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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당홍계(南陽洪氏-唐洪系) 各門人物 / 萬姓門中 2015. 1. 9. 12:29 https://blog.naver.com/cjdgkdus/220234716118 |
남양홍씨-당홍계(南陽洪氏-唐洪系)
원조:/휘 홍천하/ 봉위 당성백
일세조/휘 홍은열/ 관직 태사
관향의 유래
경기도 남양은 고구려 때의 당성군을 신라 경덕왕이 당은군으로 고쳤다가 고려 초에 다시 당성군으로 개칭을 하였다. 고려 현종 9년(서기1018년)수주(수원)와 인주(인천)에 편입되기도 했으나 충성왕2년(서기1310년)에 남양부가 되었다. 조선조 말기에 남양군이 되어 인천부 관할이 되었다가 1913년 군을 페지하고 대부면을 부평군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군에 합하였다. 그 후 수원읍 이외의 땅은 화성군에 합하였고 수원읍은 수원시로 승격하였다(지금의 화성시 남양면으로 지칭 됨)
창씨 연유
남양홍씨의 시조는 홍천하는 고구려 영유왕 때 당나라에서 8학사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유학을 강명하고 문화를 널리 혁신 시켰다. 그는 고구려가 망하고 삼한통합에 따라 신라 선덕여왕 때 유학 발전에 공을 세워 문무왕 때 당성백에 봉해 졌으며,신문왕이 태자태사로 추대했고 효소왕은 당성후를 삼았다. 그 후 당성의 지명이 개칭됨에 따라 후손들은 남양을 본관으로 삼고, 고려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를 지낸 홍은열을 일세조로 하여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
씨족사와 유적지 및 집성촌은 생략하기로 합니다.
역대인물(歷代人物)
홍기// 1603년(문종17)문과에 장원 한 후 우보궐이 되고,1098(숙종3)국자제주로서 동지공거를 겸임했으며,1101년(숙종6)공부상서가 되어 사관수찬관을 겸했다.
홍관//?~1126(인종4) 자는.무당 시호는,충평/문과에 급제하고 직사관을 지낸 뒤 1111년(예종6)국자사업, 어사잡단으로 동북면 병마사 되었다. 어사증승, 예부상서를 역임,1113년 형부상서 김의원과 함께 사신으로 요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문덕진 학사,1115년 청연각 학사가 되었으며,인종 때 수사공, 상서 좌복야에 이르렀다. 1126년(인종4)이자겸의 난 때 인종을 호위하다가 척준경의 난군에게 살해되었다. 김생의 필법을 본받은 명필로 알려졌으며, 앞서 1102년(숙종7)숙종의 명으로 집상전 전문의 액을 썼고, 회경전 병풍에 서경의 무일편을 썼다.(해동악사)의 의하면 보문각, 청연각의 편액을 썼고, 보전화루의 병풍과 편액도 그의 필적이라 했다. 예종의 명으로 삼한 이래의 사적을 찬집해서(편년통재속편)을 완성했고, 당대의 학자 김부일, 박승증과 함께 음양이서를 논변했다 추성보국공신, 삼중대광, 개부의동삼사, 판예부사, 상주국에 추증되었다.
홍이서//인종 때 지주사가 되어 왕의 근신이 되었고,1133년(인종11)지주사로서 동지공거가 되었으며,1135년(인종13)에는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왕의 명으로서 조서를 가지고 묘청을 초유하러 가다가 두려움이 생겨 역리를 시켰다는 죄로 김부식에 의해 평주에 수금되었다.
홍중방//1170년(의종24)무신의 난 때 중방장으로 정증부를 도와 대장군 역임
홍균//고려 때 평장사 역임
홍유수//고려 때 추밀부사 역임
홍녹주//시호는,회순/1274년(원종15)우복야로서 나주도 도지휘사가 되어 일본 정벌을 위해 원나라가 주문한 조선을 감독했으며,1277년(충렬왕3)에 세자 조호가 되었다.
홍진//1250년(고종37)중서사인으로 추밀원 부사 최자와 함께 사신으로 몽고에 다녀왔으며, 간의대부에 올라1263년(원종4) 상서좌목야에 승진,전선을 관장하였고,1266년(의종7)에 병부상서가 되고, 뒤에 동지추밀원사 역임
홍자번//1237년(고종24)~1306(충렬왕32)자는,운지 시호는,충정/동지밀직 예의 아들, 문과에 급제, 남경유수, 판관을 거쳐, 광주통판, 충청, 경상, 전라안찰사, 호부시랑을 거쳐1271년(원종12)우부승선이 되어 왕에게 서정을 친히 보살필 것을 청했다. 1278년 지밀직사사가 되어 왕을 따라서 원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판밀직사사로서 전라도 도지휘사가 되어 원나라와 일본정벌을 위한 전함의 수조을 담당했다.1280년 지첨의부사, 세자 이사, 1284년 첨의찬성사, 1293(충렬왕19)왕이 원나라로 갈 때 서울을 유수했다. 이듬해 첨의중찬, 1295년 지도첨의사사가 되었다가 이해 첨의중찬으로 치사했다. 이듬해 상의도첨의사사에 이어 중찬으로 편민십팔사를 왕에게 조진했으며, 1298년 충선왕이 잠시 즉위한 동안 좌복야, 참지광정원사를 거쳐 삼중대광,첨의중찬, 판전조사가 되었다. 같은해 충렬왕이 복위하자 공신의 호를 받고 1300년(충렬왕26)판중군사가 더해졌으며,1303년 충렬, 충선왕 사이를 이간시킨 오기, 석천보를 잡아서 원나라에 보내는 등 부자를 화해시키려고 노력을 했고, 이해 도첨의좌중찬이 되었다. 1305년(충렬왕31)경흥군, 자의도편의사사가 되어 원나라에 가는 왕을 호종, 이때 왕유소, 송인 등이 충성왕의 측근에서 갖은 흉모로써 왕의 부자를 이간하므로 두 왕을 모시고 귀국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나라에서 죽었다.추성동덕익대공신, 벽상삼한 삼중대광에 추봉되고, 충선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홍자한//1282(충렬왕8)탐라방호부사, 1298년 밀직사 지신사를 역임,1300년 부지밀직사사가 되어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08년(충선왕 즉위)금오위 섭상장군 겸 사헌증승에 이어 지감찰사사 역임
홍선//?~1318(충숙왕5)시호는,관정 백수의 아들, 1292년(충렬왕18)장군으로서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공물을 바쳤으며, 이듬해에도 대장군으로서 원나라에 파견되어 인삼을 바쳤다. 1298년 삼사 좌사,1300년 밀직부사,1303년 판도판서를 역임, 1307년(충렬왕33)상호군이 되었다. 1311년(충선왕3)찬성사로서 정조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오고, 이듬해 사은사로 다시 원나라에 가서 고려에 행성을 두지 않기로 결정한 것을 사하고 돌아왔으며, 1313년(충숙왕 즉위)강녕군에 봉해졌다.
홍수//강녕군 선의 아들, 충선왕이 세자로서 연저레 있을 때 시종했으며,1310(충선왕2)우부대언에 등용되었다. 충숙왕 때 만호가 되고, 뒤에 섭행정동성사, 장백상이 탐재일권의 죄로 투옥되자 김심과 함께 장백상의 직책을 대행했다.
홍규//?~1316(충숙왕3)자는,미루 호는,수재 시호는,광정/동지추밀원사 진의 아들, 충숙왕비 명덕태후의 아버지, 원종 때 어사증승이 되었으며, 1270년(원종11)원나라로부터 돌아오는 왕을 권신인 처남 임유무가 배척하려하므로 대의를 위해 송승례와 함께 삼별초의 힘을 빌어 이를 죽였다. 이어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원제의 명으로 고려 본국의 1품직에 올라 좌부승선이 되었으나 국정이 문란하므로 사직하고 다시 추밀원부사에 승진이 되었으나 또한 사퇴했다. 1297년(충렬왕23)판삼사사 수사도, 영경령 궁사가 되었다. 충선왕 때 익산군에 봉해지고 추성진력정안공신에 녹훈되고 남양부원군에 진봉, 상의첨의도감사에 이르렀다.
