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십리(踏十里)
민영
하나
땅거미 지면
거나해서 돌아온다
양 어깨 축 늘어진
빨래가 되어
새벽에 지고 나선
청석(靑石)의 소금 짐은
발 끝에 채이는
돌멩이만도 못하구나
활영소 고개 너머
십 리(十里)의 불빛
중랑천 둑방에는
낄룩새 운다.
둘
고개 하나를 넘으면
아주까리 마을
오리 치는 초막(草幕)에는
사당이 산다.
머리가 반백인
늙은 사당
전축 소리만 들려 와도
어깨춤 춘다.
김세나 낙양성(洛陽城) 십리허(十里許)
에도 덩실거리고
심청가 자진모리에도
고개 떨군다.
셋
어디로 간들
숨통이 트이랴
여뀌풀 흐드러진 하빈(河濱)
기(氣)를 돌린다.
저자의 왁자지껄
들 앞에서 멈추고
거무튀튀한 쓰거운 물이
창자를 훑는다.
내 생애이 만 리의 구름
짓씹는 어금니의 허전한 새벽
예서 살으리
발굽 닳을 때까지!
(『창작과비평』, 1977. 봄)
[어휘풀이]
-사당 : 떼를 지어 떠돌아다니면서 노래와 춤을 파는 여자
-김세나 : 가수 김세레나
-하빈 : 물가
[작품해설]
이 시는 도시화로 오염된 중랑천 근처에 살고 있는 보따리 소금 장수와 오리를 사육하는 늙은 사당의 고단한 삶을 통해 생활고에 시달리는 서민들의 현실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는 소금 행상으로서 고단하게 살고 있는 화자의 현실을 제시한다. 소금을 지고 마을마다 돌아다니는 화자의 현실은 눈물나도록 비참하다. 새벽에 한 짐 가득 지고 집을 나섰다가 땅거미 질 무렵 빨래처럼 피곤한 몸으로 돌아오는 화자에게 소금은 돌멩이만도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제목 ‘답십리’는 공간적 배경임녀서도 화자가 소금을 팔기 위해 온종일 걷는[踏] 거리[十里]의 고달픈 일상을 의미하는 중의성을 갖는다.
「둘」은 화자가 장사를 하는 도중에 본 늙은 사당의 흥겨워하는 모습을 통해 새벽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장사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반어적으로 보여 준다. 그녀는 ‘낙양성 실리허’의 노래에도 흥겨워하고, ‘심청가’ 판소리 가락에도 저절로 흥이 넘쳐난다. 사실 흥겨워할 것도 없는 상황에서 흥겨워하는 사당이야말로 이 현실이 얼마나 재미없는 곳인지를 반어적으로 드러내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무기력한 좌절 의식에 빠져 있는 화자는 사는 재미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늙은 사당은 음악만 나오면 흥겨워한다. 그러나 ‘어깨춤을 추’고, ‘덩실거리고’, ‘고개 떨구’는 흥겨운 춤사위는 사당의 인생관과 대립되는 것이라기보다는 화자의 현실 인식을 반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화자의 사당 모두 고달픈 삶을 사는 사람들이기에 현실의 모순에 대응하는 태도도 근본족으로 동일하다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셋」은 썩어 가는 중랑천변에서 살고 있는 ‘야뀌풀’의 생명력을 통해 자신의 현재 처지를 긍정하는 것은 물론, 고통을 극복하고 열심히 살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두가 숨 막히는 상황, 저자 거리의 왁자지껄한 모습이나 ‘거무튀튀한 쓰거운 물’이 흐르는 중랑천은 화자를 비롯한 모든 서민들의 열악한 삶의 터전이다. 그 같은 절망적인 현실 인식 속에서 화자는 자신의 삶이 ‘만 리의 구름’처럼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지만, 물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여뀌풀’은 화자에게 어금니를 짓씹으며 살라는 듯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 준다. 마침내 시상은 반전되어 화자는 부정적 상황 속에서도 현실을 삶의 근거로 긍정하게 된다. 즉 중랑천 둑방을 떠나지 못하는 ‘낄룩새’처럼 화자에세도 이 곳은 결코 떠날 수 없은 운명 같은 곳이지만, 이러한 현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고단한 삶은 오히려 그에게 현실 극복의 의지의 디딤돌이 되는 것이다.
[작가소개]
민영(閔暎)
1934년 강원도 철원 출생
1959년 『현대문학』에 시 「죽어가는 이들에게」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83년 한국평론가협회 문학상 수상
1991년 제6회 만해문학상 수상
시집 : 『단장(斷章)』(1972), 『용인 지나는 길에』(1977), 『냉이를 캐며』(1983), 『엉컹귀꽃』(1987), 『바람 부는 날』(1991), 『유사(流沙)를 바라보며』(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