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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2 : 1 -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 고전 2 : 2 -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제 2 장 : 영적인 진리
1.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 전도 ( 2 : 1 - 5 )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세상이 깨닫지 못한다.
1-3절은 사도가 복음을 전파할 때 사람의 지혜로 하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을 전하였다.
4-5절은 전도와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성령의 능력에 있음을 말한다.
고전 2 : 1 -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
복음은 하나님의 증거이다. 그것은 죄 사함과 영생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증언하신 진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증거는 참되며 확실하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
복음의 진리성은 하나님께서 증언하셨다는 사실에 있지 사람의 달변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기독교 복음은 그 전달 방법보다 그 내용이 더 중요하다. 복음의 가치는 그 내용에 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이 문구는 문자적으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갔을 때'(When I came, NIV)라는 의미로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당시 약 1년 반 동안 고린도에 머무르면서 전도하였을 때를 가리킨다.
* 행 18: 1-17 -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3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15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16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바울 사도는 아덴으로부터 고린도에 왔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바울은 아덴의 아레오바고에서 많은 철학자를 만났다. 그는 해박한 지식으로 기독교에 대하여 말했다.
그러나 여지없이 실패하고 말았다. 비로서 바울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겠다고 자백하였다.
2]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증거'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르튀리온'(*)은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 근거한 것이다. 증거는 <마르튀리온>인데, 여기서 증인이라는 뜻의 <마르튀스>가 파생되었으며, 이는 영어에서 순교자(Martyr)라는 뜻이 되었다.
오래된 사본들(P, A, C)에는 '뮈스테리온'(*,'비밀')으로 되어 있어서 '비밀'로 해석하기도 하지만(Aland), 내용에 있어서는 어떻게 해석하든지 별 차이가 없다. 즉 하나님께서 주시고 하나님을 내용으로 삼는 증거 곧 복음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셨고 그 계시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역사였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며 곧 '십자가의 도'(1: 8 참조)를 전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죄 사함과 영생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증언하신 진리이다. 하나님의 증거는 참되며 확실하다.하나님의 증거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증거라는 뜻으로 곧 십자가의 도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을 목격하여 증인이 된 자들은 목숨을 걸고 기독교를 전파하였으며, 그 결과 많은 증인은 순교자들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3]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복음은 인간의 말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
복음의 진리성은 하나님께서 증언하셨다는 사실에 있지 인간의 달변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복음은 전달 방법보다 그 내용이 더 중요하다. 복음의 가치는 그 내용에 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말이라는 헬라어 <로고스>는 여러 가지 개념이 있지만 여기서는 당시의 웅변이나 수사학을 의미한다. 지혜는 <소포스>인데 당시의 헬라 철학과 풍부한 학식 또는 현학적인 논쟁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세상 지식으로도 누구 못지않은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하였다. 곧 사도는 전혀 세상 지식을 의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자랑하기를 좋아한다. 자기의 가문, 자기의 지식, 자기의 외모, 자기의 재능을 자랑하기 좋아하고 자기의 이름 석자를 자랑하기 좋아한다.
사도 바울도 전에는 자기의 가문과 자기의 학문과 자기의 종교적 열심을 자랑했다. 나중에는 낙원에 이끌려 올라갔던 신비한 체험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십자가를 체험한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자기에 관한 자랑들을 모두 포기했다. 이제는 모두 하찮케 보인다고 고백했다.
* 빌 3: 8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갈 6: 14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도 바울은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분명하고 단호하게 고백했다.
고전 2 : 2 -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헬라어 본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가르'(*)가 있어서 본 절이 앞 절의 이유가 됨을 보여준다.
복음의 중심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전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전하겠다고 작정하고 결심했다.
사람이 복음을 아름다운 말로 단장한다고 복음이 더 효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효력은 사람의 아름다운 말에 있지 않고 그 내용 자체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이 죄인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
1]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본 절에서 바울은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한다.
