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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이별하던 그 날, 그 카페에서는 이별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밝은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 내 귀에 들려오는 멜로디는 그 때와 같은 것인데도 그 때와는 사뭇 다른 센티멘털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귓가에 맴도는 겨울멜로디 Written by. dod●
카페에 혼자 앉아서 가장 싼 카페라떼의 얼음이 녹는 동안 뜻도 제대로 알 수 없는 원서를 건성 요약하면서 창 밖을 힐끔힐끔 쳐다본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훔쳐보는 것은 뭔가 즐겁다. 변화가 많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지나가면서 연신 시계를 들여다 보는 사람, 귀에 이어폰을 꽂고 고개를 까닥이며 여유롭게 걸어가는 사람,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문서 같은 것을 잡고 약간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사람. 내가 그렇게 사람들을 분류하고 있을 동안 시간은 가고, 내가 들고 있는 펜이 움직이는 속도는 점점 느려지다가 결국에는 멈춘다.
그가 올 시간에 대해서는 미지수인 채로 그냥 주변 사람들이나 훔쳐보면서 펜을 돌린다. 시계를 슬쩍 보니 그가 온다고 했던 시간에서는 30분이 조금 넘어있었다. 항상 이런 식은 아니었지만 요즘 들어 부쩍 그가 약속시간에 늦는 것이 흔한 일이 돼버렸다. 나는 나대로 기다리는 일에 익숙해져 있고 말이다. 시간이 꽤 여유가 있을 것 같아서 나는 가방에서 콤팩트와 립글로즈를 꺼내어 나름대로 신경 써서 한 화장을 고치기 시작한다.
갑자기 ‘통통’하면서 누군가가 밖에서 유리창을 손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약간 보기 좋지 않은 표정으로 립글로즈를 덧바르고 있던 나는 바르고 있는 그 상태 그대로 소리 나는 쪽을 본다. 그다. 성급한 마음과는 다르게 그래도 더 늦게 와도 상관없었다는 식의 태도로 여유롭게 짐을 정리하는 새에 그가 들어와서 마주보고 앉았다.
“오래 기다렸어?”
“얼마 안 기다렸어. 나도 늦게 왔거든.”
“아, 그래.”
그는 시계를 흘끔 보더니 내 가방을 쳐다본다.
“뭐해, 정리 안하고.”
“조금만 기다려. 뭐가 그렇게 급한데.”
“나 원래 성격 급한 거 알잖아.”
확실히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엔 전보다 훨씬 더 급해졌다는 걸 그는 모르는 걸까. 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나름대로 천천히 짐을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와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한다. 날이 가을 치고는 꽤 더운 날씨다. 이게 그 흔히 말하는 ‘인디안 썸머’라는 것 인가보다. 늦가을에 잠시 지나가는 더위. 벌써 계절이 바뀌는 때가 온 모양이다. 나는 화장이 지워질까 걱정을 하지만 정작 그는 시선을 멀리 둔 채 버스가 언제오나 보고 있는 듯하다. 내가 어떻게 화장을 했건 어떤 옷을 입었건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은 무슨 실험 했어?”
“그냥, 별거 아니지.”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나도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어 문다. 그가 그제서야 나를 힐끗 쳐다본다.
“다시 피기 시작했냐?”
“응.”
“끊으라고 했잖아.”
“무슨 상관이야.”
“그런가.”
보통의 연인들이라면 ‘나는 네 남자친구니까.’라는 식의 살가운 말도 하련만 그는 그냥 무심하게 ‘그런가.’라는 식의 말로 넘어가 버린다. 그는 언제나 던힐 밸런스를 피우고, 나는 팔리아먼트 라이트를 피운다. 그의 담배는 순하고, 나의 담배는 독하다. 누군가가 그랬다. 힘들 때는 말보로 레드를 피우는 거라고. 하지만 담배에 있는 타르나 니코틴의 양 같은 것은 힘든 것과 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피우든 말든 힘들고 안 힘든 것은 똑같다. 담배의 취향은 맛이 문제이고 힘들어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인 것 같다. 담배는 그냥 끊기 힘든 단순한 습관에 지나지 않는 거겠지.
