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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심
출 14:26-31
2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27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밀매 새벽이 되어 바다의 힘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슬러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28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따라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으니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를 육지로 행하였고 물이 좌우에 벽이 되었더라
30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에서 애굽 사람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았더라
31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출 14:26-31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뻗어라. 그러면 바닷물이 바로뿐만 아니라 그의 병거와 기병 부대 위로 다시 넘쳐 흐르게 될 것이다.' 27) 모세가 곧 그 손을 바다 위로 내뻗자 동이 틀 무렵 바닷물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애굽 사람들은 바닷물결이 뒤덮쳐 오는 것을 보고 오던 길로 다시 도망치려고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한가운데로 처넣으셨다. 28) 이렇게 바닷물이 제자리로 돌아와 애굽의 병거 부대와 기병 부대를 뒤덮어 버렸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뒤쫓아 바다로 뛰어들었던 바로의 군대는 하나 남지 않고 다 바닷물 속에 잠기고 말았다. 29)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다 한가운데를 마른 땅처럼 지나갔으며 그들이 지나갈 때 바닷물은 그들 좌우에 벽처럼 둘러서 있었다. 30) 그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애굽 사람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주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닷가에 즐비한 애굽 사람들의 시체를 보았다. 31)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대항하여 큰 손을 휘두르시는 모습을 보고서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굳게 믿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 바닷길을 육지처럼 건너 구원받게 하시고, 애굽 사람들에게는 그 바닷물을 통해 심판하심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다시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26-2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다 건너자 다시금 모세에게 “네 손을 다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들의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고 명하십니다(26). 홍해를 명해서 바닷물을 갈라지게 했던 모세에게 이번에는 ‘열려있는 홍해를 향해 다시 합쳐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순종은 추격해 오던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 빠져 전멸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번 더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모세의 손에 잡힌 지팡이는 바다를 갈라지게도 하였고 다시 바다를 합치게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권능은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와 홍해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는 구원을, 바로와 애굽의 군대는 심판받는 현장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수 11:20;삼상 15:2).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30-31)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를 마른 땅처럼 건너며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을 인정하고 신뢰합니다. 아울러 이러한 홍해의 심판은 애굽에 대한 최후의 심판이었고, 앞서 행하였던 열 가지 재앙에 이어서 열한 번째 재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모세를 사용하신 것은 모세가 이미 쓰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라는 모세의 확실한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3-14).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항상 기도에 힘쓰며(눅 18:1),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으로 확실한 믿음의 증거를 하나님 앞에 올려드려야 합니다(마 16:24; 막 8:34; 눅 9:23). 큰 능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적용: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통해서 구원과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당신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구원(복음)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심판(율법)을 위한 것입니까?
아인슈타인은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내 인생이 얼마나 많은 동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파트너는 삶의 성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러나 파트너로 인해 상처받고 고통당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인생 최고의 파트너는 예수이십니다. 그분과 함께 가는 인생길은 기쁨이 넘칩니다.
< 설 교 >
홍해를 건넌 사람들
출 14:26-31 / 박종순 목사
성경 안에는 문제에 얽히거나 거기 빠져 실패하거나 죽은 사람의 얘기도 있고 도저히 헤어나기 어려운 문제를 풀고 승리한 사람들의 얘기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넌 사건 역시 불가능을 넘어선 사건이었습니다. 뒤에는 바로의 기병대, 앞에는 넘실대는 홍해 그리고 쫓기는 이스라엘은 부녀자를 합하면 수백만이 넘는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로의 기병대를 이기고 홍해를 건넜다는 것이 출애굽기 14장의 줄거리입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은혜를 나누도록 하십시다.
1.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2:51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군대대로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고 했고, 13:3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손의 권능으로 너희를 그곳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고 했고, 13:9,11,14,16에서도 계속하여 "하나님이 인도해 내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 사건의 주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은 그들을 가나안 땅에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디모데후서 4:18을 보면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끝까지 인도하십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출발에서 종점까지 인도하십니다. 중간에 그만두는 일이 없습니다. 영원한 천국까지 인도하십니다.
2. 확실하고 안전하게 인도하십니다. 인도하시는 목적지가 확실하고 가는 길이 완전합니다.
■ 빌리그레함 목사님이 목회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편지를 부치러 나갔지만 우체국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지나가는 소년에게 우체국 위치를 물었습니다. 그 소년은 친절하게 알려주었고 빌리그레함은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오늘밤 저기 있는 교회에 오너라 내가 천국 가는 길을 가르쳐 주겠다"고. 그랬더니 그 소년은 "싫어요 안 갈래요. 아저씨는 우체국 가는 길도 모르면서 어떻게 천국 가는 길을 가르쳐 주겠다는거죠"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도는 불안전하고 허약하지만 하나님의 인도는 너무나 확실하고 안전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십니다.
2. 부르짖었습니다.
14:10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부르짖었다는 것은 소리쳐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절박한 위기에서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시편 50:15을 보면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부르짖으면 환난에서 건져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 안에 부르짖어, 부르짖음이라는 구절이 145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르짖음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부르짖으려면 입을 열어야 합니다, 다문 입으로는 부르짖을 수 없습니다. 부르짖으려면 소리를 내야 합니다. 묵상으로 부르짖을 순 없습니다. 부르짖으려면 힘을 써야 합니다. 소리는 힘을 써야 커지기 때문입니다.
