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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유명 연애 인 중에 만약 한 명만 뽑으라고 한다면 단연 코 저의
로망은 인수대비입니다. 물론, 황진이, 장희빈, 장녹수보다도.
인수대비는 실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다간 왕실여성이며, 지식인입니다.
조선 제9대왕 성종의 어머니이자,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의 할머니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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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유명한 인수대비는 시아버지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몸소 지켜본
어쩌면 계유정란의 일등공신이고, 남편의 죽음으로 잃어버렸던 왕비 자리를
대신해 자신의 어린 둘째 아들을 왕(성종)으로 만들면서 대비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여성이지요. 인수대비 한 씨는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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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확(1403~1456)의 6째 막내딸로 어려서부터 유교 교육을 받았고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했던 청주 한 씨 가문에서 성장하였는데, 어머니 홍 씨는 그녀의
나이 13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수대비의 집안은 그녀의 고모 2명
이 명나라 황실의 공녀로 갔다가 명 성조의 후궁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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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정의 맏딸이었던 여비는 사대부가의 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히
공녀가 되었으나, 명 성조의 눈에 들어 후궁까지 된 케이스입니다.
여비는 1424년 성조가 죽자 순절하였다고 전하는데, 실제로는 처형과 다름
없는 자살이었습니다. 극 중에서는 순장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를 이어 황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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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 선종 또한 한영정의 막내딸 즉 한확의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세종실록에 보면 당시 한확이 재산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미모가 뛰어난
여동생을 시집보내고 있지 않다가 명나라 황실로 보냈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청렴결백한 인품의 소유자라 전해지지만, 권력욕이 강한 인물이었다는 평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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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명 황실과 인척이 된 한확은 명나라와 조선의 민감한
사안을 도맡아 담당하는 비중 있는 인물로 성장하였고, 실제로 1417년(태종
17) 진헌부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는 명 황제가 광록시소경이라는 벼슬을 내려
주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했을 때에는 조선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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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명나라에 가서 황제의 고명을 받아 오기도 했습니다.
1437년(세종 19)에 둘째 딸이 세종의 후궁 소생인 계양 군과 혼인하였고,
1455년(단종 3)에는 여섯째 딸(인수대비)이 수양대군의 아들 도원 군과 혼인
하였습니다.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는 20대의 한 씨 역할을 걸 그룹 함 은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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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라) 열연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명성황후’ 때, 이 미연과 최명길이 바튼
체인지 하기 전이 더 좋았던 것처럼 티아라 함 은정은 제가 본 걸 그룹 중에
연기력이 최고입니다. 당시25이던 티아라 함 은정은 18세에 아들을 낳고
시아버지의 정치 동반자로, 갈등하는 범 생이 남편을 대하는 애교 질은 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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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 무-파탈 급입니다. 제 미인군단은 공 효진-김 옥빈-함 은정입니다.
야망이 컸던 수양대군은 훗날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하여 명 황실이라는
막강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한확과 사돈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입니다.
한확은 한명회와 함께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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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과 왕위찬탈이 성공하자 도원 군 또한 의경세자로 책봉되었고
한 씨도 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수빈이 되었습니다. 수빈 한 씨가 된 그녀가
왕비 자리에 오르는 것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였으나 운명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부친인 한확이 세자 책봉의 고명을 받아 조선으로 돌아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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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 사망한 것은 세자빈이 된 이듬해 일이었습니다.
어린 조카를 끌어내리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명나라의
승인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을 무사히 성공시킬 인물은 중국통인 한확
밖에 없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로 위세가 등등했던 한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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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지만, 객사라는 불운을 피하지는 못하자 수빈 한 씨는 막강한 정치적
후견인을 하루아침에 잃고 말았습니다. 고명사은사가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어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사하포에 이르러 죽었답니다.