홍융//?~1342(충혜왕 복위3)시호는,장간/중찬의 규의 아들, 충혜왕의 장인,1315년(충숙왕2)삼사사 역임
홍의//?~1356(공민왕5)1352(공민왕1) 조일신의 난 때 상호군으로서 반군에 의해 죽을 뻔 했으나 그의 처가 가로막아 죽음을 간신히 모면했다. 뒤에 밀직사 역임
홍탁//?~1356(공민왕5)호는,의헌/강녕군 선의 아들, 화비(충혜왕비)의 아버지,1342년(충혜왕 복위3)평리로서 경상도 진변사가 되고, 이해 딸이 충혜왕비가 되었다. 이듬해 익성군에 봉해지고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와 1352년(공민왕1)조일신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의 장인으로 회원현령에 좌천되었다.
홍빈//자는,문야 시호는,강경/선조가 원나라 연경에 살며 대대로 내정에 숙위한 공으로 대도로 패주동지가 된 뒤에 송강부 판관, 도수감 경력을 지냈다. 충숙왕이 무고를 입고 폐위되어 원나라에 억류되자 이를 변호했으며, 충숙왕이 복위되자 그의 공을 인정한 왕이 원나라에 정동성 이문소의 벼슬을 내릴 것을 주청했고, 도첨의찬성사, 판군부사에 올랐으며,1339년 충숙왕이 죽자 유명에 의하여 권정동성사가 되었다. 이해 조적의 난 때 성관과 함께 조적의 강요로 충혜궁을 습격했으며, 조적이 폐사하자 다른 사람은 순구에 잡혔으나 그는 용서되었다. 1341년(충숙왕 복위2)조적의 일당의 호소로 충혜왕이 원나라에 압송되자 함께 잡혀가 왕을 위해 변호, 이듬해 왕이 귀국하게 되자 그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당성군에 봉해지고 이어 행성낭중에 올랐다. 충목왕 때 원나라에 가서 홍국록 총관이 되고, 돌아와서1353년(공민왕2)우정승에 승진, 추성익대동덕협의보리공신에 녹훈이 되고,당성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그뒤 홍은박, 이공수와 함께 장방제조로 있다가 사직하고 66세에 죽었다.
홍은박//1309(충선왕1)~1363(공민왕12)자는,증용 호는,양파 시호는,문정/남양부원군 규의 손자,1390년(충혜왕 즉위)문과에 급제하여 1348년(충목왕4)밀직제학에 이어 지신사가 되었다. 1352년(공민왕1)삼사우사로서 성절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와 팜삼사사, 이어 첨의찬성사가 되었으며 추성양절 좌리공신의 호를 받고 남양군에 봉해졌다. 1354년 좌정승,1356우정승이 되었다가 관제 개혁으로 문하시종이 되어 남양후에 봉해졌고,기철일파의 숙청에 공을 세워 1등공신이 되고,1361년(공민왕10)홍건적이 침입하자 중의가 피난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홀로 이를 반대,서울을 고수할 것을 주장했다. 서경이 함락되자 피난하는 왕을 호종하여 서울 수복의 방략을 세웠다. 피난 중 왕에게 절제생활을 권하여 내탕금을 잘약케 했고, 개경을 수복하여 환도하려 할 때 왕이 시일을 끌며 떠나지 않자 백성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농번기에 들기전에 갈 것을 독촉하여 왕이 이에 따르게 되었다. 1363년(공민왕12)김용이 흥왕사에서 난을 일으켜 왕을 죽이려 할 대 그곳을 피하라는 아들 사범의 권고를 물리치고 적에 항거하다가 살해되었다. 호종1등공신에 추록되고, 정승에 추증되었다.
홍원철//1351년(공민왕 즉위)밀직으로서 국새를 가져온 원나라 단사관 완자부카의 귀국을 전송하고 그길로 평안도순문사에 부임했다. 상사좌사, 삼사우사를 거쳐 1354년(공민왕3)판개성부사가 되고,1363년 찬성사로서 앞서 홍건적이 침입했을 대 호종한 공으로 호종1등공신이 되었다.
홍언유//남양부원군 규의 손자,1361년(공민왕10)승선이 되고,1363년 안동도호부사로서 앞서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호종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고 이듬해 밀직부사가 되었다.
홍순//?~1377(우왕3)1358년(공민와7)판태상시사로서 원나라에 파견되어 인삼을 바쳤고,1363년 관기로의 서를 어사대에 바쳤다 이때 원나라에서는 덕흥군 혜를 고려왕으로 삼고 연경 고려 사람들도 모두 이에 응했으나 그는 이에 불응하고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1369년(공민와18)지도첨의 겸 감찰대부가 되어 서북면순목사를 겸하고 이어 첨의평리에 올랐다.
홍중선//?~1379(우왕5)초명은,중원/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내부부령이 되고,1356년(공민왕5)한양부원군으로 충혜왕의 서자 석기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장형을 받았으나,1371년(공민왕20)총부상서로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5년(우왕1)판개성부사,장당문학을 거켜1377년 문하찬성사에 올라 우왕이 서연을 열자 그 사부가 되었으나 함께 정방에 있는 이인임, 임견미등의 시기를 받아 계품사에 임명되어 명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나하추가 요동에 출병하고 있어 길이 막혔으므로 즉시 떠나지 못한 일로 평소부터 사원이 있던 간관 서균형의 탄핵을 받아 의령현에 유배,1379년 양백연의 옥에 연루되어 배소에서 살해되었다.
홍길민//1353(공민왕2)~1407(태종7)자는,명부 시호는,문경/검교중추원부사 보현의 아들, 전법정랑으로서 1376년(우왕2)문과에 급제하여 강릉도 안렴사, 사헌부장령등을 지냈다. 1390년(공양왕2)우사의대부가 되었으나 정몽주가 우정승에 임명되자 전제를 문란케하고 언관을 추방한 장본인이라 하여 고신에 서명을 거부했다가 파직되었다. 1392년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좌부승지가 되어 개국2등공신으로 남양군에 봉해졌다. 상의중추원사 역임
홍선//장군이 되어 1361년(공민왕10)홍건적이 침입하자 장군 조천주 등과 함께 보기 4백을 이끌고 박주에 이르러 적병1백여 명을 살해하고 대승을 했다. 이해 전세가 불리할 때 유격장군이 될 것을 자청하여 남경윤, 양광도관군상만호로 기용되었다. 이해 최유가 원나라의 황제에게 무고하여 왕을 폐하고 덕흥군 혜를 세워 고려를 치러 온다는 정보가 있자 서북면 도변마사가 되어 정주에 주둔,동북 지방을 자청했다. 이듬해 최유가 거느린 원병 1만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했을 때 이를 맞아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다.
홍징//?~1388(우왕14)권신 염흥방의 매부, 1377년(우왕3)신주, 문학, 안악, 봉주 등지에 침입한 왜구와 싸우던 중 양백익, 나세, 심덕부 등이 전세가 불리하여 원군을 요청하자 당시 밀직부사로서 이성계, 임견미, 변안렬 등과 함께 조전원수가 되어 출전 왜적을 방어했다. 뒤에 당산군에 봉해졌으며,1384년(우왕10)북변이 시끄러워지자 정몽주 등고ㅓ 함께 동북면에 파견되어 사태를 조사하는 한편, 이듬해까지 지밀직으로서 누차 동북면 부원수로 활약했다. 1387년 판밀직으로서 문하평리상의 우인렬과 함께 한양부에 파견되어 중흥산성의 형세를 시찰, 이듬해 처남 염흥방이 사형당할 때 연좌되어 함께 사형당했다.
홍인계//?~1390(공양왕2)1365년(공민왕14)신돈 이최영 등 구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할 때 판사로서 구세력에 속했기 때문에 순흥에 유배되었으나 1377년(우왕3)양고도 도순문사로서 신평형의 왜구를 쳤고,1380년 강계 원수가 되어 왜구를 격파했으며,1388년(우왕14)요동정벌 때는 이성원수로서 종군했다. 1390년(공양왕2) 이초의 옥에 연루되어 순군옥에 갇혀 옥사했다.