연애를 시작한지 얼마 안됐을 때에는 그는 자기도 담배를 끊을 테니 나도 끊으라고 해서 끊으려고 해봤지만 역시 무리여서 그의 앞에서는 되도록 피우지 않고 그가 없을 때는 그 때 안 피웠던 담배를 몰아서 피웠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다. 그도 끊는 것을 포기했고 나도 포기했다. 이제는 서로가 늦게까지 술을 마시든, 얼마 안 피우던 담배의 양이 늘어나든 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자연스럽게 버스에 타고 서로 시선을 다른 곳에 둔 채 항상 내리는 역 근처에서 내린다. 예전에는 이것저것 새로운 것을 해보려고 했고,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냥 익숙한 대로 그냥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하는 영화 표를 끊고 밥을 먹고, 디저트를 간단하게 먹고 영화를 본 후 형편이 된다면 술을 마시고 헤어지는 게 전부다. 오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만큼 예전과 같은 설렘이라든지 기대 같은 것은 없다. 그냥 그가 옆에 있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는 것처럼 시간이 흐른다.
“저거 보자.”
“뭔데?”
“나도 몰라. 그냥 재미있다고 하더라고.”
”몇 시 영환데?”
“다섯 시 삼십 분 영화니까 밥 먹고 나면 바로 시작하겠네.”
“그래.”
얼핏 듣기에는 그냥 구질구질한 멜로 영화인 듯 하지만 내 생각엔 꽤 오래 전에 상영했던 ‘봄날은 간다’ 풍의 영화인 것 같다. 생각하는 데에는 더없이 좋은 영화지만 내 생각에 그는 영화를 보다가 잘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래도 그는 돈을 낸 것은 재미없더라도 끝까지 보는 성격이라 조는 한이 있더라도 보긴 볼 것 같지만 생각은 하지 않을 것 같다. 나름의 자극이 됐으면 하는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것도 거의 포기상태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점심 겸 저녁을 때우고, 나는 편의점에 있는 종이컵 커피를 사서 마시고 그는 싼 캔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한 개피 피우고 나니 영화 시작시간까지는 15분 정도의 여유가 있다.
“그러고 보니 너 하던 공부는 어떻게 돼가냐?”
“뭐, 그냥 그렇지.”
“그게 뭐야.”
“그냥 그렇다는 게 그냥 그런 거지 뭐라고 더 설명해.”
시작할 때는 의욕이 가득했던 국제 자격증 시험 공부가 요즘 들어 뜻대로 안되고 있다. 그 때는 그 길이 내 길이었던 것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나와는 맞지 않는 부분 같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그렇게 힘들 때마다 그에게 이것저것 앓는 소리를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반응이 영 시원찮아서 결국엔 나 혼자서 끙끙 않고, 그에게는 별 말을 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가 원래 말이 없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말이 없는 그에게 조금은 질려가고 있었던 것 같다. 말이 없는 것도 익숙하고, 진부한 데이트 코스도 익숙하고, 어찌됐든 그와의 모든 것들이 익숙해져 버린 지금의 상황은 확실히 다른 연인들의 익숙함과는 다른 상태가 돼버렸다. 예를 들면 힘들었던 고3시절에는 편했던 옷들이 대학생이 되기 전의 다이어트로 안 맞게 돼서 어정쩡한 상태로 아무 때나 무신경하게 꺼내 입는 그런 정도.
“안 힘드냐고.”
“힘들면, 그러면…”
그러면 네가 무슨 말이라도 해줄 거냐는 말이 나오려다가 말았다. 화를 내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터득한 결과다. 그냥 내가 말을 하지 않으면 언성을 높일 일도 싸울 일도 없어지니까 서로 편하다. 말을 참는 그 순간만 힘들 뿐이지 참고 나면 편해지니 차라리 이 편이 나은 것 같다. 그는 분명히 내가 하려던 말을 물어보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 사실을 알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의외로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짜증이 스쳐지나 간다. 그냥 평소의 무심한 표정일거라고 생각했는데.
“힘들면서.”
그런 말을 하는 그를 문득 쳐다본다. 그가 오늘 처음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의 얼굴은 다시 평소의 무심한 표정이고 그는 다시 상영관 게이트의 전광판으로 시선을 돌린다. 입이 근질거린다.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냐고 묻고 싶다. 하지만 그래 봐야 그냥 얼버무릴 것이 뻔하니 말해도 소용없다.
“너 요즘 말 별로 안 한다?”
“네가 말을 안 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해.”
