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벌레
윤옥란
204호실 사내는 잘 웃었다
탐스러운 알밤 한 줌을 주었는데
그 중 한 알이 벌레 먹은 게 있었나보다
구멍 난 밤을 보더니만
자신의 몸 어딘가 밤벌레 같은 게 살고 있어서
가끔 머릿속에서 쇄애쇄하는 소리가 들릴 때는
정신이 혼미해지거나 기억이 가물거린다고 한다
폭풍이 몰려와도 끄떡없던 밤나무 같던 사내
머릿속인가 뼛속인가 벌레의 거처를 알 순 없지만
깊은 나무속에 벌레가 터를 잡고 산지 10년이 지났다
요즘 자주 머리가 띵하고
물체가 두 개로 보인다는 사내
하룻밤 사이 어둠의 살을 잔뜩 갉아먹은
밤벌레에게 자리를 양보한 것일까
묵직한 밤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했다
사내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벌레 먹은 밤알처럼
아주 눈을 감아버렸다
고추장에 마늘을 찍어먹으며
며칠 있으면 칠순이라고 좋아했던 사람
통통 살이 오른 벌레처럼
더 크고 넓은 세상으로 가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는 몸 한쪽 모퉁이에서 살던 밤벌레와
남은 생을 맞바꾸었다
식충식물
붉은 호리병 속으로 호객 행위를 한다 더운 여름 한 낮, 지나가던 곤충들이 기울어진 호리병 속으로 모여 든다 보기도 좋고 향기 좋은 네펜데스 알라타* 목이 타 들어가는 갈증에 한 모금 마시면 약이 될 것 같아 그 입술에 닿았다 부드러운 세로 줄무늬에 닿는 순간 날개가 미끄러지고 뒷다리가 비비꼬여간다 온종일 아픈 몸도 무릉도원이다 목숨을 버릴 만큼의 감미로운 촉감의 네펜데스 알라타, 한 점 구름도 숨이 멎었다 즐거운 비명에 눈이 멀었다 귀도 닫혔다 달콤함에 갇혀 온 몸과 정신이 마비되는 줄도 모른다 정지 된 시간 속에서 바깥이 보이지 않는 빨간 별나라에 갇혔다 때는 이미 늦었다 아무리 애원해도 붉은 살이 차올랐다 위장에 걸린 몸뚱이가 허우적거릴 때 아무도 구해줄 이 없다 중독에 빠진 이름들 식충식물뿐일까 다신 날지 못 한다 혀끝 마비시킨 네펜데스 향기, 하나 죽고 나면 또 하나가 태어난 꽃의 위장, 아침부터 주식시황을 열어놓고 손을 떨고 있다
*네펜데스 알라타: 쌍떡잎식물 끈끈이귀개목 벌레잡이 통풀과의 식충 식물이다.