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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국 나이
오종락
설날 차례를 지내고 먹는 떡국은 예사로이 그냥 한끼 먹는 음식이 아니다.
이 떡국은 설음식의 기본이 되는 조상님이 하사한 음복(飮福) 음식이요. 나이를 한 살 더하는 첨세병(添歲餠) 음식이다. 또 설날 아침 오장육부를 따뜻하게 데우는 에너지원이며 새해 첫 출발선에서 마음속으로 복을 부르는 음식이다.
설날 아침 마주하는 떡국 그릇 안에는 조상님이 후손에게 선사한 축복의 나이도 한 살 들어 있다. 이 나이는 막연하게 한 살 더 먹게 하는 그런 나이가 아니라, 후손들의 성장을 돕기 위해 격려의 기운을 가득 담은 조상님이 하사한 ‘떡국 나이’이다. 조상님이 주신 떡국 한 그릇 안에는 후손을 향한 애정이 모두 다 담겨 있다. 떡국에 넣는 고명처럼 사랑, 건강, 재물 등의 기운을 고스란히 넣어 놓으셨다. 이런 조상님의 음덕으로 우리는 대대손손 면면히 살아올 수 있었다.
설날은 긴 인생길 여정 속에 서 있는 일 년 구간의 정겨운 역(驛)이다. 그리고 설날 먹는 떡국은 새해 첫 시동을 거는 열차인 셈이다. 사람들이 새하얀 떡국 맛을 보기 위해 떡국 열차에 승차하면 열차는 모락모락 김을 내며 출발 준비에 들어간다. 승객들의 손놀림이 부산해지고 숟가락 소리가 달그락달그락 거리며 떡국 그릇이 거의 비워질 때면 첫 열차는 플랫폼을 서서히 벗어난다.
눈치 빠른 세월은 숟가락이 내는 자그마한 소리도 놓치는 법이 없다. 조상님이 하사한 구수한 떡국 맛을 보고 있는 승객들을 모두 태우고 곧장 달린다. 승객들은 부지불식간에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된다. 이런 영향은 떡국 먹는 장소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며, 단 한 사람에게도 예외를 인정하는 법은 없다. 그 장소가 거실이든 주방이든 현재 앉아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새해 첫 열차의 객실이 되는 셈이다.
설날을 기준으로 하여 약 한 달 전은 동짓날이었다. 동지팥죽의 새알심 나이는 얼마 안 있으면 한 살 더 먹게 된다는 ‘예고 나이’라면, 설날 떡국은 먹으면 즉시 한 살이 반영되는 ‘참 나이’이다. 사람들은 즉시 한 살이 늘어나는 ‘떡국 나이’보다 동지팥죽 먹을 때 새알심의 따끈한 ‘예고 나이’를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막상 설날 아침 떡국을 먹은 후 곧바로 한 살 더 먹게 되는 ‘떡국 나이’는 그저 경견한 마음으로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 짐작해 본다. 아마 첫째로 조상님이 후손들을 위해 축복 속에 하사한 나이 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조상님의 음복 ‘떡국 나이’에는 후손들이 한 살 만큼 새롭게 더 성장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둘째는 동지팥죽의 새알심이 나이를 미리 예고하여 마음의 준비를 시켜놓았기 때문인 듯하다. 동지팥죽의 쫀득한 새알심이 세월의 나이에 토를 달지 못하도록 입을 단단히 봉하는 아교풀 역할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령 새색시가 준비해 가는 폐백 음식 중 폐백엿이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입을 막아 새색시의 허물을 잡지 못하도록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떡국 나이’ 한 살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며 하나의 큰 변화를 주는 의례였다.
설날 차례를 지낼 때 주요한 사항을 고하면서 마음속으로 나이도 고하며 절을 올렸다. “할배, 할매 예!, 설을 맞이하여 후손들이 작은 정성을 모아 조촐한 제례를 올리오니 흠향하시고 기뻐해 주이소오.” “지난 한 해 동안 잘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더.” “할배, 할매 예!, 금년 한해도 굽어 보살펴 주이소오. 열심히 노력하며 살겠심더!” “오늘 아침 이 떡국을 먹고 나면 저도 이제 스무 살이 됩니더.” 이렇게 아뢰고 다짐했다. 지난해의 감사함과 새해의 기대와 설렘을 안고 차례를 지내고 설을 맞이했다.