홍상재//?~1391(공양왕3)시중 채하중의 사위,1357년(공민왕6)상장군으로서 채하중의 무옥에 연루되어 장배, 후에 기용되어1369년(공민왕18)예부상서로서 명나라 태조의 즉위를 축하하러 남경에 가서 처음으로 명나라와 국교를 맺고 돌아왔다. 1383년(우왕9)문하평리로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으나 당시 고려의 친원, 천명 양면정책으로 인해 명나라의 의혹을 사서 귀양을 갔다. 이듬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온 정몽주의 주선으로 귀양에서 풀려 귀국했다.1391년(공양왕3)밀직이 되고,당산군에 봉해졌다.
홍여방//?~1438(세종20) 자는,자원 호는,연생당 시호는,문량/판서 길민의 아들,사마시를 거쳐1401년(태종1)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에 우동시학이 되고 예문 검열, 사헌감찰을 거쳐 병조, 이조 좌랑, 지평등을 역임했다. 1415년 지형조사로서 노비의 소송에 판결을 잘못해 한때 파직되었다. 1417년 이조참의로 강원도 도관찰사가 되어 공안부윤, 예조참판을 역임, 1419년(세종1)형조참판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설화로써 장기에 유배되고, 다시 장단에 유배된 후 풀려나와 1427년 인순부윤으로 평안도 도관찰사를 겸하였다. 이듬해 한성부윤을 거쳐 경상도 도관찰사가 되고,1429년 좌군총제를 겸했으나 진상한 문어가 정결치 못하여 파직되었다. 1433년(세종15)전주부윤이 되었으며,1438년 판한성부사로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 있을 때 본국으로부터 대제학에 임명되고, 귀국 후 판서가 되었다.
홍경순//1409(태종9)~1481(성종12)자는,길보 호는,우국재/사재감 직장 지의 아들,1435년(세종17)사마시를 거쳐1439년 친시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교리 장령등을 역임하여 첨지중추부사 겸 동지선균관사를 지냈다. 인물이 출중하고 재능이 뛰어났으나 고려 중실의 외손으로 크게 등용되지 못했다. 문장에도 뛰어나{동국여지승람}에 그의 글이 실려있다.
홍달손//1415년(태종15)~1472(성종3)자는,가칙 시호는,안무/영중추원사 치의 아들, 어려서부터 무예에 출증하여 내금위에 속했다가 의주도 수군첨절제사에 오르고,1453년(단종1)무과에 급제하여 첨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이해 계유정란에 수양대군을 도와 정난1등공신에 녹훈되고, 병조 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병조참판에 승진, 남양군에 봉해졌으며,1455년(세조1)좌익2등공신이 되고 이듬해 남양부원군에 봉해진뒤 명조판서,영중추원사를 거쳐1467년(세조13)좌의정에 이르렀다.
홍흥//1424(세종6)~1501(연산군7)자는,사결/한성부윤 심의 아들,1443년(세종35)사마시에 합격하고 음보로1479년(성종10)지평을 지낸뒤 장령, 우승지를 거쳐1490년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1494년 개성부유수로 부임하자 그의 명망을 흠모하던 개성 사람들로부터 크게 환영을 받았으며,1496년(연산군2)강원도 관찰사, 호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사헌, 한성부 좌윤을 지냈다. 호조참판을 거쳐 한성부 우윤으로 죽었다. 성품이 정직하여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고, 글씨에 뛰어났다. 인물과 풍채가 잘나서 성종이 그를 사신으로 명나라에 보내어 나라의 인물을 자랑했다.
홍경림//자는,윤정/조선 때 공조판서 역임
홍윤선//1425(세종7)~1475(성종6)자는,수옹 호는,경해 시호는,위평/제년의 아들,1450년(문종 즉위)추장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고 무제가 뛰어나 특히 사복시 주부를 겸임, 이어 한성부 참군, 통례문 봉례 등을 역임했다.1453년(단종1)수양대군을 도와 김종서 제거에 공을 세워 정난2등공신에 책록되고.장령을 거쳐1455년 판사복시사가 되었다. 그 후 예조판서, 경상우도 도절제사를 역임,1460년(세종6)모령위의 야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 막하의 부장이 되어 이를 토벌하고1467년 우의정, 이듬해 세조가 죽자 신숙주, 한명회 등과 원상이 되어 성정을 처결했다. 1469년(예종1)좌우정이 되었으며, 이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영의정에 승진,1470년(성종1)부원군에 진봉되고 이듬해 좌리1등공신이 되었다.
홍유순//1431(세종31)~1529(중종24)자는,여경 호는,조총/광진자 순치의 아들, 김종직의 문인, 문장에 능해 남양부사로부터 이역을 면제받았다. 세조의 찬위 후 세속적 영화를 버리고1482년(성종13)남효온, 이총, 이정은, 조자지 등돠 모임을 갖고, 죽림칠현을 자처, 노자, 장자의 학문을 토론하여 시주로 세월을 보내어 청담파로 일컬어졌다. 1498년(연산군4)무오사화 때 잡혀 국문을 당하고 제주에 유배, 노예가 되었다.1506년 증종반정으로 풀려나왔다.
홍경주//?~1521(중종16)자는,제옹 시호는,도열/임의 아들, 희빈 홍씨(중종의 후궁)의 아버지,1501년(연산군7)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1504년 지평이 되고,1506년(연산군12)사복시첨정으로 중종반정에 가담, 정국1등공신으로 남양군에 봉해졌으며,동부승지에 이어 도승지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이과의 옥사를 잘 처리하여 정난2등공신에 봉해지고, 그후 병조판서, 좌찬성, 호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좌참찬이 되어 사림파출신 언관들의 탄핵을 받아 퇴거했다.1519년(중종14)훈구파의 한사람으로 심정, 남곤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비롯한 사람파의 신진 세력을 몰아냈으며, 그후 좌찬성,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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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이평//1463(세조9)~1525(중종20)자는,중성/상호군 귀손의 아들,1513년(중종8)식면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 예조 좌랑, 형조정랑, 상의원정을 역임
홍덕연//1493(성종24)~1553(명종8)자는,숙용/대사성 이평의 아들, 김안국의 문인,1524년(중종19)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유로 뽑혔다가 강원도도사로 있을 때 김안로, 채무택의 무고로 파직당했다. 다시 등용되어 봉상시 봉사, 정언을 거쳐1539년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었다. 시독관, 집의를 역임한 후, 이듬해 상주목사 역임
홍춘경//1497(연산군3)~1549(명종3)자는,명중 호는,석별/대교 계정의 아들,1522년(중종17)식년문과 을과로 급제, 저작, 정자를 지내고,1536년(중종31)문과중시에 장원,사성, 보덕, 집의, 예조참의를 역임했다. 1541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좌승지를 지내고, 한성부 우윤, 이조참의를 지내고,1545년(인종1)중종의 지문을 지었다. 글씨는 김생체를 썼다.
홍봉세//1498(연산군4)~1575(선조8)자는,흉증/판서 경림의; 아들, 조광조의 문인, 신진사류로서 성수침 형제와 친교가 있었다.1519년(중종14)기묘사화 이후 벼슬을 단념하고 있다가 나이 40이 지나서 등용되어 판결사가 되었고, 춘천부사, 남양부사, 괴산군수를 역임, 여주목사에 이르렀다.
홍인우//1515(중종10)~1544(명종9)자는,웅길 호는,치재/첨지중추부사 덕연의 아들,서경덕, 이황의 문인,1537년(중종32)부친의 권유로 사마시에 응시해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대과를 단념,학문에 전심했으며, 당시의 거유 노사신도 그에게 학문을 물었다. 만년에 부친이 병들자 의서를 연구, 마침내 약의 처방을 손수하기에 이르렀다, 아들 진의 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홍천민//1526(중종21)~1574(선조7)자는,달가 호는.율정/관찰사 춘경의 아들, 성혼의 문인,1543년(중종38)사마시에 합격,1553년(명종8)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이 되고,1515년 수찬으로 사가독서 한 후정언을 거쳐 이듬해 이조좌랑이 되었다. 문학, 이조정랑, 검상, 사인, 집의등을 역임,1560년 전한, 집제학, 공조참의, 다음해 동부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오르고,1563년 병조 참지, 이조, 형조참의,1571년(선조4)대사성에 재임,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교지의 작성에 뛰어나 여러번 도승지를 역임했다.
