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과거로부터의 편지
☱재회
지독히도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에서도 최근 몇 년간 그랬듯이 이번 장마에도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상했었는데 정말 그랬다. 이 지겨운 강우의 끝이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지루한 기다림이랄까. 기다리는 일엔 이젠 이골이 났다. 너무 지친다.
"미현씨, 오늘 오후에 잡힌 스케줄이 어떻게 되죠?"
후우…… 담배연기가 쓰다.
몇 번이고 담배를 끊으려고 시도했지만, 비오는 날이면 습관처럼 입에 물게 된다. 또 한 개비의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다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고 있다. 도대체 얼마나 퍼부어야 직성이 풀리는 걸까.
어두운 하늘을 향해 의미 없는 원망을 해보며 담배에 불을 당겼다.
"제기랄, 모두 삼키고 싶은 거냐."
스피커폰을 통해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후 2시에 인성 실업의 김 상무님과 미팅이 있습니다. 그리고... 4시에는 기획팀 직원들과……
세상을 모두 삼키기라도 하려는 듯, 천상에서 강림한 수마(水魔)는 거대한 아가리를 벌린 체 도시를 휘젓고 다녔다. 도시 전체가 물에 잠겨 버렸지만, 내겐 별다른 감흥을 주진 않았다. 어차피 이 세상에 큰 의미를 두고 사는 것은 아니니까. 당장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해도 상관없다. 늘 그래왔다. 10년 전, 그날 이후로는…….
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졌다. 손님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미현씨, 이 시간 이후의 모든 일정은 내일로 연기해주세요."
비서가 자신의 책무를 다하려는 듯 습관적인 멘트를 했다. 3년간 같이 일을 했지만 정말 유능한 여자다.
-알겠습니다, 실장님. 저 커피라도…….
평소 같으면 이런 날씨에는 커피를 마셨겠지만 오늘은 생각이 없었다.
"아니, 괜찮아요. 지금은 혼자 있고 싶습니다. 전화 연결도 하지 말아줘요. 아, 그리고 운사라는 사람이 찾아 올 겁니다. 그 사람이 오면 내게 알려줘요. 그럼 부탁할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10년 전, 꼭 10년이다.
그날도 오늘처럼 많은 비가 내렸었다. 그날 이후로는 비를 볼 때마다 아련한 기억의 상처가 되살아난다. 지금도 생각하면 내가 악몽을 꾼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 때의 일은 분명 내게 일어났었다.
후우, 악몽 같은 현실……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질 않는다.
-실장님, 말씀하셨던 분이 오셨습니다.
"아, 그래요.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드디어, 그가 왔다. 내가 겪었던 일들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이었다.
10년 만인가? 간편해 보이는 캐주얼 복장을 한 그가 사무실로 들어 왔다. 그가 악수를 청한다.
그때와는 다르게 우호적인 태도다.
"오랜만이군요, 박성일씨. 10년 만인가요?"
나는 그의 손을 잡음과 동시에 다시 과거의 기억과 만났다.
"10년, 그렇군요."
이 남자, 이름도 모른다. 그저 '운사'라고 불린다는 것밖에는. 놀랍게도 이 남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었다.
"당신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군요. 하나도……."
10년이란 시간 속에서도 10년이다. 10년…… 10년…….
☲폭우 속에서
"이런, 젠장! 정말 지독하게 퍼붓는군. 날 한번 멋지게 잡았군."
그랬다. 정말,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 같았다. 쏟아지는 폭우 때문에 한치 앞도 볼 수가 없었다.
이런 빗속에서 산행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더욱이 산에서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오빠, 어두워지려나 봐요. 어쩌죠."
"걱정 마, 랜턴이 있으니까.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알았지?"
"네……."
"그럼, 계속 가볼까?"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미 해가 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이런 날씨에 MT를 강행한 동아리 회장놈은 도대체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궁금하다.
"어떻게든 산장을 찾아야 할 텐데……."
빌어먹을! 남자인 나도 힘든데.. 내 옆에 바짝 붙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는 현지가 걱정됐다. 벌써, 3시간째 산 속을 헤매고 있었다. 이러다간 합류하기로 한 산장은커녕, 산에서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다른 녀석들은 도착을 했을까? 망할 놈의 회장. 사람들을 보내 마중이라도 나와야 될 것 아닌가.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야. 어디 두고 보자.
예정대로라면 진작 도착을 했을 텐데. 현지가 약속시간에 늦는 바람에 내가 남아서 데려 오느라 늦어 버렸다. 하지만, 그녀를 원망하진 않는다. 이번 MT도 내가 우겨서 따라 나선 것이었다.
현지가 심하게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저러다가 감기라도 걸린다면…….
"현지야, 괜찮니?"
"괜찮아요. 오빠. 미안해요. 저 때문에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오빠까지 고생을 하네요."
괜찮다고는 하지만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바보야, 미안하긴. 당연한 걸 가지고……."
"다른 사람들은 벌써 산장에 도착했을까요?"