낮엔 가까운 동네 친척 어르신 댁을 집집마다 일일이 찾아뵙고 세배를 드렸다. 세배를 드리고 자리에 앉으면 새해 덕담이 이어진다. 새해 건강하고 마음먹은 일이 술술 잘 풀리기를 바란다는 일반적인 덕담에 이어 나이에 대한 중요한 덕담은 “이제 한 살 더 먹었으니(이제 떡국 먹었으니) 올해 몇 살 되제?”라고 많이 물으신다. 대답을 드리면 이제 “중학교 갈 나이가 되었제?, 곧 군대 갈 나이가 되었제?, 이제 장가갈 나이가 되었제?” 등 그 말씀 속엔 이제 한 살 더 먹은 데 대한 진심 어린 축하와 격려의 뜻이 담겨 있음을 은연중에 느낄 수 있었다. 한편으론 한 살 더 먹었으니 집안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뜻도 담겨 있는 듯했다. 이처럼 우리는 어른들의 축복과 격려를 받으며 나이를 한 살 더 먹었고 차츰 철이 들어갔다.
해마다 설날 이른 아침이면 차례상 준비로 식구들 모두가 분주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국을 끓여 차례상에 올리고 나면 차례 준비는 거의 마무리되었다. 제례에 참석한 대소가大小家 친척들은 대청마루와 마당에 펴놓은 멍석에 나란히 줄을 서서 조상님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 제주祭主이신 아버지의 동작에 맞추어 조상님께 정성껏 절을 하며 차례를 지냈다. 정월 초하루 아침 기온은 몹시 차가워 발끝은 몹시 시렸고 입안에선 호호 입김이 나왔다. 멍석 위에 줄을 선 종제(從弟)들과 나는 설빔을 차려 입고 조상님을 대하니 기분이 좋아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차례를 모두 지내고 나면 방에 들어가 얼었던 몸을 녹이며 따끈한 떡국그릇을 앞에 놓고 둘러앉았다. 서로 한 마디씩 덕담을 나누며 떡국에다 맑은 제주祭酒 한 잔으로 음복을 하였다. 새해 아침 처음으로 먹는 떡국 한 그릇은 너무나 달고 맛이 좋았다. 아마 조상님의 사랑이 스며든 음복 음식이라 그러했을 것이다. 설이 가까워져 오니 그 옛날 고향집의 정겨운 설날 아침 풍경이 아련히 떠오른다.
설을 한 열흘 앞둔 오일장날 아버지는 방앗간에서 대소쿠리에 떡가래를 한 가득 뽑아오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쫄깃한 떡가래를 어머니는 손으로 뚝뚝 잘라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거 먹고 내년엔 모두 건강하고 무탈해라!”라고 하시면서. 형제들은 조청 그릇을 가운데에 놓아두고 가래떡을 조청에 살짝 묻혀 조심스럽게 입에다 넣으며 행복해했다. 그 시절은 하얗고 기다란 가래떡만 봐도 설레고 군침이 돌던 시절이었다. 설에나 맛볼 수 있었던 귀한 음식, 그 구수하며 쫀득쫀득한 맛에다 조청까지 묻혔으니 얼마나 달콤하고 환상적인 맛이겠는가. 그 오묘한 맛은 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뜰아래채 광에 널어놓은 떡가래는 이삼 일이 지나면 꾸덕꾸덕 썰기 좋도록 적당히 굳었다. 형제들은 명절 준비로 바쁜 어머니 일손을 돕기 위해 떡국떡을 직접 나누어 썰었다. 어머니의 설명을 듣고 누가 잘 써는지 시합을 겸해 썰었다. 옛날 떡 잘 썰기로 유명한 한석봉 어머니처럼 일정한 크기와 두께로 누가 더 많이 써는 지로 우열을 가린다고 하셨다. 조상님 차례상에 올릴 떡국용 떡이라 정성을 다했다. 실수로 잘못 썰어 모양이 못생긴 떡국떡은 잽싸게 입에다 집어넣어 버리곤 했다. 심사위원장인 어머니로부터 잘 썰었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서였다. 서로 시합에 지기 싫어 열심히 애쓴 탓에 형제들의 실력은 비등비등했다. 어머니는 떡국떡을 고르게 잘 썰었다고 칭찬해 주시면서 조상님이 무척 기쁘게 흠향하실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정성을 다해 썬 떡국떡이 설날 조상님 차례상에 올라간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몹시 좋았다.
