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입동>
-다른 사람들은 몰라.
나는 멍하니 아내 말을 따라 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그러곤 내가 아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
쪼그려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2.<노찬성과 에반>
-그럴 땐 종종 할머니가 일러준 '용서'라는 말이 떠올랐다.
없던 일이 될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일은
나중에 어떻게 되나.
그런 건 모두 어디로 가나.
-'네가 네 얼굴을 본 시간보다
내가 네 얼굴을 본 시간이 길어....
알고 있니?'
-'할머니. 용서가 뭐야?'
.
.
.
'그냥 한 번 봐달라는 거야.'
3.<건너편>
-이수야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빼가서 너랑 헤어지려는게 아니야.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아.
-이수는 자기 근황도 그런 식으로
들렸을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걱정을 가장한 흥미의 형태로,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의 방식으로
화제에 올랐을 터였다.
4.<침묵의 미래>
-이곳 사람들은 '혼자'라는 단어를
닳아 없어질 때까지 만지고 또 만졌다.
몸에 좋은 독이라도 먹듯 날마다 조금씩 비관을 맛봤다.
고통과 인내 속에서, 고립과 두려움 속에서,
희망과 의심 속에서 소금처럼 햐얗게, 햐얗게 결정화된
고독...... 너무 쓰고 짠 고독.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단순한 사랑,
그것이 내 표정이었는지 모른다.
범람 직전의 댐처럼 말로 가득차 출렁이는 슬픔,
그것이 내 성정이었는지 모른다.
5.<풍경의 쓸모>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6.<가리는 손>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혔으면 부셔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지쳐 있었어.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돼 있거든.
7.<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남편을 잃기 전,
나는 내가 집에서 어떤 소리를 내는지 잘 몰랐다.
같이 사는 사람의 기척과 섞여 의식하지 못했는데,
남편이 세상을 뜬 뒤 내가 끄는 발 소리,
내가 쓰는 물 소리, 내가 닫는 문소리가
크다는 걸 알았다.
침묵의 미래
노찬성과에반
건너편, 어디로 가고싶으신가요
건너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