시편 28:2을 보면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했고, 34:6을 보면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했습니다.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고통, 걱정, 근심, 환난을 물리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 어느 날 밤 술에 만취된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평소 교회를 드나드는 출석 교인이었습니다. 그는 목사님에게 자신의 신세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술을 끊을 수 없다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하나님께 맡기고 도우심을 요청하자며 먼저 형제께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를 죽여주십시요. 저는 죽일 놈입니다. 하나님 속썩여 드리고 우리 목사님 가슴 아프게 하고 교회 욕되게 한 나쁜 놈입니다. 제발 저를 죽여주십시요"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 끝에 목사님이 "형제여 제가 형제를 위해 기도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목사님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여 이 사람을 죽여주옵소서. 본인이 그토록 소원하고 있사오니 빠른 시간 안에 이 사람을 죽여주옵소서."라고 기도하자 그가 깜짝 놀라며 "아니 목사님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형제를 죽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깜짝 놀라며 "목사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죽여 달라니요." "예, 죽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면 어떡해요?" "당신이 그렇게 원하는 기도를 저도 함께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건 제가 그냥 해본 소린데 죽여달라고 기도하면 됩니까?"
이 이야기는 미국 스코트테이텀 목사님이 겪었던 이야기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내가 입을 열어 구한대로 응답하십니다. 부르짖어 기도합시다. 소리내어 기도합시다. 소리내어 기도하고 소리내어 찬송합시다. 소리내어 복음을 전합시다.
3. 기다려야 합니다.
14:13을 보면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화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했고, 1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했습니다. 바로의 기병대는 뒤쫓아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 놓여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가만히 서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믿음 없으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해서 되는 일이 있고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소리치고 서둘고 안절부절해서 되는 일이 있고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힘쓰고 노력해도 안되는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다리면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14:30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 사람을 애굽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고 했습니다.
내가 떠들고 설치고 나서면 하나님은 잠잠하십니다. 그러나 믿고 기다리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4. 새벽에 응답하셨습니다.
24절을 보면 "새벽에 여호와께서...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라고 했고, 27절을 보면 "새벽에 미쳐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된지라...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8절을 보면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홍해의 기적은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도 새벽이었습니다(수 6:15). 이방여인 룻이 베들레헴 갑부 보아스를 만나 사랑을 나누고 결혼하게 된 것도 새벽이었고(룻 3:14), 예루살렘 여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도 새벽이었습니다(눅 24:1). 주님도 새벽마다 한적한 곳을 찾아가 기도하셨습니다(막 1:35).
같은 태양이지만 아침에 뜨는 해와 저녁에 지는 해는 느낌도 다르고 역할도 다릅니다. 아침에 뜨는 해는 바라보는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밤사이 내린 이슬과 함께 만물에게 생기를 주고 성장의 활력을 줍니다. 그러나 지는 해는 바라보는 사람에게 슬픔, 서운함, 아쉬움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금방 저버리기 때문에 영향력이 적습니다.
사이쇼 히로시는 아침 일찍 일어나면 세 가지 득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건강해지고 부유해지고 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천냥, 밤에 깨어 있는 것은 백냥"이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지도 부지런하면 더운밥을 먹는다"는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교우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2021년 새벽을 깨우는 사람들이 됩시다.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6개월만 참고 노력하면 체질이 바뀌고 건강이 바뀔 것입니다. 강요나 강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신앙과 결단으로 시작합시다. 새벽 동트는 아침을 내 시간으로 만듭시다. 밝아오는 아침 해를 바라보며 기도의 단을 쌓읍시다.
늦잠 자던 사람들은 힘들고 고생스럽고 입술이 터지는 역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비만 넘기면 아침형 인간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새벽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만납시다.
5. 믿고 순종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그때 상황은 매우 절박했습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으로 갈라지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 한마디에 손을 내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21절을 보면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어 민대"라고 했습니다. 믿고 순종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26절을 보면 "네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고 했고, 27절을 보면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어 밀매 새벽에 비쳐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된지라"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손을 내밀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손을 내미는 모세의 순종 신앙을 보게 됩니다.
만일 그때 모세가 "될까? 안될건데. 힘들꺼야. 괜한 짓거리지"라며 시큰둥해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홍해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 앞에도 홍해가 가로 놓여 있습니다. 내 힘으로 풀지 못하는 문제, 해결할 수 없는 사건, 심각한 고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절망, 질병, 아픔 이런 것들은 모두가 우리의 홍해입니다. 홍해의 절망과 위기 앞에서 서있던 이스라엘을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젠 죽었다. 이젠 끝장이다"라며 원망하고 소리치고 덤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포기한 사람들이고 두 손 털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홍해를 건널 수 없습니다.
둘은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 때문에 원망하고 대들었던 사람들도 홍해를 건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없다면 믿음 있는 사람과 어울리고 섞여야 합니다. 내가 덕이 없다면 덕 있는 사람과 교제하고 만나야 합니다. 내가 외롭다면 외로움을 이기고 행복을 찾은 사람과 사귀어야 합니다. 내가 문제가 있다면 문제를 풀고 해결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친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변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앞에 가로놓인 홍해 같은 고통, 절망, 아픔, 좌절을 극복하려면 소리내어 부르짖어야 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홍해에 길을 내시고 건너게 하실 것입니다. 아멘.