* 행 10: 37-43 - 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에 가고자 했던 유일한 목적이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곧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가르친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다. (Hodge).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바로 십자가에 도에 대한 설명이다. 이는 곧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진리를 말한다.
2]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데나이'(*)는 경험을 통해 아는 일반적인 용어인 '기노스코'(*)와는 달리 직관적이며 전문적인 지식을 가르칠 때 쓰는 용어인 '오이다'(*)의 부정사이다.
바울은 모든 것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으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은 깊은 지식을 가졌고 또 가지기를 원했다.
바울이 이렇게 다짐한 것은 바울이 회심 때에 겪은 체험과 철학적인 지혜를 동원하여 전도하려다가 실패한 아덴에서의 경험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 행 17: 22-34 -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만이 참이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가장 합당(合當)한 것임을 깨달았다. 복음의 핵심적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사실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전도할 때 이 복음만을 전하겠다고 작정하고 결심하였다.
사람이 복음을 아름다운 말로 단장한다고 복음이 더 효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복음의 효력은 인간의 아름다운 말에 있지 않고 그 내용 자체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이 죄인들을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는 말은 사도 자신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편지의 수신 대상자인 고린도 교인들이 십자가의 도만을 아는 자들이 되도록 만들겠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이 고침을 받는 사실이 나온다. 예수님은 침을 밷어 흙을 개어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령하셨다. 순종한 그는 앞을 보게 되었다. 전에 알지 못했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을 어떻게 의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은 영적으로 말하면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이다. 우리의 조상 아담이 영의 눈을 잃어버렸기에 영적인 것들을 볼 수 없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의 복음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랐다. 그는 시각장애인의 눈에 복음의 침으로 흙을 개어 발랐다.
주님은 사람들이 어리석다는 전도를 통하여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했다.고전 1: 22-23에서는 이렇게 고백했다.
* 고전 1: 22-23 -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은 바울이 소아시아 안디옥에 가서 설교한 첫 설교의 핵심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었다.
* 행 13: 29-30 – 29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유럽의 데살로니가에 가서 설교한 첫 설교의 핵심도 십자가와 부활이었다.
* 행 17: 2-3 –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사도 바울의 대표적인 저술인 로마서와 고린도서의 중심 내용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죽음이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만을 설교했고, 십자가만을 전파했고, 십자가에 대해서만 글을 쓴 사람이었다.
3] 신비주의를 경계하자.
어느 목회자의 동영상 설교를 들어 보았다. 설교하면서 자기가 경험한 것을 말하고 있었다. 설교하면서 기도하는데, 그 기도가 하늘을 뚫고 올라간다. 자기 영은 하늘나라에 오르락내리락한다는 식으로 말을 한다. 혼자 신령한 척하는 겁니다. 자기는 어려서부터 이런 훈련을 많이 받아서, 영계를 돌아다닌다. 한마디로 신비주의자이다.
교인들에게도, 훈련을 받으면 자기처럼 할 수가 있고 자기처럼 훈련만 잘 받으면 하나님도 움직인다는 겁니다. 참으로 대단하지요? 이 사람의 논리대로 라면, 예수도 내 스스로 믿을 수가 있고, 믿음도 내가 만들 수 있고, 은사도 내가 따낼 수가 있다. 우리가 게을러서 은사를 받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교인들에게 자기에게 훈련을 받아서, 자기처럼 영계를 드나들라는 겁니다. 제가 듣기엔 ‘날 따라 올 테면 따라와 봐!’ 은근히 교인들의 기를 죽이고, 자기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내 말 잘 들으라는 겁니다. 날 만난 것을, 다행으로 알라는 겁니다. 나 같은 사람을 만난 것을 영광으로 알고 있으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정도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 도를 모르는 사람은 다 넘어가게 되어 있다.
저도 과거에 이런 비슷한 짓을 했다. 이런 신비한 현상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분명히 보고 듣는다.
