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의 또 다른 원인 제공자는 당시의 '언론'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 있는 모녀상. 군경이 초토화작전을 벌이던 1949년 1월 6일
젖먹이 딸을 안고 피신하다가 토벌대의 총에 맞아 눈밭에서 희생된 봉개동 주민의 모티브 조각.
'제주4.3'은 거칠게 요약하면, 불과 30정의 구식 총을 가진 300명의 무장대를 소탕하려다가 3만 명의
제주도민을 죽이는 '대학살'로 비화한 사건이다. 그 배경에는 해방 직후의 극심한 좌우대립, 제주도를
반공정책의 상징으로 삼아 본때를 보이려던 미군정의 강박감, 남한 단독 선거를 통해 정국 주도권을
쥐려던 이승만의 야욕과 실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거기에 일본 군경 출신 지휘부와 서북청년단이
주도하는 토벌대의 잔인무도한 초토화 작전과 무장대의 보복 살해가 복합 요인으로 상승작용을 했다.
그러나 2년 반 동안 4.3항쟁에 관한 책과 보고서 40여 권을 읽고, 당시 기사와 자료를 찾아보고, 진상
규명을 위해 애쓴 취재기자와 유족 등을 인터뷰하면서 내린 결론은 '언론이 또 다른 핵심 원인 제공자
였다'는 사실이다. 해방정국에서 주류 중앙언론은 진실보도는커녕 이념과 정파를 대변해 가짜뉴스를
조작해낸 혐의가 짙다. 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는 진실이었던 셈이다.
여운형 같은 중도·좌파는 물론 김구·김규식 같은 우익 세력마저 단독선거에 반대했기에 이승만과
보수파인 한민당 세력으로 구성된 국회에서 제주도민을 대변해줄 정치세력은 없었다.
언론마저 침묵하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대부분 도민은 목숨을 건지려고 한라산으로 대피했다가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 몰리면서 대학살의 과녁이 되고 말았다. 제주도 산하에는 피가 뿌려지지
않은 곳이 없고 거의 전역이 공동묘지가 됐다. 대개는 이유를 묻지 않고 죽였고 이유 없이 죽었다.
이유가 있다면 그저 증오심과 보복심 그리고 무지의 소산이었다. 사적 보복을 막아야 할 공권력이
오히려 보복을 부추기고 집행했다.
3건의 허위보도가 부추긴 초토화 작전
해변에서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마을을 거의 다 불태우고 수만 명 주민을 학살한 초토화작전도
언론 보도가 분위기를 조성했다. 강경 토벌작전의 지렛대가 된 것들이 ▲3.1시위와 4.3항쟁의
북한 또는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 ▲북한 또는 소련 선박 출현설 ▲오라리 방화 폭도 소행설인데
모두 허위보도였다.
1947년 3.1절 시위는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다음 해 4.3항쟁의 한 원인이 된 사건인데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이 군정청 출입기자단 회견에서 "북조선의 세력과 통모했다"고 단정하자 언론은
확인도 안 하고 대서특필했다. 수구세력은 3.1시위와 4.3항쟁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이들마저
용공혐의를 씌웠기에 4.3의 피해자들은 기나긴 침묵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북한 또는 남로당 지령설은 학계에서 근거 없는 낭설로 정리됐다.
출처: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