"글쎄, 그랬다면, 마중이라도 나왔을 텐데. 걔네들도 우리처럼 길을 잃고 헤매는 건 아닐까? 아무튼, 서둘러서 산장을 찾아가자."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럼, 찾을 수 있을 거야"
대답은 했지만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이런 어둠 속에서는 산장은커녕 비를 피할 만한 곳도 찾는 일조차 쉬운 것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랜턴의 배터리가 다 되었는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리곤 들리지 않는 실낱같은 비명을 남기며 그 생명을 다하면서 어둠이 찾아왔다. 절망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난 신경질적으로 랜턴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때다.
"오빠! 저기요!"
"응?"
"저길 봐요. 불빛이 보여요."
현지가 가리키는 곳에 불빛이 보였다. 거리상으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난 망설일 것도 없이 현지의 손을 잡고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달렸다. 달리는 동안, 몇 번을 넘어졌지만 문제가 되질 않았다.
숨이 가쁘게 느껴질 정도로 전력질주를 한 우리는 불과 수분만에 불빛이 흘러나오는 근원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산장 같아요."
"하늘이 우리를 도왔어! 푯말에 뭐라고 써 있는데? 산장 이름인가."
낡은 산장이었다. 불빛은 낡은 산장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통나무로 지은 2층 짜리 건물이었다. 산장 입구에 다 쓰러져 가는 푯말이 보였다.
"보……산장? 글자가 지워져서 못 알아보겠네. 오빠, 우리가 만나기로 한 산장 이름이 보성 산장이었죠?"
"응, 맞아."
"그럼, 여기가 맞나봐."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어서 들어가자. 여기가 맞든 안 맞든 일단 비부터 피하고 봐야겠어. 이러다간 둘 다 감기에 걸릴 거야. 얼른……."
삐걱거리는 계단을 지나 문 앞에 선 우리는 급한 마음에 무작정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현지의 손을 잡고 앞장서서 걸었다.
"어라, 문이 열려 있는데?"
산장 안은 밖에서 본 것과는 달리 의외로 넓어 보였다. 하지만, 사람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계십니까? 아무도 없나요? 여보세요?"
"조용한데. 아무도 없나 봐요."
"그러게. 버려진 산장인가? 동수가 이런 곳에 엠티 장소를 정할 리가 없는데……. 뭐, 아무렴 어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처지가 아니잖아. 이렇게 비를 피한 것도 어딘데. 안 그러니?"
꽤 오랫동안 영업을 하지 않았는지 카운터에는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열쇠함의 객실열쇠들도 녹이 슬어있었다. 아무래도 버려진 산장인 듯 싶다.
"네에, 그렇죠. 아, 춥다."
현지의 말에 나는 황급히 배낭에서 모포를 꺼내 걸치게 했다.
"자, 감기 걸리겠다. 얼른 이걸로.……."
"고마워요. 오빠."
녀석이 얼굴을 붉히며 인사를 한다.
"고맙긴. 당연한 걸 가지고."
왠지 멋쩍은 기분이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두요. 정말, 고마워요."
"알았어. 음, 불빛이 저쪽에서 나오는데? 가보자."
낡은 판자로 된 복도를 지나니까 넓은 거실 같은 공간이 나왔다. 그리고 한쪽에는 벽난로가 있었다. 불빛은 벽난로에서 나온 것이었다. 누군가 불을 지폈는지, 벽난로에는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어, 이런 곳에 벽난로가 다 있네. 저리로 가서 불을 쬐자."
"정말이네……."
우리는 벽난로 앞에 가서 앉았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자, 피곤함이 가시는 것 같았다. 현지는 모포를 내려놓고 손을 뻗어 벽난로에서 나오는 열기에 몸을 맡겼다. 드디어, 녀석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많이 지쳐 있었던 것이다.
"아, 따뜻하다."
"그렇지?"
"이런 곳에 벽난로까지 있다니 다행이다. 그쵸?"
"그래, 다행이네."
아이처럼 좋아하는 현지의 얼굴을 보면서,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나만 아니었으면 여기까지 와서 고생을 하진 않았을 텐데. 나의 시선이 느꼈는지, 현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깜빡 잊고 있었던 사실을 깨닫게 해줬다.
"그런데, 정말 아무도 없나 봐요. 그럼, 누가 불을 피웠을까요?"
"글쎄……."
'꽈르르릉-'
"엄마야!"
순간, 푸른 섬광이 번쩍이면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현지의 몸이 움찔거렸다. 갑작스런 천둥소리에 놀란 모양이다.
나는 현지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달래주었다.
"괜찮아. 그냥 천둥소리야."
다시, 번개가 쳤다. 천둥소리가 들리기에 앞서 현지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산장 안에 울려 퍼졌다.
"꺄아아악! 오……오빠, 저……저……기……!"
현지는 무언가를 보고 놀란 듯,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내 등뒤를 가리켰다. 고개를 돌렸다. 귓가에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현지가 가리킨 곳은 이층의 객실로 이어지는 계단이었다. 그곳까지는 불빛이 닿지 않아서 어두웠기 때문에 잘 보이질 않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뭘 봤는데 그러니?"
현지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겨우 대답을 했다.
"저……저기…… 누가 있어……요."
그러나, 나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누가 있다는 거야?"
"저기요.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분명히 누군가……."
"난 안 보이는데 누가 있다는 거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지가 여전히 겁먹은 표정으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현지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푸른 섬광이 창을 통해 들어와 계단을 휩쓸고 지나갔다.
