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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시산책]화엄, 흑매
경기신문 기사 등록 일 : 2017.06.06.
화엄, 흑매
/한이나
화엄사 각황전 옆 흑매
검붉은 그리움이
뜨겁게 허공에 떠 있다
왈칵 속엣 것 누가 쏟아 놓았나, 핏자국
애절하여 차마 바라보지 못하겠다
처연함이 짙어져 지리산도 산그림자 깊어진다
피지도 못하고 진 꽃숭어리들
스물 둘 아버지 꽃
하르르 하르르
이별은 없다
- 시집 ‘유리자화상’
사군자의 하나, 세한삼우(歲寒三友)의 하나인 매화는 상춘의 상징이라 하겠다. 요즘엔 눈꽃 흐드러진 광양 매실군락지가 인기지만 아무래도 몇 백 년 수령을 자랑하는 古梅의 자태라야 매화 본연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고매로는 수령 600년이 넘는 선암사 청매도 일품이지만 화엄사의 흑매가 단연 압권이다. 오래 묵은 나무 둥치의 적당한 구불거림, 각황전 빛바랜 단청이나 기왓골과의 고졸한 어울림, 어찌 그리 검붉을까. 화자는 그 붉은 빛에서 핏자국을 본다. 누구나 아름답다고 칭송해 마지않을 그 꽃나무 앞에서 단숨에 져버린 낙화를 더 애잔해 한다. 미처 피지 못하고 진 목숨, 그는 수물 둘에 이승을 하직한 아버지이리라. 화자는 봄날의 눈부신 꽃에게서 아버지를 만나고 ‘이별은 없다’라고 단언한다. 분명 화엄이 아니고 무엇이랴.
/이정원 시인
[특집 ④ 숨겨진 비경] 화룡점정 봄의 정점을 찍는 흑매화와 올벚나무, 구례 화엄사의 봄
손수원 기자
여행스케치 기사 승인일 : 2010.03.13.
[여행스케치 = 구례] 무르익는 봄은 풀과 꽃의 색으로 표현된다. 지리산의 천년고찰 화엄사로 가면 동백보다 더 붉디붉은 단 한 그루의 흑매화와 세속의 번뇌를 벗은 듯 의연하게 서 있는 올벚나무를 만날 수 있다. 천년고찰에서 300살 먹은 두 나무가 들려주는 무르익은 봄 소식을 만나보자.
여인의 입술처럼 검붉은 흑매화
화엄사 창건에 대한 기록은 정확하지 않으나 544년(신라 진흥왕 5년)이나 670년(신라 문무왕 10년)부터 그 역사가 시작된다고 보니 지나온 세월만 천 년이 훌쩍 넘는다. 웅장한 건물의 빛바랜 단청, 사람들의 손을 탄 나무기둥의 옹이에서 천 년이란 세월의 진득함이 묻어난다.
화엄사는 국보 제67호인 각황전과 국보 제12호이자 우리나라 최대의 석등, 국보 제35호 사사자삼층석탑 등 내로라하는 문화재들이 있는 절이다. 웅장한 건물의 위세에 문화재 하나하나 범상치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화엄사의 봄엔 특별한 ‘문화재급’ 볼거리가 한 가지 더 생긴다. 각황전 앞의 홍매화. 이 홍매화 나무는 조선 숙종(1674~1720) 때 장육전이 있던 자리에 각황전을 중건한 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계파선사가 심었다고 전해진다. 나무의 나이만 300살이 넘으니 화엄사의 역사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지만 인간사에 비하면 신성함마저 느껴지는 오랜 세월이다.
이 홍매화가 특별한 것은 수령뿐만이 아니다. 오랜 불심이 꽃에 깃든 덕분일까, 다른 홍매화들에 비해 유난히 검붉은 꽃 때문에 ‘흑매화’로 불리는 유일한 나무이다. 덕분에 봄이 오면 이 흑매화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린다.