베푸신 큰 일 본 사람
출 14:25-31 / 곽선희 목사
우리는 지난 6월에 역사적인 세계의 큰 축제행사, 월드컵 축구경기를 감격 속에 보았습니다. 이 축구경기는 국가 대항전이었습니다. FIFA라고 하는 것은 즉 이 국제 축구연맹은 여기에 가입된 회원수가 UN회원국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그 말은 아직 UN에 회원국으로 가입되지 못한 작은 나라들도 축구 연맹에는 가입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큰 기구입니다. 특별히 현대 축구는 대리전쟁적 성격, 대리전쟁적 의미가 있다는 것에 깊이 생각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생결단하고 축구경기에 임하고 온 세계가 떠들썩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독일과 잉글랜드, 독일과 잉글랜드가 축구 경기를 벌이게 되면 잉글랜드 사람들은 말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독일은 이겨야 한다. 그런가 하면 독일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잉글랜드는 이겨야 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오래 전에 독일과 영국은 싸웠습니다. 전쟁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런 과거가 있기 때문에 어쨌든 축구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보통 일입니까? 대리전쟁을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대로 오만 불손했던 불란서 축구팀이 아프리카의 세네갈에게 패했습니다. 이것은 큰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모르는 엄청난 의미가 있어서 온 세계가 감격 속에 만세를 불러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래 전에 세네갈은 불란서의 식민지였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속국을 지낸 일이 있어도 축구는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작은 나라가 별로 신통치 않은 줄 알았더니 가장 유력한 우승후보였던 불란서를 꺾어 버렸습니다. 온 세계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 이랬을 것 같습니까? 대리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자, 남의 얘기 할 것 있습니까? 우리 한국 역시 축구 경기가 시작되면서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다른 나라에게는 다 져도 좋지만 일본에게만은 이겨야 한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안 하셨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절대 안 된다고, 일본에게서는 패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좀 이상하기 때문입니다. 36년 동안 우리 나라가 고생을 했지만 축구만은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마음을 알만하지 않습니까? 전부가 이런 행사였습니다. 그래서 온 세계가 떠들썩했던 것입니다. 대리 전쟁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색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월드컵 본선에 다섯번을 출전했지만 한번도 이겨본 경험이 없습니다. 일승도 못하고 패했던 그런 한국이 첫 승은 물론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의 강호들을 다 차례로 꺾고 4강에 올라갔다는 것 아닙니까. 온 세계가 깜짝 놀랐고 뿐만 아니라 7백만 인구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우리 꼬마들도 "대∼한민국!"을 불렀단 말입니다. 그 속에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큰 승리를 노래했고 승리를 만끽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신기한 것은 하나님께서 일본을 싸우지 않고 이기도록 해주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일본과 한국이 붙었더라면 저 곽목사가 죄 많이 지을 뻔했습니다. 왜요? 일본에게는 이겨야 한다고 그 소리를 했을 것이고 패했으면 제가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그러니 일본하고 비켜가게 해주신 것에 참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일본하고 싸우지 않고 이겼고 그뿐 아니라 일본 사람들까지도 우리를 위해서 목소리를 높여서 한국을 응원해주었다는 말입니다. 누구도 이런 시나리오를 쓸 수는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특별한 지혜와 경륜이 여기에 있었지 않았나?'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무려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430년이라는 것은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는 지금 36년 가지고도 민족이 없어질 뻔했는데 430년 동안을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그저 노예로 민족이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구원의 역사는 첫째, 자유적 성격이 있습니다. 억압과 고통, 노예 생활로부터 자유로운 것입니다. 벗어나는 것입니다. 출애굽적인, 자유하게 하는 성격이 있고, 또 하나는 승리의 의미가 있습니다. 애굽을 물리치고 애굽나라를 망하게 하고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싸우지 않고 이겼습니다. 이 이기는 것, 승리라고 하는 것, 승리가 자유요 자유가 승리요. 승자에게만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가 하면 이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앞 뒤 어디를 보아도 어느 내용을 보아도 이것은 온전한 기적입니다. 기적이 아니고는 이런 일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보십시오.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창조적이고 적극적 역사였습니다. 여러분 함께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출애굽 같은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노예 속에서 노예로 태어나서 노예근성이 있습니다. 그대로 노예로 살다가 죽어 없어질 사람들입니다. 어쩌면 그저 조상적부터 옛날 이야기처럼 전해지는 전설을 따라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다, 우리는 애굽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택한 선민이다, 그렇게 연연히 교육을 했겠지만 그것은 마음속에 있는 꿈과 같은 이야기이고, 이들이 자유할 수 있다, 이들에게 해방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합니다. 그런 운동을 했었다는 이야기도 없고 그렇게 부르짖었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전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전적으로 무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지도자를 미리 준비하시고 모세를 보내시고 그와 함께 역사하셔서 위대한 출애굽, 해방의 역사를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과 순종입니다. 오직 믿고 순종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철저한 믿음을 요구했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열 가지 재앙도 그렇고 홍해를 갈라서 들어가게 하는 이야기도 그렇고 하나에서 열 가지가 다 기적인데 여러분, 이 기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앞에 저들이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신학자 루우엘 하우의 Men's Need and God's Action이라는 책에서 현대인들은 하나같이 마음 깊은 곳에 소외감이 있다. 이 소외감의 뿌리는 불신앙입니다. 소외감의 저쪽에는 교만이 있습니다. 어쨌든 소외감 때문에 문제인데 보십시오. 자신이 자신으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원하지 않는 죄만 짓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못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합니다. 그 마음에 마치 두 사람이 있는 것 같이 한 사람 속에 두 사람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싸웁니다. 그리고 항상 실패합니다. 그래서 자기 적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Self-hostility 입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보고 하는 말입니다. "야, 이놈아! 너는 무엇을 하는 것이냐? 너는 그것도 모르느냐? 이 무능한 것..." 자꾸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 결과로 무절제한 자기 사랑에 빠져서 탕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그럽디다. "그 담배, 나쁜 걸 왜 피우냐" 그러니까 "나쁘니까 피우지" 그러더군요. "몸에 해로운 것을 왜 좋아하나?" 