"조, 조심해요."
"걱정 마. 아무도 없는데 뭘. 이렇게 외진 곳에 우리 말고 또 누가 있겠어? 자, 보라고. 아무도…… 헉!"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현지의 말대로 누군가 계단에 있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푸른 섬광 사이로 사람의 모습이 보였었다.
손에서 식은땀이 베어 나왔다. 두려움 때문에 더 이상 계단으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차츰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지자, 점점 더 뚜렷하게 보였다. 만일을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어 등산용 칼을 찾았다. 다행히, 칼이 손에 잡혔다.
난 용기를 내어 어둠 속에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누, 누구요! 누군지 말을 해요!"
현지를 나를 잡아당겼다.
"오, 오빠.."
"괜찮아. 이, 이봐요. 거, 거기…누…누군지… 어, 어서 마, 말을 해, 해…애요."
애써 침착 하려고 했지만, 내 목소리는 심하게 떨고 있었다. 어둠 속에 있던 자가 천천히 일어나더니 우리를 향해 걸어 나왔다. 호흡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누, 누, 누구냐……니까!"
남자였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짙은 눈썹,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로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외모였다. 갓 20살이 된 나이로도 보이고 30대로도 보이는 특이한 분위기였다. 주머니가 많이 달린 건빵 바지에 검정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그 역시, 오랜 시간을 빗속에서 헤맸는지 걸치고 있는 짙은 감청색의 우의에서는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꺼져!"
그가 차갑게 내뱉었다. 인정미를 기대하기 힘든 목소리다. 다시, 푸른 섬광이 들이치면서 사내의 얼굴에 기이한 푸른 음영을 남겼다.
사내가 위압적인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주머니 속에 있는 칼을 움켜쥐다가 실수로 날을 잡았는지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피가 나오는 것 같다.
"뭐, 뭐라고요?"
착각이겠지만, 주머니로부터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멈추고 서릿발 같은 싸늘한 시선으로 우릴 노려보았다. 마치 내 안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이다.
그의 모습이 무서웠는지 현지가 내 팔목을 세게 잡았다.
"오빠……."
"가만 있어봐. 이봐, 당신!"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그에게 되물었다. 그에게서 우호적인 모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건 예상 밖의 말이었다. 이런 빗속에서 우리를 보고 나가라고 하다니, 난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느새 그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졌다. 아니, 어쩌면 현지를 의식한 나머지 괜한 호기를 부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꺼지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짐짓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한다는 것이 바보처럼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후후……."
그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떠올랐다. 마치 나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주머니 속의 칼을 움켜쥐며 언제든 빼어들 준비를 했다. 칼에 벤 상처가 따끔거렸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여전히 그는 우릴 비웃고 있었다.
"다시 말해주지.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꺼져!"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거야!"
난 지지 않고 반문했다. 그가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더니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다소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했다.
"난 같은 이야길 가지고 두 번, 세 번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당신 말은 여기서 나가질 않으면 우리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음장 같은 차디찬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나는 무의식중에 뒤로 물러났다.
현지가 내 팔을 끌어안았다.
"오, 오빠……."
"훗, 그것도 나쁘진 않겠군. 고집을 부린다면…… 놈들에게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어. 후후후."
그의 웃음소릴 듣는 순간, 소름이 돋으면서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내 팔을 잡고 있는 현지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현지가 떨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현지에게 머물렀다. 만약, 현지에게 손을 댄다면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이다. 다리에 힘이 빠졌지만, 죽을힘을 다해 버텼다.
갑자기, 그가 등을 돌려 입구로 걸어갔다.
"좋아, 마음대로 하라구. 하지만 말야, 후회하게 될 거야. 여기는 인간이 있을 곳이 못돼. 이 산장에는 아주 흉한 마물이 살고 있거든. 단순한 지박령이 아냐. 난 이 산장을 정화하기 위해 온 사람이야.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당신들을 위해서니까 듣는 게 좋을 거야. 끝까지 고집을 부리겠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지만. 알아서들 해."
미친 소리였다. 어이가 없어진다. 난데없이 마물이며 지박령이라니…….
"미친! 정화는 뭐고, 마물은 또 뭐야.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어떻데 된 거 아냐?"
"후후후. 좋을 대로 생각해. 미끼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더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어. 나중에 보자구."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
"미끼? 이봐,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봐, 잠깐만!"
그는 내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그를 뒤 좇아 나갔지만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멀어져 가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심해. 난 경고했어. 후회했을 땐 이미 너무 늦어 버릴지도 몰라.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끝까지 좋은 소리는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자식! 현지가 부르는 소리에 가볍게 침을 뱉고 다시 벽난로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 사람…… 갔어요?"
"응. 이제 신경 쓰지 마. 정신 나간 놈 같던데 뭘. 어? 불길이 약해졌네. 가만 있어보자. 장작이 더 필요하겠는걸."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산장 전체가 나무로 된 것을 생각해내고 낡은 마루바닥을 뜯어서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현지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이렇게 해도……."
걱정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일단은 안심시키고 볼일이었다.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럼, 주인도 없이 버려진 산장인데. 이 까짓 마룻바닥을 좀 뜯어냈다고 별일이야 있겠어? 근데 너 배고프지 않니?"