“나는 원래 말 없어.”
“내가 말 한다고 해서 네가 네 얘길 하는 건 아니잖아.”
“나야 별일 없으니까.”
“나도 별 일 없어.”
“그런데 너, 아니다.”
그는 또다시 그런 식으로 말을 끊어버린다. 말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글쎄, 그건 아닌 것 같다. 단지 말을 하기 싫은 것일 뿐. 하지만 그는 무슨 말을 또 하려는 듯 입을 열다 만다.
“입장하래. 가자.”
내가 먼저 어색한 침묵을 깬다. 공기가 평소와의 침묵과는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어서 전광판만 쳐다보던 나는 전광판에 입장하라는 안내가 뜨자마자 말을 꺼내고 먼저 발걸음을 옮기고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있던 자리에 잠시 서있다가 천천히 따라온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는 오래된 연인들이 새로운 사랑을 찾고, 연인에게는 점점 무심해지고 결국에는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 이야기이지만 이별을 하면서 나누는 이야기들이 영화가 시작한지 30분 만에 나와버린 것을 보니 계속 그 이야기만 할 생각인가보다. 그가 졸고 있을지 궁금해서 옆을 살짝 보니 생각보다 그의 눈은 영화에 몰입해 있는 듯 하다. 결국 나는 다시 스크린으로 눈을 돌린다. 보고 있자니 영화 속의 여자가 부럽다는 생각을 한다. 속사포처럼 가슴에 쌓아뒀던 말은 잔뜩 해도 남자가 그냥 묵묵히 들어주고 있으니 말이다. 그냥 들어주는 것만은 아니지만 적어도 언성을 높인다든지 변명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솔직하게 말하는 것 같아서 나는 이 영화의 결말이 다시 해피엔딩일거라는 판단을 내린다.
어쩌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이별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남자의 태도로 보아 남자는 행동이나 말투가 어떻든 간에 적어도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느껴지니 말이다. 여자는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사람과 연애를 해야 인생이 편하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마음이 없다면 그리 편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 때문에 여자가 새로운 사랑을 선택한 것이라는 이중적인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나의 생각은 점점 이 영화가 해피엔딩이 아닐 거라는 쪽으로 치우쳐가고 그 생각은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 영화는 남자의 쓸쓸한 뒷모습과 담배 한 개피로 끝을 맺는다.
영화관을 나온 후 모든 것이 귀찮아져 버린 나는 집에 갈 생각으로 집에 가는 방향의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려 했지만 그는 건물 앞에 그냥 서있다. 불이 붙지도 않은 담배 한 개피를 물고 내 쪽을 쳐다보고 있다.
“그럼 나 먼저 갈게.”
바래다주길 바라지도 않고 처음엔 익숙지 않던 길도 익숙해 졌으니 혼자 가기도 무리가 없을 것 같고 그도 바래다 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아 그렇게 말을 했지만 그는 내 쪽으로 걸어온다.
“술 한잔 하자.”
“미안해. 나 오늘 피곤해. 너도 어제 쪽지시험 공부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그냥 들어가.”
“그냥 얘기 좀 하자고.”
“피곤하다고 했잖아. 다음에 얘기하자.”
그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곧 ‘그래’라는 짧은 대답을 하고 담배에 불을 붙이려 하지만 라이터가 고장이 났는지 불이 붙지 않아서 나는 내 주머니에 있는 라이터를 건넨다.
“난 또 있으니까 그건 네가 써. 그럼 갈게.”
어차피 대답은 들을 생각도 없었으니 나는 말을 끝냄과 동시에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나름대로 매정하게 했다고 생각한 나의 말에도 그는 나를 붙잡지 않는다. 보나마나 그는 그냥 담배를 피우면서 갈 길을 가고 있을 것이고, 나 역시도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얘기 같은 것, 그런 건 이제 궁금하지도 않고 더 이상 하고 싶지도 않다. 피곤했던 게 아니라 그런 이유였다는 걸 그는 알고 있을까. 어색한 침묵 때문에 억지로라도 늘어놓던 지루한 일상이야기를 하는 것에도 지쳐있는 나 자신도, 더 이상 원하는 게 없을 만큼 식어버린 이 관계도 그 모든 것들에 신물이 나다 못해 이제는 그냥 무뎌져 버린 이 연애에 대해 그는 얼마나 자각하고 있을까.