그러니까 "빨리 죽으려고 좋아하는 거지." 보십시오. 살고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아는 사람이 위암 수술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술을 마시면 안됩니다. 의사가 술을 다시 마시면 죽는다고 그랬답니다. 그 사람이 그 말을 하면서 술 담배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아,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면서?" "말했죠." 그럼 왜 하느냐고 그러니까 죽으라고 먹는 거라고. 보십시오. 현대인의 생활의식이 자기 소외감에 빠져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웃과의 관계에서 또 소외감을 느낍니다. 여러 이유로 해서 그리고는 친절한 것처럼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How are you, Fine thank you 이러지만 그것은 다 치례적인 이야기이고 속으로는 다 적으로 대합니다. 적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돕는 자도 없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는 자도 없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전부가 내가 망하기만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며 주변사람들을 전부 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의식에 빠져있고 피해망상에 있습니다. 그래서 건드리기만 하면 터집니다. 이 모두가 자기 소외감에 빠져있고 이웃과의 관계도 소외감을 가지고 대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은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사랑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자신 같은 죄인을 사랑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하여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옛날 이야기라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운 하나님으로 대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하나님은 아십니다. 당신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이 말이 안도감으로 행복으로 느껴지십니까, 아니면 두려움으로 느껴지십니까? 내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라 하면 하나님 앞에 평안함이 있습니까? 아니면 두려움이 있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 그 기적, 이것을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그 능력을 능력으로 깨닫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합니다. 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이 기적을 보면서 그 기적 속에 내가 있고 그 기적 속에 사랑이 있고 기적 속에 은혜가 있음을 알고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바로 그것을 못하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역사 속에는 심판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구원, 애굽사람에게는 심판입니다. 동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같은 사건 속에서.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의 강퍅한 마음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무조건 바로왕을 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심판을 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열 가지 재앙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이 바로를 볼 때에 참 미련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재앙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알 터인데 시작할 때, 하나 둘 셋쯤 받아 놓고서 정신 차리면 되지 않습니까? 열 가지 재앙을 다 받아볼 필요가 있습니까? 참 미련한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열 가지 재앙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열 한가지입니다. 홍해까지 따라 들어갔다가 홍해에 빠져 죽지 않았습니까? 그렇게까지 할 것이 무엇 있습니까? 그 사람은 그렇게 철저하게 완악한 사람입니다. 회개할 기회가 열 번이나 주어졌는데,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셨는데,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바로이기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닙니다. 완악하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능력 앞에 온유 겸손하여 믿고 순종한 사람은 구원을 받고, 그 누구든, 그 능력을 거절하고 완악하고 강퍅한 사람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출애굽 사건 아닙니까. 그래서 히브리서 3장 13절을 보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강퍅케 됨을 면하라. 마음 악하게 먹지 마십시오. 혹 잘못된 생각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때에 회개하십시오. 말씀을 거절하고 강퍅해지고 또 강퍅해지고 강퍅해지면 그대로 심판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어찌 할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의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못하시는 일이 있는데,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찌하겠습니까? 이 강퍅한 사람을. 그래서 홍해에 수장되게 된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승리하셨습니다. 강퍅한 자를, 바로의 군대를 수장시키시며 큰 승리를 이루었습니다. 그 승리에 이스라엘은 편승했습니다. 그 승리를 기뻐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14장을 읽었지만 15장을 읽어 가면 한 장 전부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의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구원하시고 애굽의 군대를 바다 속에 던졌도다. 하나님이여 할렐루야! 감사의 노래입니다. 그 노래가 계속 이어집니다. 자유의 노래, 바로 승리의 노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보십시오. 애굽사람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하나님과 모세를 믿었더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을 믿어야 했고, 또 특별히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독수리 날개로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약속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큰 권능을 보았으면 이제는 믿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모세를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습니다. 모세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원망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왜요? 하필이면 왜 모세인가? 할말이 많습니다. 예나 오늘이나 불평하는 사람에게는 할말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은 말합니다. 모세는 우리 온 백성이 노예로 고생할 때에 이 사람은 바로의 궁전에서 40년 동안 왕자처럼 편하게 자란 사람입니다. 맞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애굽사람은 하나 때려죽이고 도망을 해서 광야에 나가서 처자식을 키우면서 목자로 지내며 편안하게 40년을 지낸 사람입니다. 이런 과거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우리의 지도자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지도자 자격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실격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종 모세를 보내노라.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같이 하셨습니다. 그 양을 치던 막대기, 지팡이 하나 이것을 들고 이 지팡이로 내려 칠 때에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와 같이 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요 내가 하는 일은 모세가 하는 일이요. 하나님을 믿느냐? 또 모세를 믿어라. 나를 믿느냐? 내가 모세를 보냈다는 것을 믿어라. 저의 말을 믿으라. 저의 말은 곧 내 말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와 함께 했습니다. 