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 공화국’의 자구책… ‘내 몸의 블랙박스’
공무원이나 경찰을 향한 요즘 민원인들의 폭언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고 현장 관계자들은 말한다. “이××” “어디서 ××이야” 같은 욕설이 무뎌질 정도로 무한다는 것이다. 무례한 생떼는 때로 멱살잡이와 손찌검, 주먹질, 기물 파손 같은 폭력 행위로 이어진다. 포항에서는 민원인이 공무원 얼굴에 제초제로 추정되는 화학약품을 뿌렸고, 경주 시청에서는 손도끼를 치켜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런 민원인들의 위법 행위는 2021년 5만 건을 넘어섰다.
▷도를 넘은 악성 민원에 시달려온 이들 사이에선 보디캠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지난달 서이초 교사의 자살 사건 이후엔 교사들도 “보디캠이라도 달고 싶다”고 하소연하는 지경이다. 이런 수요를 겨냥해 시중에서는 20만, 30만 원대에서 80만 원짜리 고급형까지 다양한 보디캠이 쏟아지고 있다. 네모난 소형 녹음기 모양이 일반적이지만 라이터형, 손목시계형, 보조배터리형, 안경형, 넥타이형, 목밴드형 등도 나와 있다. 업체들은 선명한 화질, 초소형 사이즈 등을 앞세우며 “억울한 누명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라”고 홍보한다.
▷‘내 몸의 블랙박스’로 불리는 보디캠의 착용은 책임을 다투거나 법정싸움을 벌일 때 자기를 방어할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민원 공화국’이라는 자조적인 말까지 나오는 한국에서 공복(公僕)에 대한 요구는 많고, 악성 민원인에 대한 처벌은 상대적으로 경미하다. 정당방위 인정 범위는 좁다. 그러니 반복, 악화하는 행패를 영상으로 남겨놓지 않으면 언제라도 적반하장의 상황에 몰릴 수 있다는 게 공무원들의 문제 제기다. 보디캠 촬영을 할 때는 상대방에게 미리 알리는데, 이는 난폭한 행동을 자제시키는 예방 효과도 있다고 한다.
▷대리운전 기사, 숙박업 종사자 등도 보디캠을 달기 시작했다. 취객의 폭행과 성추행 등 범죄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해외에서는 스포츠 심판들의 보디캠도 등장했다. 선수나 코치는 물론 아마추어 유소년 경기의 경우 부모들의 폭언, 폭행 사례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갑질’ 피해를 볼 수 있는 누구라도 보디캠의 기록이 필요한 상황에 처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보디캠은 찍히는 자의 프라이버시 침해, 영상 유출 피해와 악용 가능성 등의 문제점도 안고 있다. 경찰청이 아직까지 장비 사용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지 못하는 이유다. 교사들의 보디캠 착용을 놓고는 “학생들을 감시하는 감옥으로 만들려는 거냐”는 반발이 나온다. 논란 속에서도 보디캠 구매가 늘어나는 것은 한국 사회가 고단한 ‘불신의 늪’에 빠지고 있다는 경고일 것이다. 각자도생의 해법에 앞서 악성 민원인 처벌 강화를 비롯해 ‘을’들을 보호할 근본 예방책 마련이 절실하다.
이정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