홍성민//1536(중종31)~1594(선조27)자는,시가 호는,졸옹 시호는,문정/관찰사 춘경의 아들,서경덕, 이황의 문인,1561년(명종16)진사가 되고,156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자, 교리등을 지냈다.1567년 사가독서 한 후 대사간을 거쳐1575년(선조8)호조참판으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에 힘썼다. 그 후 부제학, 예조판서, 대사헌을 역임하고,1590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2등공신이 되어 익성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판중추부사가 되었다가 건저문제로 정철이 실각하자 그 일당으로 몰려 북면에 유배되었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특사로 풀려나와 대제학이 됐다가 부친상으로 사직했다.
홍세영//1539(중종34)~?자는,중실/군수 보의 아들,1568년(선조1)생원이 되고,1572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1575년 동서분당이 시작될 때 서인에 속했으며, 정언을 거쳐 우승지 역임
홍봉//1539(중종34)~1597(선조30)자는,천유 호는,경재/주부 거방의 아들, 벼슬이 제용감 첨정에 이르렀다. 임실 학정서원에 제향되었다.
홍진//1541(중종36)광해군8)자는,희고 호는,인재,퇴촌 시호는 단민/학자 인우의 아들,1564년(명종19)사마시를 거쳐1570년(선조3)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자, 검열, 수찬, 응교 등을 지내고,1589년(선조22)직제학으로 문사랑에 올라 정여립의 옥사를 다스렸다. 이어 동부승지를 거쳐 좌,우승지를 역임,1592년 임진왜란에 왕을 호종할 때 왕이 요동으로 피난하려는 것을 반대했다. 이듬해 한성부판윤에 승진, 선발로 서울에 와서sgbf했고,1604(선조37)호성2공신으로 당홍부원군에 봉해졌고,1609년(광해군1)관상감제조가 되었으나 북인들이 정권을 잡자 사퇴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홍은//1541(중종36)~1593(선조26)자는,혼원 호는,시우당/충주부도사 필세의 아들, 이황의 문인,1566년(a여종21)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1573년(선조6)정언을,1576년에는 지평을 각각지내고,1579년 집의로 급제하였으며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었다.1583년 대사간, 이조참의를 거쳐 뒤에 병조, 형조의 참의 역임, 판결사, 강원도 관찰사, 성주와 양주의 목사 등을 지냈다.1592년 임진왜란 때 부제학으로서 신병을 무릅쓰고 왕을 호종, 송도에 이르러 이조참의가 되었으나 병이 위독해지자 고향 예산에 돌아와 죽었다.
홍인걸//1541(중종36)~?자는,응시/직장 덕렴의 아들,1568년(선조1)진사가 되고,1573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예조정랑, 해미현감, 서천군수, 회향부사를 거쳐 오위장이 되었다.1592년(선조25)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왕을 호종하는 도중 형조참의가 되고, 이어 삼척부사가 되었으며,1595년 삼척에 쳐들어 온 일본군과 싸울 때 포로가운데 우리나라 사람이 있으므로 이들을 관찰사에게 압송하려고 했으나 술취한 인간이 동족을 해친놈들이라 하여 그 포로들을 살해했다. 이 사실이 그가 마치 공을 세우기 위해 죄없는 백성을 함부로 죽인 것처럼 조정에 잘못 보고되어 9년 동안이나 투옥되어 있다가 옥사했다.
홍세공//1541(중종36)~1598(선조31)자는,중안 호는 봉계/군수 보의 아들,1567년(명종22)생원이 되고,1573년(선조6)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함경도 순찰사로 전주부윤을 겸했다. 그 후 평안도 조도사로서 군량미 조달에 힘쓰다가 재임중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당성부원군에 추봉되었다.
홍여순//1547(명종2)~1609(광해군1)자는,사신/은의 아들,1567년(명종22)생원이 되고,1568년(선조1)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에 황해도 도사가 되고,1575년에 성절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병조 판서를 거쳐1592년 호조판서로 전임, 이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중추부사로 북도 순찰사를 지냈으나 성품이 간악하여 대간의 탄핵으로 순천에 유배되었다. 북인으로서 전쟁이 끝난 후 류성룡 등을 몰아내고 정권을 쥐었으나1599년 그의 대사헌 임명을 남이공이 반대하다 북인에서 분당하여 이이첨 등과 대북을 영도, 남이공 소북과 당쟁을 벌이다가1600년 병조판서에서 사직 당했다. 이듬해 복관 되었으나1608년(광해군즉위) 또 다시 대간의 탄핵으로 진도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홍적//1549(명종4)~1591(선조24)자는,태고 호는,양재/하의자 인우의 아들,1572년(선조5)진사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관이 되고, 이듬해 사가독서를 한 후 10년 동안 홍문관에 재직했다. 1583(선조16)양사에서 이이를 탄핵하자. 이를 반박하다가 장연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4년 후 병으로 사임, 돌아와 다시 등용되어 병조정랑, 집의, 사인을 지냈다. 경학에 밝고, 논사를 잘하여 홍문관에서 학사전재라 불렸으며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작품으로 시조 1수가 전한다.
홍준//1557(명종12)~1616(광해군8)자는,사고 호는,괴음/사성 인건의 아들,1579년(선조12)진사가 되고,15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도부승지, 공조참의를 거쳐 성천부사가 되었다가 사직, 시주로 소일했다. 1615년 신천구수가 되었으나 이듬해 해주옥사에 그와 이름이 비슷나 사람이 연루되자 잘못 투옥되어 병으로 죽었다.
홍희남//자는,자열//임진왜란 이후 대일 교섭에 난관이 있을 때 마다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 공으로 승록대부의 위계에 올라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일본에 여섯 번, 명나라에 두 번 사신으로 다녀왔고,1649년 인조가 죽었을 때 일본의 조제사를 부산에 맞아 제례를 올리게 했으며, 이로써 일본사신 왕래의 사례를 만들었다.1659년(효종10)문위사를 수행하여 유황의 산화법을 배워왔다.
홍서익//1572(선조5)~1623(인조1)자는,익지 호는,화옹/이조판서 성민의 아들,1609년(광해군1)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수안, 옥천, 선산 등의 군수를 역임하고,1617년에 분병조참의가 되었다. 대북파 전횡을 피해 외직을 자청, 가평군수로 나갔다. 이듬해 폐모론이 발의되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홍서봉//1572(선조5)~1645(이조23)자는,휘세 호는,학곡 시호는,문정/도승지 천민의 아들,1590년(선조23)사마시에 합격,159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조좌랑, 교리, 사성, 응교를 역임하고,1608년에 사가독서를 한 후1609년(광해군1)문과중시에 갑과로 급제했다.1612년 김직재의 무옥에 장인 황혁이 화를 입자 이를 변화하다 파직, 그 후 벼슬을 단념하고 은거했다.1623년(인조6)류호림의 모반 음모를 고변, 그 공으로 다시 영사2등공신이 되고 지의금부사에 올랐으며, 이조판서를 거쳐1633년 예조판서가 되어,1635년 대제학을 겸했다. 이듬해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승진, 세자 사부를 겸했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최명길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였고, 김진국, 이경직 등과 수차에 걸쳐 청나라 진영에 왕래하며 항복의 절차를 협의했다.1639년 부원군에 진봉,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가1644년 좌의정의 세자책봉을 반대하고 소현세자의 아들로서 적통을 잇게 하라고 주장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문장과 시에 능했고, 글씨도 뛰어났다(청구연언)에 시조1수가 전한다.
홍명원//1573(선조6)~1623(인조1)자는,낙부 호는,해봉/진사 영필의 아들, 1597년(선조30)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0년 검열이 되고, 세자시강원 설서, 사서를 거쳐 헌납이 되어 권신들을 탄핵하여 함경도도사로 좌천되었다.1603년 예조정랑이 되고 죽주부사 정주와 의주의 목사 등을 역임, 동부승지가 되었다. 부모봉양을 우해 광주목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표리를 하사 받았다. 광해군 초에 후금과 수교한 사실이 명나라에 알려져 양국 외교관계가 긴장되자 급고사로 명나라에 가서 이를 무마했고, 후금의 위협에 강경론을 주장했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경기도 관찰사가 되어 반정 후에 치안유지에 힘썼다. 시와 문장에도 뛰어나 특히 한 대의 문장과 당대의 시에 정통했다.