그 모든 생애 속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이 믿음으로 애굽을 나왔고 그리고 가나안으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백범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속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님이 어렸을 때, 소년 시절에 꿈이 관상쟁이가 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과거를 보아야 출세를 하는데 옛날에 이런 상황이 좀 부패해서 돈 없이는 과거를 보아도 소용이 없어서 자신같이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공부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어떻게 먹고살까 했는데, 어렸을 때에 아버지께서 농담처럼 하신 말씀이 관상쟁이가 되면 돈걱정은 안하고 살 수 있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 생각이 나서 관상을 보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관상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많이 읽고 훈련을 쌓았습니다. 이제 관상을 보아도 될 수준에 도달했을 때에 일차적으로 거울을 놓고 자신의 관상을 보았다고 합니다. 보았더니, 관상이 아주 불길하고 자신의 관상이 아주 흉했다고 합니다. 운명이 삐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관상도 잘 못 보는데 다른 사람의 관상을 어떻게 보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망할 때에 관상 책에서 본 하나의 구절이 마음속에 떠올랐다고 합니다. 관상보다 신상이 더 좋고, 관상은 신상만 못하고 신상은 심상만 못하다. 얼굴이 아무리 좋게 생겼더라도 몸 전체가 늠름하고 건강한 것만 못하고 아무리 몸이 건강하게 잘생겼다 하더라도 마음이 잘생긴 것만 못하다. 결국은 심상의 문제이다. 마음을 닦아야겠다. 마음의 문제다. 다시 그는 공부를 시작해서 독립열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분명히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큰 권능을 보고 그 속에서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 모세에 대한 믿음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에게 구원이 있고 구원의 노래를 지켜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57년 전, 1945년,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입니다. 그 여름에 해방이 되었습니다. 해방되기 직전에 제가 교회에 나갈 때 찬송가에서 금지 찬송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좀 전에 부른 36장입니다. 예수를 왕으로 추대하고 찬양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니, 천황이 있는데 어떻게 예수를 왕으로 높이느냐고 해서 못부르게 했습니다. 금지 찬송이었고, 그리고 교회에 들어갈 때에 보고 그 찬송 페이지를 찢었던지 아니면 흰 종이를 붙여야 합니다. 그것을 보여주고서야 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되자마자 교회에서는 하루종일 그 찬송만 불렀습니다. "예수의 이름 권세요" 얼마나 목이 터져라 불렀는지 모릅니다. 해방 직전에는 교회 모든 종까지 모두 공출해서 어디에 가져다 놓았었는데 해방 된 후에는 종을 찾아서 달아놓고 시도 때도 없이 종을 쳤습니다. 종을 치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종을 쳤습니다. 종소리를 들으면서 다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유의 노래, 해방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것은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 안에 우리가 있음을 알고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여러분, 잃어버린 자유의 노래, 영원한 자유의 노래를 다시 불러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나의 찬송, 자유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다시 새롭게 자유의 노래를 불러야 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도탄과 무지와 억압과 속박에서 건져주심을 감사합니다. 잃어버린 자유의 노래를 다시 찾게 하시고, 잃어버린 자유의 감격을 다시 찾아 주여, 주의 그 큰 은혜를 찬양하며 믿음을 새롭게 하고 영원 영원히 자유의 노래를 부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원은 감사의 대주제
출애굽기 14:30-15:1
음악가 슈베르트(F. Schubert)가 남긴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미완성 교향곡(The Unfinished Symphony)이 있습니다. 보통 교향곡은 4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2악장으로만 쓰여져 있습니다. 그래도 아름다운 작품이 되었다고 해서 ‘미완성 교향곡’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그런 유의 미완성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보여주시는 당신의 역사(役事)는 언제나 완전하고, 거룩하고, 귀하고, 중하고, 영원합니다. 그 결정적인 결과가 하나님의 천지창조이고, 인류에게 나타내신 그의 구속입니다.
지금 우리는 출애굽기 15장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과 소고치며 북치며 모세의 누이 미리암을 따르는 모든 이스라엘 여자들의 결정적인 감사의 축제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죽음의 홍해바다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을 맛본 후에 터져 나온 민족적 대축제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죽음(바다)에서 다시 살아난 민족부활의 축제였습니다. 홍해에서의 구원은 저들 감사의 대 주제가 된 것입니다.
I. 감사의 대 주제는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출 14-15장).
‘여호와’는 저들 감사의 대 주제였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저들 감사의 대 주제였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출애굽기 14장에는 ‘여호와’라고 하는 말이 15회 이상 반복이 됩니다. 그리고 홍해를 건넌 다음에 저들이 토하는 감사의 노래 중에는 ‘여호와’라고 하는 말이 무려 45회 이상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이곳 뿐 아니라 전 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우리 감사의 주제요, 대상이요, 내용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께 감사하라, 만드신 천지를 통치하시고 섭리하시는 여호와께 감사하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선민 유다를바벨론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거듭거듭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의 감사 주제와 대상과 내용은 다른 신이 아닙니다. 우상들이 아닙니다. 그 어떤 사람도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II. 감사의 내용은 여호와의 구원입니다(출 14:30).
출애굽기 14장 30절에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고 하였습니다.‘여호와께서…구원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같이…구원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14장 전부를 결론짓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홍해바다에서의 구원을 결론 지어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구원하시매」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1. 먼저 모세를 통하여 구원의 메시지를 주었습니다(출 14:13-14).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낸 애굽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졌습니다(출 14:4). 그래서 특별 병거 육백승과 모든 병거를 총동원하였습니다. 모든 애굽의 장관들이 지휘하였습니다(출 14:7). 저들의 추격을 목도한 이스라엘은 결정적인 공포와 불안으로 인해 절망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출 14:10). 그리고 모세에게 결정적인 원망을 퍼붓고 말았습니다. 저들은 광야에서 모세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출 14:11-12).이때 여호와는 어쩔 줄 모르는 모세에게 구원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① 두려워 말라고 하였습니다. ② 가만히 서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③ 오늘 이 현장에서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④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출 14:13-14).