부음을 듣고 놀란 세조는 압록강으로 관리를 급파하여 그의 시신을 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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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습니다. 실록에 따르면, 한확은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들의 자식들을 거
두어 키웠는데 자기 자식과 다름없이 키웠다고 합니다. 수빈 한 씨는 결혼
직후 맏아들 월산대군과 명숙공주를 낳았고, 이어서 1457년(세조 3)에 둘째
아들 자을 산군을 출산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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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편인 의경세자가 갑작스런 질병으로 사망하는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이때 의경세자의 나이 20세였고, 한씨는 21세에 불과하였는데 두 날개였던
부친과 남편이 1년 간격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슬픔에 젖을 사이도 없이
그녀 앞에 닥친 현실은 왕비가 될 꿈을 접고 사가로 물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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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2년 3개월 밖에 안 된 세자빈 생활이었습니다. 남편이 죽지 않았더라면,
아니 부친이라도 살아 있었더라면 최소한 세자 자리는 의경세자의 맏아들이자
세조의 장손인 월산대군에게 주어졌을 지도 모르지요. 그녀는 8살에 불과한
시동생 황(예종)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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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확이 딸내미에게 다 퍼주고 결국 목숨을 거는 부분을 보면서 저절로
눈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세자 시절 건강했던 예종은 부친인 세조의 병
간호와 즉위 후 정무에 시달렸는지 죽어서 예종이라는 시호를 받고 싶다는
말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예종의 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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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자 정희왕후는 후계자를 빨리 정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독촉 속에 한 씨의
둘째 아들인 을산 군을 후계자로 지목하였습니다. 그 후 인수대비 입장에서는
서열상 장남인 월산 군이 왕위에 올랐어야 하나, 월산군은 병치레가 잦고
동생인 을산 군의 도량이 왕재감이라 하여 을산 군이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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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는 없지만, 장인인 한명회의 정치적 위상도 을산 군이 왕위에 오른
뒷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바야흐로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사가에 머물던 한씨
가 12년 만의 컴백을 합니다. 시어머니 정희왕후는 학식이 깊은 한 씨에게
수렴청정을 수차례 양보하였으나 재상들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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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서는 글 모르는 시어머니를 쥐락펴락 하는 며느리(채 시라)에게 금방
빠져버린 저를 너무 지조가 없는 남자라고 흉보지 마시라. 저는 개인적으로
똑똑한 여자, 섹시한 여자를 좋아한답니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 의경
세자의 위호와 어머니의 위상 문제가 대두되어 성종 1년에 의경세자의 시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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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문의경왕’으로 하고, 수빈의 휘호를 인수왕비로 하여 예종비와 인수왕비를
형제의 서열로 차서를 정하였습니다. 대비냐 그냥 왕비냐의 차이로 두 여인들은
죽을 때까지 싸우다가 2년 뒤 인수대비는 남편이 덕종으로 추존됨에 따라
덕종비가 되었습니다. 사실 인수대비는 생전의 존칭이었고, 죽어서는 소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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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한 씨(티아라)는 어려서 부모와 남편을 잃은 탓에
불교에 심취하였고, 사서삼경을 운운하는 정도의 신지식인이었습니다.
성종이 도첩제를 폐지하고 불교를 탄압하자 이에 불만을 품기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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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합니다. 그녀가 왕실 여성으로 그치지 않고 여성 지식인으로 각인되는 일을
실천한 것도 이 무렵입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의 이념은 여성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는데. 특히 여성에게 요구된 가장 큰 임무 중의 하나는 남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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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섬기고,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인수대비는 왕실 어른으로서
늘어가는 왕실 여성들을 교육시켜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1475년(성종
6) 궁중의 비빈과 부녀자들을 훈육하기 위해 "내훈"이라는 책을 그녀의 나이
39살에 편찬하였답니다. 한편 인수대비의 일생에 있어서 며느리 윤 비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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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는 불행 중의 불행이었습니다. 높은 여성상을 목표로 한 인수대비에게
윤 비는 성에 차지 않는 며느리였습니다. 원래 성종의 부인은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였으나, 그녀가 1474년 후사 없이 사망하는 바람에 후궁 윤
씨(연산, 중종의 모후)가 중전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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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대비 한 씨와 왕비 윤 씨는 물과 기름같이 섞일 수 없는 생각과
배경을 지닌 여성이었습니다. 인수대비에게 막강한 친정 세력이 있었다면,
윤 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의 딸로서 그를 후원해 줄 부친
도 없는 신세인데다 유교적 부덕을 완벽하게 실천하고 강요했던 인수대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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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윤 비는 자유분방하고 사랑을 중요시했으니 인수대비는 윤 비의 폐출과
사사에 깊이 관여했고 이는 평탄하지 않은 불행한 노후의 신호탄입니다.
각시 시절의 송이(지 진희)는 ‘해 품 달’에서 처음 보았는데 싹수가 파랬습니다.
그 밖의 아역은 노산군(단종)의 채 상우 와 이태우가 기염을 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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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주변에는 많은 여성들이 있었고, 윤 비는 이를 참지 못했습니다.