홍득일//1577(선조10)~?자는,형제 호는,만회/후포 사유의 아들,1609년(광해군11)생원이 되고,16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1617년 호조좌랑 이듬해 예조좌랑을 역임한 뒤 1624년(인조2)동래부사로 선정을 베풀어 표리를 하사받았다.1628년 동부승지, 이듬해 우부승지를 거쳐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1647년 좌승지에 이르렀다.
홍무적//1577(선조10)~1656(효종7)자는,면숙 호는 백석 시호는,충정/성혼의 문인,1615년(광해군7)생원으로 이이첨, 정조, 윤인 등을 사주하여 폐모론를 제거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 거제에 유배되었다.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와 창녕현감이 되고 지평, 수찬을 거쳐1632년(인조10)김제군수를 지내고,1637년 공주목사, 장령을 역임했다. 이때 낙당의 영수인 김좌점의 행포로 탄핵했다가 한때 사직되었고, 사간, 우승지, 병조참판을 거쳐1643년 대사헌이 되었다. 이듬해 판결사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갔다가 배청파라 하여 정사 이경여와 척화파의 대신 긴상헌 등과 함께 억류되었다.1645년 소현세자(민희빈)의 옥사가 일어나자 강 빈의 무죄를 역설하다가 제주에 유배,1649년(효종즉위) 전리에 방귀 되었다. 이듬해 한성부 우윤에 기용, 병조, 형조판서를 거쳐1652년 우참찬 역임
홍명형//1581(선조14)~1636(인조14)자는,계통 호는,무적당 시호는,의열/진사 영필의 아들,1609년(광해군)진사시에 합격,1612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618년 경성판관을 거쳐 1623년(인조1)정언, 장령을 역임했다. 형조참의를 지내고,1634년(인조12)동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중국에서 사사로이 부총병 저용과 만났다하여 파면되었다.1636년 승문원 부제조가 되고, 이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피난. 적들이 다다르자 김상용과 함께 화약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강화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홍우경//1590(선조23)~1625(인조3)자는,경부 시호는,정간/참판 식의 아들,1603년(선조36)선조의 딸 정인옹주와 결혼, 당성위에 봉해지고 봉헌대부가 되었다.1618년(광해군10)폐모론이 일어나자 침식을 폐하고 이이첨, 한찬남 등의 음모를 상소했다가 유배되고,1623년 인조반정으로 복관되었다. 수륙대부에 추증되었다.
홍명구//1596(선조29)~1637(인조15)자는,원로 호는,나재 시호는,충렬/승지 서익의 아들,1619년(광해군11)알성문과에 장원했으나, 대북파의 횡포로 시골에 은거하다가1623년 인조반정 후에 등용되어 1625년(인조3)부수찬이 되었다.1627년 직강, 이어교리, 이조좌랑, 좌부승지 등을 지내고,1633년 우승지,1635년(인조13)대사간, 부제학을 거쳐 이듬해 평안도관팔사로 나갔다. 이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근왕병 2천 명을 거느리고 남하, 김화에 이르러서 적을 만나 수 백 명을 살상하고 전사했다. 여주의 기천서원, 평양의 서산서원에 제향 되었다. 정문이 세워졌고 뒤에 좌의정이 더해졌다.
홍처후//1599(선조32)~1673(형종14)자는,덕재 호는,성암 시호는,충장/관찰사 명원의 아들,1616년(광해군8)진사시에 합격, 음보로 참봉이 되었다. 이어 세자익위사 세마, 의금부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1629년(인조7)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고,1633년 정언으로 최명길을 탄핵했다가 제천현감에 좌천되었다.1652년(효종3)수찬, 이듬해 교리, 1655년 의주부윤에 오르고,1659년(형종죽위) 경상도관찰사,1661년 호조참의 다음해 동부승지를 거쳐 병조참지, 참의를 지냈다.1655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다음해 판결사, 전라도관찰사, 우승지를 거쳐1669년 함경도관찰사가 되고,1673년 경기도관찰사,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홍명일//자는,만초 호는,보옹/영의정 서봉의 아들,1630(인조8)진사가 되고,1633년(인조11)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대교, 이조정랑 등을 지낸 뒤 163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 이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상헌, 정온 등과 척화론을 주장, 난이 끝난 후 이들 척화론자의 처벌이 논의되자 옹교로 이목 등과 함께 그들을 변호했다. 장령, 필선을 거쳐 대사성에 이르렀다. 글씨를 잘 썼다. 영안군에 습봉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홍석기//1606(선조39)~1680(숙종6)자는,원구 호는,만주/생원 이중의 아들, 구서봉의 문인,1627년(인조5)진사시에 합격, 장릉 참봉이 되고,1641년 호조좌랑으로 정시문과에 자원, 병조좌랑을 지냈다.1645년 정언으로 만언소를 올려 시사를 논하여 해운판관에 좌천되었다.1654년(효종5)예조좌랑으로 기요되었다가 인동부사로 부임, 그 후 남원부사 등 여러 외직을 지내고 사직, 청주에 머물면서 화양에 와 있는 송시열과 교유하며 학문을 닦았다.
홍처량//1607(선조40)~1583(숙종9)자는,자회 호는,북정 시호는,정정/사재감 첨정 명현의 아들,1630년(인조8)진사가 되고1637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수찬, 헌납, 이조정랑, 사간, 승지를 지내고,1656년(효종7)대사간이 되었다. 그 후 대사성, 예조참판, 개성부유수, 대사헌을 거쳐, 이조 예조판서를 지내고, 숙종 때 제학, 좌참찬, 판중추부사를 역임
홍처윤//1607(선조40)~1663(현종4)자는,지임 호는,안분재/관찰사 명원의 아들,1639년(선조17)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1641년 검열을 거쳐1646년 시관이 되었으나 과거에 부정이 있어 파방되자 사직 당했다. 1648년 복직되어 정언, 수찬을 지내고,1650년(효종1)응교로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으며 이해 지평으로 영의정 깁자점을 탄핵했다. 이어 교리가 되고 왕이 당쟁의 폐해를 지적하자 그 해함을 진술하여 사직되었다가 배천군수로 기용되고,1655년 수찬, 겸보덕 등을 지냈다. 이해 효종이 죽자 빈저도감 도청이 되고 이어 사간을 지낸 후 이듬해 형조참의, 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661년(현종2)호조참의가 되고,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1663년 첨지중추부사, 예조참의에 이르렀다.
홍명하//1608(선조41)~1668(현종9)자는,대이 호는,기천 시호는,문간/분병조참의 서익의 아들/1630년(인조8)생원이 되고,164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164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한뒤 규장각 대교, 정언, 교리를 역임했다.1648년 부수찬, 헌납을 지낸 후 이듬해 이조정랑으로 암행어사가 되어 부정한 관리를 적발하는데 당대에 이름을 떨쳤으며,1650(효종1)이조정랑을 거쳐1652년 동부승지에 승진되어 이듬해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이어 대사간으로 사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후 이조와 예조의 참판, 부제학, 대사헌, 형조판서를 지내고, 약방제조로1659년 효종이 죽자 사직되었다. 이어 예조, 병조판서를 거쳐1663년(현종4)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사은 겸 진주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1665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효종의 신임이 두터워 왕을 도와북벌계획을 적극 추진했고, 박세체, 윤중 등 명신들을 천거 했다.글씨에 뛰어났다. 여주의 기천서원에 제향되었다.
홍처대//1609(광해군1)~1676(숙종2)자는,중일 호는.역현/관찰사 명원의 아들,1633년(인조11)사마시를 거쳐1639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 봉교를 지냈다.1644년에 함경도 암행어사가 되었다. 그 후 이조정랑, 정언, 수찬, 헌납, 교리를 역임하고,1652년(효종3)암행어사가 되어 호서지방에 실시한 대동법이 실효를 거두고 있는가를 조사했다. 그 후 우승지, 병조참의, 황해도관찰사를 지냈으며,1664년(현종5)1666년에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도승지, 한성부우윤을 거쳐1676년(숙종2)지중추부사로 영남무과전시시관이 되어 임지로 가는 도중 군위에서 죽었다.