매화는 나무를 심은 이나 사연, 지명에 의해 그 이름이 제각각 달리 불리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백양사의 고불매와 선암사의 청매화(선암매), 산청 남사마을의 원정매와 단속사지의 정당매 등이 있다. 마치 사람에게 이름을 붙이듯 각각의 나무에게 이름을 붙이고 친근하게 불러주는 것이 우리 선조들의 매화 사랑이었던 것이다.
화엄사 흑매화도 마찬가지다. 장육전 앞마당에 있던 나무라 해서 장육화(丈六花)라 부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사람의 얼굴색을 보고 별명을 붙이듯 흑매화란 이름이 더 자주 불린다.
각황전 오른쪽으로 눈길을 주니 한 폭의 수묵화가 펼쳐진다. 아니, 단지 평면의 수묵화라 하기엔 그 생생함이 훨씬 더해 ‘수묵화보다 더 수묵화’같은 풍경이다. 진득하게 시간과 싸움을 하며 세월의 풍경을 그리는 것이 수묵화라 하지 않던가. 화엄사 흑매화 또한 수려한 수묵화에 붉은 낙인을 찍기 위해 인내의 시간을 보낼 줄 아는 나무다. 섬진강변엔 이미 청매며 백매, 산수유가 지천으로 피었건만 각황전 앞의 흑매는 섣불리 꽃을 틔우지 않는다. 이른 봄 소식을 전해 듣기 위해 흑매 앞에 선 사람들에게 한껏 팔을 펼쳐 ‘조금 더 기다리라’고 말한다.
화엄사 흑매가 꽃을 틔우는 시기는 금둔사로 가면 알 수 있다. 설익은 봄기운은 금둔사에 먼저 당도해 홍매화를 틔우고 3월 중순 다시 선암사로 옮겨간다. 선암사에서 홍매화가 한껏 봄기운을 담았다 뱉어내면 그제야 화엄사의 홍매화가 꽃을 틔우기 시작한다.
봄기운의 농익은 정도에 비례해 꽃의 붉음도 더욱 진해져 금둔사의 홍매화가 어린 아기의 볼처럼 연분홍의 순수함을 가졌다면, 선암사의 홍매화는 수줍어 발갛게 달아오른 소녀의 뺨처럼 짙은 분홍빛을 띤다. 화엄사의 흑매화는 소녀가 여인으로 되는 순간을 담아내듯 꽃망울마다 여인의 붉은 입술처럼 농염한 기운을 담고 무르익어가는 봄을 표현한다.
꼭꼭 숨은 봄을 틔워내는 지장암 올벚나무
화엄사에서 봄을 틔워내는 것은 흑매화뿐만이 아니다. 화엄사 찻집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지장암이란 작은 암자가 있는데 거기에서 조금 더 오르면 흑매화보다 더 오랜 세월 이곳을 지킨 벚나무 한 그루가 있다.
화엄사와 흑매화를 아는 이는 많아도 350여 년 동안 자리를 지킨 올벚나무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리고 이 올벚나무가 천연기념물 제38호라는 것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벚나무라는 사실을 아는 이도 많지 않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서운할 법도 하지만, 올벚나무는 의연하게 봄기운을 흰 꽃에 담아낼 채비만 하고 있다.
여기에 올벚나무가 심어진 사연이 재미있다. 이 나무는 조선시대 화엄사를 중창한 벽암스님이 심은 것이다. 병자호란(1636~1637년)이 끝난 후 조정에선 유사시에 대비하여 벚나무를 많이 심게 하였다. 벚나무 껍질은 창이나 칼의 자루를 만드는 귀중한 군수자원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전한 벽암대사도 이를 잘 알았기에 화엄사 주변에 올벚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때 심은 나무 중에 3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홀로 살아남은 게 바로 이 나무이다.
“한 100년 전까지는 이 나무 말고도 한 그루가 더 있었는데, 적묵당을 보수할 때 베어서 마루를 깔았지요.”