현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허기지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몇 시간을 빗속에서 헤매느라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배낭을 열어 안에 들어 있던 것들을 모두 꺼내 놨다.
"오오! 생각보다 진수성찬이 되겠는걸? 이 정도면 내일 아침까지 끄떡없겠어."
"후훗, 네."
"어어! 천천히 먹어. 그러다가 체한다."
"오빠두요. 꼭 며칠 굶은 사람 같아."
"뭐? 그러는 넌 어떻고! 하하하하"
"후훗, 그런가요?"
우리는 배가 고파있던 탓에 배낭에서 꺼낸 음식물들을 개 눈 감추듯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현지도 처음에는 머뭇거리다가 먹을 것이 입에 들어가자 동작이 빨라졌다. 허기짐이 가시고 포만감이 느껴지자, 당연하게 졸음이 쏟아졌다.
"따뜻하니까 졸려요……."
"으으응, 나도 그러네. 아아암……."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기대었다. 벽난로에서 전해지는 온기 탓인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산장은 목조로 되어 있어 다행히 땔감은 많았다. 아침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지야? 현지…… 음? 잠들었구나. 자식, 겉으로는 괜찮다고 하더니 정말 피곤했나 보네."
현지가 먼저 쌔근거리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피할 수 없는 수면의 욕구에 몸을 맡겼다. 창문을 때리는 천둥소리도 이제 자장가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포근한, 포근한, 자장가, 자장가, 어머니가 들려주던 자장가로…….
☳나찰(羅刹)
"이봐, 학생? 이봐, 일어나라고"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가 날 깨우고 있었다.
"누, 누구세요?"
눈을 떴다. 40대 후반쯤 되는 아저씨가 비닐로 된 우의를 걸친 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엔 부인으로 보이는 30대 중반의 아주머니와 7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가 서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빗속을 걸어왔는지 옷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저씬 누구야? 왜 우리 집에 있어?"
손에 든 빨간 막대사탕만큼이나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아이가 내게 물었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이는 무시당한 것이 기분 나빴는지 신경질적으로 엄마의 옷을 잡아당겼다.
"아, 여기 산장 주인이 되시나요? 전 버려진 곳 인줄 알고……."
이 낯선 사내는 산장 주인이었다. 인상을 살펴보니 동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듯, 산장을 비운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손님이 너무 없어서, 잠시 시내에 있는 처가에 가 있다가 오늘 왔수. 근데 학생은 누구쇼?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 난 사과를 해야했다.
"네, 길을 잃어서…… 죄송합니다. 주인도 없는데, 함부로……."
"아, 괜찮아요. 다 돕고 사는 거지. 그리고 숙박비만 내면 아침까지 지어 줄 테니. 근데 바닥이 왜 이리 부숴 졌남. 쥐가 갉아먹었나? 여보 내일 아침에 쥐약 좀 놔"
"알았어요. 이상하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정말 별일이야."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불을 때기 위해서 바닥을 뜯어 낸 건 나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산장 주인은 마음이 좋아 보였다.
"자, 따라 오슈. 내가 방을 줄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현지? 어? 얜 어디 갔어?"
그러고 보니, 현지가 안 보였다. 어디로 갔지? 바보처럼 현지를 잊고 있었다니.
"아, 학생이랑 일행인가? 그 아가씨는 벌써 방에 먼저 가 있지"
"그, 그래요?"
이상하군, 날 깨우지도 않고 혼자서 가다니. 아이를 데리고 짐을 풀던 아주머니가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애인인가 봐요? 이쁘게 생겼던데, 호호"
"아, 네. 감사합니다."
애인이라……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엄마, 걔는 내 꺼야"
무슨 말이지? 나는 아이에게 되물었다. 아이가 말하는 '걔'.. 분명, 현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잘못 본 것일까. 장난스럽게 웃던 아이의 눈빛이 붉은 기운을 띄는 것처럼 보였다.
"뭐라고? 방금 무슨 말을 한 거니?"
주인아주머니가 당황해하며, 아들을 나무라며 말했다. 막, 램프를 들고 나온 산장주인이 아내에게 언짢은 표정을 지어 보였기 때문에 더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아, 아니에요. 얘가 농담을……. 너, 이게 무슨 말버릇이니!"
"하하하. 괜찮습니다. 아직 어린 앤데요, 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분이 썩 좋진 않았다. 여전히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자, 이쪽으로 오쇼."
산장주인을 따라 이층으로 올라갔다. 아까 그 남자가 앉아있던 계단으로 올라갔다. 낡은 계단이라 그런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 금방 무너질 것 같았다.
"조심해요. 계단이 낡아서 발이 빠질지도 모르니까."
그 말을 들으니 더 조심스러워졌다.
"아, 네……."
"다 왔수, 이방이우"
복도 맨 끝에 위치한 방이었다. 산장 주인이 노크를 했다.
'똑똑'
"누구세요?"
문 저편에서 들려온 것은 현지의 목소리였다.
"네에. 저기, 아가씨일행을 데려 왔어요."
문이 열리자, 현지가 활짝 웃는 얼굴로 날 반겼다.
"오빠, 왜 이리 늦게 올라 왔어. 얼마나 기다렸는데"
먼저 말도 없이 올라온 녀석이 누군데, 하지만 화를 낼 순 없었다. 게다가 옆에는…….
