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류나무 끝에는.
정상진의 소설 ‘미류나무,를 읽고
이 현 자
내가 소설 속 재순이를 만난 건 나리타공항으로 가는 탑승자 대기실이었다. 이렇게 장거리 여행을 할라치면 몇 시간 덤으로 얻는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서둘러 준비하고 집을 나서는 것은 여행의 목적지로 가는 설렘도 있지만, 일상을 떠나 이런 자투리 시간에 아무런 방해없이 책을 펼쳐 들 수 있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이다. 나는 이렇게 여행의 즐거움과 더불어 마치 흑백 연속극을 보듯 재순에게 빨려든다.
남색 비로도치마에 흰 누비저고리를 입고 시골교회 한 모퉁이에 앉아 쇠약한 몸으로 재순이가 제 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했는지, 간절하게 기도를 하고 있다. 차분하고 따듯한 마음을 가졌던 그녀는 그리운 사람들과 고향마을, 그리고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그 짧은 자신의 생을 더듬어 보리라.
황주 수수골에서 사과 과수원을 하는 재순이는, 정 많은 부모님과 여러 형제가 다복하게 살고 있었다. 미술 학도를 꿈꾸며 이웃에 사는 오빠 친구인 현택이와 서로를 마음에 두지만, 친오빠 재환이와 함께 학생시위로 반사회적 정치 행위자로 몰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결국 둘 다 소식이 끊긴다. 곧바로 터진 6.25 전쟁에 떠밀려 고향산천을 두고 이웃에 살던 현택이네 가족과 함께 친척이 있는 공주와 제천으로 각각 피난간다. 재환이와 현택이의 죽음을 가족들에게 알리지 못하는 아버지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폭격으로 동생 재춘이 마저 보내고 막내는 청각을 잃는다. 원했던 것도 아니고 선택한 길도 아닌 어린 나이에 그냥 가는 줄로만 알았던 길이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시국 속에 그녀의 인생도 어그러진다. 그 시절 누구의 삶이든 들여다보면 절절한 사연이 가득하지만, 평범한 여인의 일생을 찾아서 소설로서 남기려 한 작가는 그 여인을 꼭 기억해야만 하는 사정이 있는 것만 같다.
천신만고 끝에, 유구에 도착하여 고모를 만난다. 전쟁에 떠밀려 오빠들과의 소식은 끊기고 동생을 잃고 낯선 곳 생활이 익숙해질 즈음 아버지마저 돌아가신다. 그러던 중, 고모의 중신으로 성실하고 마음이 유연한 원영이와 혼담이 오가고, 시댁에서 작은집 한 채를 지어 주어 천안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렇게 시작된 한 집안의 며느리이자 한 남자의 아내로 사는 삶이 시작된다. 꿈도 잃고 이루지 못한 첫사랑,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 하나하나 그림처럼 아픔이 되어 가슴에 맺혀 있지만 듬직한 원영과 시어른의 배려로 득남을 한 후 종교 생활을 이어간다. 전쟁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가면서 재순은 사 남매의 어미가 됀다.
그동안 시동생 넷의 혼사와 시할머니의 장사를 치렀지만, 전쟁 후의 생활이란 누구한 명 빠지지 않고 골고루 고달픈 것 같다. 다른 가족들과 사 남매의 앞날을 위해 원영이와 힘겹게 지키고 늘린 농토를 내어놓으라는 시동생의 욕심에 크게 낙담하며 마음 편할 날이 없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교회에서 묵상 중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그 후, 재순이는 뇌졸중 증상으로 왼쪽의 신체는 완전히 못쓰게 되었는데, 귀신이 쓰였다고 굿을 해야 한다는 시부모를 말릴 수는 없었다. 점점 상태는 나빠져 거동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또다시 안수기도하는 이들이 와서 한바탕 소동을 벌이지만, 얼굴의 표정은 더 일그러지고 말도 어눌해진다. 재순이는 제일 맘에 걸리는 막내만 힘없이 찾는다. 구석지고 어둑한 그 방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아이를 할머니는 억지로 어미에게 데려가지만, 어린 막내는 다리에 힘주고 뻗대며 끝내 고개를 돌린다. 얼마 후, 할머니의 울음소리가 나고 아이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 울기 시작한다. 꽃상여가 나가던 날 어린 상주와 아이의 울음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안타까움만 더한다.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긴 수초처럼 살다간 한 여인의 삶은 우리의 어린 시절 동구밖 미류나무처럼 잊혀 질 수 있지만, 누군가가 기억을 끄집어낸다면 어찌 그 삶이 애절하게 다가오지 않으랴. 이처럼 미류나무의 기억은 쉽게 사라지기도 하지만 이 키 큰 나무는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잔상으로 남아있다. 소설 도입에서 이 여인의 생을 기억해야 한다는 작가에겐 아마도 뽑아내지 못하는 회한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듯하다. 이 나무처럼 위로만 자라는 애절한 그리움이 있는듯하다. 어수선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마다 삶의 흔적은 모두 이처럼 소설이 될 수 있지만, 여인의 기억을 잊지 않고 되잡으려는 이의 몸부림으로 이렇게 재순은 세상으로 나왔다. 소설이라 하기엔 작가의 전작수필 ‘어머니’의 내용이 자꾸 겹쳐진다.
시골집 작은 건넌방 아랫목에 오랜 투병으로 일그러진 모습의 어미에게 가지 않으려고 뻗대던 대여섯 살 먹은 아이의 얘기가 한동안 내 마음을 아프게 했건만, 이 소설 끝부분에서도 그 모습을 그려냈다. 누군가에게 서걱대던 미류나무 끝에는 하늘로 맞닿을 듯한 평생의 후회와 막내 한번 제대로 품지 못하고 떠난 어미의 애달픈 모정이 매달려 있는듯하다. 너무 어려 마냥 외면했고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서른일곱 해만 살다간 어미를 이제야 찾아 나선 글쓴이의 여정이 애처롭다.
이륙한 비행기 작은 창문 너머 구름 아래로 수많은 나무가 서 있을 터인데, 나도 그 잊혀 가는 미류나무를 찾으려 마음의 시야를 넓혀 본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새끼를 품어 보려는 힘 빠진 어미를 지척에 두고도, 다가가지 않으려고 다리에 힘주는 어린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