버스를 기다리면서 나는 가방 구석에 처박아놓았던 라이터와 새 것처럼 반듯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담뱃갑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매캐한 담배연기가 순식간에 입안을 점령하고 나는 괜시리 콜록거려본다. 글쎄, 내가 왜 그런 건지는 나 스스로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 답답한 것은 담배로 찌들어 있는 나의 호흡기보다 내 불완전한 머리와 마음이라는 것, 그뿐이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오늘 봤던 영화와 그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본다. 분명히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틀어놓았는데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으며, 주변의 풍경도 큰 감흥 없이 그저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머릿속을 온통 채운 생각이 그와 나의 관계에 대한 거라면 확실히 그와 나의 관계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다.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찌됐든 언제부턴가 잦은 술자리와 피우는 담배에 대한 은근한 잔소리, 매일같이 주고 받았던 유치한 애정표현, 손에서 땀이 나도 손을 잡았다는 그 설렘과 놓았을 경우의 어색함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했던 그와 나는 점점 흐려지고 술에 취해 전화를 하면 걱정보다는 짜증이 앞서는, 손에서 땀이 나면 맘대로 손을 놓아버리고, 연인 사이라는 의무감에 마지못해 했던 성의 없는 애정표현과 새로움을 기대하지 않는 무기력하고 지루한 데이트 날짜와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펑크를 내주면 오히려 고마울 것 같은 그런 비정상적인 그와 나만이 남아있었다.
즐거움이 없고 두려움만이 남아있는 그런 의미 없는 관계를 지속하면서도 헤어지자는 말이 두려워 대화를 피하려 하는 나를 자각하니 그저 허탈한 웃음만이 빈 공간에 탁하고 터진다. 어째서 헤어지지 못하고 있는 건지, 의미 없고 비정상적인 관계임을 알면서도 되돌릴 생각은 하지 않고 회피만 하고 있는 건지. 그것은 어쩌면 오랜 시간 지속해온 관계에 마지못해 드는 의무감 같은 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까의 그 영화처럼 새로운 사랑을 찾을 여력도 남아있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가 싫어진 것도 아니고 그와 헤어지고 싶은 것도 아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우유부단한 행동의 근원은 어쩌면 그가 너무 익숙해져서 그와 이별하면 내 지루하지만 그런대로 편안했던 일상이 통째로 바뀌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 두려워 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대로 이런 관계를 내버려둘 수 없다는 것은 나 스스로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헤어지는 것보다도 더 큰 문제라는 것쯤은 알기에 나는 약간 느릿한 동작으로 그의 휴대폰에 메시지를 띄운다.
「내일 잠깐 만나. 수업 끝날 때쯤 항상 있던 학교 앞 카페에 있을게.」
* * *
카페에 앉아서 가장 싼 카페라떼를 시켜놓고 창 밖을 바라본다. 그가 듣는 수업은 10분 정도 후에 끝날 것이다. 그 동안 나는 분명히 이것저것 말할 것, 그리고 좀체 가라앉지 않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말할 준비를 해야 하지만 내 마음과 머리는 그저 선보는 사람 마냥 긴장한 상태여서 그런 것들을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
평소대로였다면 그냥 다른 것을 하면서 충분히 여유를 부렸겠지만 어떤 마음을 먹은 상태에서 그를 기다리는 상태이다보니 여유를 부릴 수가 없는 모양이다. 평소보다 조금 느끼한 카페라떼를 억지로 마시면서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혀 보려 하고 시간은 꽤 흘렀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해가 질 때까지도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플라스틱 컵에 맺힌 이슬이 다 말라버렸을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해는 셀 수 없이 여러 번 떴다 지기를 반복했고 그러는 동안에도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헤어지자는 확실한 말도, 그렇다고 해서 다시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보통의 애인 같은 그런 사이로 돌아가자는 말도 없는 지금의 상황은 마치 관과도 같이 좁은 후덥지근하고 캄캄한 방안에서 아무도 들리지 않는데도 혼자 소리치고 있는 것 같은 정도의 갑갑함으로도 표현할 수 없다. 문이 없다면 뚫는 것으로 그런 류의 갑갑함은 조금이나마 해결될 수 있다. 그렇다면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연락을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 보다는 결과야 어떻게 되든 간에 일단은 내가 먼저 연락을 하는 것이 훨씬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천천히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외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도 어쩌다 보니 자연스레 외워져 버린 그의 전화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이 가고…………………누군가가 전화를 받았지만 아무런 말이 없었다. 분명히 그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렇기에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다.