"야, 넌 의리 없이 혼자 오냐"
산장주인이 우리 눈치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그럼, 난 내려 갈 테니. 필요한 것 있으면 저 종을 치슈"
주인아저씨가 방 입구에 걸려 있는 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고맙습니다."
나는 가볍게 인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산장주인이 내려간 것을 확인한 나는 방 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방안에 둘만 남게 되니까 어색해졌다.
"음, 음. 현지 너!"
금방 이라도 잡아먹을 듯한 표정을 하며 현지를 노려봤다. 나를 두고 온 죄는 물어야 하니까.
녀석이 애교를 떨며 내 팔을 안았다.
"난 오빠가 너무 곤히 자니까, 안 깨웠지, 오빠 화났어? 화났구나. 났지, 났지, 났지?"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냐, 임마! 화 안 났어."
역시, 현지는 내가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주변을 돌아봤다. 낡은 산장치고는 방안이 의외로 깨끗했다. 나무로 만든 이층 침대도 있고 램프에서 나오는 그윽한 불빛이 제법 근사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신혼여행이라도 온 기분이다.
"오빠, 이러고 있으니까. 꼭 신혼여행 온 거 같다"
"그래? 그럼 우리 미리 연습할까?"
내 말에 현지가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처음도 아닌데, 사춘기처럼 긴장이 되었다. 분위기 탓이라 생각됐다. 현지의 입술 위로 내 입술을 포개었다. 키스는 부드럽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이루어 졌다.
졸업을 하면 현지와 결혼을 할 작정이다. 사실, 이번 엠티도 현지에게 확실한 프로포즈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갑자기 내린 비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현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길 때, 불현듯 아까 그 남자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정말 사기였잖아"
"뭐가? "
현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벌써, 잊어버린 걸까? 불과 몇 시간전의 일인데.
"아까, 그 자식 있잖아."
이상하게도 현지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되물었다. 마치,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누구 말하는 거야?"
"왜 아까, 벽난로의 불을 피워 놓은 그 사이코."
"누가 왔었어?"
정말, 이상했다. 현지가 아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정색을 하며 내게 따지듯 물었다.
순간, 현지가 내게 반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2년 동안 사귀면서 단 한번도 말을 놓은 적이 없었는데.
"참, 너 이상하다. 아까 말이야. 이 집에 귀신인가 뭔가가 있다고 지가 정화인지, 전환인지를 하러 왔다는 그 미친놈. 생각 안나?"
착각일까? 현지의 몸 주위에서 아지랑이 같은 붉은 기운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그. 래. 서.?"
다그치는 모습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뭐가..그래서야?"
"그래서, 그놈 어디로 갔는데. 말해봐!"
착각이 아니었다. 현지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졌고, 그 붉은 기운이 점점 선명해졌다. 도대체 이게…….
"야, 야 너 왜 그래? 마치 딴 사람 같잖아."
-크크크크 아둔한 놈! 아직도 내가 네 애인으로 보이냐?
갑자기, 현지의 목소리가 전혀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변했다. 아니, 사람이라기보다 짐승에 가까운 울림이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뒷걸음을 쳤다.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너, 너, 갑, 갑자기 왜 그래?"
-똑똑히 봐라, 내가 누군지…….
아, 어떻게 이런 일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장면이 내 앞에서 펼쳐졌다. 현지의 팔, 다리가 기형적으로 늘어나더니, 목까지 기린의 것처럼 길게 늘어났다. 그리고 피부가 찢겨 나가면서 시커먼 비늘 같은 것이 솟아 나왔다. 더 이상 현지라고 부를 수 없는, 그것은 요괴(妖怪)였다.
현지, 아니 놈이 내게 다가왔다.
- 크크크크, 아깝군. 좀더 가지고 놀다가 먹으려고 했는데. 방해자가 나타났다니 할 수 없구나…….
'그것'은 마치 검붉은 젤리로 만든 기형의 인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몸체가 투명해서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뱃속에 사람의 뇌 같은 것이 꿈들 대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있으니 구토가 일 것 같았다.
"으으으……."
난 겁에 질려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었다. 놈의 긴 팔 끝에 달린 갈고리 같은 손이 내 머리위로 내려왔다. 난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걱정 마라. 고통은 없으니까. 크크크크. 자, 다시 묻겠다! 네가 말한 그 사이코 같다는 놈, 그 놈은 어디로 갔지?
눈을 감아도 목소리를 계속해서 들려왔다.
"모, 몰라 나도……. 우, 우리 보고 떠, 떠나라고 하더니 어, 어딘가로 사, 사라졌어."
-그래? 모른다면 더더욱 살려둘 이유가 없지. 크크크크
'그것'의 갈고리 같은 손이 벼락처럼 떨어진다.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화이트 아웃
-끄아아악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아래층으로부터 들려 왔다. 눈을 떴다. 흉찍한 갈고리 손이 내 눈앞에서 멈춘 채였다. '그것'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래층에서 들려온 괴성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놈이다! 놈이 왔어. 운이 아주 좋구나. 우선 녀석부터 상대해주고 다시 돌아오마.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크크크크..