보거나 듣는 것이 없으면, 이런 말을 하지 않고, 이런 일을 자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 은 하나님이 준 것이 아니고 마귀가 준 것이라는 게 문제다.
사람들은 기도하다가 뭔가 신비한 체험을 하면 무조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는다. 마귀가 장난하는 것을 모른다. 그러니 이상한 음성을 듣거나 이상한 환상을 보면,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곤 스스로 하나님의 거룩한 종 행세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한다.
성경을 보면 계시를 받은 사람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다. 바울이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계시를 받았는데, 예수님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그래서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예수님이 그 주제)을 기록하였다.
바울이 계시를 받아서 성경을 기록하였는데, 그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를 하였다. - 본문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했다. 3년 동안이나 계시받은 바울의 고백이다. 신약 성경을 거의 다 쓴 바울의 고백이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만 전하겠다고 작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이외는 말을 안 하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내가 다 이루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계시의 완결이란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칭 기도하다가 계시를 받았다면 어떤 이야기가 나와야 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계시라고 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가 나와야 한다.
사람들은 신기한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어느 시대이고 마귀는, 항상 초월적인 신기한 것으로 사람을 미혹하고 있다. 지금도 천국 갔다 왔다고 간증을 하면 사람들이 우르르 몰리는 이유가 다 신비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자기도 그런 체험을 한번 해 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호기심으로 모이는 것이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자기가 분명하게 경험한 사실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말을 하거나, 떠벌리거나, 자랑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십자가의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하게 진리가 아님에도 하나님께서 환상이나 신비한 일들을, 일어나게 하시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지 안 믿는지 시험하기 위함이다.
* 신 13: 1-3 – 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3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꿈꾸는 자들이 일어난다고 하고, 분명히 이적과 기사를 일으킨다고 한다. 그럴지라도 이들의 말을 청종치 말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 신 13: 5 - 그런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만약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보다 자기가 받은 신비적 체험(꿈과 환상)을 더 강조하면, 그것은 비 진리이기 때문에 꿈꾸는 자를 죽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원리가 하나 나온다. 꿈이 무엇을 방해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 간절히 바라보지 않게 한다.
대신에, 자기가 꾼 꿈과, 자기가 본 환상에 집착하게 한다. 대표적으로 이장림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눈을 떼게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눈을 떼게 하는 그 어떤 것도 다 비 진리다. 그러므로 목사가 하늘을 날아다닌다고 하여도, 정신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그것이 사실 / 비 사실의 여부를 떠나서) 하나님의 계시(말씀, 십자가의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가 신비한 체험을 가질 수가 있다. 하지만 이런 체험을 진리화나 객관화하여서는 안 된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 언약이요. 하나님 언약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맺은 새 언약’만이 진리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 자기 백성들이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성령의 은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은사는 성경적이다. 그러나 그 성령의 은사, 그 신비체험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지향해야 한다. 그런데 종종 보면, 은사주의나 신비체험이 개인적 기복신앙, 개교회적 숫자성장을 지향할 때가 많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목격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시작해서, 호기심으로 끝나고 말았다.
예레미야와 거짓 선지자
그럼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들어 봅시다.
* 렘 23: 25-32 – 25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26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27 그들이 서로 꿈 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2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 2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30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2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거짓 꿈을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령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은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거짓 선지자들이 “몽사” 를 가지고 백성들을 미혹하고 있다고 예레미야에게 가르쳐주셨다.
몽사란 꿈인데, 이 시대로 말하면 환상을 보았다거나 천국과 지옥에 갔다 왔다거나 하는 신비한 체험을 말한다. 그런데 23: 27에 보면 몽사는 하나님 뜻이 아니고 그들의 생각이라고 한다. ‘그들이 서로 꿈 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 그들의 마음속으로 꾸며낸 이야기’다. 이 자들이 몽사를 가지고 뭘 하는가 보니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이름을 잊게’ 하더라는 겁니다. 27에 여호와의 이름을 잊게 한다는 것은 지금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을 잊게 한다는 겁니다.
