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73)*편
*역적(逆賊)의 아들, 왕(王)이 되다*
♧조선 여성들의 커리우먼, 궁녀해방♧
궁녀(宮女)는 전제군주제 국가에서 궁궐에서 일하는 일종의 공노비이다.
백제가 망할 때 삼천궁녀 스토리가 전승되는 것을 보면 궁녀(宮女)는 삼국시대부터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궁녀제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고려시대 부터였다
궁녀(宮女)는 주로 왕실의 의식주에 관한 일을 담당했는데, 왕의 수라와 잔치준비를 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
후궁과 궁녀를 포함하여 궁궐의 여인들은 모두 내명부에 속해 있었다.
정1품 희빈, 종1품 귀인, 정2품 숙의, 정3품 소용, 종3품 숙용, 정4품 소원, 종4품 숙원까지는 후궁(後宮)의 품계이고,
궁녀는 그 업무에 따라 정5품부터 종9품까지 10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정5품 궁녀는 참판 아래 중견 실무자급 책임자에 해당되었다.
궁녀(宮女)는 종신제 이며 일정한 급료를 받았다.
보통 궁녀들은 매월 쌀 3말 그리고 매년 명주,무명각 한필과 솜 10근, 여름철 에는 베,모시 등을 지급받았다.
궁녀(宮女)는 대개 5~15세 사이에 일정한 심사를 거쳐 궁궐로 들어간다
(앵무새 피를 이용한 처녀 감별법)
조선초에는 관청의 여종과 기첩 소생에게서 선발하던 궁녀(宮女)를 효종 때부터는 양가의 딸을 뽑아 궁녀로 삼았다.
궁녀는 상궁, 나인, 무수리, 생각시로 분류되며 성인이 되면 정식 나인이 되고, 나인이 된 지 15년이면 상궁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상궁(尙宮)은 정 7품부터 정5품까지 품계가 있었다
궁녀(宮女)는 궁중의 규율과 법도에 얽매어 외부와 차단된 채 외롭고 쓸쓸한 생을 보내야 했으며,
이러다 보니 동성연애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동성애자가 안되려면 승은을 입어야만 하는겨?ㅠㅠ)
그러나 그녀들은 여성의 활동이 제약된 시대에 왕과 왕비를 보필하며 궁중음식 과 복식, 그리고 궁중문학 등 최상층의 문화를 보존해 온 전문 직업인, 커리우먼 들이었다.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에 대조전(大造殿)은 창덕궁에서 가장 내밀한 왕비의 생활공간이었다.
중앙의 큰 방은 왕과 왕비의 침전이고 그 둘레의 여섯 개의 작은 방에서 궁녀들이 각각 한 명씩 들어가 숙직을 섰다.
그래서 이 방에는 이부자리를 두지 않았다.
왕과 왕비가 합방을 할 때는 나이든 상궁(尙宮)들이 숙직을 섰으며, 젊은 궁녀들의 접근은 금지 되었다.
이 숙직을 맡은 곳을 지밀(至密)'이라 했는데, 말 그대로 가장 지엄하고 중요하여 말 한마디 새어나가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이 침전과 수라간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의 옷과 이부자리 등을 만드는 침방,
의복과 장식물, 이불 등에 수를 놓는 수방,
음료와 과자를 만드는 생과방,
세숫물과 목욕물을 준비하고 내전을 청소하는 세수간,
빨래와 그 뒷손질을 담당하는 세답방 등이 있었다
(아이고~세답방에 있을지라도 이쁘당)
조선조 궁궐의 궁녀(宮女)는 대개 500~600명 정도가 있었는데, 정조가 예산문제를 들어 대전의 궁녀를 몽땅 궁 밖으로 내보내 버렸다.
그러나 대비전과 중전의 궁녀는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조선후기 정조시대에 들어서서 궁녀가 겨우 500~600명 정도였는데,
어느 인간이 백제가 망할 때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떨어져 죽었다고 뻥을 쳤냐?
♡ 노비추쇄도감 을 없애다 ♡
1778년 정조(正祖)는 도망친 노비를 잡아들이는 노비추쇄 도감 을 폐지했다.
조일전쟁을 거치면서 노비문서가 몽땅 타버리자 관노비, 사노비 할것 없이 노비들은 모두 도망치고 말았다.