“얘기 좀 하자.”
그가 나에게 했던 말과 비슷하게 나도 그에게 ‘여보세요?’라는 식의 말이 아닌 다짜고짜 만나자는 말부터 꺼내버린다. 단도직입적으로 용건만 간단히 말해버리는 버릇은 모르는 새에 그를 닮아 버렸나 보다. 순간 가슴 한 구석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올라오려 했지만 나는 다시 심호흡을 하고 같은 말을 반복한다.
“얘기 좀 하자고.”
“굳이 만날 거 없잖아.”
“속 좁게 굴지마. 네 멋대로 지금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데 전화로 이러지 말고 만나서 얘기해.”
“그냥 전화로 얘기해. 굳이 얼굴 볼 이유 없다고 본다.”
그의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가 나의 기분을 조금 건드린다. 하지만 속 좁게 굴지 말라고 한 나도 그의 기분을 건드렸을 테니 뭐라고 대꾸는 할 수 없어서 그냥 가만히 있으려다가 어찌됐든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약간 진정이 된 상태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만 생각하지마. 나는 그냥 너랑 내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것뿐이야. 저번에는 미안했어.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어찌됐든 무작정 연락을 끊어버린다든가 하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아?”
전화 저 편에서는 말이 없다.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말없이 나에게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에 대해서는 난 알 수가 없다. 그의 전화도, 그의 목소리도, 그리고 그의 표정도, 그는 항상 내가 그의 감정을 알 수 없도록 하는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적어도 지금 그가 하는 말로 보아서는 그가 분명 약간 화가 나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있으면서도 내가 무슨 용기로 다짜고짜 전화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갖다 붙여 만나자고 밀어붙이는 건지 나도 알 수 없다.
어찌됐든 나는 꼭 이별하려고 그를 만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오랫동안 두절됐던 그와 나 사이의 대화를 조금이라도 살려놓으면 그래도 조금 나아지지 않을 까 하는 바람에서 만나려고 했으나 나름대로 밀어붙이고 있는 나로서도 그의 냉담한 반응에 작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매번 이런 식이었다. 그가 화를 내면, 나는 작아졌고 거기에 익숙해지다 보니 내 감정을 너무 억눌러 왔던 것 같다.
“예전에 했던 말 중에 내가 너에게 난 너와 잘 맞는 것 같다고 했던 것 기억해?”
“무슨 얘길 하고 싶은 건데.”
“그 말과 지금 상황에 대한 이야기. 결과야 어떻게 되든 말은 해봐야 할 거 아냐. 그냥 입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그러니까 일단은 만나서 얘기해.”
* * *
나는 항상 그를 기다리던 카페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그 때와는 다르게 긴장된다는 것도 없었고 대신 뜨거운 카페라떼를 마셔도 즐길 수 있는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그가 수업이 끝나고 도착할 시간까지는 넉넉히 잡아 5분 정도가 남아있다. 무슨 얘기를 할지에 관해서는 준비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전달하면 그걸로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혔고 카페라떼를 주문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감고 느낌만으로 그와 나의 거리를 재고 그가 내 등 뒤쯤에 왔을 때 눈을 천천히 뜨고 그가 내 앞에 앉는 것을 본다.
“왔네.”
“어.”
그의 짧고 무미건조한 말투는 그가 정말로 내 앞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그의 시선은 나를 보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어찌됐든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그런 역설적인 의미이기도 했다.
“나 좀 봐.”
그렇게 말을 했지만 그는 잠깐 나와 눈을 마주치고 시선을 테이블 위에 놓인 컵에 둘 뿐이었고 그는 커피를 마시고 다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고개를 돌린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그는 아예 나를 보려고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먼저 말을 하면 대답은 안 하더라도 최소한 듣기라도 할 테니 그냥 말을 할 수 밖에.
“예전에 했던 말 중에 내가 너에게 난 너와 잘 맞는 것 같다고 했던 것 기억하냐고 했었지?”
“어.”