성종이 엄 귀인과 정 귀인을 총애하자 윤 비는 왕의 총애를 되찾고자
했습니다. 왕실 여성들 사이에는 이른바 압승이라 불리는 이른바 저주행위가
있었는데, 들키게 되면 큰 화가 되었습니다. 윤 비의 처소에서 극약인 비상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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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바른 곶감이 발견되자 인수대비와 성종은 이 곶감이 왕과 후궁을 죽이려
는 의도라 생각했습니다. 야사에는 윤 씨가 성종과 다투면서 얼굴에 손톱자국
을 냈다고도 하나, 확실치는 않은데 윤 비는 왕비가 된지 8개월 만에 폐비가
되어 사가로 쫓겨났고, 여전히 반성하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아 결국 14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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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 13) 8월에 사약을 받고 사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대신들은 윤 비의 폐비와 사사 문제를 원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성종과 인수대비의 입장은 폐비 윤 씨가 살아 있으면 화근의 불씨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른 송이 역할을 전 혜 빈 이 했는데 웬만하면 미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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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예쁘게 보는 제가 다 밉게 본 것을 보면 송이 연기력도 훌륭했습니다.
윤 씨가 죽고 폐비 윤 씨를 대신하여 윤 호의 딸 파 평 윤 씨가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녀는 대비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인수대비는
“이제 중전다운 사람이 들어왔으니 낮이나 밤이나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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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며느리를 죽이면 후환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인수대비의 판단은 오판이었습니다. 윤 씨를 죽인 이듬해 인수대비는 정희왕후
와 함께 온양을 갔는데, 여기서 정희왕후가 죽고, 성종 또한 재위 25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기 전 성종은 자신의 사후 100년 동안 폐비 윤 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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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 사건을 공론화 하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겼습니다.
서오릉 내에 위치한 인수대비의 무덤 경릉은 남편인 덕종과 같은 곳에
묻혔으나, 당연히 덕종의 무덤보다 훨씬 화려합니다. 왕릉은 승하할 당시의
신분 차이에 따라 축조되는데, 인수대비의 경우 왕실 최고 어른이었던 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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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비로서 승하했기 때문에 세자 신분이었던 남편의 능보다 크고 격식 있는
것입니다. 인수대비는 손자 연산군으로부터 많은 원망을 받았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연산군은 폭군으로 변해갔고, 방탕한 생활로 국정을
파멸로 몰아가자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광폭함을 누차 지적하고 타일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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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원망만 살 뿐이었습니다. 연산군은 부친의 후궁이자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간 엄 숙의와 정 숙의를 궁 안뜰에 결박하고서는 아들인 안양 군, 항과
봉안 군, 봉을 불러 모친들을 때리게 만들었습니다. 이어서 분이 풀리지 않은
연산군은 항과 봉의 머리채를 쥐고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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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술잔을 드리게 하니, 인수대비가 놀라 잔을 받았습니다.
연산군은 큰소리로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하며 분노
했습니다. 연산군은 엄숙의·정 숙의를 죽인 뒤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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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그고 산과 들에 흩어 버렸습니다. 이 모든 것을 지켜 본 인수대비는 병들어
자리에 누웠고 어느 날 연산군이 찾아오자 갑자기 일어나 바로 앉으면서,
“이 사람들이 모두 부왕의 후궁인데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분노했습니다.
이 말에 흥분한 연산군은 자신의 머리로 할머니 인수대비의 몸을 들이 받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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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을 받은 인수대비는 “흉악하구나.” 하며 자리에 누운 뒤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노약한 인수대비는 연산군과의 갈등과 마찰 속에 68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연산군은 할머니의 죽음에 이르러서도 슬퍼하기는커녕
3년 상까지 폐지할 정도로 원한을 품었습니다. 그간 인수대비는 왕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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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치지 않고 대비에 오른 특이한 이력을 가진 여성으로, 며느리를 쫓아낸
비정의 시어머니로 묘사되어 왔으나 필자가 본 그는 이 시대의 준비된
지도자가 분명합니다. 여성이지만 정치, 경제, 역사를 두루 섭렵했고 계유정난
의 일등 공신으로 남자들 못지않은 대담함과 결단력, 특히 번뜩이는 지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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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를 타계하는 그의 리더로써 자질은 세조-덕종-예종-성종-연산군-
중종까지 무려 6대를 거쳐 영향력을 행사하질 않았습니까? 저는 원자(연산군)를
살려 두고 중전을 폐위 시킨 일 또한 인수대비의 실책으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만약 그대로 뒀다고 해도 중종이 적자니 역사는 바뀔 것이 없질 않습니까?
2017.5.21.sun.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