1624년 인조 2년의 노비 실태조사에 따르면 관노비는 거의 남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18세기 중반 효종 때에 이르면 공노비 20만 명 중에서 신공(身貢)을 거둘 수 있는 노비는 겨우 2만 7,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남아있는 노비가 거의 없자 1655년 노비추쇄 도감 을 설치하여 도망친 노비를 잡도록 했으며, 사가에서도 노비들을 동원하여 도망친 노비를 잡으러 다녔다.
노비추쇄 소동으로 전국이 시끄러웠으나, 애초에 10만 명은 잡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겨우 1만 8,000명을 잡는데 그쳤다
거기다 쫓기는 노비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도망친 노비들은 포졸이나 상전이 나타나 잡히게 되면 그들을 집단으로 구타해 쫓아 버리거나, 심지어 죽이는 사태도 일어났다.
또한 노비들이 초적(草賊)에 가담하거나 반란세력에 가담해 반란군이 되는 경우도 있고 포졸들이 노비를 쫓느라고 원래의 직무인 치안을 소홀히 해서 도적이 날치는 등 부작용이 심각해지자 시대의 변화를 읽은 정조(正祖)는 아예 노비추쇄도감(奴婢推刷都監)을 폐지해 버렸다.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듣다,상언과 격쟁*
상언(上言)은 '백성이 왕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으로 왕이 행차할 때 그 앞에 나아가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며,
격쟁(擊錚)은 원통한 일을 당한 백성이 왕이 있는 곳 근처에서 징이나 꽹과리 등을 울려 왕의 주의를 끈 다음,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다
정조(正祖)는 말과 글을 통해 백성들과의 소통을 중시했다.
그래서 신하들과 자주 대화를 하며, 다양한 주제로 토론을 했고 지방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자 했다.
물론 정조 이전에도 왕이 백성과 소통하는 제도는 있었다.
이미 태종 때부터 신문고 제도가 있어서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생기면 북을 울려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신문고 (申聞鼓)는 궁궐안에 있었다.
이는 왕이 직접 백성들의 억울함을 듣겠다는 것이 아닌, 그저 백성들과의 소통 의지를 나타내주는 상징적인 물건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유명무실 해진 신문고(申聞鼓)를 대신해 16세기 중엽부터 격쟁(擊錚)이라는 제도가 성행했다.
글을 아는 선비나 신하들이야 상소라는 문서를 통해 왕에게 직접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었지만, 당시 백성들은 글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격쟁(擊錚)은 백성들이 자신의 억울한 일을 임금에게 직접 하소연 할 수 있는 효과 만점의 제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제도가 있어도 임금이 궁궐 밖으로 나오질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정조 는 다른 임금과 달랐다.
사실 숙종 때부터 왕이 궁궐 밖으로 나와 행차하면서 백성들과 만나는 일이 많아졌는데,
특히 영조와 정조는 임금의 어가행렬을 구경하는 백성들을 막지 않았다.
국왕의 모습을 백성들이 직접 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 백성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자 했던 것이다.
왕의 행차는 선대왕의 능을 방문하기 위한 것이었고, 정조 (正祖)는 1777년 2월부터 1800년 3월까지 66번의 행차를 했으니 연평균 3회 정도이다.
할아버지 영조 조차 연 1회, 많아야 2회 정도였는 다는 것을 보아 정조(正祖)가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해 얼마나 힘쓴 왕인지 알 수 있다
정조(正祖)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이 어린아이라고 해도 막지 않았다.
실제로 1779년 8월 10일, 효종의 능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살곶이(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곳)에서 격쟁(擊錚)하는 어린아이와 마주쳤다.
저희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돌아올 때가 넘었는데 아직도 오지 않고 계십니다.
빨리 돌아오게 해주세요.
이 이야기를 들은 정조(正祖)는 신하들에게 어떤 일인지 알아보고 속히 처리하도록 명했다.
10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왕 앞에 긴장하는 기색없이 또박또박 이야기하는 모습이 감동을 주는구나.
낮고 미천한 이들 가운데 이렇게 똑똑한 아이가 있을 줄 몰랐으니,
매우 가상하다.
네 사정을 들으니 불쌍하고 안타깝구나.
이는 조정에서 마땅히 처분하겠다.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은 정조(正祖)는 3일 이내에 신속하게 처리하도록 했다.
신속한 처리가 곧 신뢰라는 걸 알고 있었던 정조(正祖)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