말을 마친 '그것'이 바닥으로 스며들어갔다. 온몸에 힘이 다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놈'이라고 불리어지는 인물은 아까 그 남자인가. 그럼 그가 한 말이 사실이란 말인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현지는 어디로 가버린 거지. 그래, 현지! 현지를 잊고 있었다.
"현지, 현지를 찾아야 돼."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방을 나왔다. 아래층에서는 흡사 전쟁이라도 난 것 마냥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까 그 남자의 것으로 들리는 기합, 이상한 짐승의 비명, 집기들이 부서지는 소리...
발을 앞으로 내딛는 순간, 바닥이 무너지면서 아래층으로 떨어졌다.
"으아아아악."
내가 떨어진 곳은 '그'와 '그것'의 사이였다.
'그'는 '그것'의 몸에서 나온 듯한 녹색의 액체를 뒤집어 쓴 체, '그것'과 대치하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산장주인과 그의 부인이 겁에 질려 떨고 있었고, 그 아들은 허물(?)만 남기고 없었다. 아마도 저 편에 쓰러져 있는 '그것'의 시체가 그 아들의 정체인 듯 싶었다.
'그'가 '그것'을 노려보면서 내게 말을 걸었다.
"이봐, 괜찮아? 그러 길래 내가 뭐랬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것'의 긴 팔이 공기를 가르며 '그'를 노렸지만, '그'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공격을 실패한 '그것'이 분하다는 듯, 바닥을 내리쳤다. 낡은 마루바닥이 부서지면서 파편들이 내게 날아왔다. 죽을힘을 다해 기어서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그것'이 다시 갈고리 손을 휘두를 기세였다.
-남 신경 쓸 겨를이 있나. 방해자!
'그'가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차갑게 내뱉었다.
"쳇, 역시 령(靈)보다는 괴(怪)가 물리력을 구사해서 그런지 박력이 넘치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혼루(魂淚)를 가져오는 건데."
내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요즘 같은 과학의 시대에 지박령이니 요괴니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그'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젠 결판을 져야겠군."
-아직도 자신이 넘치는군..
"넌 애초에 내 상대가 아니었어. 너무 약해서 힘 조절이 안 되거든."
-아니 이 놈이! 끄아아아 가만 안 두겠다!
'그것'은 '그'의 도발에 발끈하며 갈고리 손을 뻗었다. '그'가 가볍게 어깨를 비틀며 피하자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던 갈고리 손이 목표를 잃고 기둥하나를 박살냈다.
그가 그것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너랑 노는 것도 이제 지겨워졌어."
'어'라는 말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고무공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둘의 모습이 포개지면서 차가운 금속성의 빛이 몇 번인가 번쩍였다.
'그것'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뒤로 서너 걸음을 물러나던 '그것'이 조각이 나면서 허물어져 내렸다.
"말했잖아. 어차피 넌 상대가 안 된다고."
'그'의 손에는 언제 꺼냈는지 30cm정도의 칼이 들려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아앗! 당신 미쳤어!"
갑자기, '그'가 산장주인에게로 다가가더니 경고도 없이 칼로 찔러 버린 것이다. 그러나, 산장주인은 그 칼을 가볍게 피하며 자신의 아내를 방패로 썼다. 더 놀라운 것은 칼을 맞자 여자는 먼지처럼 소멸되고 말았다. 나는 이 아비규환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졌다.
"사, 사람을 죽였어. 사람을……."
달아나려는 나를 누군가 잡아 세웠다. '그'였다.
"이런, 이 친구야 똑바로 보라고! 봐, 저기! 이 여자는 사람이 아니야, 나찰이라는 괴물이지. 내가 말했잖아. 여긴 괴물이 나타난다고. 놈은 당신들을 제물로 바쳐서 이계에 있는 나찰들을 소환하려는 속셈이야. 알아?"
순간, 산장주인의 입에서 음산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큭큭, 역시 도계감찰이라 이건가. 어리다고 얕봤다간 큰일 나겠어. 나의 정체를 이 정도로 쉽게 간파하다니. 운사에 대한 소문이 헛것은 아니었군."
산장 주인은 더 이상 40대 후반의 인자한 아저씨가 아니었다. 60? 70? 갑자기 늙어 버린 듯한 얼굴에 머리엔 이상한 모양의 붉은 관을 쓰고 있었다. 한 손에는 녹슨 구리종이 들려 있었고, 다른 손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그려진 부적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지더니 장난스런 말투로 산장주인을 놀렸다.
"네놈에게서 나는 구린내가 워낙 독해야 말이지. 굳이 애써서 찾아 나설 필요도 없었다니까. 그저 악취가 진동하는 곳을 찾다보니 이곳이더군. 헤헤헤"
"뭐야? 이 놈이!"
산장주인은 노기를 띤 목소리로 반박하려 하자, '그'가 손을 들어 말을 잘랐다. 장난스럽게 웃던 미소가 사라지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갈(喝)! 청학, 이놈! 네놈은 금기를 어기고 나찰을 인계로 불러 들여 많은 인명을 해쳤으니 용서할 수가 없다. 자! 금제(禁制)를 순순히 받을 테냐? 아니면……."
'그'가 괴물들을 베었던 칼을 앞으로 겨누며 한 걸음 내딛었다.
