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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해본 행궁터 건물들 가운데 큰 건물은 용장사 대웅전 |
[한국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정유재란 순절묘를 돌아서 용장산성 행궁터로 향하여 달렸다.
차는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계곡을 낀 요새지역에 이르러 멈추었다.
산 가운데 그리 넓지는 않지만 그나마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곳이 있는 곳.
그런 곳은 평시에는 궁터로 할 수 없을 것이나
가장 힘든 시기에는 적이 침입했을 때 방어하기는 좋은 곳이기에 행궁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용장산성은 육지에 바로 인접하면서도
울돌목의 거센 물결을 거슬러 올라와야 닿을 수있는 요새지역이다.
진도고려 임시정부는 벽파정을 주요 항구로 하여 방어하게 좋게 산성을 쌓았다.
그 산성은 주로 돌로 지은 석성이 길지만
흙을 돋우어 지은 토성이 혼합된 성으로 행궁터를 중심으로 전체 길이가 12.85km에 이른다.
고려는 1231년 처음 몽골의 침공을 당하였고,
준비없는 침략에 당황한 고려는 일단 강화조약을 맺어 환심을 산 후 몽골군이 퇴각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1232년 고려 정부를 수군에 약한 몽골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그러자 몽골은 다시 침략하여 고려의 초조대장경이 있던 대구 부인사까지 내려가 대장경을 모두 불사르고,
또 경주의 황룡사와 황룡사9층탑도 불살랐다.
그리고 지금의 용인(처인성)에 진을치고 강화에 피난간 고려정부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이때 고려에는 스님이면서 명궁이었던 김윤후장군이 있었고,
진을 친 후 잠시 쉬고 있던 대장 살리타이를 김윤후장군이 화살 한발로 살해하자
대장을 잃은 몽골군은 즉시 퇴각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3차 침략을 감행하였고
고려의 강화도 천도에 불만을 품은 고려왕실은 이후 몽골 침략군에 합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편성된 연합군에 강화도 피난부대가 패하여
고려 정부는 강화도 시대를 접고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따라서 고려정부는1231년부터 1270년 까지 39년간은 강화도 강화행궁이 임시도읍이었다.
당시 고려는 최씨무신정권 하에 있던 때였기 때문에,
고려의 왕은 사실 실권이 별로 없었다
이에 몽골은 허수아비 같은 고려왕실과 최씨정권과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당시 고려왕 원종은 무신정권을 무너뜨리면 자신이 실권있는 고려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실권없는 왕을 하느니 차라리 몽골의 사위국이 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런 연유로 고려 원종의 정부군과 몽골군이 연합하여
최씨의 사병집단과 그에 동조하는 항몽군데를 공격하였고,
그 싸움에 패하여 강화의 최씨 사병집단이었던 고려삼별초군은
이곳 진도로 또 다시 천도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진도로 오기 전부터 이들은 여러해에 걸쳐 진도 용장산성을 축조하면서 미리 준비를 하였다.
진도로 본거를 옮긴 것은 1270년 고려 원종 11년으로
당시 여몽 연합군에 대항하던 삼별초의 장군은 배중손을 대장으로 하였고,
삼별초는 몽골에 항복해버린 원종을 폐하고
왕씨중의 종친인 승화후 왕온을 항몽군의 새로운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들은 이곳 용장산성 행궁의 중심에는 용장사를 건립하고
용장사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행궁 건물들을 배치한 후,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다시 훗날의 영광을 기원하였다.
이들은 망명정부의 재정에 필요한 물자는 남해안 도서 뿐 아니라
전라도 경상도의 남부지역의 곡물들을 거두어 들여 충당하였다.
또 외교적으로는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진도정부가 고려의 정통정부임을 알리는 문서도 전하였다.
그 문서는 일본에 남아있다 역사적으로 삼별초군의 외교관계를 전하고 있다.
한편 고려 정부는 곡창지인 전라도 경상도 남부지역의 세금이 올라오지 않게되자
재정의 압박이 심하게 되어 진도에 근거지를 경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271년 전함 650척을 건조한 고려 몽골연합군은
고려장군으로 김방경을 몽골은 고려인으로 몽골에 귀하한 홍다구를 대장으로 편성한
대대적인 공격으로 진도의 용장산성과 행궁이 모두 불에 타고 또 다시 제주로 근거를 옮기게 되었다.
진도에서 싸우다 패한 삼별초군은 전투중에 진도에서 옹립했던 승화후 왕온도 전사하고,
총사령관이었던 배중손장군도 남도석성 근처에서 전사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항복하지 않고 또 다시 바다 멀리 제주도로 그 본거지를 옮기는 끈질김을 보여주었다.
진도의 남쪽 한편에는 배중손장군이 싸우다 전사한 곳이 있고 현재 이곳에는
그의 뜻을 기리는 사당과 동상이 세워져 옛날의 의리와 기백을 전하고 있다.
지금은 쓸쓸히 흔적만 남아있던 진도 용장산성내 행궁터에는
당시의 모습을 알기 위하여 문화재발굴조사를 하였고
이로써 확인된 축대를 다시 쌓아 옛날의 흔적이나마 느껴볼 수 있다.
그 바로 옆에는 새로지은 용장사와 삼별초의 "고려항몽충혼탑"만이 남아있어
이곳의 역사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