“난 내가 너와 잘 맞을 줄 알았어. 나도 무심한 편이라 이것저것 챙기지 못하고 간섭하는 것 싫어하고, 개방적인 편이어서 너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반대가 끌린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었나 봐. 처음에는 그래도 아니었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했지. 네가 정말 날 네 여자라고 생각을 하는 건지, 너와 내 관계가 정상적인 것이 맞는 건지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어. 내가 전에 사귀었던 남자들에게 난 네가 날 대하듯 대했었거든. 난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고 그게 나니까 그냥 그대로 받아주길 원했지. 그때는 그런 줄 알았지만 너와 연애를 하면서 알았어. 그게 사랑이든 아니든 간에 어찌됐든 상대방은 행복하지 못하다는 걸 말이야.”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너랑 내가 잘 맞지 않는다는 거잖아.”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돼. 최소한 너에게 날 사랑하긴 했었냐는 식의 진부한 질문은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난 지금 네가 내 얘기를 듣기만 하거나 요약해 버리는 건 싫어.”
”네가 질문을 하든 안 하든 말은 할게. 그래, 사랑했었던 게 아니라 사랑해. 그 감정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네가 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걸 보면 대충 그런 감정인 것 같아. 나도 솔직해져 볼게. 내가 생각하기에 네가 한 노력과 내가 한 노력은 달랐어.”
“어떻게 다른데?”
“너에게는 사소한 걸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름대로 노력했어. 나는 쓴 것 싫어하지만 네가 카페라떼를 좋아하니까 나도 그냥 그것만 먹게 돼버렸고, 나는 던힐 밸런스를 피우기는 하지만 네가 팔리아먼트를 피우길래 네 담배 취향도 맞춰보려 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거더라고. 나는 네가 만나자면 만나도록 노력했고, 네가 하자는 거면 웬만하면 다 해줬는데 난 뭐가 문제인 건지 모르겠다.”
“좋아, 나도 솔직히 말할게. 무엇보다 나는 너를 만날 때마다 이야기 거리를 찾는 게 가장 힘들었어. 너는 항상 내 얘기를 듣기만 했어. 기억해? 내가 너한테 말이 별로 없다고 했을 때 넌 원래 그렇다고 하고 말았잖아. 그렇게 까지 말했으면 약간의 노력이라도 했어야 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는 원래 말이 없어. 말 주변도 없고. 그리고 네가 얘기하는 걸 듣는 건 좋아. 네가 어떻게 지내는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너에 대해 이것저것 파악할 수 있기도 하고. 하지만 난 너에게 예전에 얘기했던 게 내 일상의 전부였어. 학교 갔다가 두 세시간 걸려서 집에 도착하고 집에 오면 텔레비전을 보거나 게임을 하고 자거나 가끔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가끔은 친구들하고 술 마시는 것. 그게 내 일상의 전부니까 똑같은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 그러면 데이트코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네가 날 기다리게 한 시간은 어떻게 생각해? 너랑은 항상 밥 먹고 영화보고 가끔씩 술 마시는 게 전부였고 언제부턴가 난 널 30분 정도는 기본으로 기다려야 했어. 다른 곳을 가고 싶다고 하면 넌 귀찮다고 했고 약속시간도 늦는 게 당연한 거였잖아. 그건 어떻게 생각해?”
“늦는 것부터 말하면 내가 오래 기다렸냐고 그러면 넌 항상 금방 왔다고 말했잖아. 내가 말 했잖아. 난 연애는 네가 처음이라고. 난 여자 잘 몰라. 그래서 금방 왔다고 하면 그게 정말인 줄 알았지. 그리고 수업시간이 항상 일정할 수는 없다는 건 너도 알잖아. 그리고 데이트 코스, 그건 네가 조금 이해를 해줬어야 했어. 내가 멀리 사니까 일찍 들어가야 하고 그러면 당연히 멀리 갈 수가 없어. 네가 내켜 하지 않는 것쯤은 알았는데도 항상 같은 곳에서만 널 만났던 건 거기서 데이트를 하면 그래도 조금이라도 오래있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랬어. 네가 다른 데로 가자고 하면 가주고 싶었지만 넌 길 치니까 내가 길을 알지 못하는 곳에 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적어도 내가 아는 곳이 낫겠다 싶었기 때문에 그런 거야. 그럼 이걸로 됐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어찌됐든 내가 예전부터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것은 남자의 뇌와 여자의 뇌는 다르다는 것. 그래서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서로 이해하기가 힘들다는 것. 그래서 나는 여전히 그의 생각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찌됐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다르다는 게 어떻게 다른 건지 알 수 없으니까. 아무리 남자라고 해도 남자라고 해서 사고방식이 다 똑같은 건 아니니까 말이다. 그냥 그렇게 이해하면 되는 거였는데도 나는 어째서 그냥 그가 알아서 다 눈치 채주기를 바랬던 걸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물었다.
