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된 고통
일본의 진주만(珍珠灣, Pearl Harbor) 급습(急襲)으로 미국은 그동안 유지(有支)하던 중립(中立)을 포기(抛棄)하고 제2차 대전에 뛰어들었습니다.
태평양(太平洋) 일대에서는 해군이 주축이 되어 즉시 교전 상태(交戰狀態)에 돌입(突入)했지만,
또 다른 상대인 독일과 싸우려면 대서양(大西洋)을 건너가야 했으므로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육군이 주도(主導)한 유럽 전역(全域)에서의 싸움은 1년 가까이 지난 1942년 11월이 돼서야 실시(實施)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진주만 급습으로 미국은 참전을 선언했습니다
경험(經驗)이 일천(日淺) 한 미국은 서(西)유럽을 침공(侵攻)하자고 제안(提案)했지만, 그동안 독일과 혈투(血鬪)를 벌여온 영국은 어림없다며 외곽(外廓)에서부터 주축국(主軸國)을 격파(擊破)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따라 비시 프랑스(Vichy France)가 점령(占領) 중인 북(北)아프리카에 상륙(上陸)해서 아프리카 집단군(集團軍)의 배후(背後)를 강타(强打)하기로 결정(決定)했습니다.
1942년 11월 8일,
작전이 개시(開始)되며 미군은 제2차 대전 유럽 전역 최초의 전투에 돌입(突入)했습니다.
↑연합군 합류 직후인 1942년 1월 26일 자신만만하게 영국에 도착한 미군
하지만 구형 복장(舊型服裝)에서 보듯이 전투 경험이 없었습니다
대규모 적진 상륙(大規模敵陣上陸)은 처음이었지만 미군은 한때 연합군의 일원이었던 프랑스군이 저항(抵抗)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樂觀)했습니다.
아직 전쟁의 무서움을 모르고 있었기에 전투에 투입(投入)될 날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며 자신감(自信感)에 충만(充滿)했던 병사(兵士)들은 마치 영화(映畫) 속의 주인공(主人公)이 된 것처럼 들떠 있었습니다.
기대대로 미군을 반긴 곳도 있었지만 모든 상륙 지점(地點)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시 프랑스군의 저항이 없었던 알제(Algiers)에 상륙한 미군
카사블랑카(Casablanca)와 오랑(Oran)에 상륙한 부대는 프랑스군이 무자비(無慈悲)하게 갈겨대는 포탄(砲彈)의 영접(迎接)을 받았습니다.
숨을 곳 없는 텅 빈 해안가(海岸街)에 노출(露出)된 병사들은 '우리는 미군이다. 쏘지 마라'라고 외치다가 비명횡사(非命橫死)했습니다.
이후 항공대(航空隊)의 지원(支援)으로 프랑스군을 제압(制壓)했지만 이처럼 최초(最初)의 교전(交戰)은 비극(悲劇)에 가까웠습니다.
자만(自滿)의 대가(代價)였는데 이런 모습은 8년 후에 재현(再現)되었습니다
↑미군과 포격전을 펼쳐 상갑판이 파괴된 전함 장 바르(Jean Bart)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勃發)했을 때 대한민국을 도우려 제일 먼저 파견된 UN군 부대는 일본에 주둔한 미 제24사단 예하(豫下) 1개 대대로 편성(編成)된 전투단(戰鬪段)이었습니다.
7월 5일,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中領)이 이끄는 부대는 오산(烏山) 인근의 죽미령에서 처음 북괴군(北傀軍)과 마주했습니다.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자부심이 가득 찬 미군은 북괴군이 자신들을 보면 도망갈 것이라고 낙관(樂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