사람들은 가을철 한가위가 되면 맛 좋은 송편을 먹듯이, 새해가 되면 막연히 떡국을 먹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 떡국은 몇 가지 깊은 의미가 숨어 있는 음식이다. 음력 1월 1일은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다. 조상들은 예로부터 가래떡을 길게 뽑아 새해 무병장수와 풍년을 기원하며 떡국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떡국의 흰색은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색으로 백의민족이라고 하여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색이다. 흰색은 시작, 신성, 정직, 고귀, 장수 등을 뜻하는 색으로 하얀 떡국을 먹음으로써 작년에 안 좋았던 일들을 깨끗하게 잊고 새해에는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리고 썰어 놓으면 엽전 모양 같이 생긴 둥근 떡국을 먹어 재산이 불어나기를 기원하는 마음도 담겨 있다. 그러나 실제로 떡국떡은 동전 모양으로 동그랗게 썰지는 않는다. 떡가래에다 칼날의 각도를 60도 정도로 비스듬히 하여 어슷썰기로 약간 길쭉하게 타원형으로 썰었다. 이렇게 썰어야 맛도 좋고 잘 익는다고 어머니는 시합 전에 일러 주셨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음식 하나에도 깊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온 지혜로운 민족인 것 같다.
설날 차례상에 올리는 떡국은 깊은 의미가 있는 특별한 음식으로 조상과 후손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매개 음식이다. 또 후손들은 조상의 격려 속에 ‘떡국 나이’를 한 살 더 먹으며 새롭게 한 해를 힘차게 출발하는 기운을 얻게 된다.
해마다 설이란 역(驛)에서 음복 떡국을 먹으며 떡국 열차를 타고 달려온 지도 어느덧 강산이 여섯 번 바뀐 시간이다. 그러나 설날 차례상 앞에 서면 아직도 나이 어린 후손이 된다. 기해년 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금년 설날, 조상님은 황금 기운이 서린 ‘떡국 나이’를 내게 내려 주실 것이다. 조상님 음덕을 마음속 깊이 기릴 준비를 해본다. (2019.1.29.)
첫댓글 떡국에 설킨 이야기를 너무나 자세하고 실감나게 쓰신 글을 읽으니, 설 명절이 가까이 왔슴을 실감 합니다.
어릴적에는 한살 더 먹는 것이 자랑스러웠는데 지금은 한심하기만 하군요. 오 교수님 떡국은 많이 잡수시고 나이는 먹지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설 명절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보내시고 건강을 기원드리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떡국 나이의 의미, 새롭게 새겨봅니다. 지금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스치고 지나가는 그런 명절의 풍습이 모이고 모여 우리의 아름다운 삶이 되고 역사사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작금의 현실은 너무 쉽게 우리의 전통을 왜곡하고 변형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자꾸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설날 떡국에 담긴 깊은 뜻을 생각하면서 즐거운 맘으로 나이를 한 살 더 먹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최상순드림
어릴때 떡국을 먹으면 한살 더 먹는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나이가 더 먹는다는 현실이 반갑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걸 잊고 현재에 충실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떡국을 먹으며 동네 어르신들에게 새배 드리고 덕담을 나누는 정겨운 설날 모습이 그림처럼 와 닿습니다.
새해에는 떡국을 먹어야 떡국처럼 모나지 않고 가족간 원만하게 잘지낸다고 시어머니는 명절 때 마다 말씀하신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