“너는 나한테 물어볼 것 없어?”
그는 그저 담배연기를 길게 뿜어낼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물어볼게 없다는 의미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나를 어떻게 봐왔든지 간에 미안하다는 생가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나도 알고 있기는 했었다. 다만 그것을 억지로 변화시키려고 했을 뿐이다. 그냥 그라는 사람 그 자체가 어쩌면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지도. 어쩌면 생각보다 그와 나는 맞지 않는 사이였을 지도 모른다. 맞는 다고 생각했던 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는, 그것만이 확실한 거라고 나는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나는 담배 한 개피를 꺼내 물고 그는 꽁초까지 태워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꺼버린다. 그는 창 밖을 보고, 나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본다. 지금 나의 생각으로, 그는 나에게 지금 할 말이 없다. 물어볼 것도 없고.
“있잖아, 네 사랑은 내가 이해하기 힘든 사랑인 것 같아.”
그는 나를 잠시 쳐다본다. 처음 만났던 그 때의 오만한 느낌을 주었던 무표정한 얼굴이 이제는 미묘하게 달라져서 굳이 표현하자면 약간 제멋대로 풀어져 버린 그런 느낌의 무표정이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나는 그의 표정이 나에게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 질문을 받은 것도 아니고 받지 않은 것도 아니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나는 잠깐의 그 시간 동안 생각을 한다. 너의 사랑은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사랑이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랑이라고, 그렇게 말하면 네가 이해할까? 조금 더 쉬운 말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닌 적당한 말로는 나의 심정을 표현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심정을 침묵으로 표현한다. 알 수 없을 정도의 그런 마음이라고, 네가 나의 침묵으로 나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혹시나 알아줬으면 하는 그런 욕심에.
이상하게도 항상 느낌이 좋던 담배의 맛이 목을 아프게 하는 정도의 쓴 맛으로 변질 되어 있었다. 곧 머리가 아파와서 지금 당장 담배를 꺼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상하게도 입은 자꾸 담배를 찾는다. 이유는 그저 단순한 습관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억지로 담배를 피운다.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그는 여전히 창 밖을 보고, 나는 담배를 피운다.
어쩌면 그도, 나도 서로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겠지만 그와 나 중 어느 한 사람도 먼저 그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냥 그와 나는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어정쩡하게 시간을 때우고 있을 뿐이다. 그와 나는 꽤 오래된 사이라서 어쩌면 편안함에 안주하기 위해 억지로라도 이별을 피해보려는 그런 상황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됐든 서로의 머릿속에서는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연애는 수학 공식 같은 것도 아니고 어떤 일정한 법칙 같은 것이 존재하지도 않지만 적어도 사람이 자신이 죽을 때를 어렴풋이 느끼는 것처럼 연인들도 이별의 때를 머리보다 가슴으로 먼저 느낀다.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더 이런 관계를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해, 나는.”
그가 말없이 또 하나의 담배를 피워 물 때 나는 새삼스레 카페에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와 나 사이에 흐르는 무미건조한 공기와 바깥의 더운 늦가을의 날씨와는 상반된 새하얀 눈 속에서 두 연인이 눈싸움을 하는 영화의 한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그들의 행복한 모습이 잠시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나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내 눈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끼고 눈을 감아버린다. 그가 내 얼굴을 보고 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잘 가.”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다시 눈을 떴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고 내 시야는 흐려지고 맑아지는 것을 여러 번 반복한다. 나는 고개를 숙일 수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를 마주볼 수도 없어서 그냥 시선을 옆으로 돌려버리는 것으로 애써 눈을 가라앉힌다.
내 눈이 뜨거운 이유는 이별이 가슴 아픈 게 아니라 이별의 그 순간마저도 평소의 모습과 별 차이 없이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지 않는 그의 모습이 싫어서, 그것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일어나지도 않은 채로 내 눈과 귀, 그 사이 어딘가 쯤으로 어정쩡한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알고 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그가 나에게 말을 하려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그것을 말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째서 그와 연애를 할 때는 몰랐던 안타까움이 이제서야 느껴지는 것인지.
