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뭔가를 찾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손전등 빛이 그려내는 원은 점점 커졌다. 술래에게 잡히지 않으려는 듯 그 애와 나는 소나무 뒤로 가서 숨을 죽였다. 바스락 소리에 머리끝이 섰다. 들켜버린 둘은 눈이 마주쳤고 어둠 속이지만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거기 누구냐며 솔밭 공원지기가 소리를 질렸다. 목소리와 길어진 불빛이 우릴 삼길 듯 뒤따라왔다. 바닥에 떨어진 솔방울에 발이 미끄러졌다. 어른 놀이와 같은 데이트였다.
고3 봄.
덩굴장미로 담장은 붉게 몰들고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싱숭생숭할 때였다. 친구의 소개로 그 애를 처음 만났다. 나는 뮐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른 채 파도에 쏠려 다니는 조약돌 같았다. 무스를 발라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에 하얀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눈빛은 슬픔에 차 있었고 말수는 적었다. 또래보다는 성숙해 보였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은 그리 길지 않았다.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소개했던 친구가 그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고, 나는 그에게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겨울이 다가오고 친구들의 취업으로 졸업반 교실의 의자는 비어 갔다. 나도 그해가 끝나갈 무렵 작은 해운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직원들 책상마다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공기는 매캐하고 앞은 흐렸다. 경리과 대리는 내게 검은색 장부와 모나미 볼펜을 주었다. 1에서 10까지 숫자 쓰는 연습부터 하라면서 견본을 써주었다. 장부에 그려진 촘촘한 간격과 숫자들은 빌딩 속 창문보다 더 답답해 보였다. 정해진 퇴근 시간은 없었다. 월급통장에도 재미없고 불안한 날들이 그대로 쌓여갔다. 복잡한 도시 한복판에 있어도 정적이 흐르는 날이 많았다. 왜 여기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오월이 있고 튀밥치럼 아카시나무에 다시 꽃망울이 터졌다. 그때 회사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을까. 내 삐삐 속에는 그 애와의 추억만 있을 뿐 전화번호는 지우고 없었다. 구겨서 휴지통으로 던져놓고 며칠 있다가 휴지통을 다 뒤져 찾아낸 쪽지처럼 그가 완전히 버려지지 않았다. 그와 탓던 버스가 지나가거나 함께 공부했던 독서실 앞으로 지날 때면 홀끗 올려다보게 되었다. 비슷한 사람이라도 보면 숨이 멎고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았다.
우연히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던 걸까. ''우리 같이 재수할래? 내가 도와줄게." 도와준다는 말에 정신이 바짝 났다. 그가 나타나서 기쁜 것보다 걷힐 것 같지 않았던 짙은 안개 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공부에 갈증이 나 있었지만 어떤 길이 있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몰랐던, 방황하고 있는 나를 지켜보고 있기라도 했던 걸까. 나는 더 이상 장부에 숫자 따위는 쓰지 않았고 재떨이를 비우지 않아도 되었다.
그 애는 우리 둘 중 한 사람이라도 대학에 떨어지면 헤어지자는 약속을 하자고 했다. 내가 모르는 수학 문제를 풀어주고 가끔 가지고 있던 연필로 쓱싹쓱싹 내 얼굴을 그려주었다. 매일 독서실에서 나와 어둑한 골목길에 있는 자취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연탄불이 꺼진 빈방은 춥고 쓸쓸했지만, 새벽까지 책장을 넘기며 나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애는 연락도 없이 사라졌다가 손이나 발에 상처가 난 채로 학원에 나타나곤 했다. 북한산 암벽을 타고 오르면 마음이 가라않는다고 했다.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가장자리를 배회하던, 무릎에 난 상처가 빨리 아물지 않았던 나처럼 그도 무언가를 참고 견디고 있는 것 같았다.
합격자 발표 날,
그는 내가 지원한 학교에 같이 가보자고 했다. 교문까지 올라가며 그의 주머니에 내 손을 넣어주었다. 따뜻했다. 학교 정문에 내걸린 합격자 명단이 구원의 깃발처럼 펄럭였다. 나는 힘껏 깨금발을 들어 올렸다. 그 애는 인파를 뚫고 들어가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내 이름을 더듬었다. 그러고는 뒤돌아서 내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사이에 오월은 다시 오지 않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안에 고인 맑은 샘물을 길어 올리는 일입니다." 이명애 2023년 <에세이문학> 여름호에 /(살구)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