2.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진 명령을 내리게 하였습니다(출 14:16).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어 바다위로 내밀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바다를 향하여 나아가게 하였습니다(출 14:15-18). 백성은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게 될 것이고, 이스라엘이 그날 본 애굽 사람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3. 하나님의 사자가 이스라엘과 애굽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였습니다(출 14:19-20).
그 결정적인 현장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났습니다(출 14:19). 지금까지 그 하나님의 사자가 백성 앞서 행하였습니다. 그때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함께 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자가 자기 위치를 바꾸어 백성들의 뒤로 옮겼습니다. 바로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의 정체는 하나님의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출 3:2). 그결과 애굽은 하나님의 사자의 정체인 구름기둥과 불기둥 때문에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편(애굽)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편(이스라엘)은 광명이 있어 밤새도록 저편이 이편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출 14:20).
4. 여호와께서 동풍으로 홍해의 물을 갈라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로 건너게 했습니다(출 14:21-22, 29).
모세가 하나님의 명대로 지팡이를 내어민대, 여호와께서 큰 동풍으로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출 14:21).순간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바다 가운데 육지로 걸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동풍에 밀린 물이 그들의 좌우에 벽이 되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출 14:22). 마침내 장정 60만과 유아와 여자들까지 합치면 200여만이 넘는 전 이스라엘이 바다 가운데 육지로 완전히 건넜습니다.
5. 애굽 사람들을 심판하였습니다(출 14:23-28).
이스라엘 백성의 마지막이 홍해를 건너가는 즈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바로 왕의 군대로 하여금 저들을 쫓도록 하여 바다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군대가 홍해 바다 속에 완전히 들어갔을 때, 하나님은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로 하여금 다시 바다를 향하여 지팡이를 내어 밀게 하였습니다.
그 순간 좌우에 쌍벽을 이루었던 바닷물이 다시 합쳐지고 말았습니다. 바로를 위시한 전 애굽의 군대들은 합쳐진 물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바로는 자신이 뿌린 씨를 자신이 거둔 셈입니다. 그는 고센 땅에 살던 이스라엘 여인들이 낳은 그 수많은 아들(男兒)들을 나일강에 던져 죽였던 장본인입니다(출 1:22). 그 날에 이스라엘은 이 같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였습니다. 그 날에 저들은 그 바닷가에서 애굽인의 시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출 14:30). 그 날에 이 같은 여호와의 구원을 보았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고 하였습니다.
III. 여호와의 구원은 초자연적이었습니다(출 15:1-21).
출애굽기 15장은 모세와 그 백성(남자) 그리고 그 누이 미리암과 그 여자들이 부른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그 감사의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초자연적 권능이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출애굽기 15장 2절에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15장 3절에는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영원 자존자라는 말입니다(출 3:14). 그가 애굽과 바로와 그 군대를 ‘돌처럼’ 큰 바다에 던졌다고 하였습니다(출 15:4-5). ‘주의 콧김’으로 물을 벽같이 쌓고, 파도로 언덕같이 일어서게 했다고 하였습니다(출 15:8). 주께서 ‘주의 바람’으로 바다를 덮어버릴 때, 원수들이 ‘납같이’ 물속으로 잠겨버렸다고 하였습니다(출 15:10).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다’고 하였습니다(출 15:12). 이 소리를 들은 이방인들의 마음이 두려워 ‘돌같이 고요’해져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주의 힘있는 팔’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출 15:16).미리암은 이 하나님의 구원역사(救援役事)에 대하여 모든 여인들과 함께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다고 하였습니다(출 15:21). 모세도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 15:1)라고 하였습니다.말하자면 여호와의 구원은 초자연적 권능의 힘이라고 한 사실입니다. 자연이나, 다른 신이나, 아니면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 자신의 힘, 곧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권능이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홍해에서의 구원의 근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그 하나님의 초자연적 구원의 능력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 가지의 큰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5장 13절에 보면 그 하나는 ‘주의 구속’이고, 두 번째는 ‘주의 인도’이고, 세 번째는 ‘주의 성결한 처소’ 곧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심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애굽은 영적으로 죄악 세상에 대한 상징입니다.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곳이라고 비유하였습니다(계 11:8).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옴은 곧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세상에서 교회로 나옴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넘은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신자들이 세상에서 구별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새로운 목적지인 가나안 곧 천국을 향하는 이정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천국을 가는 길에 죽음의 홍해가 있고, 고통의 광야가 있고, 원수들의 침략이 있는 것입니다. 이는 가나안을 향하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고난이요, 시련이요, 환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살이(노예)를 그대로 계속했다면 홍해의 시련은 없었을 것입니다. 죽음 그대로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죽음의 세계는 아무런 소리가 없습니다. 움직임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창조나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애굽에서의 구원은 본질적인 구원입니다. 홍해에서의 구원은 성화적 구원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은총은 지상에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유월절 양을 먹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이는 십자가로 말미암는 우리의 구원(출애굽)을 말하는 것입니다.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이 만난 홍해는 사실상의 죽음이었습니다. 그 홍해에서 살아나옴은 사실상 죽음에서의 부활입니다. 저들은 모세와 함께 바다 가운데서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셈이 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가리켜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1-4)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죽음의 애굽(세상)에서 나옴(출애굽)입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장사됨, 즉 바다 가운데 잠김입니다. 구원은 거기에서 다시 살아나오는 부활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애굽과의 분리입니다. 그 날 이후로 이스라엘은 다시는 애굽 사람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출 14;13).