"킬킬킬, 어린놈이 방자하구나. 아직, 내겐 숨겨둔 카드가 남았어. 여율령 급령……."
조금 전까지 사람 좋아 보이던 산장주인의 입에서 뜻을 알 수 없는 주문 같은 것이 흘러 나왔다. 주문이 끝나는 순간, '그'가 서 있던 곳의 뒷벽이 무너지면서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손이 튀어나왔다. 그리곤 엄청난 힘으로 그의 목을 조르며 들어 올렸다.
맙소사! 그. 것. 은. 현. 지. 였. 다.
"이, 이건 괴뢰술(怪儡術)! 컥, 컥, 청학 이놈! 이 금지된 술법을 사람에게 쓰다니, 정말 네놈은 정녕……."
현지가, 현지가 괴물이 되다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제 두려움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너, 너 잘도 현지에게…… 으아아아!"
그가 떨어뜨린 칼을 주워 들어 산장주인 아니, 그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불가항력이었다. 악마의 강한 주먹을 맞고 힘없이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놈이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큭큭큭, 어리석은 놈! 네놈이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곧 저승구경을 시켜줄 테니 얌전히 있거라. 주제넘게 나서지 말고!"
"크흑. 너,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반드시!"
"그래? 그것참 기대가 되는군. 네놈 주제에 날 어떻게 해보겠다는 거냐? 크하하핫. 정말 가소로운 놈이구나! 정녕 그리도 서둘러 죽고 싶더냐?"
그때, 현지의 손에 붙들린 '그'가 힘겨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 이봐, 지금 당신애인은 괴뢰술이란 술법에 걸려있어. 그건 죽은 거나 다, 다름없다고 컥, 어서 그 칼로 이 여자를 찔러. 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린 둘 다 죽어!"
"오호, 그런 방법이 있겠군. 하지만…… 클클클."
그가 현지를 죽이라 한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산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악마가 고민하는 나를 보며 비웃었다.
"클클클 그러면 네 애인이 죽는다. 과연, 네가 할 수 있을까?"
다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바보야, 아니면 우린 다 죽어! 망설일 시간이 없어!"
"애인을 잃고 싶나? 그렇다면 이놈이 시키는 대로 그녀를 찔러라. 어디 한번 해봐! 무엇을 망설이나? 크핫핫핫!"
"칼로 찔러! 늦기 전에, 어서!!"
난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도저히…… 도저히 내 손으로 그녀를…… 이건 악몽이다.
"그만! 그만해! 으흐흑"
"포기해라, 도계감찰! 어차피 이 놈은 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녀석이야."
악마가 음흉한 미소를 띠우며 '그'에게 다가갔다.
"클클클, 잘됐군. 너 같은 술법자를 제물로 쓰면 좀더 강한 놈을 부를 수가 있으니까."
악마는 바닥에 이상한 도형을 그리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가 다시 한번 다그쳤다.
"빌어먹을! 이봐, 빨리 서둘러! 어서……."
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꿈이라면...악마가 뱀을 닮은 특이한 모양의 검으로 그의 심장을 겨누었다.
"클클클, 글쎄, 저 녀석은 안 된다니까. 이제 네놈이 짖는 소리도 듣기가 싫구나. 애송이 도계감찰! 그럼 안녕이다. 꼬마."
악마가 쥐고있는 칼이 그의 심장을 도려내기 위해 천천히 머리위로 들려졌다. 차마, 그 장면을 볼 수 없어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건 내가 할 소리! 타합!"
기합성과 함께 폭풍 같은 기운이 '그'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 듯 하더니, 목을 죄고 있던 현지의 손이 느슨해졌다. 그가 빈틈을 놓치지 않고 몸을 비틀어 빠져 나오면서 악마에게 강한 차기를 작렬시켰다.
'그'의 공격을 받은 악마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다시 한번 '그'가 달려들며 악마의 턱에 강한 주먹을 꽂았다.
"컥, 아직 그런 힘이 남아 있었다니……"
"네놈이 시간을 끄는 동안, 기력을 모았지."
그의 발이 맹렬한 속도로 악마의 다리를 찍어버리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뼈가 부러져 버렸다. 악마는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며 자신이 그려놓은 도형 위에 넘어졌다.
"내가 주문을 완성시켜 주겠어!"
그가 중지를 물어 피를 내더니 도형위로 뿌리면서 주문 같은 것을 빠르게 외었다. 그러자, 이상한 기류가 도형을 중심으로 생겨나면서 악마를 삼켜 갔다.
"으음, 아, 오……오빠? 여기는…여기는 어디에요? 왜 내가 여기에 있죠?"
"현지야! 정신을 차린 거니?"
"정신이요? 내가 정신을 잃었었나요? 아무 기억도 나질 않아요."
"아니야, 이제 됐어. 이제 됐다고. 정말 다행이야."
"오, 오빠……?"
순간, 현지의 정신이 돌아 왔다. 반가움에 그녀를 끌어안았다. 기쁨을 느낄 틈도 없이 '그'가 우릴 바깥으로 밀쳐 내며 소리쳤다.
"뭣들 해! 진법(陣法)에 휘말리고 싶어, 어서 나가!"
그의 외침에 재빨리 산장을 나가려고 하는데…….
-같이 가자..
악마의 목소리였다.
