 돌아와 버린 것이었다.
그랬더니 몇 년 후에 삼가현에서 소환하는 독촉장이 줄을 이었다.
이옥(李鈺)은 할 수 없이 삼가현으로 내려가 군대에 복무하게 되었다.
거기서 몇 년 썩은 후 1800년 에 과거가 있자 삼가현 현령은 이옥 (李鈺)이 한양으로 가는 것을 허락했다.
(이거 웃어야 되나? 울어야 하나? 하여튼 이런 경우를 가리켜 🐕같은 경우라 하지?)
어영부영 나이는 마흔이 넘고 준수하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한 인생 후반에 들어서서 관직에도 나아가지 못하게 되자,
이옥(李鈺)은 낙향하여 고향 남양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 1815년 세상을 떠났다.
이옥(李鈺)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문체를 버리지 않았고, 그 시기는 하필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시기였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옥(李鈺)의 글은 이옥의 벗이며,
그의 글을 적극 옹호했던 김려에 의해 유고(遺稿)가 수습되고 정리되었으며,
최근 그의 글은 새로운 작가 정신이 발현된 글로 인정받아 그의 문학세계가 연구되고 있다
(예림잡패 이옥이 지은 시론집)
(시장 속 백성의 모습을 그린 이옥의 시기(市記))
*요대목에서 잠깐 이옥의 글한편봅시다*
조선 후기의 문장가 이옥(李鈺, 1760~1815) 은 당시의 정통 한문학이 외면했던 백성들의 구체적인 삶과 일상을 생생하게 기록한 작가로 유명합니다.
특히 시장(市)은 다양한 계층이 뒤섞여 삶의 활력이 넘치면서도 고단함이 서린 공간으로, 그가 즐겨 다룬 소재였습니다.
시장 속 백성의 모습을 묘사한 대표적인 시와 그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표적인 작품: 백운필 중 시장의 풍경
이옥은 시뿐만 아니라 산문에서도 시장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했습니다.
그의 작품 속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행위뿐 아니라, 그 이면의 사람 냄새 나는 장면들이 가득합니다.
성시도(城市圖)적 묘사: 시장에 나온 장꾼들, 짐을 지고 가는 부역꾼들, 전대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 노인 등 인물의 동작을 마치 눈앞에서 보는 듯 묘사합니다.
물가와 생계: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라, 됫박으로 쌀을 재는 모습이나 푼돈을 아끼려 흥정하는 모습을 통해 백성들의 절박한 생계 문제를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이옥이 그린 시장과 백성의 모습은 당대의 다른 문인들과 차별화되는 몇 가지 지점이 있습니다.
① 일상어와 속어의 과감한 사용
그는 격조 높은 고사(故事) 대신, 시장바늘에서 실제로 쓰이는 조선어의 어감을 한문으로 옮기려 노력했습니다.
이를 통해 백성들의 감정이 훨씬 직접적으로 전달됩니다.
소외된 계층에 대한 시선
그의 시선은 화려한 상점보다는 노점상, 엿장수, 땔나무꾼 등 기층 민중에게 머뭅니다.
장꾼의 고단함: 새벽같이 일어나 장터로 향하는 발걸음과 해 질 녘 빈손으로 돌아가는 허탈함 등을 연민의 시선으로 담아냈습니다.
소품체(小品體)'의 미학
길고 장황한 서사보다는 찰나의 장면을 포착하는 소품체 형식을 사용하여, 시장의 소란스러움과 활기를 스냅 사진처럼 찍어내듯 표현했습니다.
이옥의 시를 읽을 때는 다음의 장면들을 상상해 보시면 좋습니다.
소리: 짐승의 울음소리, 물건을 외치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
냄새: 장터의 국밥 냄새, 비린내, 사람들의 땀 냄새.
시각: 알록달록한 포목과 투박한 옹기들.
참고: 이옥은 이러한 파격적인 글쓰기 때문에 당시 정조(正祖)가 주도했던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대상이 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200년 전 조선 시장의 생생한 민낯을 오늘날에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