바로 여기에 이스라엘의 진정한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감사 말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에 대한 감사 말입니다. 여호와의 권능의 구원에 대한 감사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본질적인 감사가 아닌가! 없어질래야 없어질 수 없는 영원한 감사가 아닌가! 그것은 감사의 대상이신 여호와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사를 드릴 그 사람이 구원으로 인하여 영원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투하는 지상의 그리스도 교회가 갖고 있는 구원에 대한 감사의 힘은 실로 대단합니다. 그 감사하는 믿음의 힘이 산더미 같은 모든 인생문제를 바다에 던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감사는 모든 감사의 총체요 주제입니다. 그 놀라운 감사의 힘이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그래서 요한계시록 7장이나 14장에 보면 천상 교회 14만 4천인들의 영원한 감사의 주제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계 7:10)라고 한 것입니다. 천상 교회의 모든 영물과, 장로들과, 피조물들의 감사의 주제도 이 어린양 예수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감사는 은혜의 산물입니다. 특별히 구원 은혜의 산물입니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신앙고백의 표현입니다. 축복의 열매요, 교회 생활의 본질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마귀를 이기는 최대의 무기입니다. 날마다 이기는 승리의 비결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받은 제일 귀한 보배 중의 하나입니다. 이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성화적 삶의 측정기와 같은 것입니다. 현재보다 천 배나 더하는 상승의 감사는 바로 상승하는 신앙의 성화를 나타내는 표적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감사합시다. 여호와께서 베푸신 구원에 감사합시다. 아멘
"구원과 심판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출 14:26-31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너무도 강퍅하기만 합니다. 바로왕은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해서 엄청난 고통과 절망을 겪었으면서도, 그 교만과 독선을 버리지 못하고 또 다시 하나님께 대적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바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님께 맞섭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홍해가 갈라지는 그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도 회개하거나 그의 군대를 다시 돌이키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고야 말겠다는 왜곡된 일념으로 바다 한 가운데로 뛰어드는 무모한 짓을 감행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런 그의 교만과 독선을 지켜보고만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에게 홍해는 구원과 감격이 넘치는 은혜의 바다가 되었지만, 반면에 바로와 그의 군사들에게 홍해는 마치 피로 물든 나일강처럼 죽음의 바다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나일강을 피로 변하게 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면, 결국 나일강의 피가 그들 자신의 피가 될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를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대적하는 인생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마음도 악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애굽의 종으로 있을 때 얼마나 하나님께 제발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까?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기 위해서 혹독한 노역을 감당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막 태어난 피 덩어리 자식들을 나일강에 내던져야 했던 그 비극적인 삶 속에서,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이 생지옥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예비하신 모세를 통해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순탄한 것 같지만은 않았습니다. 모세의 존재는 바로왕에 비하면 너무도 미약하고 힘이 없는 지도자에 불과해 보였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들이 한 짓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 원망하고 모세에게 불평을 쏟아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놀라운 기적들을 애굽 땅에서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려움과 감격 속에서 하나님께서 손수 역사하시는 그 드라마틱한 장면을 직접 지켜봤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그들은 꿈에서나 그리던 출애굽의 감격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당당하게 애굽 땅을 나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얼마 못가서 또다시 절망해야 했습니다. 이들 뒤에서는 자신들을 죽이고자 달려드는 애굽 군대들이 있었고, 그들 앞에는 홍해가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또 다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차라리 애굽땅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을 뻔 했다고 한탄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또 다시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의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입니다. 이들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뒤를 쫒아오는 애굽 군대가 바다 한 가운데서 수장되는 장면까지 직접 목도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 앞에서 그분을 경외하며, 그의 모세의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3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동시적으로 보게 됩니다. 홍해에서 어떤 자들은 심판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자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바로왕과 그의 군대는 분명 하나님께 대적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의롭고 믿음이 충만해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것은 자신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애굽 군대와 맞설 힘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홍해가 갈라지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역사는 “그들이 출애굽까지는 성공했으나, 홍해에 막혀 애굽 군사들에게 전멸당하고야 말았다”로 기록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이고 현실적이라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세속적인 판단을 뒤엎어버리십니다. 그분은 홍해를 가르셨고 그 속에서 애굽의 병사들을 수장시켜 버리셨습니다. 대신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리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세속적인 역사는 침묵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침묵은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시기로 작정하셨고 애굽의 군대는 죽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어떻게 애굽 군대가 심판을 당했느냐, 또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았느냐”는 질문 보다 “도대체 누가 심판을 행하셨으며, 누가 구원을 이루셨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죽을 고비를 넘길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내가 그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 영웅담을 말하길 더 즐길 수 있습니다. 사업이 망하고 가정에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해서 그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는지 말하기를 더 좋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떻게”가 아니라, “누가” 죽을 고비에서 살려주셨고, “누가” 어렵고 힘든 절망의 삶에서 건져주셨는지를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하나님,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심판과 구원의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재수가 좋고 나쁘다는 말은 가당치 않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결단코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순종하는 인생을 사는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홍해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마치 거울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바다 또한 어떻습니까? 불의를 행하는 자, 강한 자들이 뭔가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향해 조롱하고 비웃기조차 합니다. 세상의 엄청난 권력과 힘에 비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너무도 미약하고 연약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별히 교회를 대적하고자 하는 세력들도 만만치 않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구원의 길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길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길인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보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통해서 그 길이 바로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십자가의 길, 구원의 길인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홍해에서 해야 할 일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묵묵히 앞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홍해를 가로질러 걸어가라”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뿐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보십시오. 어느 날 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자, 그분의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줄을 알자, 베드로가 자신도 그 물 위로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순종하며 믿음으로 물 위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는 물 위를 걷고 자신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곧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순간 믿음을 잃고 두려워하기 시작하자, 그는 바다에 빠지고야 말았습니다. 그때 그는 외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자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셨다”고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인생의 홍해 길을 건널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은 믿음뿐입니다. 