지나가던 스님은 마지막 남은 올벚나무의 외로움이 안타까운 듯 바라본다. 어쨌든 무기와 건축의 재료로 쓰려던 본디 목적에 맞게 쓰였으니 그 희생이 무의미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버티고 지내온 세월이 아깝고, 그 빈자리가 커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스님은 “식목일 즈음이면 우리 피안앵이 하얗게 될 것”이라며 그때도 꼭 오라고 한다. 이때는 흑매화가 지기 직전이자 올벚꽃은 피기 시작하는 시기여서 화엄사가 가장 화려해지는 때란다.
흔히 올벚나무를 피안앵(彼岸櫻)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세상의 번뇌를 벗어나 열반세계에 도달하는 나무’란 뜻이다. 그 오랜 세월 봄마다 세간의 이목을 모두 받는 흑매화를 언덕에서 바라보면서도 피안앵은 시기하지 않고 묵묵히 서 있었을 것이다. 100여 년 전 유일한 벗이 잘려나가는 광경을 보면서는 마치 자신의 몸이 잘리는 듯 괴로워했으리라. 인고의 세월을 지켜온 올벚나무에게서 해탈한 고승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탐하다 봄의 전령사 매화(1)
영남일보 발행일 : 2022-02-25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코로나19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겨울은 그 마지막 꼬리를 감추고 있다. 하루빨리 코로나19의 기세가 푹 꺾여 겨울과 동무해 썩 물러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봄이 되었지만 봄날 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완연한 봄날은 좀 더 기다려야 하지만, 이때쯤이면 오히려 더 설레는 마음으로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충만한 시간을 누린다. 매화 덕분이다. 필자뿐만 아닐 것이다. 2월로 접어들어 남녘에서부터 매화 개화 소식이 날아들기 시작하면, 매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설렐 수밖에 없다.
대구 곳곳에서도 10여 일 전부터 봉오리를 터뜨리기 시작한 매화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이런 매화나무는 따뜻한 기운에 힘을 받아 보다 일찍 몇 송이 봉오리를 터뜨렸다가 날씨가 추워지면 그 상태로 움츠린다. 따뜻한 날씨를 기다리다 때가 되면 다시 개화를 시작한다.
매화가 본격적으로 피기 전인 이 시기가 매화에 대한 마음이 특히 간절하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봉오리가 맺힌 매화 가지를 잘라와 화병에 꽂아두고 매일 집안에서 마주하며 즐긴다. 2월에는 해마다 이렇게 꺾어온 매화 가지와 함께한다. 매화 가지를 한 번 꺾어와 꽂아두면 1주일 정도 황홀한 향기와 예쁜 꽃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매화 향기는 맑고 그윽하다.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 집안에 들어설 때 특히 그 향기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에 홀로 매화와 함께하면 최고다. 이럴 때는 매화가 그 향기를 일정하게 뿜는 것이 아니라, 한 번씩 강하게 내뿜는 것임을 확실하게 느끼는 각별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가까운 고향 매화밭에서 두어 가지를 꺾어와 곁에 두고 이렇게 달콤한 시간을 누리다 보면 어느새 야외의 매화들이 본격적으로 피어나 매화 천지가 된다. 그러면 보고 싶은 매화를 찾아 나선다.
요즘은 어디나 주변에서 쉽게 매화를 즐길 수 있다. 대구에서는 중심가에 있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가면 청매, 홍매, 백매, 그리고 가지를 수양버들처럼 늘어뜨린 수양매 등 다양한 매화들이 그 자태를 다투며 피어난다. 이곳에도 따뜻한 날씨가 며칠 계속되던 열흘 전부터 청매와 홍매 몇 그루가 꽃잎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10여 년 전 친구들과 매화가 한창 피어나던 이곳에서 '매화음(梅花飮)'을 즐겼던 기억이 새롭다.
해마다 이른 봄이면 탐매객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대표적 '고매(古梅)'가 전국 곳곳에 있다. 매화 애호가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고매는 특히 산사에 많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홍매, 승주 선암사 고매들(선암매), 양산 통도사 홍매(자장매), 장성 백양사 홍매(고불매) 등이 대표적이다.