이제 와서 왜 그 때는 잘해주지 못했는가 하는 그런 것이 안타깝다기 보다 지금 이 순간 가장 날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은 그의 눈과 몸짓만 보아도 그게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정도로 그에게 익숙해져 버린 나 자신을 자각하는 것과, 자존심 세고 제멋대로인 그가 내 말에 어떠한 코멘트도 하지 않은 채로, 말을 하고 싶지만 하지 않은 채로 그저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 해버리는 그의 모습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는 것. 그게 슬프고도 안타깝다. 하지만 나는 그냥 일어서고, ‘응’ 이라는 짧은 말로 모든 가능성을 일축하고 그에게서 멀어져 간다.
나는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항상 그가 하자는 대로만 했고, 그가 말이 없어도 그냥 나 혼자라도 말을 하는 식의 노력을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평소의 연애와는 달랐던 나의 그 노력과, 그 때문에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기대는 어쩌면 지금의 이별의 근원 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시 멈춰있던 나의 발을 천천히 떼고 하나하나 정신의 끈을 부여잡은 채로 처음 걸음마 하는 아이처럼 느릿느릿하고 부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긴다.
‘진작 그렇게 했다면 그래도 우리에게는 조금의 희망이라도 있었을까?’
* * *
밖에는 눈이 오고 있고 그와 이별한지 꽤 긴 시간이 흐른 오늘, 나는 카페에 혼자 앉아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와 이별했던 그 늦가을이 아닌 겨울엔 창 밖을 보면서 그와 있었던 얼마 안 되는 추억을 곰 씹는 버릇이 생겼다. 이상하게도 그와 이별한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내 머릿속에는 그의 모습도, 적당히 낮아서 날 안심시켜주던 그 목소리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따듯하게 데운 카페라떼를 마시면서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그를 기다렸던 그 때처럼.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내려다 보면서 나는 무심코 카페에서 나오는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
그 노래에 맞춰 흥얼흥얼 콧소리로 음을 따라가다가 나는 순간 그 음악이 그와 내가 이별하던 그 순간에 그 카페에서 흘러나왔던 그 음악임을 자각한다. 그와 이별하던 그 날, 그 카페에서는 이별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밝은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지금 내 귀에 들려오는 멜로디는 그 때와 같은 것인데도 그 때와는 사뭇 다른 센티멘털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 때는 단지 언밸런스 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이별한 지 오래 된 사람에게 생기는 특유의 여유덕분인지 이별의 노래가 슬프지 않게 느껴진다.
그 때는 어렸고 많은 것을 알지 못했으며 그랬기에 부서지기 쉬웠다. 그래서 부서진 것뿐이다. 어린 아이가 깨진 유리를 보고 호기심에 건드렸다가 다쳐 상처를 입고 그것이 흉터로 남든 깨끗하게 사라지든 그 경험으로 인해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런 비슷한 경험들을 하면서 성장해 가듯이 연애라는 것도 사람을 성숙하게 해주는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그런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와 이별하고 그 이후에도 여러 번 연애를 하면서 나는 이별을 추억으로, 이별하던 그 순간의 미운 감정을 그 동안 많은 추억을 줬던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바꾸는 법을 배웠다. 비록 이별을 했지만 그는 내 기억이라는 서랍 속의 한 장의 바랜 사진 같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고, 나는 그 추억을 가끔씩 꺼내보고 다시 넣어두면서 하루하루 내 갈 길을 가고 있다. 그도 지금쯤 눈이 내리는 이 하늘 어디에선가 자신의 갈 길을 바삐 걸어가고 있으리라. 마지막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시고 카페를 나올 때, 내 귓가에는 흐릿한 음색의 겨울멜로디가 맴돌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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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 그런거죠^^;감사합니다
정말 현실적이라 더 공감이 가네요..
공감이라, 이런 소설에 공감한다는 것은 슬픈일일지도 몰라요;어찌됐든 감사합니다
뭔가 소설책 한권을 읽은듯한 느낌 ^^ 글을 참 잘쓰시는것같아요
다닥다닥 붙어있기도 한데다 인터넷 단편소설 치고는 긴 편이라서 그렇게 느끼시는 걸지도^^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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