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
고은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들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 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써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사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기울이여 들리나니 대지(大地)의 고백(告白)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자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寂寞)을 지킨으로써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 1960)
[작품해설]
이 시는 시인이 민족과 역사를 만나기 전 허무주의적 세계에 빠져 있던 초기 시의 대표 작품이다. 그의 허무주의는 1950년대 전후(戰後)의 폐허를 배경으로 방랑과 입산, 환속으로 이어진 자신의 행려 의식(行旅意識)과 노장(老壯)의 무위(無爲)사상, 그리고 불교의 공(空) 사상과 관련 깊은 것으로, 그의 초기 시 세계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시인은 눈 덮인 길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던 방황과 고뇌를 가라앉히고 무념무상(無念無想)의 명상적 겅지에 다다르는 체험을 노래한다. ‘눈’은 그 흰 빛깔로 인해 ‘정화(淨化)’의 이미지이며, 모든 것을 너그럽게 감싸 안는다는 의미에서 ‘관용(寬容)’ 내지 ‘포용(包容)’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 눈길은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즉 지난날의 방황과 고뇌를 정화시키고 포근히 감싸 안는 평온한 상태를 의미한다.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라는 구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화자는 고통스러운 삼ㄹ 속에서 오래도록 방황을 거듭한 사람이다. 그러니 이런 방황의 끝에서 그는 모든 것을 덮어 버리는 눈을 바라보며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솟구쳐 오르는 벅찬 감동과 희열을 느낀다. 바로 이 순간의 눈 덮인 풍경을 그는 ‘설레이는 평화’라고 표현한다.
그러한 ‘눈길’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인데 ‘안에서는 어둠’이다. 나아가 ‘쌓이는 눈 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라고 하고 있다. 이 어둠은 실제 어둠이 아닌, 마음속에서 느끼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눈길과 서로 조응되는 이미지이다. 따라서 어둠은 절망적 암흑이 아니라 평화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에서 느끼는 어떤 감정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눈’은 ‘겨울’, 즉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방황을 거듭해 온 시인의 갊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 주는 이미지요, ‘어둠’은 ‘눈’으로 덮인 평화의 경지를 바라보며 느끼게 되는 시인의 평온하고 고요한 평정심을 의미한다.
[작가소개]
고은(高銀)
본명 : 고은태(高銀泰)
법명 : 일초(一超)
1933년 전라북도 군산 출생
1952년 출가(出家)
1956년 『불교신문』 창간
1958년 『현대문학』에서 시 「봄밤의 말씀」, 「눈길」, 「전은사운」 등이 추천되어 등단
1962년 환속(還俗)
1975년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9년 제3회 만해문학상 수상
1989년 장시집 『만인보』 발간
1991년 중앙문화대상 예술상 수상
1998년 제1회 만해시문학상 수상
시집 : 『피안감성(彼岸感性)』(1960), 『해변의 운문집』(1963), 『신언어의 마을』(1967), 『세노야』(1970), 『문의(文義) 마을에 가서』(1974), 『부활』(1975), 『제주도』(1976), 『입산』(1977), 『새벽길』(1978), 『고은시선집』(1983), 『조국의 별』(1984), 『지상의 너와 나』(1985), 『시여 날아가라』(1987), 『가야할 사람』(1987), 『전원시편』(1987), 『너와 나의 황토』(1987), 『백두산』(1987), 『네눈동자』(1988), 『대륙』(1988), 『잎은 피어 청산이 되네』(1988), 『그날의 대행진』(1988), 『만인보』(1989), 『아직 가지 않은 길』(1993), 『독도』(1995), 『속삭임』(1998), 『머나먼 길』(1999)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