다른 많은 매화 애호가처럼 화엄사 각황전 앞 홍매를 그중에서 각별히 좋아한다. 진하면서도 맑은 붉은색 꽃을 피우는 이 홍매는 꽃도 홑꽃으로 아름답고 나무 모양도 준수하다. 그리고 주변의 오래된 한옥인 각황전이나 영산전 등과 어우러져 특별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찾아 호젓하게 즐기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다. 이 홍매는 현재의 각황전을 중건할 때(1702년) 심은 것으로, 수령은 300년이 훨씬 넘는다.
화엄사 부속 암자인 길상암 앞에는 더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다. 450년 정도 됐다는 이 백매는 울창한 숲속에 자라서인지, 소박하고 자연스러우며 꽃도 작고 드문드문 피운다. 그리고 위를 쳐다보지 않으면 매화나무인지도 모를 자태로 주변의 숲과 어우러져 각별한 분위기와 맛을 느낄 수 있다. 천연기념물 제485호로 지정됐으며, '화엄매'로 불린다.
[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탐하다 봄의 전령사 매화 (2)…300년 사찰 곁에서 정갈하고 기품있는 자태…맑고 붉은빛에 한참을 취하다
영남일보 발행일 : 2022-02-25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선암사에는 오래된 고매들이 특히 많다. 원통전 앞 백매(천연기념물 제488호)는 600년 정도 된 고매로, 지금도 온전한 형태의 나무 전체가 건강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보기 드물게 큰 이 매화나무는 꽃이 매우 성글게 피어 더욱 고귀하게 보인다. 그 옆 무우전 돌담을 따라 수백 년 된 홍매와 백매 20여 그루가 봄만 되면 진하고 맑은 향기를 뿜어낸다. 선암사의 한 스님은 선암사 매화나무들이 한창 꽃을 피우면 멀리 떨어진 선암사 입구에만 들어서도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고불매(古佛梅)'라 불리는 백양사 홍매는 수령이 350년 정도로 추정된다. 담홍색 꽃을 피운다. 1863년에 절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을 때, 100m쯤 떨어진 옛 백양사 터에 있던 홍매와 백매 한 그루씩 같이 옮겨 심었다. 백매는 죽어 버리고 지금의 홍매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1947년에 백양사 고불총림(古佛叢林)을 결성하면서 '고불매'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통도사의 '자장매(慈藏梅)'는 수령 350년이 넘은 홍매다. 1650년을 전후한 시기에 통도사 스님들이 사찰을 창건한 자장율사의 큰 뜻을 기리기 위해 심은 나무라고 전한다. 이 자장매는 다른 산사의 고매보다 일찍 꽃을 피우기 때문에 매화 애호가들의 발길을 다른 매화보다 먼저 끌어들이는 주인공이 되고 있다. 통도사에도 자장매뿐만 아니라 매화나무가 곳곳에 있다.
처음 피는 매화 찾아 나서는 '탐매'
선암사 입구부터 향기뿜는 600년 백매
백양사 '古佛梅'라 불리는 350년 홍매
화엄사 검은빛 돌 정도로 붉은 흑매
선비들의 최고급 취미 활동 탐매행
이른봄 홀로 꽃 피우며 그윽한 향기
가난한 김홍도 거금 들여 매화 구입
퇴계 이황, 107수 달하는 매화시 남겨
운명 전에 "매화분에 물 주라" 당부
◆화엄사 탐매의 즐거움
올해는 어느 고매를 찾아볼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가장 많이 찾았던 고매는 화엄사 홍매와 선암사 매화다. 몇 해 전 화엄사 홍매를 찾았던 때의 감흥을 떠올려본다.
화엄사 각황전 옆 홍매는 홍매화이지만 꽃의 빛깔이 검은빛이 돌 정도로 붉어 '흑매'라는 이름도 붙었다. 제때 맞춰 가서 그 자태와 향기를 온전히 만끽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매화였다.