신비주의가 왜 악한가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을 “밀” 이라고 한다면, 몽사는 “겨(껍질)”로 “밀”은 양식이라면, “겨”란 찌꺼기란 말이다. 그러므로 몽사는 찌꺼기 같이 버려져야 한다. 왜냐하면 무가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몽사는 구원의 능력이 없으니 몽사를 붙잡다간 큰일난다. 이처럼 신비주의는 겨와 같이 구원의 능력을 주지 못한다. 물론 예레미야도 신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어떻게 보면 거짓 선지자들과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신비적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백성들을 회개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갔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신비적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나게 만들고, 백성들을 미혹으로 인도하고, 자기를 높이고, 백성들의 귀에 솔깃한 말만 했다.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 이라고 하셨다. 신비로운 체험에서 생명의 능력이 나오지 않고, 예수님의 살과 피에서 생명이 나온다. 예수님은 분명히 내 살과 피를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했다. 그러니 예레미야가 말한 “밀”은 곧 예수님의 살과 피다. 다시 말하지만 죄 사함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서만 주어진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증거하지 않는 그 어떤 기적이나 환상이나 신비적인 체험이라 할지라도 겨같이 날아갈 것들이니 붙잡으면 안 된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겨 같은 몽사를 가지고 교인들을 미혹하고 있다. 둘 다 같은 부류이기 때문에 하나가 되어 따른다. 하나님께서 거짓 선지자들을 세우는 이유가 밝혀졌다. 이는 거짓 신자들을 걸러내기 위해서다. 바울의 증언을 보면 (살후 2: 9-12) ‘9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고 증언하였다.
악한 자가 임하는 것은 사탄의 역사에 따라서 모든 능력과 표적과 기적을 행함으로 나타난다. 계시록13장에 적그리스도가 온갖 기적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러면 심령에 진리가 없는 사람은 다 따라간다. 바울은 이런 사람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고 계신다.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마귀를 통하여서 거짓 것을 추수하려고
거짓 선지자들이 기적으로 일하는 것을 허용하시고 계신다. 왜냐하면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을 심판하기 위해서다.
그럼에도 몽사를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교인들로부터 대접을 받는다. 그 이유는 거짓 선지자들이 사람을 기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몽사를 말하는 자들이 백성들로부터 인기를 얻는 것은 모두가 복 받고 잘 살 것이라는 말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렘 23: 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신비주의자들은 나쁜 말을 하지 않는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했다. 이 시대로 말하면 ‘축복 받는다’는 말을 한다. 가짜 목사들은 항상 백성들을 기쁘게 하는 말만 한다. 교인들의 마음을 사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래 자식이 유명해 진다거나, 부자가 된다거나, 하나님이 당신을 귀하게 사랑하고 있다거나 하는 말들로 도배를 해서,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준다. 그러니 신비주의자들 곁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자기 탐욕을 이루기 위해서 몰려든다. 소망을 주는데 얼마나 좋아요.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면 복 받고 자식도 잘 된다고 하는데 누가 싫다고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건 악한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악한 길에서 돌이키게 하는 것이 아니고, 더욱 더 악한 길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죄를 지적해 줘야 하는데 죄를 지적하진 않고, 좋은 말만 해 준다는 말이다. 신약 식으로 말하면 육신의 소욕은 악한 것이라고 해 줘야 하는데 도리어 육신의 소욕을 채워주겠다고 한다. 땅을 바라보지 말고 위를 바라보게 하여야 하는데. 땅을 바라보게 하였다. 인간의 탐욕이 죄라고 지적을 해 주어야 하는데, 도리어 탐욕을 부추기고 있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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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될 일도 좋은 결과로 돌아 올수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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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할수있도록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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