그 믿음을 통한 순종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풍파를 만났을 때 쓰러졌다고 낙심하지 마시고 대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진리로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믿음을 회복하고 의심하지 않으며, 오직 심판과 구원의 은총은 하나님께 맡기는 가운데, 주님께서 예배하신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예배하신 구원의 길을 믿음과 순종으로 걸어가심으로서, 구원의 감격을 누리기 바랍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너무도 강퍅하기만 합니다. 바로왕은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해서 엄청난 고통과 절망을 겪었으면서도, 그 교만과 독선을 버리지 못하고 또 다시 하나님께 대적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훼방꾼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바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하나님께 맞섭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홍해가 갈라지는 그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도 회개하거나 그의 군대를 다시 돌이키지 않고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고야 말겠다는 왜곡된 일념으로 바다 한 가운데로 뛰어드는 무모한 짓을 감행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런 그의 교만과 독선을 지켜보고만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에게 홍해는 구원과 감격이 넘치는 은혜의 바다가 되었지만, 반면에 바로와 그의 군사들에게 홍해는 마치 피로 물든 나일강처럼 죽음의 바다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나일강을 피로 변하게 한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면, 결국 나일강의 피가 그들 자신의 피가 될 것이라는 준엄한 경고를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대적하는 인생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의 마음도 악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애굽의 종으로 있을 때 얼마나 하나님께 제발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까?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기 위해서 혹독한 노역을 감당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막 태어난 피 덩어리 자식들을 나일강에 내던져야 했던 그 비극적인 삶 속에서,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이 생지옥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기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예비하신 모세를 통해서 그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순탄한 것 같지만은 않았습니다. 모세의 존재는 바로왕에 비하면 너무도 미약하고 힘이 없는 지도자에 불과해 보였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들이 한 짓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 원망하고 모세에게 불평을 쏟아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약속대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놀라운 기적들을 애굽 땅에서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려움과 감격 속에서 하나님께서 손수 역사하시는 그 드라마틱한 장면을 직접 지켜봤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그들은 꿈에서나 그리던 출애굽의 감격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당당하게 애굽 땅을 나갈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얼마 못가서 또다시 절망해야 했습니다. 이들 뒤에서는 자신들을 죽이고자 달려드는 애굽 군대들이 있었고, 그들 앞에는 홍해가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또 다시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서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차라리 애굽땅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을 뻔 했다고 한탄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또 다시 홍해가 갈라지는 놀라운 기적의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입니다. 이들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뒤를 쫒아오는 애굽 군대가 바다 한 가운데서 수장되는 장면까지 직접 목도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 앞에서 그분을 경외하며, 그의 모세의 말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31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동시적으로 보게 됩니다. 홍해에서 어떤 자들은 심판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자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바로왕과 그의 군대는 분명 하나님께 대적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의롭고 믿음이 충만해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것은 자신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애굽 군대와 맞설 힘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홍해가 갈라지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역사는 “그들이 출애굽까지는 성공했으나, 홍해에 막혀 애굽 군사들에게 전멸당하고야 말았다”로 기록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이고 현실적이라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세속적인 판단을 뒤엎어버리십니다. 그분은 홍해를 가르셨고 그 속에서 애굽의 병사들을 수장시켜 버리셨습니다. 대신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리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세속적인 역사는 침묵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침묵은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시기로 작정하셨고 애굽의 군대는 죽이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어떻게 애굽 군대가 심판을 당했느냐, 또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았느냐”는 질문 보다 “도대체 누가 심판을 행하셨으며, 누가 구원을 이루셨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죽을 고비를 넘길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때 우리의 관심은 어떻게 내가 그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 영웅담을 말하길 더 즐길 수 있습니다. 사업이 망하고 가정에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어떻게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해서 그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는지 말하기를 더 좋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떻게”가 아니라, “누가” 죽을 고비에서 살려주셨고, “누가” 어렵고 힘든 절망의 삶에서 건져주셨는지를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여호와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하나님,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심판과 구원의 권세는 오직 하나님께만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재수가 좋고 나쁘다는 말은 가당치 않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결단코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을 철저히 믿고 순종하는 인생을 사는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홍해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마치 거울처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바다 또한 어떻습니까? 불의를 행하는 자, 강한 자들이 뭔가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향해 조롱하고 비웃기조차 합니다. 세상의 엄청난 권력과 힘에 비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너무도 미약하고 연약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특별히 교회를 대적하고자 하는 세력들도 만만치 않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구원의 길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길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길인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이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보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통해서 그 길이 바로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십자가의 길, 구원의 길인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세상의 홍해에서 해야 할 일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묵묵히 앞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홍해를 가로질러 걸어가라”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뿐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보십시오. 어느 날 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시자, 그분의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신 줄을 알자, 베드로가 자신도 그 물 위로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순종하며 믿음으로 물 위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는 물 위를 걷고 자신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곧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순간 믿음을 잃고 두려워하기 시작하자, 그는 바다에 빠지고야 말았습니다. 그때 그는 외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그러자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셨다”고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인생의 홍해 길을 건널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은 믿음뿐입니다. 그 믿음을 통한 순종뿐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풍파를 만났을 때 쓰러졌다고 낙심하지 마시고 대신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주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진리로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믿음을 회복하고 의심하지 않으며, 오직 심판과 구원의 은총은 하나님께 맡기는 가운데, 주님께서 예배하신 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예배하신 구원의 길을 믿음과 순종으로 걸어가심으로서, 구원의 감격을 누리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