매화와 산수유 꽃만 보이는 이른 봄날, 화엄사를 찾았다. 화엄사에는 매화나무가 곳곳에 있다. 각황전 홍매에게 가기 전, 그 아래 청풍당(淸風堂) 담장 앞 홍매가 먼저 반갑게 맞았다. 한창 꽃을 피우고 있는 홍매는 맑고 청초한 연분홍빛이었다. 담장 밖 화단에 자연스럽게 자란 고목 매화나무에 꽃을 피운 모습이라, 소박하면서도 친근한 맛과 멋이 좋았다.
각황전 홍매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발길을 돌려 각황전으로 향하는데, 맞은편에 백매화가 눈에 들어왔다. 만월당(滿月堂) 앞마당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매화에게 다가갔다. 나무 모양이 아름답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지만, 향기는 최고였다. 백매도 꽃이 한창이었다. 향기가 너무 좋아 한참 동안 향기를 즐기며, 한낮이었지만 보름달 뜬 밤 만월당 마루에 앉아 백매와 함께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각황전으로 다시 향했다. 보제루를 돌아 대웅전 앞마당에 올라서자, 멀리 각황전 홍매가 눈에 들어왔다. 300년이 넘은, 우리나라 최대·최고(最古) 사찰 목조 전각인 각황전 옆에 붉은 꽃을 피우고 있는 홍매의 모습을 멀리서 보니 연꽃봉오리가 연상되기도 했다. 각황전 앞 계단을 올라 홍매를 마주했다.
각황전과 영산전 사이에 서 있는 이 홍매는 매화나무로서는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자태의 고목이다. 특히 꽃의 빛깔이 압권이었다. 꽃이 핏빛의 붉은 색이지만, 탁하지 않고 맑은 빛이었다. 이처럼 맑게 붉은 색의 홍매는 본 적이 없다. 거기다가 꽃잎도 다섯 개의 홑꽃이었다. 작으면서도 정갈하고 기품 있는 매화였다. 요즘 주위에서 많이 보는, 꽃잎이 많고 빛깔도 탁한 홍매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단청 없는 목조건물인 각황전과도 너무나 잘 어울렸다. 나무 모양이나 생태도 다른 매화와 달랐다. 나뭇가지는 부드럽고 적당히 늘어져 매우 아름다웠다.
매화를 보고 또 봤다. 각황전을 배경으로 해서 보고 뒷산의 동백숲에 겹쳐 보기도 했다.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보기도 하며 마음껏 감상했다. 다행히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아 탐매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만개할 때는 더 좋을 것 같아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지만, 희열 넘치는 탐매의 시간을 가졌다.
◆옛사람들의 매화 사랑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매화를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은 옛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사람보다 더했던 모양이다. 특히 선비들 중에는 가장 일찍 피는 매화를 찾아 벅찬 감흥을 맛보려고 눈길을 헤치며 나서는 이들이 많았다. 이처럼 처음 피기 시작하는 매화를 찾아 나서는 것을 '탐매'라 했다. 매화가 본격적으로 피는 때 매화의 명소를 찾아 즐기는 것은 관매(觀梅)·상매(賞梅)라 했다. 탐매행은 선비들의 최고급 취미활동이었다.
매화는 이른 봄 모든 초목이 움츠리고 있을 때 홀로 아름다운 꽃을 피워 맑고 그윽한 향기를 퍼뜨린다. 이런 매화의 성품은 지조와 절개, 맑음 등 군자가 추구하는 덕목과 상통하는 것이어서 선비들은 누구나 매화를 특히 좋아하고 그 성품을 닮고자 했다.
매화를 지극히 사랑해 호까지 매월당(梅月堂)이라 지은 김시습은 이른 봄이면 언제나 매화를 찾아 산속을 헤맸다 한다. 그가 남긴, 탐매를 주제로 한 한시 중 한 수다.
'크고 작은 가지마다 휘도록 눈이 쌓였건만(大枝小枝雪千堆)/ 따뜻함을 알아차려 차례대로 피어나네(溫暖應知次第開)/ 옥골의 곧은 혼은 비록 말이 없어도(玉骨貞魂雖不語)/ 남쪽 가지 봄뜻 따라 먼저 꽃망울을 틔우네(南條春意取先胚).'