홍중보//1612(광해군4)~1671(현종12)자는,원백 호는,이천 시호는,충익/평안도 관찰사 명구의 아들,1645년(인조13)진사시에 장원,1641년 영릉 참봉을 거쳐 시직이 되었다.164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 성산현감을 지내고,1650년(효종1)수찬으로 춘추관 기사관이 되어(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그 후 수원부사, 도승지, 대사헌, 호조참판, 예조판서를 역임,1644년(현종5)지경연사가 되고, 호조와 병조의 판서, 우참찬, 판의금부사 등을 거쳐1669년 우의정이 되었다.
홍승//1612년(고아해군4)~1688(숙종14)자는,경초 호는,정애/도사 선경의 아들,1654년(효종5)사마시에 합격,1662년(현종3)천거를 받아 남별전 참봉이 되었으나 노친의 봉양을 위해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홍구연//1612(광해군4)~1635(인조13)자는,이정 호는,마경현/형조판서 무적의 아들, 어려서부터 시재가 뛰어났으나 요절했다.
홍위//1620(광해군12)~1660(현종1)자는,군실 호는,청계/창람 진사 원호의 아들, 조석윤의 문인,1634년(인조13)진사시에 합격.1649년(효종즉위)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 성훈의 문묘종사를 상소했다가 경상도 유생들의 규탄을 받고 한때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이듬해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설서, 정언, 문학, 지평을 역임했다.1654년 부수찬을 거쳐 이듬해 이조좌랑을 지내고1656년 교리, 다음해 동래부사가 되었다.
홍석구//1621(고아해군31)~1679(숙종5)자는,국보 호는,동호/구곡산인, 지리재 진사 준의 아들, 이식의문인,1645(인조23)생원이 되고,1650년(효종1)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해주목사에 이르렀다. 10여세 때부터 글씨에 뛰어나 많은 편액을 썼으며, 효종의 잠저 시절에 총애를 받아 세자의 신발을 하사 받았고, 천문학에도 정통하여 나무로 혼천의를 만들기도 했다. 글씨는 특히 전서를 잘 써서 현종의 격찬을 받았다.
홍수량//1627(인종5)~1697(숙종23)자는,청숙 호는,규헌/경기도관찰사 처후의 아들,1663년(현종4)사마시에 합격, 강릉참봉이 되고, 첨정, 순흫부사를 역임했다. 시부에 뛰어나고 글씨는 특히 해서를 잘 썼다.
홍수헌//1640(인조18)~1711(숙종37)자는,군택 호는,담포 시호는,문정/관찰사 처후의 아들,1660년(현종1)진사가 되고,1682년(숙종8)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수찬으로 함경도 암행어사가 되었다.1688년 헌납으로 소론의 박세채, 남구만, 여성제, 를 신구하려다가 북청 판관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사예가 되었다가 기사환국으로 무안에 유배,1694년 갑술옥사로 풀려나와 대사성이 되고 대사간을 거쳐 이천부사로 나갔다. 그 후 형조판서, 판의금부사, 이조판서를 역임,1705년 좌참찬에 이르렀다.
홍득우//1641(인조19)~1700(숙종26)자는,숙범 호는,수졸재/우의정 증보의 아들, 송준길의 문인,1662년(현종3)사마시에 합격, 음보로 통진 현감에 이르러 병으로 사퇴했다.1676년(숙종2)송준길이 관작을 추탈 당하자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무안에 유배, 이해 겨울에 풀려나왔다. 그 후 장악원, 사복시의 주부를 거쳐 병조좌랑, 첨지중추부사를 지내고,1700년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죽었다.
홍수주//1642(인조20)~1704(숙종30)자는,구언 호는,호은/호곡, 관찰사 처운의 아들,1682(수종8)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 헌납 등을 지내고,1684년 장령으로 재직중 서인으로서 파직, 경홍에 유배되었다. 덕원, 철원 등지의 밀양과 경원의 부사를 지냈다. 이듬해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고,1696년 동부승지로 원접사가 되어 청나라 사신을 마자 능숙한 문장과 글씨로 그들의 격찬을 받았다. 이해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다음해 부부승지를 거쳐1701년 예조참의, 이듬해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1704년 도승지를 거쳐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글씨 그림에 모두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는 전서를 잘 썼고, 그림은 매화, 대, 포도를 잘 그렸다.
홍득귀//1653(효종4)~?자는,자징 호는,창곡/영의정 명하의 손자, 벼슬을 목사에 이르렀다. 산수화에 뛰어났고, 독창적인 화법으로 특히 편폭소경을 즐겨 그렸다.
홍우서//1662(현종3)~1716(숙종42)자는,중옹 호는,서암/부사 수량의 아들,1702년(숙종28)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가주서가 되고, 설서, 검열, 수찬, 부교리를 역임,1712년 은율 현감이 되었다. 이해 다시 수찬, 교리가 되고 이듬해 헌납, 이조정랑을 거쳐1714년 대사간에 승진, 다음해 동부승지에 이어서 우승지가 되었다. 이해에(가례원류)의 발문에 스승 송시열을 배반한 윤증을 비난한 정호를 변호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아 서주 현감에 좌천되고,1716년(가례원류)의 시비에 승리한 노론이 집권하기 전에 죽었다. 시문에 능하고 당대 명필로서 특히 예서에 능했다.
홍우전//1663(현종4)~?자는,집중 호는,귀만/정랑 수제의 아들, 송시열의 문인,1702년(숙종28)진사시에 합격, 군수를 지내고,1719년에 57세로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지평이 되었으나 직언을 하다가 박필몽의 탄핵을 받아 삭직, 전주에서 은거했다.1725년(영조1)노론의 재집권으로 복직되어 대사간이 되었으며,1727년 수원부사로서 소론의 남구만,윤지완,최석정 드을 숙종의 묘정에서 출향할 것을 주장하다가 다시 사직되었다. 후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홍호인//1674(현종15)~?자는,유재 호는,노포/이도의 아들, 상도에게 입양,1706년(숙종32)정시문과에 장원하고,0707년 정언, 지평을 지낸뒤 진해현감, 필선을 거쳐1716년 집의,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었다.1721년(경종1)신임사화로 삭직되었다가1725년(영조1)우부승지로 발탁되고 충청도관찰사, 경기도 수군절도사, 좌부승지에 이어 173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거쳐1744년(영조20)한성부판윤을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홍계적//1680(숙종6)~1722(경종2)자는,혜백 호는,수허재 시호는,의간 뒤에 충간으로/이조참판 우석의 아들,1702년(숙종28)진사가 되고,1708년(숙종34)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 세자시강원 설서 등을 지낸뒤 경종이 즉위하자 강화유수, 대사헌, 도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1721년(경종1)대사헌으로 노론의 선봉이 되어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여 소론과 대립, 이해 신임사화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역모에 가담했다는 죄로 서울에 압송되어 문초를 받다가 옥사했다. 영조 즉위 후 신원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홍임//1685(숙종11)~1728(영조4)초명은,진 자는,춘경 시호는,충강/첨절제사 수명의 아들,1727(영조3)충청도 병마절도사 이봉상에 의해 청백함이 인정되어 그의 막료가 되었다. 이듬해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켜 청주에 침입, 이봉상을 잡아 죽이려하자 대신 반란군 앞에 뛰어나가 스스로 병마절도사 이봉상을 자칭하고 항전하다가 살해되었다. 호조참판에 추증되고 청주의 표충사에 제향되었다.
홍성//1702(숙종28)~1778(정조2)자는,광국/지중추부사 명원의 아들,1723년(경종3)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되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다. 시와 글씨에도 능했다.