"아악! 오빠……."
"안돼! 현지야!"
긴 촉수 같은 것이 뻗어 나와서 현지를 도형 안으로 끌고 갔다. 내가 그 뒤를 쫓아가자, 그가 막았다.
나는 그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현지를.. 현지를 구해야 한다.
"안돼! 지금 들어가면 당신도 말려들어 간다고."
"비켜! 현지를 구해 와야 돼!"
"이런 바보 같으니! 저 안으로 휘말리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해! 빨리 나와!"
"비켜! 비키란 말이야, 이 자식아! 현지를, 현지를 데려와야 해!"
"이 어리석은 인간!"
그가 내 몸 어딘가를 찌르자, 힘이 빠져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기이한 도형의 중심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그가 나를 잡아끌었다.
"아, 안돼!"
화이트 아웃 현상.
언젠가, 다큐멘터리 비디오에서 본적이 있다. 남극에 가면 볼 수 있다는 화이트 아웃 현상, 모든 것이 하얀빛의 바다에 삼켜지는 그 현상이 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무한정 뻗어 나오는 빛의 해일이 악마와 산장을 삼키고 주변의 숲 마저 뒤덮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빛 속에서 현지의 환상이 보였다.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현지야……."
내가 눈을 떴을 땐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산장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 것도 없이 공터만 남아 있었다.
비도 어느새 그쳐 있었다. 날이 밝아 왔다.
사라진 현지. 난 현지의 이름을 부르며 찾았지만 대답을 하는 건 메아리뿐. 지쳐버린 나머지, 그대로 주저 않았다.
"이런 말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잊는 게 좋아, 누구에게 말한다고 해도 믿어 주지도 않지만, 당신에겐 정말 미안하게 됐군."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흠, 그 여자는 유계(幽界)의 저 편으로 휩쓸려가서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그곳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이야.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그러니 포기해. 그게 당신에게 여러 가지로 좋을 테니까.
그럼, 다음에 봅시다. 인연이 닿는다면. 참, 난 운사, 남들이 운사라고 부르지. 어쩌면 내 도움이 필요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군."
"크흐흐흐. 현지야.."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당시, 동아리의 친구들은 타고 가던 버스가 고장이 나서 결국, 앰티를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그들도 나와 같은 일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그 뒤로 몇 년 동안은 현지를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월 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그렇게.. 그렇게.. 그때의 기억들을 한동안 잊고 살아 왔었는데, 아니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다가 얼마 전,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이 사람 '운사'를 만났다.
그리고 오늘 그를 부른 것은 하나의 편지가 도착해서였다.
침묵을 깨고 그가 물었다.
"그 편지 볼 수 있습니까?"
나는 서랍 속에서 며칠 전 도착한 문제의 편지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여기……."
"흠, 그랬었군."
편지를 읽은 그가 봉투까지 살피더니 알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제가 한번 그곳에 가 보죠. 당신에게 진 빚을 감는 셈치고. 다녀와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그가 나가면서 편지를 떨어뜨렸다. 과거에서 온 편지를…….
오빠, 보고 싶어요,
겨울에 산장으로 놀러 오세요, 알았죠?
설경이 너무 멋지거든요.
산장 아저씨도 오빠가 보고 싶대요.
꼭 오세요...
- 현지가 -
지박령(地搏靈) :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특정한 지역에서 맴도는 영을 말한다.
주로 교통사고가 빈번한 지역에서
지박령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대부분, 자신의 죽기 직전의 행동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정화(淨化) :
지박령이나 폴터가이스트,
혹은 악령에 의해 나쁜 영향을 받고 있는
특정한 지역을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나찰(邏刹) :
불교에서 말하는 악마의 일종으로
범어로는 락샤사(Rakasasa)라고 한다.
이들의 존재는 고대 바라문교 이전부터 기록이 남아있는데
특정한 형태가 없는 부정형의 악마로 인식되어 오다가
불교가 생겨나면서 나찰의 존재도 귀속이 되어
지옥에서 죄인들을 벌하는 임무가 주어진다.
또 정신물리학에서는 물질계 보다 상위차원인
아스트랄계의 하층에서 서식하는
나쁜 파동(Evil Wave)라고 보고 있다.
소설상에서는 이계의 술법자들의 주술에 의해
현상계로 소환된 것으로 설정을 했다.
영(靈)과 괴(怪) :
영이란 육체를 지니지 않은
귀신이나 유령 같은 존재들을 일컫는 말이고
괴는 반대로 육체를 지닌 존재로
본문에 등장하는 나찰이나
늑대인간, 흡혈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영문 표기는 영은 spirit, 괴는 monster)
때문에 괴는 영과 달리 육체를 지니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강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다.
소설 상에서 운사가 내뱉은 말은 그런 맥락에서 한 것이다.
괴뢰술(傀儡術) :
괴뢰란 꼭두각시의 한자어로
주술사가 인간의 자아를 제어하여
자신의 의지를 반영시켜
맘대로 부리는 술법을 말한다.
중국 묘강 지역에서는
침술로 사람의 혼을 뺏어서
그 사람을 조종하는 기술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주로 전쟁터에 임하는 전사들에게 시술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모르는 상태로 만들었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부두교의 좀비와 유사한 술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