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밥집에서 - 박승우
허름한 국밥집에서 국밥 한 그릇 먹다보면 그래도 사는 게 뜨끈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장난 시계와 삐걱거리는 의자와 비스듬히 걸린 액자가 다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뜨거운 국밥 한 숟갈 목젖을 데워오면 시린 사랑의 기억마저 따뜻하다는 생각이 든다 외로움도 쓸쓸함도 다 엄살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자리 모여 앉아 제각각의 모습으로 국밥을 먹는 사람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낯이 익었다는 생각이 든다 소주 한 잔 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국밥집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으며 구겨진 날들이 따뜻하게 펴지고 있다
♧ 거룩한 식사 -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 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 스마트 폰 - 임보
방안에 가만히 앉아서도 온 세상과 내통한다
작은 창만 하나 열면 사통팔달 못 갈 곳이 없다
신발 매고 누굴 찾아갈 것도 편질 부쳐 누굴 부를 일도 없다
자동차도 기차도 소용없고 배도 비행기도 필요 없다
남미에 살든 북미에 살든 아프리카든 유럽이든 상관없다
온 지구촌이 한마당 온 인류가 다 친구다
온 세상이 손바닥 안 참 기똥찬 세상이다
♧ 있게 하는 것들을 보기 위하여 - 정순영
보이는 것을 있게 하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기 위하여 눈을 감는다.
꽃의 아픔을 보기 위하여 사랑의 애틋함을 보기 위하여
손바닥으로 귀를 막으면 맑은 하늘의 소리가 들리듯
눈을 감으니 맑은 거울 속에 선명하게 보이는 있게 하는 것과의 만남
꽃의 속마음이 보이고 치맛자락 휘감는 바람의 알몸이 보인다.
♧ 그날의 꽃들에게 - 김성호
호우에 제 몸 가누기조차 힘들어 하면서도 피어 보지도 못하고 떨군 그날의 꽃들에게 미안한 마음 전하느라 비를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 오월에 쏟아진 장대비에 네 모습 다 보여 주진 못해도 너는 한 떨기 꽃으로 피어 사랑을 받고 있지 않느냐 죽어서 책처럼 기억되고 쏟아지는 별빛의 언어 같은 사랑을 받은들 지금의 너만 하겠느냐 미안한 마음 전하려 고개도 못 들고 울고 있는 너에게 내 마음도 보탠다.
♧ 냉기 속의 꽃 - 방화선
갓 겨울을 비질한 절 마당 동안거를 끝낸 매화가 붉은 문을 열었다
우르르 몰려 든 초점들이 쉴 새 없이 찰칵거리는 통도사 홍매는 스님의 붉은 속곳
렌즈의 경계에서 밀려난 청매는 입을 것도 벗을 것도 없는 가난이 고고하다
눈 속의 매화는 여름 꽃 천 송이와도 안 바꾼다는데 속으로만 우물거리는 내 꽃은 계절 뒤에 숨은 술래
이순의 자락恣樂에도 꽃이 피려나 등이 가려워진다
♧ 사랑에 대한 슬픈 오마주 - 장수철
사랑은 오만하고 사랑은 성마르며 홀로 걸어가는 긴 긴 터널이며 터널 속 지나쳐가는 눈 먼 불빛이며
사랑은 불귀의 슬픔이며 투기와 질투로 들끓는 밤이며
사랑은 그리하여 황폐한 사막이며 무너지는 한 목숨이며 사랑은 무례하여 아무 가슴이나 허무는 발길질이며 폐허 위에 쌓아올린 도도한 성채이며
사랑은 스스로를 삼키는 불길이어서 불신과 함께 애태우다 모든 것을 태우며 모든 것을 사르며 모든 것을 소멸하느니라
--- *신약성서 고린도전서 13장 중 일부를 변용함.
♧ 대표작 - 홍해리 -치매행致梅行 ․ 297 나의 생은 미완성 작품일 뿐
땅 위를 내달리고 푸른 하늘을 날고 바닷속을 헤엄치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지근거리를 방황하다 빈 잔에 따르는 몇 장의 추억
생전에 쓰지 못할 나의 대표작은 꿈이요, 무지개! |
출처: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김창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