홍계희//1703(숙종29)~1771(영조47)자는,순보 호는,담와 시호는,문간/참판 우전의 아들,1737년(영조13)별시문과에 장원하였다. 정언, 수찬을 거쳐1742년 북도 감진어사로 나가 공을 세우고 이듬해 북도 별건어사가 되어 북로의 지형을 자세히 복명했다. 그 공으로 공조참의에 특진, 부제학 등을 지내고,1747년(영조23)대사성으로 재직중 서울의 유생들을 거재시키지 않았다 하여 파직되었다. 이듬해 병조판서로 균역법 실시에 노력을 했다. 그 후 이조판서, 한성부판윤을 역임,1557년 편집당상으로(열성지)를 증보하고, 왕명으로(해동악)을 지었으며,1762년(영조38)경기도관찰사로 김한구, 윤급 등과 공모, 나경언의 상변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영조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죽이게 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그 후 판중추부사가 되고 봉조하에 이르렀다.1777년 아들과 손자의 대역 혐의로 관직 모두 추탈당했다.1804(순조4)신원되었다.
홍지해//1720(숙종46)1777(정조1)자는,백미/판서 계희의 아들,1752년(영조28)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 전라도 도사, 헌납, 승지 등을 지냈고,1764년 대사간이 되었다. 그 후 이조참의, 동지의금부사, 대사성을 역임한 뒤1774년 등준시에 병과로 급제, 이조참판을 거쳐 평안도관찰사,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1776년(영조52)벽파인 홍인한, 정후겸 등과 결탁하여 정조의 즉위를 방했다가 이듬해 주살되었다.
홍임제//1727(영조3)~1768(정조10)자는,경윤 호는,경직제/훈련원 첨정 주구의 아들, 당대의 유종 김원행을 찾아 많은 교화를 받았다. 실천을 위주로 하는 학문태도로 여러 후진들을 훈도했다.
홍광일//1738(영조14)~1844(순조22)자는,백승 호는,화서/명원의 아들,1756년(영조32)생원이 되고,1776년(영조52)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형조와 이조의 좌랑을 거쳐 지평, 장령, 정언, 흡곡현령, 강원도 도사, 경성부 찬과 등을 지냈다.1618년(순조16)돈령부 도정이 되고,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좌윤을 거쳐 동지돈령부사에 이르렀다. 학문을 즐겨 제자백가에 정통했고, 견문이 넓어 학자 간에 존경은 받았으며 문장과 글씨에 능했다.
홍상간//1745(영조21)~1777(정조1)자는,경이/판서 지해의 아들,1766년(영조42)진사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부수찬, 교리 등을 지내고,1773년 사가독서하고 승지가 되었다.1777년(정조1) 홍인한이 정조를 시해하려다 주살된 사건에 관련되어 고문으로 죽었다.
홍의영//1750(영조26)~1815(순조15)자는,정칙 호는,간재/첨정 계우의 아들,1783년(정조7)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1808(수종8)경기도 암행어사가 되고, 뒤에 교리를 역임한 후 사퇴했다. 시, 글씨에 능하고 특히 행서와 초서를 잘 썼다.
홍이간//1752(영조29)~1827(순조27)자는,원례 호는,남헌/황주목사 선양의 아들,1777년(정조1)진사시에 합격했다.1789년(정조13)휘릉 참봉이 되었고, 이어 재용감 부봉사 등을 거쳐 통례원 인의,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그 후조지서별제, 형조좌랑, 이어 사직서, 종묘서의 영 등을 역임했다. 그 후 안성군수, 전주부 판관,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청렴 강직하여 상사 앞에서도 주장을 굽히지 않아 관운이 순탄치 않았다. 문장에 능했다.
홍주익//1756(영조32)~?자는,몽서 호는,수백제/대원의 아들,1778년(영조2)정시문과에 을로 급제하였다.1782년 정언으로 중종묘에 배향된 박원종 등 3훈신과 숙종묘에 배향된 남구만 등3신의 출향을 상소하여 정의현에 유배되었다가1792년 풀려나왔다.
홍원섭//자는,태화 호는,태호/치중의 현손, 영조 때 사마시에 합격한 후 음보로 참봉이 되고,1790년(정조14) 황주목사를 거쳐1799년 사복시정을 지냈다. 수원판관으로 부임하여1801년(순조1)찬집랑으로서(화성성역의궤)를 편찬한 공으로 가자가 되었다.
홍재철//자는,치경 시호는,청헌/1826년(순조26)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 좌찬성 역임하였다.
홍직필//1776(영조52)~1852(철종3)자는,백응 호는,매산 시호는,문정/동지돈령부사 이간의 아들, 박윤원의 문인, 사마시에 실패한 후 학업에 정진하여 대학자가 되었다.1814년(순조14)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세자익위사 세마가 된 후 장흥고 봉사를 지내고 사퇴,1838(헌종4)다시 천거되어 지평. 부사직을 거처1845년 제주를 지냈고,1851년(철종2)대사헌이 되고 그 뒤 지돈령부사,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유학자로 문장에도 뛰어났다.
홍학연//1777(정조1)~1852(철종3)자는,계습 호는,임간/승지 경안의 아들,1805년(순조5)성균관의 유생이 되고,1812년(순조12)증과문과에 병과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1822년(순조22) 강원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1835년(헌종1)대사성을 거쳐 이듬해 공조참의가 되고 이조 참판, 도승지를 역임,1845년 대사헌이 되었고,1850년(철종1)지경연사, 지춘추관사, 도총관. 대사헌을 역임, 이듬해 공조판서를 지냈다. 독서를 즐겼으며 서예, 산수, 문학, 정사, 법리 등에 능했다.
홍경래//1780(정조4)~1812(순조12)1798년(정22)사마시에 낙방하고 조정에서 평안도 출신의 배척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횡포가 만연한 정세를 한탄하고 과거를 단념한 후 선에 들어가 독서하며 jwdrnjswodxkf을 결심하였다.1800년(순조1) 박천의 청룡사에서 우군칙을 만나 반군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으며, 마적단 두목 정시수, 거부인 이희저를 포섭, 다복동을 근거지로 삼아 난을 일으켰다. 그는 각지의 무인, 술사, 도사를 규합하여 한 때 평안도 일대를 장악했으나 관군이 반격으로 정주에서 전사하였다. 홍경래의 난은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민중반향운동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홍종응//1783(정조7)~?자는,사협 시호는,문헌/승규의 아들.1827(순조27)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검열, 정자, 동래부사 등을 역임하였다.1842(헌종8)대사성, 이어 이조참의, 예방승지를 거쳐1849년(철종즉위)형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거쳐 예조, 병조, 공조판서를 역임,1857년(철종8)판의금부사, 좌참찬,1859년 한성부판윤,1863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남릉군에 봉해졌으며 당대 이름난 시인 이었다.
홍순목//1816(순조16)~1884(고종21)자는,희세 호는,분계 시호는,문익/승지 종원의 아들,1844(헌종10)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 수찬을 지내고1846년 초계문신에 뽑혔다.1849년 헌종이 죽자 빈전도감 도청이 되었고, 부사과를 거쳐 1858년 이조참의에 승진,1864년(철종14)대사헌이 되어 이해 고종이 즉위하자 홍선 대원군의 심복으로서 이듬해 황해도관찰사가 되고, 이조판서, 한성부판윤, 예조판서 등을 역임,1869년(고종6)우의정에 올랐다. 당시 수구당 강경파의 거두로서 대원군의 쇄국주의를 적극지지,1871년 중국주재 미국공사 로우와 로저스 제독이 미국 군함 크로라드호가 광선진에 들어와 통상교섭을 요청하자 강경히 척화를 주장, 포문을 열어 대항케 했다.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가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사임, 영돈령부사, 판충추부사 등 한직을 지내다가,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제 집권하자 영의정에 복직,, 관제개혁으로 김병국과 함께 총리군국사무가 되어 당오전의 주조를 실시케 하는 등 대원군의 정책시행을 적극 추진했으나, 대원군의 실각 후 1884년 사직, 중추부사가 되었다가 이해 그의 아들 영시기 개화당 중요간부로서 갑신정변 때 활약하다가 사흘 만에 실패하고 살해되자 관작이 삭탈되고 이어 자살했다.1894년 갑오경장으로 복관되었다.
홍순한//1842(헌종8)~?자는,덕오/기종의 아들, 석종에게 입양,1857년(철종8)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정언, 수찬을 거쳐1866(고종3)주청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장편기행가사(연행가)를 지었다. 대사헌, 대사간, 예조참의를 거쳐1884년(고종21)감리 인천항통상사무가 되고, 이듬해 인천 부사를 겸임했으며, 그 뒤 협판교섭통상사무를 지냈다.