◆김홍도와 이황의 일화
'단원 김홍도는 외모가 수려하고 풍채가 좋았으며, 또한 도량이 넓고 성격이 활달했다. 그는 술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성격이 부드러운 가운데 소탈하여 사람들은 그를 신선 같은 인물이라 불렀다. 김홍도는 살림이 늘 가난해서 아침저녁으로 끼니 걱정을 하는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좋은 매화 한 그루를 보고, 그것을 사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돈이 없어 살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그의 그림을 원하는 사람이 찾아와 그림값으로 3천 냥을 주고 갔다. 단원은 그중 2천 냥으로 매화를 사고 8백 냥으로 술 여러 말을 사다가 친구들을 불러 매화를 감상하며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 그 술자리를 '매화음(梅花飮)'이라 했다. 그리고 남은 돈 200냥으로 쌀과 나무를 집에 들였으나 하루 지낼 것밖에 안 되었다.'
문인화가인 우봉(又峯) 조희룡(1797~1859)이 남긴 '호산외사(壺山外史)' 등에 나오는 내용이다. 단원의 매화 사랑을 알 만한 이야기다.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홍매도' 등 매화 그림을 즐겨 그린 조희룡도 지독한 매화 애호가였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매화에 대한 편벽(偏僻)이 있다. 스스로 큰 매화 그림 병풍(梅花大屛)을 그려 침실에 두르고,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져 있는 벼루(梅花詩境硯)를 쓰고, 먹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烟)을 쓴다. 매화를 읊은 시 100수를 짓고 내가 거처하는 곳에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는 편액을 단 것은 매화를 사랑하는 내 뜻에 마땅한 일이지 갑자기 이룬 것이 아니다. 시를 읊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편차(梅花片茶)를 달여 마셨다.'
퇴계 이황의 매화 사랑 또한 유명하다. 107수에 달하는 매화시를 지은 이황은 운명하기 몇 시간 전 시중을 드는 사람에게 "매화분에 물을 주도록 해라"고 했다. 음력 12월8일 오후 6시경에 별세했는데, 당시 그의 방 윗목에는 그가 애완하던 매화분이 놓여 있었고, 매화분에는 몇 개의 꽃망울이 금방 향기를 터뜨릴 듯이 부풀어 있었다.
'내 평생 즐겨 하는 것이 많으나 매화를 지독하게 좋아한다(我生多癖酷好梅)'고 한 이황은 설사를 만나 방에 냄새가 나게 되자 "매형(梅兄)에게 미안하다"면서 매화 화분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한 뒤, 환기를 시키고 화분을 다시 정갈하게 씻도록 하기도 했다.
이황은 매화가 한창이면 밖에 나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매화를 완상했다. 그의 시 '도산월야영매(陶山月夜詠梅)'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읊고 있다.
'나막신 신고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사람을 쫓아오네/ 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 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그림자 몸에 닿네.'
매화는 단순히 봄소식을 일찍 전해주는 향기로운 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에게는 득도의 기연(奇緣)을 선사하는 꽃이기도 했다. 이것을 알게 하는 대표적인 시로 무명의 비구니가 지었다는 오도송 '심춘(尋春)'이라는 시가 있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다녔지만 봄은 보지 못하고/ 짚신 발로 온 산을 헤매며 구름만 밟고 다녔네/ 돌아와 우연히 매화나무 밑을 지나는데/ 봄은 가지 끝에 이미 한창이더라.'
매화를 소재로 한 선시 하나를 더 소개한다. 고려 후기 스님인 진각 혜심이 편찬한 '선문염송(禪門拈頌)'에 나오는 시다.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 주련 글귀이기도 하다.
'서리 바람 땅을 휩싸며 마른 풀뿌리 쓸지만/ 봄이 벌써 온 걸 그 누가 알리요/ 고갯마루 매화만이 그 소식 알리려고/ 가지 하나 홀로 눈 속에서 피었네.'
화엄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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