홍만식//1842(헌종8)~1905(광무9)자는,백헌 호는,호운 시호는,충정/영의정 순목의 아들, 교관, 순경에게 입양,1866년(고종3)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 수찬, 집의 등을 거쳐 동부승지를 지내고, 여주목사가 되었다.1884년 이조참판에 올랐다가 생부 손목이 의복제도의 개정을 반대하다 삭직되자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이해 10월 동생 영식이 김옥균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아버지는 자살, 그 자신도 자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투옥 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1894년에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다음해 지방제도 개혁 때 춘천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했다. 이어 의정부찬정을 다시 사퇴,1905년(광무9)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음독 자결했다. 참정대신에 추증되고, 1962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 되었다.
홍재학//1848(헌종14)!1881(고종18)자는,문숙/창섭의 아들, 강원도 출신, 이항로의 문인,1880년(고종17)일본에서 돌아온 수신사 김홍집이 청나라 황준헌의 저서(조선책략)을 왕에게 올려 개혁정책이 적극성을 띄게 되자. 이에 격분하여 상경, 정부의 수구파에 가담하여 이듬해 관동 대표로서 척외를 상소했다.
홍영식//1855(철종6)~1884(고종21)자는,증옥 호는,금석 시호는,충민/영의정 순복의 아들, 서울출신,1873년(고종10)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자, 대교를 지내고 참판이 되었다. 조준영, 어윤중과 같이 일본을 시찰했고,1883년(고종21)에 특사로 부임했다.1981년(고옺21)우정국을 창설하고 총판이 되어 그 개국 연에 6조 판서와 대관을 초청하여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피살되었다.1894년 갑오경장 때 총리대신 김홍집 등의 상주로 죄명을 씻고 관에 복귀되어 1910년(융회4)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홍순형//1857(철종7)~?자는,여문/판서 석종의 아들,1874년(고종11)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사관을 지내고, 장령, 집의를 거쳐1884년 갑신정변으로 개화당 정부가 수립되자 공조판서가 되었으며,1893년 개성부유수, 황해도관찰사, 이듬해 경기도관찰사를 역임, 이해 갑오경장으로 곤제개혁이 실시되자 궁재부유수, 지중추부사 등을 거쳐1904년(광무8)의정부찬정. 궁내부 특진관, 규장각 대제학을 역임하고,1910년(융희4)한일합방 때 일본정부에 의해 남작이 되었으나 거절하였다.
홍계훈//?~1895(고종32)초명은,재희 자는,성남 호는,규산 시호는,충의/1894년9고종31)장위영 영관으로 재직중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로서 출전하여 전주, 태인, 정읍, 고창, 영광 등지에서 싸우고 전주를 탈환, 동학군의 예봉을 꺾었다. 그 공으로 훈련대장에 승진했고. 유길준 등과 박영효 타도에 앞장에 섰으나, 이듬해 을미사변 때 광화문을 수비하다 살해됐다. 군부대신에 추증, 장충단에 제향되었다.
홍원식//?~1919/경기도 화성 출신, 구한국 군인으로1807년(융희10 군대 해산 때에 서소문 병영에서 해산을 반대하며 일본군과 항정하다가 부상을 당한 후에 각처로 전전하며 의병활동을 계속했다. 뒤에 화성으로 돌아가 김성렬, 안종후 등과 구국동지회를 조직,이를 수색하러 온 일본 헌병 2명을 타사하고 도피했다.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김성렬, 안종후 등과 만세시위를 지도하고 발안 주재소를 습격하다가 체포되어 수원서에서 고문을 당하고 일본군의 제암리 교회 대학살 때 살해되었다.
홍식//?~1920/호는,문산/평북 구성 출신.1905년(광무90조병준의 휘하에서 의병이 되어 일본군을 맞아 싸웠고,3,1운동 후 만주 관전현으로 망명, 민국독립단 조직에 참여하여 소모부장이 되었다.1920년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체인 광복군 사령부가 결성되자 제3영장으로서 백의범, 김시형, 고득수 등과 함께 입국, 항일투쟁을 하다가 김종희의 밀고로 용천군 미륵동 김택영의 집에서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고 교전 중 전사했다.
홍기조//1865(고종2)~1938/호는,유암/홍경래의 후손,평남 용강 출신, 어려서부터 한악을 배우고,1886년(고종23)동학에 들어가 황해도와 평안도의 수접주, 대접주, 창의대령 등을 역임하고, 동학혁명에 가담했다. 3,1운동 때는 민족 대표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애 서명하고,2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고향에 들어가 청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천도교의 도사, 장로를 지냈다.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홍정후//이상재,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협회에서 활약,1898(광무2)만민공동회가 열리자 청년 연사로 이승만과 함께 정부의 시책을 공격하는 연설을 하여 여론을 일으켰다. 그 후 황국협회와 충돌, 한때 투옥되었으나 출옥하여 중추원 관제개혁 때 독립협회 대표의 한 사람으로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홍범도//1868(고종5)~19431907(융희1)전국적인 의병 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이해 9월 일제가 총포급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자 이해 11월 차도선, 태양옥과 함께 산포대를 조직, 의병을 일으켰다. 북청의 후치령을 중심으로 갑산, 삼수, 혜산, 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 수배대를 격파했으며,1910년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간도로 건너가서 독립군 양성에 전력,1919년 간도국민회의 조직에 가담하여 그 소속군대인 대한독립군의 총사령이 되었다 약4백명이 독립군을 모아 2백명으로 1개 부대를 편성하여 국내에 잠입,감산, 자성, 혜산 등의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리고, 특히 만포진 싸움에서는 70여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듬해6월에 반격으로 나온 일본군의 제19사단의 병려과 남양수비대로 부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해오자 7백여명의 독립군을 지휘,3일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120여명을 사살, 종전까지의 독립군 전과 중 최대의 승전을 했다. 이해 9월 청산리 전투 후 일본의 대대적인 공격을 피해 독립운동 단체가 흑룡강변 국경지대에 집결하자 단일단체에의 통합운동을 벌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서열을 총제에 추대하고 김죄진과 함께 부총제가 되었다. 이듬해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하여 스랍스께 부근에 주둔, 레닌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의 실력 양성에 진력하던 중 흑하사변으로 크게 타격을 받고 헤체 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자 복장이 수여되었다.
홍병기//1868(고종5)~1949호는,인암/경기도 여주 출신, 동학교도로서 동학혁명에 가담했고, 천도교 장로로 있다가 3,1운동 때 민족대표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문에 서명하고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 받았다. 출옥 후 계속하여 항일 투쟁을 하다가 만주에 망명,1926년 길림성에서 고려혁명당 창당에 참여, 고문으로 추대되었다가 다시 피체, 신의주 감옥에서 3년간 복역했다.
홍성익//1883(고종20)~1920/평북 정주 출신, 숭실전문을 졸업하고,1907(융희1)시독교 장로로서 신민회에 가입했다가 1911년105인 사전에 연루,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18개월간 수감되었다. 3,1운동 때 신성학교 교원으로 만세 시위를 사전 협의, 선천 만세 시위를 주도했으며, 그 후만주로 망명,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교통국 안동지국을 설치하여 사무국장으로 있다가1920년 일본 밀정 김극전의 밀고롤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살해 되었다.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홍승로//1895(고종32)~1965호는,만당/일본쥬우옹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상해로 망명, 임시정에 가담하여 주로 자금을 담당했다. 해방 후 귀국,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 감찰위원,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을 역임했다.
홍학순//1904(광무8)~1934/일명 학원, 평북 의주 출신 만주 관전현 안평동을 이주,1924년 통의부에 가입하고 입국, 평북 일대에 독립군 자금을 모급하고,1927년 식산은행 의주 지점을 습격하고 금융조합에 들어가 9백 8십원을 강탈, 만주로 갔다. 다시 국민부 동지들을 인솔, 삭주 광산에서 시가 2천3백원 상당의 금을 빼앗고 후에도 각지 경찰서를 습격, 군자금 4천원을 마련했다
이상 마무리 합니다..
[출처] 남양홍씨-당홍계(南陽洪氏-唐洪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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